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간은 불량하게 시에시선 36
조하은 지음 / 시와에세이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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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뒤척여봐도
끝내 잠에 빠지지 못했다.

새벽 세 시.
작은 불 빛에 기대고.
시집을 집어든다.

첫 장부터 빠져든다.

그래. 나도 나의 엄마를 오래도록 기다렸지.
어린시절 나의 엄마가 이쁜 원피스 입고 나를 데리러 올 것이라는 상상을 했었지.

어느 날 뾰족구두에 꽃무늬 양산을 쓴 여인이 나를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나는 잠시 맡겨진 아이야"
소공녀를 읽으며 주문을 걸었다는 시인.


선데이 서울!

아주 오래전에 쿵쾅 거리는 심장소리를 억누르며
오라비가 바지 뒷주머니에 둘둘 말아 집어넣은 채
나타났을 때, 몰래 친구들을 모아놓고 소공녀와 퀴리부인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보다 선데이 서울에서 보였던 가슴 볼록한 여자들의 몽롱한 눈빛을 더 흥미로워했다는. 그리고 오라비가 금방 책 속에서 나온 듯한 여자를 데려오면서 은밀한 독서의 방은 문을 닫고, 못다 쓴 일기의 마지막 장처럼 마침표를 찍지 않은 문장은 흔들렸다. 얼마간은 불량하게.


비슷한 세대를 살아 온 우리네들의 이야기가 시로 탄생되어가고 있었다.

시인 정현종의 방문객에서 그랬지.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라고.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라고.

잠이 오지 않는 밤도 있던 날을 생전 첨으로 겪었던
그 날. 그 새벽까지 조하은 시인의 시를 모조리 읽으면서
난 그 시인의 인생을 만나고 말았다.
사람을 만나서 만났던 그의 일생이, 사람을 굳이 만나지 못했어도 그 사람의 인생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육성회비가 없어서 집으로 쫓겨 가던 날.
육성회비대신에 빈 봉투와 생고구마를 받은 담임은
받은 생고구마로 머리통을 후려친다.
그 날 밤 숙자 엄마가 싸다 준 거한 저녁식사와 중간고사 답안지는 담임선생의 서랍 속에 같이 잠들었고
시인은 중간고사 1등을 했다. 그렇게 복수란 단어의 뜻을 그렇게 배웠다고 했다.

삶의 아름다운 것을 보기 보다는
삶의 모서리. 어쩌면 외면하고 싶을 그 모습들에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그 아픔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의 시를 만난다. 하지만 아픔과 슬픔은 피비린내 나는 고통과 복수, 좌절로만 끝나지 않음은.
시인의 인생을 마주하는 시선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시집 한 권을 집어들면서
시인의 인생을 마주하게 될 거라는 건 상상도 못했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 까지는.



2020.9.13.소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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