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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꽃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87
최두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0년 12월
평점 :
품절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이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이 시집의 가장 큰 특징은
시인이 따로 시론까지 발표하면서 주창한 이야기시가 가득하다는 것이다.
운문으로서의 성격을 거의 다 버리고 오로지 이야기에 집중한 시들. 그래서 르포에 가까운 것들이 많다. 시인이 30대 중반에 낸 시집이니 다소 과격할 만큼 당대를 비판하고 당대를 처절하게 담아낸다. 3부와 4부가 특히 그렇다.
“ 한장수
-고온리 앞바다 감배바위에 붙은 굴을 따다가 등줄기에 폭탄을 맞아 죽은 아낙이 있었다. 그 여자의 남편 한장수씨는 그 대가로 쿠니 사격장 경비원으로 취직하여 이제까지 그 일을 하고 있다.
가만있자, 그게 벌써 이십오 년 되얐구만. 그 일만 생각허면 지금도 오싹해. 사격장에서 염해갖구 밤중에 공동묘지에 묻었어. 애미가 죽으니께시리 뱃속에 있는 거는 말할 거이 읎구 두 살백이 기집애두 따러 죽잖우. 나, 당최 정신읎었어. 걔 죽는지두 몰르구 술먹었으니······ 경비 스다 집에 오면 사는 거이 너무 구차스러. 진절머리 넌덜머리가 나. 그러니께 술 먹고 뻗어. 아침에 정신나면 새끼들 낯바닥이 뵈여. 그 낯바닥 보고 또 출근을 허는겨. 그냥저냥 숫제 속아살았어. 요 동네 참새는 아마 귀 먹었을겨. 폭격이 요란해두 용감하니 날러댕겨. 먹고 사는 게 뭔지 참 아심아심해. 시방은 속 삭아서 그렇지. 독약두 약이래니 세월이 약이 안 되것나. 다른 건 다 쇡여도 팔자는 못 쇡이디라구, 인저 팔자 탓이거니 생각허구 견뎌.“ 72쪽
“봄꽃 벙그는 창덕궁 안
수백 년 묵은 매화나무 앞에서
임진왜란 뒤 명나라에서 보내왔다는
매화나무 앞에서
꽃을 꽃으로만 순수하게
보지 못하는 나는 난시일까” 90쪽
그의 난시는 교정이 되었을까
여전히 세상을 꼬나보고 있을까
안경이라도 썼을까
궁금하다.
샘터에서
새벽 노을 속 까마귀떼 잠 깨어 날아오른다 깃들인 자리 대숲 댓잎에 내린 된서리에 부리를 닦고 사나운 꿈자리 날갯짓으로 훨훨 털어내며 날아오른다 눈녹이물 다시 논밭에서 서릿발로 일어선 텅 빈 들판 위로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 칼날 바람 타고 잇따라 솟구쳐오른다 어느새 수백 수천의 까마귀 결빙의 하늘에서 만나 원무를 춘다 거친 숨결 하늘에 뿜어 드디어 능선 위로 불끈 해가 솟는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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