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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의 내간체 ㅣ 시작시인선 484
이정모 지음 / 천년의시작 / 2023년 9월
평점 :
만연체의 뻑뻑한 시만 있는 게 아니다.
”어떤 단어는 홀로 있어도 산정처럼 당당하다
폭우에도 겨우 이거냐 우뚝 선 산봉우리에게
바람과 구름은 시간이 잠시 주는 수사일 뿐
…
때때로 문장이 아픈 것은
수사라는 고질병 때문이다“ 102-103. 수사
를 아는 시인이다.
“허무의 등을 밟고 날아올라 가맣게 털 몇 낱 날리는,” 97. 낙점
시들을 기다린다.
이럴 수가 있나. 10월 29일에 별세하셨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외로움은 그리움이 만든 장치일까
봄볕 아래 늘어진 고양이 허리처럼 봄날이 같이 늘어지고 있었고 나무는 바람의 자국을 가지고 있었으나 - P115
평소엔 잃어버린 우산인 듯 찾지도 않다가 때가 되면 고향을 찾는 이들을 무엇이라 할 것인지 그런데 왜 내가 미안한지,
저기, 명절이 바위 하나 내려놓고 고향으로 오고 있다
오! 생활은 햇볕 쪽으로만 기우는 한 그루 나무 고향 쪽으로만 기우는 걸 보다 못해 그리움으로 날이 선 도끼를 들고 벌목하러 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의 기호가 비대면 시대를 호명하고 고향도 부모의 제사도 영상으로 대체되면 고향은 명절의 유언장도 보지 못할 것이다 - P121
동네 샘물
일렁이는 모습이 누가 꼭 부르는 것 같다 샘가에서 흔들던 동네 사람들 손짓 같다
그 많던 이야기들 이제 심장에 없고,
그래그래 맞아 맞장구치는 햇살이 정겹게 등에서 노래로 부서진다
그 많던 소리는 다 어디로 갔을까 세월의 강물은 적멸을 향해 빗나가는 법이 없다
고사리, 미나리 씻고 떠난 샘물은 손목도 발목도 없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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