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나를 자유롭게 할 거야 - 벽을 깨고 스스로 빛이 된 예술가
이소영 지음 / 블랙피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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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그림이 나를 자유롭게 할거야
작가 : 이소영
출판사 : 블랙피쉬
읽은기간 : 2026/10/18 -2026/10/21


언제나 읽는 즐거움을 주는 이소영님의 신작..

여성화가들의 이야기다.. 거의 대부분 처음 보는 작가들이었다.

역시 여성은 주류에서 벗어나있다..

우리나라 여성화가들로 시작해 전세계에 많은 여성 화가들을 담담하게, 그리고 담백한 필체로 소개하고 있다.

상당수의 화가들이 남편에게 가려지거나 주류의 화가들에게 가려져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역시 세상은 불공평하다..

이런 작가들의 손을 통해 작가들이 발굴되고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좋은 책을 읽어서 즐겁다..


p28 2023년 김윤신은 또 한 번 파격적인 선택을 한다. 88세의 나이에 강원도 양구의 박수근미술관 창작스튜디오 레진던시에 지원한 것이다. 대부분 20-40대의 젊은 작가들이 지원하는 프로그램에 그녀는 당당히 도전장을 내밀었다. “한낱한시도 허투루 살고 싶지 않다”고 쓴 그녀의 지원서를 전시장에서 읽은 나는 몇 달가 이 자기소개서가 뇌를 떠나질 않았다.

p34 김윤신은 말한다. “나이 상관없이 그냥 일을 하는 사람이에요” 그녀에게 90이라는 숫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오직 작품이고, 그 작품을 통해 전달되는 삶의 진실이다.

p43 1927년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재직 중이던 남편 김우영이 유럽 시찰 기회를 얻었다. 나해석은 아이들(당시 세 자녀)을부산 시댁에 맡기고 남편과 함께 세계 일주에 올랐다. 한국 여성 최초의 세계여행이었다

p47 나혜석은 멈추지 않았다. 여자에게도 성욕이 있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듯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것뿐이라고 말하며 파격적 발언을 이어 나갔다.

p59 193년 풍차 집의 주인이 집을 팔면서 펠턴은 완전히 떠나야 했다. 마치 무언가를 찾아 헤매듯 서쪽으로 이동한 끝에 캘리포니아 팜스프링스 근처의 커시드럴 시티라는 작은 사막 도시에 도착했다. 원래는 잠깐 머물 생각이었지만 펠턴은 결국 30년을 살았다. 도시 이름부터 대성당이라는 뜻을 가진 이곳에서 그녀는 평생 동안 머물며 그림을 그렸다.

p64 펠턴의 작품은 더 부드럽고 더 직관적이다. 다른 신비주의 화가들이 때로 격렬하게 보이지 않는 세계를 폭로했다면, 펠턴은 속삭이듯 그 세계로 안내했다. 빛과 색의 미묘한 조화로 내면의 풍경을 펼쳐 보이되, 설명하지 않았다.

p87 힐마가 꿈꾼 사원도 나선형이었다. 관람자가 나선 경로를 따라 걸으며 영적으로 변형되는 공간. 그녀가 상상한 건물은 결코 지어지지 않았지만, 100년 후 구겐하임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우연일까?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도 신비주의에 관심이 있었고, 구겐하임 최초의 관장 힐라 레비아도 신지학자였다. 추상미술의 영적 뿌리는 구겐하임의 건축 자체에 새겨져 있었다.

p103 베라의 대답은 간단했다. “컴퓨터보다 인간적인 것은 없습니다. 누가 이 기계를 만들었나요? 인간이에요. 누가 지금 이 알고리즘을 쓰고 있나요? 나에요. 누가 1%를 선택했나요? 나에요”

p109 2022년,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미술 축제인 베니스 베닝날레의 꿈의 우유 전시에 98세의 베라 몰나르가 초대되었는데, 전시 최고령 참가자였다. 그녀의 1970년대와 1980년 플로터 드로잉들이 전시장 벽에 걸렸고, 젋은 예술가들과 관람객들이 작품 앞에 서서 놀랐다. “이게 1970년대 작품이라고?” “플로터로 그렸다고?” “NFT보다 50년이나 앞선 거잖아?”

