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후 삼국지 - 세 황후는 어떻게 근대 동아시아를 호령했는가
신명호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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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이전에도 동북아시아의 역사에 격동기는 많았지만, 그 많은 격동기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격동기는 19세기였다고 저자는 밝힌다. 19세기를 기점으로 그 이전의 격동기에 대한 주체는 내부 즉 동북아시아의 각각의 나라들에 대한것이었으나,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동북아시아에서의 격동기의 주체는 서구열강이었지싶다. 그 도전들을 어떻게 극복을 했느냐? 그리고 그 극복의 과정들에서 각각의 세 황후들 청나라의 서태후 그리고 조선의 왕비 민씨 그리고 하루코 황후들의 삶을 통하여서 궁극적으로 19세기의 도전에 얼마나 잘 응했느냐의 여부로 19세기의 도전에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는가와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가를 판가름할 수 있을것이다.

 

함풍 황제의  후궁으로 들어가서 10년동안의 결혼생활을 끝으로 비록 후궁에서 벗어나 황후의 신분이 되기는 했으나 청나라를 이끌어가기 위한 권력의 화신이 되어야만 했던 일련의 사건들에서 왜 그토록 권력이란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그 모든 짐을 혼자 지려고 했을까 안타까움도 있었다. 자신의 친 자식마저 믿지 못하고, 권력을 움켜지고 모질게 대했던 그 모습들이 몸서리쳐진다. 결국은 아들과 며느리를 젊은 나이에 보내고 또 다시 동태후와 함께 한 서태후였지만, 여자라는 울타리에 안주하지 않고 청나라를 위해 정치를 하며 서구열강들과 어떠한 모습으로 대치하고 준비했었는가를 보면서 그녀가 노력한 용기와 결단 그리고 권력과 함께한 강한 정치력이 있었기에 그나마 청나라가 유지될 수 있었지 않을까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조카자식을 양자로 앉히면서까지 자신이 수렴청정 하고자 했던 야망과 함께 청나라를 위한 애국의 모습들이 절절히 헛되게 보이게 만들었던 그 마지막 선택에 대해서만은 책임을 면할 수 없으리라.

 

흥선대원군의 며느리로 고종의 비로 그리고 또 다시 흥선대원군의 딸로 조선의 왕실에 들어서면서부터 왕비민씨는 투쟁을 시작해야만 했다. 남편 고종의 권리를 위해 또 자신의 권리를 위해... 우유부단한 고종과 함께 고종의 권리를 찾아주기 위해서는 왕비 민씨가 더 강해져야 했고, 더 많은 투쟁을 했어야 했다. 왕비 민씨는 그 위치에서 그 위치에 맞는 내조를 했었을거라 생각한다. 단순한 권력의 욕심만으로 친정식구들을 왕실로 불러들인것이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그렇게 해서 조선의 왕실로 들어온 외척세력으로 인해 조선의 백성들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고 결국에는 외세의 침략에 허무하게 수치스러움을 보여줘야했던 것들에서 그러한 수치스러운 역사가 생기지 않을 방도는 없었을까 생각해보지만 그 시대에서 왕비 민씨가 결정하나 내리지도 못하는 고종을 지키고 고종의 권위를 세워주는 일에서 자꾸만 앞으로 나서게 되고 결국은 왕비 민씨만이 나쁜역활로 들어서게 되었고, 그런 고정관념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왕비 민씨를 보면서 어느것이 진정한 내조이며, 어떠한 방법으로 국모의 자리를 지켰어야지 나라를 온전하게 지킬 수가 있었을까에 대한 물음표를 던지고 그에 대한 해답은 찾을 수가 없음에 공허함을 느낄뿐이었다.

 

46년간 하루코 황후는 시어머니에게는 순종적인 며느리, 남편 메이지 천황에게는 헌신적인 부인의 역활로 만족하며 '부녀감'이라는 책자를 책상에 올려놓고 화려한 서양정장을 입고 화장을 하고 멋스럽게 찍었던 사진을 보자면 하루코왕후가 어느만큼 현모양처의 모습과 함께 근대화의 문물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나라의 문화로 받아들이고자 몸소 실천을 했는지 그 노력을  알 수 있다. 청일전쟁이 있었을 때로 하루코왕후는 자신이 개발한 붕대를 장병들에게 보내기까지 하며 감사편지를 보내기도 했으며, 하루코 왕후 자신도 메이지 천황과 떨어져 지내면서 전쟁으로 나가있는 장병들의 아내들의 마음을 이해해보려는 그 마음씀씀이가 돋보였기에 그녀는 자식이 없어서 후계자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메이지천황에게 사랑을 받고 국민들에게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진정한 국모가 되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에도 동북아시아는 격동의 시간이었지만 현 시대도 그 시대 못지않은 격동의 시기라 할 수 있을것이다. 다만 격동의 그 주체자가 바뀌었을뿐 우리는 그 격동의 한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으며 19세기의 세 나라의 황후들이 펼쳤던 내조의 모습과 함께한 정치참여와 함께 한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는 현재의 동북아시아문제를 직시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어본다.

 

명성황후, 서태후, 하루코 황후 그들이 각자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성공과 실패를 떠나 또 긍정과 부정을 떠나 험난한 격동의 시대를 최선을 다해 살았다는 그 사실만으로 그들의 삶은 역사적 평가를 받기에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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