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목민심서 - 하
황인경 지음 / 북스타(Bookstar)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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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佳緣)으로 말하면 정약용에게는 유배지 강진에서 만난, 남포사는 가실이를 이를것이다. 약전에게는 을녀가 있어 그들의 유배지 생활은 고단함에서 다소 벗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요, 또한 다산초당에서의 학문에 집념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제자들 양성에도 마음을 쏟을 수 있었을 것이다. 흑산도 우이보에서의 약전도 을녀와의 가연으로 인해 든든한 힘을 얻었고, 천주쟁이라 하여 핍박하여 피로 받아내었던, 신유사옥으로 인해 잃어버린 두 아들 대신에 새로이 두 아들을 잉태하게 되었으며, 흑산도라는 섬에서만 학문할 수 있었던 기초를 바탕으로 인해 정약전의 '자산어보'가 탄생되었으니, 약용과 약전 형제 모두 유배지에 가서도 그들을 괴롭히던 악연으로부터 얽매이지 않고 그들의 학문을 오롯이 펼쳐 내었기에 백성을 위한, 백성의 입장에서 바라보았던 삶의 모습들, 온전히 실학사상을 본보였던 학문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초야에서, 유배지에서 오직 백성만을 위한 그들의 목민의 길은 약전의 15년 흑산도 유배지에서의 삶과 약용의 강진에서의 18년의 유배지에서의 삶에서 '자산어보'와 '목민심서'가 나올 수 밖에 없었을것이다.

 

  같은 남인으로 이기경, 홍낙안, 목만중 그들이 공서파라는 부류로 나서 정약용이 죽을때 까지도 정씨일가를 그리고 남인들을 죽이는 것에 앞장서게 되었음은 그들 스스로 그들의 목숨을 부지하고 출세를 향한 집념에 사로잡혀서였다고밖에 볼 수 없다. 하지만 이기경이 유배지에 갔을 때, 그의 가족들과 이기경 부모의 제사까지도 살뜰하게 돌봐주었던, 정약용의 은혜를 저버리고 그 은혜를 원수로 갚는 그 과정은 참으로 두고 두고 울분을 쌓아놓았다. 그 시대나 현 시대나 비슷한 부류들은 항상 존재하고 있다는 것으로 넘겨본다.

 

  집에 하인으로 있던 천만호일가에게 목화솜을 트는 기계를 개발하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천만호가 거상의 꿈까지 꿀 수 있도록 일깨워주었던 정약용에게 천만호는 이기경과는 다른 은혜에 은혜로 보답하는 모습이 대조적이다. 그가 죽을때까지 그의 삶은 오롯이 정씨 가족 정약용의 걱정뿐이었다.

 

  정약용의 일대기를 만나면서 사람과 사람과의 모습들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 사람들과의 관계들 속에서 약용은 특히나 이기경이나 서용보에게만은 용서라는 단어를 생각할 수도 없을만큼 너무나도 많이 당해왔었고 끝까지 괴롭힘을 받아왔지만, 그는 그것들에 대적하지 않고 그의 더 큰 꿈이 목민의 길에 있었음으로 오직 그 길만을 꿋꿋하게 걸었던 그 모습으로, 그 강인함이 있었기에 그의 실학사상은 '목민심서'로 발돋움할 수 있었으리라.

 

  정조와 사도세자, 약용과 약전, 약현과 약종 그 형제들. 그리고  강진 유배지에서 약용을 보살피다 올라온 가실이에게도 질투라는 감정대신 너그러운 안주인의 미덕을 보여준 홍씨, 유배지 강진에서 학문에 집념하도록 보필했던 참으로 이쁘고 재주가 많았던 가실 그리고 그의 딸 비안. 초야에 묻혀있을 때 약용의 벗들인 죽란시사 정약전, 한치웅, 윤지눌, 채이숙, 윤선도의 후손인 윤지범, 이주신, 윤영희 그 소중한 벗들과의 학문의 시간은 목민의 길이 되기 위한 밑거름이 되었음이다. 참으로 많은 이들이 정약용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심지어 죽음으로 몰아넣으려고 했던가, 심지어 은혜를 원수로 갚기까지 나섰던 그들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정약용의 학문의 집념은 그것들을 이미 뛰어넘었기에, 아니 목민의 길로 이미 들어서서 그것들에게 휘둘리지 않을 거대한 재목이었기에 꿋꿋하게 정진하여 그의 모든 생애에서 가장 가치있는 목민심서가 탄생할 수 있었으니, 이는 약용의 집념과 그의 백성을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민의 마음이 지극히도 컸던 까닭이다.

 

  한동안은 다산 정약용의 글귀, 마음가짐, 행동들이 그의 삶이 나의 심장을 더욱 뜨겁게 할 듯하다.

 

  소설앓이.....

 

 

 

 

2015.1.13. 소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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