p121 당신의 그림을 이야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단어입니다. 1980년대 중후반부터 당신은 물감이 아닌 재료들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렌틸콩, 분쇄된 레이온, 실, 풀반짝이, 거즈. 당신은 이 과정을 그림을 위한 일종의 의식행위라고 불렀습니다.

p139 놀라운 것은 스테판이 어머니의 연인인 모스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그녀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이다. 현재 남아 있는 모스의 사진 대부분이 바로 1930년대에 스테판이 촬영한 것들이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이고 열린 가족 관계였다.

p162 무르나우에서 뮌터의 에술은 폭발적으로 꽃피웠다. 그녀는 하루에 다섯 점의 유화 습작을 완성하기도 했다. 동료 화가 야블렌스키, 마리 안네 베레프킨과 함께 야외에서 작업하며 서로의 작품을 비평하고 영감을 주고받았다.

p174 뮌터의 진정한 유산은 연애사가 아니다. 그녀는 청기사파의 창립멤버였고 바이에른 민속 예술을 현대 회화에 접목한 선구자였으며, 나치의 박해 속에서 20세기 초 가장 중요한 미술 운동의 유산을 지켜냈다. 무엇보다 60년이 넘는 그림 작업 동안 일관되게 자신만의 시각 언어를 발전시킨 독립적인 예술가였다.

p199 남동생 토비가 새로운 생활을 제안했다. 매주 목요일 저녁 그의 캠브리지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자는 것이었다. 하이드 파크의 어두운 응접실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젊은 남자들이 담배를 피우며 들어왔고, 여자들이 그들과 같은 높이의 의자에 앉아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빅토리아 시대가 금지한 것,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지적 대화에 참여하는 것이 고든 스퀘어 46번지의 거실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루어졌다.

p204 버네사는 그 위계를 거부했다. 의자에 앉는 것도, 컵을 드는 것도, 방에 들어서는 것도 미적 경험이 될 수 있다면… 왜 캔버스만 예술인가? 캔버스를 넘어 삶의 모든 표면으로 예술을 확장시키는 것. 이것은 단순한 확장이 아니라 버네사가 세계를 배치하는 방식 그 자체였다.

p233 약혼할 때 그가 내게 준 <약혼 정물>도 함께 기증했다. 이제 그 그림은 미술관에 걸려 있다. 내 작품은 기증하지 않았다. 기증할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무도 원하지 않아서다.

p245 디에고는 끊임없이 외도했다. 여배우, 모델, 조수, 심지어 프리다의 여동생 크리스티나까지. 프리다는 복수하듯 자신도 연애를 했다. 남자와도, 여자와도. 망명한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 일본계 미국인 조각가 이사부 노구치… 결국 1939년 두 사람은 이혼했다. 서로를 가장 깊은 사랑한 두사람은 서로를 가장 깊이 상처 입혔다.

p250 VIVA LA VIDA(삶이여 만세) 죽기 8일 전에 완성한 그림이었다.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았던 여자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삶이여 만세라니.

p264 1940년대에 전설적인 화상 다니엘 앙리 킨바일러는 이 사실을 증언했다. “비양심적인 자들이 마리아 블랑사르의 서명을 지우고 후안 그리스의 이름을 넣었다” 해서는 안 될 비도덕적 행동이었지만, 그것은 당시 미술 시장이 여성 화가를 대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p304 헬렌의 자화상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고독이 만든 걸작이라고 요약하기엔 그 말은 너무 매끈하다. 고독은 낭만적이지 않았다. 네 살 때 계단에서 떨어져 평생 다리를 절뚝 거린 것, 약혼자에게 버림받은 것, 40년을 시골에서 어머니와 둘이 산 것,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결혼한 것, 전쟁 때문에 타국의 호텔 방에서 혼자 죽어 간것. 모든 것은 선택한 고독이 아니라 주어진 고독이었다.

