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유기, 근대 한국인의 첫 중국 여행기
이병헌 지음, 김태희 외 옮김 / 빈빈책방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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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한하다.
1914년에 망국 조선의 유학자가 중국 여행을 하고 남긴 글이다.
여행의 시작은

“아, 나는 풍파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집에 있으면 근심만 깊어지니 어떻게 하면 마음을 가눌 수 있을까 생각했다. 하루아침에 몸을 떨치고 일어나 중국으로 유람을 떠났다. 다녀온 여정이 수만 리에 이른다. <시경>에는 ”말에 멍에 씌우고 길을 떠나 나의 근심 풀어보리라“라는 시가 있다. 이 시를 지은 사람에게 유람이란 고작 집을 나서 교외에 가는 정도였다. 그런데도 쌓인 근심은 교외에 이르면 다 털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근심은 집을 떠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았다. 내 나라를 벗어나 다른 나라에 갈 정도는 되어야 했으니, <시경>의 시인과 비교해도 고생이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21

수많은 선인들이 직면한 망국과 그 답답함 때문이다.
그 활로가 중국 ‘여행’인 경우는 처음 보는 듯하다. 여러 가지 길의 항일 독립 투쟁이거나 관망, 아랑곳없는 일신 영달의 길은 보았지만.

자못 궁금한 사람의 궁금한 여행이다.
아주 꽉 막힌 중화주의자는 아니었다.

“명나라가 조선을 구원해 준 의리는 비록 잊을 수 없지만, 청나라가 우리나라를 우대해 준 것이 과연 명나라에 미치지 못한 것인가? 더구나 지난날 명나라를 숭상하고 청나라를 배척한 사람들은 오만하게도 존화양이를 구실로 삼아 거만하게 도포를 휘날리고 상투를 틀고서 ”천하에 나 같은 사람이 아니면 모두가 금수다“ 라고 말했다. 가령 도포를 입고 상투를 튼 것이 백성들의 삶을 위한 가장 큰 의리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복식을 보존하고 우리의 상투를 지켜왔던 것은 청나라가 그것을 관용해서 그런 것이지, 우리가 스스로 보존하고 지켜온 것은 아니었다.
남한산성에서 항복하던 날에 청나라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변발을 강요하고 복식을 바꾸게 하려고 했다면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쉬운 일이었다. 청나라가 중국 민족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었고 우리나라에게는 그렇게 할 수 없었겠는가.“ 38-39

여정을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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