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미래 문학과지성 시인선 583
이하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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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또렷한 시들이 있다.

직지사

탑 나뭇가지 끝에서 풍경으로 댕강거리다 달이 사윈 채 져버리자 나의 비애는 사뭇 소곳해지다. 바람이 전각도 탑도 부도도 일주문도 천왕문도 들추어선 내다 말리다. 나도 속 다 내놓은 채 찬물같이 수런대다. 가을 치장으로 나무들이 밤새 옷 갈아입느라 온 산이 항라 스치는 소린데, 새벽녘 개울이 경經 조잘대며 절 감돌아 뭇 소리 씻어 내리고 나서야 늙은 나의 뜰에도 아린 단풍 물이 들다. - P90

구절초


제 누울 구덩이 파는 일은 총구의 외진 시선 앞.

함께 판 너도 그중 하나. 총살로
함께, 묻혀버렸지.

그게 마지막 지점이 될 수 없기에,

맨땅의, 그
밀봉된 자리 뚫고 나와

대지 모신의 둥지에서, 새로이 호명되는
탁란들 깨어난다고 피어, 흔드는,

흰 피켓들. - P59

분꽃


서로 앞섶 여며주는 일로 엮이지만

여며주어서 꼭, 꼭, 더 뜯어지는
결국 원수지는 일이 사랑이어도

빈 뜰에 꽃밭 가꾸어서 꽃 피는 걸로 이웃 보는 살림이 늘 있기 마련이어서

사람들의 뜨락에 분꽃들 예쁘게 핀 까닭은 나는 안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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