p313 에레라는 그림을 팔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시장에 맞출 필요도, 유행을 따를 필요도, 누군가를 기쁘게 할 필요도 없었다. “아무도 내 작품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을 기쁘게 하고 있었습니다”

p320 무시당하는 것은 일종의 자유입니다. 105세에 그녀는 말했다. “누군가를 끊임없이 기쁘게 해야 한다는 의무에서 해방된 기분이었죠” 그보다 몇 해 앞서 그녀는 이렇게도 말한 적 있다 .”유명해지면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같은 것을 다시 하고 싶어집니다. 아무도 내가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을 기쁘게 하고 있었어요”

p336 1941년 출간된 첫 책 <클리 위크>는 원주민 마을에서의 경험을 담은 21편의 짧은 이야기 모음집이었다. 유클루릿에서 처음 만난 원주민들, 토템 폴을 그리러 다니던 여행들, 버려진 마을에서의 밤들, 책은 성공했고 그해 캐나다 총독 문학상을 수상했다. 69세의 나이에 화가로서뿐만 아니라 작가로서도 인정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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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유물과 대화하러 간다 - 고궁에서 장인까지, 아주 오래된 것들의 아름다움
서헌강 지음 / 다산초당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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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오늘도 나는 유물과 대화하러 간다
작가 : 서헌강
출판사 : 다산초당
읽은기간 : 2026/10/14 -2026/10/18


유물사진작가가 있는줄 몰랐다.

당연히 전문분야기 때문에 유물이나 유적을 찍는 분이 있을 줄은 알았지만 이런 분의 책을 읽은건 이번이 처음이다.

얼마전에 악보위원의 책을 읽었었는데 전문분야에 계신 분들이 책을 내니 새로운 걸 많이 알게 된다.

여러 이야기가 재미있었지만 세계에 흩어져있는 유물들을 사진찍는 이야기는 정말 감동이었다.

지금 보고 사진을 찍는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유물을 혼자 보며 사진으로 남기는 것이 얼마나 처절하고 가슴아픈 일인지 알게 됐다.

지금도 세계 어딘가에 잠들어있는 우리 유물들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나라에 돌아오게 하고 싶어도 누군가 서명과 날짜를 잘라버려서 출처를 알 수 없어 못오는 작품들도 꽤 있다고 한다. 유물을 훔쳐다 판 인간들이 꼭 고통속에 살기를 저주한다.

이런 분들 덕에 유물과 유적의 보지 못하던 부분을 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고마운 분들이 참 많고 읽어야 할 책도 참 많다..


p5 일일시호일(날마다 좋은 날). 운문이 말한 일일시호일의 의미는 폭풍우가 몰아치면 그 비바람을 온몸으로 겪어내고, 볕이 들면 그 따스함을 만끽하는 절대적 긍정이다. 과거의 실패에 집착하지 않고,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일상의 고통을 껴안으면서도 그 안에 깃든 평온과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는 삶속에서 비로소 좋은 날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p36 조선 왕조가 경복궁을 창건한 해는 1395년이다. 자금성이 완공된 1420년보다 한 세대는 더 앞서서 지어졌다. 게다가 궁궐의 정원으로서 북악산, 인왕산과 조화를 이루며 오늘날에도 도심 속 현대인과 정서를 교감하는 경복궁과 달리 자금성은 오로지 건축물만 있어 현대에도 지극히 배타적인 공간이다.

p86 횃불을 피워 올린 듯한 거대한 붉은빛 하늘이 봉수대 위로 펼쳐지는 모습을 연출할 수 있을 만한 일출은 1년에 고작 열 번 남짓이다. 게다가 전날 비가 내려 공기에 어느 정도 습기가 있는 상태여야 다음 날 이른 새벽 일출 때 유난히 붉게 물든 하늘을 마주할 수 있다.

p125 제사 준비를 마친 종갓집 어르신들은 대청에 모여 있다가 시간에 맞추어 신주를 모셔놓은 사당으로 이동한다. 사당에서 제청(제사를 지내기 위해 묘지 옆에 마련한 대청)으로 신주를 모셔 오는 출주와 참배하는 참신 사이에 제사의 주요 절차들이 마무리된다. 이후 신주를 보내 드리는 사신과 가장 마지막 절차인 음복(제사에 참석한 사람들이 음식을 나누는 것)에 이르게 되는데, 이 모든 과정이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된다.

p213 그동안 국외 조사를 위해 출장을 떠날 때마다 아내는 일하기 위해 해외로 떠나는 나를 보고 또 징용 가느냐며 우스갯소리로 놀리고는 했지만, 아마 이 정도로 강도 높은 작업이었을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고달픈 일을 20년 넘게 계속하는 이유가 있다. 해외에서 만나는 모든 유물과의 만남은 대부분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기 때문이다.

