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황규관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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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노동자.

“불투명한 건 미래만이 아니다
오지 않은 건 평화만이 아니다
… 우리 이제 분열하자
만국의 노동자여, 분열하자
하나에서 여럿으로
소음에서 새벽으로
거리에서 냇물로, 분열하자” 63 <만국의 노동자여, 분열하자>
고 외치는 사람.

노동자의 희망이
“저 공장 안에서 돌아가는 기계처럼
누군가 규정해놓은 시간처럼
대지와 숲과 냇물에 넘쳐나는 쓰레기처럼
어떤 설렘도 노래도 기도도 아니라면
생존을 위한 왜소한 안정이라면
정년이 보장된 정규직이라면” 84 <우리의 희망>
자신들도 “구제역에 걸린 가축일 뿐,” “저들이 우리에게 강매한 상품일 뿐”이라면서 거부한다.

그래서 그는 <새해 아침에>도 ”어느새 고난에 익숙해“져
”복과 성공과 빛남을 모르겠다
뼈저린 시간과 타락과 오류가 남긴 흉터만
변함없이 끓고 있다
좀 더 가야 할 참극만 남아 있다
/오, 신음 같은 사랑이 울먹이고 있다“ 97

그래서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일까
그는 과학적이고 불교적인 인식을 한다.
”우리는 먼지로 이루어진 존재다
…자고 일어나서 남긴 것도 뿌연 먼지뿐
아무것도 아닌 먼지 탈탈 털어보면
바람 따라 눈앞에서 사라지는 먼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먼지
/그게 바로 우리의 부분들이고
또 돌아가게 될 미래다“ 117 <먼지>

‘벌레를 보면 진저리를 치는 아이들’을 위해 줄 쳐놓은 거미를 며칠 버티다 없애주면서
”저 별무리에서 잠시 이 별로 내보내진 우리도
목적 없는 희뿌연 벌레에 불과하므로“ 51 <희뿌연 벌레>

이 세상은 속도가 지배하는 세상.
”속도가 생활이고
속도가 사랑을 규정한다
/고속도로 바닥에 피투성이로 버려진
짐승의 울음은, 그러므로
/속도가 속도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은 흔적이다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은
생생한 자기 증명이다“ 53 <고속도로>

그 맹렬한 속도의 소음을 돌아본 그는
‘구월 바다를 가득 채운 제자리걸음’을 하겠다고 한다. ‘줄 맞춰 소풍 가는 코스모스를 빠르게 지나’치지 않겠다고 한다. ‘고통 없는 즐거움과 해찰 없는 진보를 입고 마시고 셈하’지 않고, ‘세상을 품으려는 번민’과 ‘뜨거운 관능’으로 살겠다고 한다. 114-115 <소음의 정체>





꽃은 내가 모르는
어두운 세계에서 오고
나라는 의미는 꽃이 피운 것

그러나 동시에 무지이므로
나는 첩첩산중의 불빛 한 점,
위태로운 숨결이다

여기까지 온 것도
꽃의 침묵,
그게 나를 떠나게 한다

나를 머물게 한다

그리고 저물게 한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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