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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맛 - 음식으로 탐사하는 중국 혁명의 풍경들
가쓰미 요이치 지음, 임정은 옮김 / 교양인 / 2015년 1월
평점 :

현대의 중국 요리를 논하고자 한다면, 광둥 요리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전 세계 중국 요리는 광둥 요리의 지배 아래 국제적인 성격을 갖추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홍콩요리와 더불어 전 세계에 흩어진 화교의 광둥 요리만이 중국 요리중에서 유일하게 프랑스 요리와 이탈리아 요리 그리고 일본 요리와 나란히 설만한 현대적 경쟁력을 지니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의 저자인 가쓰미 요이치씨가 처음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한 것은 문화대혁명 즉, 문화혁명이 한창이던 때였다고 한다. 오늘날의 중국 본토의 요리를 논하려면 다른 외국 요리를 논할 때와는 다른 좌표축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세계라는 무대에서 바라보자면 중국의 광둥 요리가 중국 요리의 대표라고 할 수 있지만, 중국의 관점에서 바라볼때에는 결코 광둥 요리만이 중국 요리의 대표 주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후 자유국가들의 각국의 대표요리들을 경연했던 일에 중국 대륙 각지의 '본고장의 맛'은 참가하지 못했었다. 인민공화국이었던 중국은 모든 음식점이 국가 소유였기때문이기도 했으며 그때에는 민간 레스토랑등이 아직 영업을 허용하지 않던 시대였다. 혀를 도려내는 것처럼 초라하고 빈곤한 그 맛에 저자는 남 몰래 '문화 혁명의 맛'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한다.
'요리는 인간이 만든다. 그 요리가 유통되고 사람들의 혀를 즐겁게 했을 때, 사회는 활력이 넘치고 그런 분위기에 세련미가 더해지면 그것이 문화다.' <본문 30페이지>
원래 중국이란 나라는 청나라 중기까지는 왕후 귀족이나 지방 호족, 소수의 민간인 부유층은 가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고급 요리를 바깥에 새나가지 않도록 비밀에 부쳤다고 한다. 그러했기에 요리법을 글로 남기지 않고 입에서 입으로 전수했고 그랬기에 제대로 된 조리법이 기록된 문헌이 남아 있을리도 없었던 것이다.거기에다 중요한 원전마저 문화혁명 때 분실된 것이 많다는데 그 중에 청나라 시대의 궁중 주방 어선방의 기록(어선방당책)도 후세에 호사가를 겨냥하여 가짜가 여러 권 만들어졌으며 고궁에 남아 있던 책들은 환관들이 반출하거나 바꿔치기를 했다고 한다. 참으로 중국이란 나라도 어지러운 나라였구나. 더구나 중국이란 나라처럼 왕조가 몇 번이나 다른 민족으로 바뀌는 역사를 경험한 국가는 달리 유례가 없다는데 중국이 변화를 겪을 때마다 문화가 성숙해진 역사를 지닌것은 참으로 내나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중국이라는 나라에서 가장 수준 높은 요리를 자랑하던 시기는 언제였을까?
중국요리가 근대적 정신 구조를 갖추기 시작하던 모습을 만나게 되는 때는, 청나라 시대에 한족문화와 만주족 문화가 격렬하게 뒤섞였던 그때에 다른시대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청나라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정보공개'였다는데 청나라때는 중국 가지의 요리사들이 이름을 떨치고자 수도로 몰려왔고, 요리의 명인들은 자연스레 조정이나 관리와 환관에게 고용되었다. 정보공개의 분위기에 휩쓸려 이름난 요리사들이 비결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현재의 인터넷에서 많은 블로거들이 레시피를 자랑삼아 드러내듯이 그랬었나보다. 이러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가면서 그러한 풍토에서 청나라 제6대 황제 건륭제(재위1735~1796)는 만주족이면서도 한족요리를 애호햇고, 특히 강남 요리를 편애했다. 그는 건륭제는 미식가였다. 건륭제는 닭과 오리 요리를 좋아했는데, 아침부터 닭이나 오리고기를 구워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상어 지느러미와 해파리는 연회에는 내놓았어도 건륭제는 먹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청나라 왕조에서는 후대 황제가 선대 황제의 생활방식을 존중했기에, 건륭제 이후의 다른 황제들도 상어 지느러미를 꺼렸다. 하지만 이 관습을 뒤집은 것이 바로 서태후였다는데 서태후는 몽골계 만주족 출신이자 하급관리 예허나라 혜징의 딸이었는데 몽골계 이슬람교도와 혈연인 한족의 피가 섞였다는 설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저자의 말에 의하면 서태후가 정말 상어 지느러미를 좋아했다기보다도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려는 목적에서 상어 지느러미를 즐겨 먹었으리라는 것이다. 권력이란 이런 음식에서도 이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중국 역사에서 음식의 역사에서 '풍택원'이라는 이름이 빠질 수야 없다. 1930년에 문을 연 이 음식점은 중국 공산당과 함께 걸어온 역사의 현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회주의에 삼켜진 곳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청기와와 벽돌로 지은 건물 내부에는 사철 언제나 난시먼 밖 꽃집 두 곳에서 싱싱한 꽃을 배달시켜 꽃병에 장식했다. 테이블과 의자를 최고급 자단으로 만들었고 잔과 과일 그릇, 숟가락, 젓가락 받침등은 순은으로 만든것으로 썼다. 젓가락은 상아에다 잔에는 건륭제 시대에 만들어진 칠보를 장식하고 호화로움을 자랑했으며 풍택원 요리의 섬세함은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요리사는 모두 산둥성 출신이었다. 하지만 1936년 풍택원 반장은 주변 음식점들이 인플레이션때문에 한숨을 푹푹 쉬고 있을 때도 일본군과 친밀했던 덕에 괜찮은 이윤을 내고 있었고, 그 시대에는 요리사는 고소득 직종이 아니었으며 그러한 대우에 불만이 있었던 요리사들이 '혁명'을 일으켰고 구력(음력) 8월 15일에 직원들은 전부 그만두고 말았다. 그 일이 있은 이후로 요리사의 권리가 인정되고 가게는 쇠퇴하였다. 산둥요리 전문점인 '풍택원'은 베이징의 대표 음식점이 되었었다.
인간이란 나고 자란 곳의 맛, 바로 어머니의 손맛을 결코 잊지 못하기 마련이다. 문화혁명은 결과적으로 봤을 때, 산둥요리와 상하이 요리의 대결이라는 측면도 담겨 있다.
혁명의 맛은 바로 문화혁명 시기의 중국을 저자가 직접 체험한 역사의 현장을 탐사하여 마오쩌둥 시대의 맨 얼굴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2015.2.22.소지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