p229 사진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사진을 찍는 사람의 시선이다. 그렇다면 시선이란 무엇일까. 한마디로 삶의 경험과 감정이 응축되어 만들어진 고유한 관점과 철학이다. 시선은 그 사람의 삶 전체가 만들어내는 것이라 본다.

p239 나는 문화유산의 고루하고 빛바랜 느낌만 전하고 싶지 않다. 디테일에 숨은 화려함을 강조하거나 때로는 사람들이 미처 보지 못했을 생동감과 재미를 부각해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주고 싶다. 문화유산이 지닌 숨은 이야기를 끄집어내 재탄생시키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나는 시선이 지닌 이 힘을 포장이라고 말하고 싶다.

p273 나는 벗어날 수 없을 이 아름다운 감옥에 갇혀 있는 지금이 좋다. 그런 의미에서 한창기 사장님의 창간사는 내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 같다. 나라를 남에게 빼앗긴 시절에도 이 땅의 흙 내음과 겨레의 얼을 잊지 않았던 예술이 있었습니다. 해방이 되고서 오늘에 이르는 사이에 속된 바깥바람이 일고 상업주의가 번졌을망정 이 땅과 이 시대의 아들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어엿한 예술인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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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수록 아름다운 우리 불화 - 망자를 위로하고 산 자를 다독인 불교 회화 이야기
김소연 지음 / 미술문화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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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볼수록 아름다운 우리불화
작가 : 김소연
출판사 : 미술문화
읽은기간 : 2026/10/10 -2026/10/13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불화를 사진으로 보여주면서 설명해주는 좋은 책이다.

종교가 다르다보니 설명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다.

특히 많은 부처님이 나오는 불화는 설명을 해줘도 부처님과 매치시키기도 사실 쉽지 않았다.

글보다는 말과 핀포인터로 설명을 해주면 더 좋았을텐데 그럴 수 없으니 이렇게 글로 읽으면서 띄엄띄엄 하나하나 맞춰보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시간이 되어 사찰을 방문하고 직접 보면 더 느낌이 살지 않을까 싶다.

그럴때는 이 책을 들고 가야지..

성당을 방문할 때도 성당에 대한 소개책을 가지고 가면 훨씬 재미있고 머물고 싶게 된다.

절에 갔을 때도 이런 책을 들고 가면 더 머물게 되지 않을까 싶다..

재미있었다.


p60 동해의 거친 파도가 부서지는 강원도 양양의 사찰 낙산사는 보타락가산의 이름을 빌려온 한반도의 관음 성지이다. 바다와 맞닿은 절벽,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 그리고 그 위에 자리한 낙산사의 풍경은 경전에 묘사된 보타락가산의 이미지와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낙산사는 점차 한국 관음 신앙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p61 오늘날 전해지는 대다수의 고려 수월관음도에서는 기암괴석 뒤로 두 그루의 대나무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묘사된다. 이처럼 일정한 형태로 나타나는 대나무 두 그루는 다른 지역의 수월관음도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p69 고려사 속 매미 날개 같은 모시에 대한 기록은 어쩌면 여러 수월관음도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반투명한 베일이 화가의 상상 속에만 있던 것은 아닐 가능성을 보여준다.

p79 치성광불강림도와 같이 부처가 마치 도교의 신처럼 수레를 타고 강림하는 도상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고려 왕실의 유연하고 실용적인 종교적 태도 덕분이었다.

p89 향을 피우고 꽃을 뿌리며 범패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작업 공간으로 들어가, 삼보에 귀의하고 절을 올린 뒤에야 비로소 자리에 앉아 한 글자씩 옮겨 적을 수 있었다. 그 순간 글자는 부처를 향한 공양이 되고, 종이는 진리의 말씀이 현현하는 신성한 공간이 되었다.

p107 회암사 불화 400점(약사불 삼존도 100점, 아미타불삼존도 100점, 석가모니 불삼존도 100점, 미륵불삼존도 100점)과 이 사불회도의 도상 구성이 유사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기인한다. 결국 사불회도는 이종린의 효심이라는 소프트웨어와 왕실 인프라라는 하드웨어가 결합하여 탄생한 작품인 셈이다.

p115 훗날 이 비극의 주인공들은 신성한 존재로 거듭난다. 묵묵히 수행했던 사라수왕은 서방 극락정토를 주재하는 아미타불이, 자신을 온전히 희생한 원앙부인은 중생을 구제하는 자비의 상징 관음보살이, 부모를 향한 지극한 효심을 보여준 아들 안락국은 지혜의 상징 대세지보살이 된 것이다.

p139 조상의 젃을 기리며 승려들에게 음식을 공양하는 우란분재와 모든 외로운 영혼을 구제하는 수륙재는 공통적으로 굶주리고 목마른 영혼들에게 자비의 음식을 베푸는 시식 절차가 핵심이다.

p167 탑은 그 주위를 돌며 바라보는 동안 서서히 의미를 드러내고, 벽화는 시선을 따라가며 읽히는 장면으로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이처럼 불교 미술은 경전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시간과 형식을 바꾸어가며 반복하고 변주한다.

p227 안타깝게는 현황도는 화면 하단에 적혀 있어야 할 화기가 누군가에 의해 예리하게 잘려나가고 없었다. 불화가 언제, 누구에 의해, 어느 사찰에 봉안되었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이 고의로 훼손된 것이다. 이는 마티엘리의 손에 들어가기 전, 이 그림을 어느 사찰에서 도난한 뒤 출처를 세탁하기 위해 훼손시켰음을 암시한다. 결국 원래 있던 자리를 알 수 없게 된 이 불화는 반환되지 못한 채 여전히 미국 오리건주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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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도시 기행 3 -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리스본, 뽀르투 편 ㅣ 유럽 도시 기행 3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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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유럽 도시 기행 3
작가 : 유시민
출판사 : 생각의길
읽은기간 : 2026/09/28 -2026/10/03


유시민 아저씨의 세번째 책..

이번 도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모두 가봤던 도시라서 더 정겨웠다..

특히 포르투갈은 무엇을 해도 좋은 동네였다..

유시민 아저씨는 역사와 알고있는 내용을 버무려서 독자가 새롭게 볼 수 있게 하는 재주가 있다.

나도 같은 지역과 유물과 건물을 보았는데 생각해보지 못했던 내용을 알려줘서 좋았다.

아는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재미있었다..


p46 점심을 먹으면서 스페인 사람들의 문화와 취향에 관해 물어보았더니 E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해외여행보다는 국내여행을 즐긴다,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가우디, 미로, 피카소도 좋아하지만 주로 나라 안에서 작품 활동을 했던 고야와 벨라스케스를 더 좋아한다, 지역마다 언어와 역사와 문화가 다른 것을 스페인의 장점으로 여긴다. 그런 점이 내 마음에 들었다. 남의 눈을 의식하기보다는 가치 판단의 무게 중심을 자신의 내면에 두고 사는 사람을 나는 좋아한다.

p57 왕도 귀족도 부자도 아닌 한낱 회계사의 초상화를 왜 저렇게 많이 그렸을까? 알고 보니 흔한 회계사가 아니었다. 16세기 초 합스부르크 왕가의 자산을 관리했던 유럽 최가 금융업자의 회계사였다. 슈바르츠는 패션을 취미로 삼고 살았던 덕분에 의상 디자인의 선구자, 세계 최초의 패션 북 제작자, 아날로그 시대의 파워 인플루언서라는 평가를 얻었다.

p67 괴물이 깨어난 시대를 살았던 그는 괴물을 다시 잠재우려면 잠들어버린 인간의 이성이 눈을 떠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 생각을 담은 그림으로 타인의 이성을 깨우려 했다. ‘어둠의 그림들’을 보면서 예술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예술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예술이 무엇이라 하든, 괴물이 인간을 잡아먹었던 그 시대에 고야 같은 예술가 한 사람도 없었다면 예술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p106 시내 북서쪽 가르멜 언덕의 구엘 공원에서 바르셀로나 탐사를 시작했다. 언덕 바로 아래 그라씨아 지구를 구경하면서 엑삼쁠레지구로 내려와 사그라다를 비롯한 명소를 본 다음 중세와 로마 시대를 품은 고딕지구와 라발지구를 거쳐 콜럼버스 동상이 있는 남동쪽 해별까지 걸어서 갈 생각이었다.

p115 유럽도시기행 1권과 2권의 도시를 다닐 때 이스탄불 말고는 가이드를 고용한 적이 없었다. 유능한 가이드를 만나면 여행이 두 배 즐거워진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G는 바르셀로나 관광업계의 핵인싸인지 어디든 자기 집처럼 드나들었는데 알고보니 그럴 만도 했다. 갈리시아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바르셀로나에서 건축학을 공부한 그는 한국계 스페인 사람으로 스페인어뿐 아니라 까딸루냐말과 갈리시아말도 구사한다고 했다. 이틀 동안 동행하면서 배운 게 많았고 몬세라트 수도원도 그가 연결해 준 분의 도움을 받아 다녀왔다.

p124 민중의 소망을 이루어준 리더도 귀하지만 현실에서 패배한 리더를 기억하고 사랑하는 민중은 그보다 더 귀하다.

p145 그림의 분위기는 신의 자비 쪽에 무게를 싣는다. 피카소는 19세기 막바지 스페인의 문화 권력자들이 회화의 모범답안으로 인정했을 법한 그림으로 큰 상을 받았고 그 덕분에 수준 높은 미술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었다. 험한 세상 살아가려면 때로 어른들 말을 따르는 게 현명하다.

p154 까사 바뜨요를 보고 알았다. 그는 돈 버는 방법과 돈 쓰는 방법을 다 잘 알았다. 가우디는 그가 원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었다. 바뜨요는 집을 올려다보는 거리의 구경꾼들한테 손을 흔들면서 돈의 힘과 맛을 즐겼을 뿐만 아니라 소유권이 남한테 넘어간 뒤에도 집에 자신의 이름이 남는 행운도 얻었다.

p167 나는 믿는다. 종교 없이도 우리가 도덕을 세울 수있다는 것을. 신앙심 없이도 이타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구원이나 다음생 같은 것을 기대하지 않고도 삶에 의미를 불어넣을 수 있다는 것을.

p190 바르사 팬들은 경기 시작 17분 14초에 이벤트를 한다. 왜 하필 17분 14초인가? 앞에서 말했지 않은가. 1714년 바르셀로나 공방전의 참혹한 패배를 기억하기 위해서다.

p199 현지 사람들이 하는 대로 해보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게 하는 도시가 길을 잃었을 때도 흥미로운 것을 만날 수 있는 도시가 살기 좋고 경쟁력 있는 곳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서울은 최근 들어서야 그런 도시로 세계에 알려지고 있지만 바르셀로나는 오래전부터 그랬다.

p217 살라자르는 초등교육을 장려한 반면 고등교육은 사실상 폐지했다. 글을 읽고 셈을 할 수 있을 정도로만 국민을 교육한 우민화 정책을 쓴 것이다. 그 결과 국민의 지적수준은 하락했고 과학기술은 퇴보했다. 1968년 뇌졸중으로 쓰러지고서도 총리 자리를 지킨 살라자르가 1970년 봄 죽었는데도 포르투갈 사회에는 이렇다 할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혁신을 추진할 정치세력이 좋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p228 사라마구 전집의 표지 디자인이 특이했다. 제목을 삐뚤빼뚤한 손글씨로 썼는데 책마다 필체가 달랐다. 포르투갈어를 쓰는 창작자들이 손으로 쓴 글씨였다.

P277 역사가들은 뻬드루 1세 왕에게 응징자라는 별칭을 주었다. 아내의 복수를 해서가 아니라 귀족도 죄를 지으면 가차 없이 처벌했고 사형 집행도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민의 범죄는 너그럽게 대했던 뻬드루 1세는 많지 않은 나이에 죽었고, 왕위는 이네스가 아니라 K와 T가 낳은 아들들이 차례로 물려받았다.

p305 포르투갈은 오래된 출판 선진국이다. 대항해 시대의 항해 기록과 탐사 보고서를 쌓아나갔던 15세기부터 그랬다. 언론의 자유를 혹심하게 탐압했던 살라자르 시대에도 출판 산업은 생명력을 유지했고 시민들은 서점에서 정치 정보를 나누었다. 언덕과 비탈이 많은 리스본과 뽀르투에서 서점은 커피와 음악을 즐기는 쉼터이기도 했다.

p307 세상은 인터넷과 검색엔진의 시대를 지나 인공지능 시대에 들어섰다. 책은 지성의 상징이 아니며 숭배할 대상 또한 아니다. 책을 쓰는 일로 세상과 관계를 맺고 살아온 나는 책을 전성기가 지난 전통 미디어로 여긴다.

p336 술은 마시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불법화할 수가 없는 마약이다. 어차피 마실 거라면 품격 있게 마시는 게 좋다. 음식과 궁합을 맞추고 철학과 문학의 향기르 ㄹ입히면 최선이다. 와인은 그렇게 하기에 알맞는 술이다.

p342 해석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텍스트라 하고 텍스트를 해석하느 ㄴ데 필요한 정보를 콘텍스트라고 한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라는 아무 콘텍스트가 없는데도 분명한 감정을 전달했다.

P348 경제학자 에른스트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책에서 기술 발전으로 이룬 거대한 물질적 풍요보다 소박하고 인간적인 삶이 아름답고 오래 지속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쳐 세계인의 관심을 받았다. 뽀르투 국립 미술관은 그런 의미에서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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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로 보는 한국사 - 기후가 바꾼 5천 년, 새롭게 읽는 우리 역사
박정재 지음 / 바다출판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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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기후로 보는 한국사
작가 : 박정재
출판사 : 바다출판사
읽은기간 : 2026/09/28 -2026/10/03


박정재 교수님의 책을 여러권 읽었다.

지리학과 교수님이라 그런지 책의 내용은 대부분 비슷하다.

Long term으로 기후가 계속 변하고 있고, 그 변화에 따라 사람들이 대응을 했고, 그로 인해 문명과 문화가 바뀌어왔다는 것.

빅히스토리에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라 낯설지는 않다.

역사학자들이나 미시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에게는 비판의 소지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빅히스토리라는게 큰 변동 사이에 있는 작은 변동은 무시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장기적으로는 우리는 모두 죽는다고 이야기했던 케인즈의 말이 떠오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빙기나 온난화 기간동안 역사와 문화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해석하는 부분은 흥미롭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다.

난 학자가 아니니까 빅히스토리에도 공감하고, 미시적 추동이론에도 공감한다.

재미있게 읽었다.


p16 주기적으로 한랭한 기후가 찾아올 때마다 사람들은 새로운 기술과 문화를 발전시키며 환경에 적응하고자 했고, 여의치 않을 때는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결단도 마다하지 않았다. 약 5000년 전 이후 지속된 한랭화와 대략 500년을 주기로 반복된 급격한 저온 현상은 홀로세 후반 한반도인들을 추위에 강한 집단으로 단련시켰다.

p25 요하(랴오허) 문명은 동북아시아를 대표하는 선사 문명 가운데 하나로 홀로세 중기에 황하 문명 못지않은 문화수준을 자랑했다.

p32 우리 모두 적도 서태평양에서 비롯된 기후 변화가 요하 유역과 한반도, 두 지역 사회의 성쇠를 결정했다고 보는 것이다. 요하 지역과 한반도가 가까이 있고 양 지역 집단의 문화가 유사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설득력 있는 가설이라 할 것이다.

p40 3200년 전 즈음에 한반도로 진입한 송국리형 문화 집단과 철기 저온기(2800-2300년 전)의 중반부터 한반도 남부로 이주해 들어온 점토대토기 문화 집단은 다른 생활양식을 기반으로 한다.

p58 흔리 로마 온난기라 불리는 시대다. 유럽에서는 로마 공화정(기원전 509-기원전 27년)이 꽃을 피웠고, 동아시아에서는 전한(기원전 202-기원후 8년)이 한무제의 위업을 발판으로 전성기를 누렸다. 한반도 북부에 자리한 위만조선(기원전 194년-기원전 108년) 또한 비록 90년도 되지 않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강국의 반열에 올랐고 한반도 남부 사회는 이주 물결이 잦아듦에 따라 비교적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p94 훈족, 서고트족, 반달족 등 당시에 강력함을 풍기던 민족 집단이 모두 4세기 후반부터 5세기 중반까지 활발하게 움직였다. 훈족의 이동은 374년에 시작되어 468년까지 이어졌으며, 서고트족의 이동은 376년에서 416년까지 이어졌다. 반달족의 이동은 406년부터 439년까지 계속되었다. 모두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했던 시기와 엇비슷하다. 이때의 기후 변화가 북반기 전역에 영향을 미치며, 동아시아와 서유라시아 양 지역 사회에 비슷한 파장을 불러왔음을 알 수 있다.

p113 후환융선은 중국 동북부 헤이룽장성(흑룡강성)의 헤이허시에서 남서부 원난성의 텅충시를 잇는 대각선으로 이 선의 서쪽에는 인구가 적은 반면, 동쪽에는 인구가 밀집해 있다.

p127 3-4세기에 다수의 부여민이 정치적 망명과 생계형 이주를 감행한 것 그리고 수단에서 격렬한 내전이 발생하면서 난민이 급증한 것은 모두 엘리트의 리더십이 부실하여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결과다. 기후 위기에 리더의 정치력 부재까지 겹칠 때 사회의 갈등과 혼란이 얼마나 커질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없다.

p161 1168년 이들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켜 현령을 쫓아내고야 마는데, 이 난을 양수라는 인물이 주도했다고 하여 양수의 난이라고 한다. 이후 제주도에서는 수백 년에 걸쳐 섬 주민의 반란이 이어졌다. 1374년 목호의 난부터 1862년과 1898년 제주 민란, 1901년 이재수의 난, 1948년 제주 4.3 사건에 이르기까지 대규모 민란이 끊이질 않았다.

p173 정말로 큰 폭발은 30년 후 1257년 인도네시아 롬복섬에서 있었다. 이 섬의 사말라스 화산에서 거대한 분출이 일어 최고 50미터 두께의 화산 새설물이 섬의 절반가량을 덮었다. 이 폭발로 적도 태평양에서 무역풍이 약해지고 장주기 엘니뇨가 강화되었을 정도로 규모가 상당했다.

p192 세차 운동이 이렇게 소빙기의 도래에 일정 부분 기여한 것은 맞다. 하지만 소빙기의 저온 현상을 가져온 주된 요인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바로 태양과 화산이다. 태양 활동이 저조하여 흑점 수가 줄어들 때, 화산 활동이 활발하여 폭발이 잦았을 때, 북반구의 기온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 그 결과 곤경에 처했던 인간 사회의 사례를 우리는 유물이나 문헌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p211 경신대기근과 을병대기근으로 조선은 큰 피해를 본 반면, 같은 시기 강희제가 통치하던 청나라는 오히려 번성했다. 양국 간에 이러한 차이를 가져온 이유를 곱씹으면서 정조는 무엇이 왕으로서 추구해야 할 통치방식인지 깨우치지 않았을까? 정조는 재해 예방과 재난 관리를 통해 백성의 안정적인 삶을 보장하고자 했다.

p235 1809년 폭발은 가뭄을, 1815년 폭발은 홍수를 불러왔다. 같은 공간임에도 ㅎㅘ산 폭발의 여파는 확연히 달랐다. 폭발한 화산의 위치 혹은 폭발의 ㄱㅠ모가 물 순환의 차이를 가져왔을 것으로 예상은 되지만 그 정확한 인과관계를 알기란 어렵다.

p265 병자년 가뭄(1876년)으로 조선이 힘겨워할 때 산동, 산시, 허난, 허베이 등 중국 북부 지역에서도 1876년에서 1879년까지 최악의 대기근으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이 기근을 정무기황이라 부르는데 1000만 명 이상 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인도에서도 1876년부터 1878년까지 가뭄과 기근이 이어졌다. 남인도 대기근이라 불리는 이때의 식량난으로 굶어 죽은 사람 수만 500만에서 800만 명에 달했다. 중국가 인도의 기근 모두 엘니뇨가 주된 원인인 것으로 추정된다.

p293 여전히 역사학계에서는 여기서 소개한 딥히스토리, 진보 사관, ㅎㅘㄴ경결정론, 인류세 등의 개념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이는 역사학자들이 지나치게 ㄷㅏㄴ순화된 거대 서사에 경계심을 갖기 때문일 것이다. 동물, 식물, 미생물, 강, 산, 기후, 바다, 돌, 기계 등 이른바 비인간 요소를 인간만큼 비중있게 다뤄야 한다는 방법론적 부담 역시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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