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인들 세트 - 전2권 - 서로마 몰락부터 종교개혁까지, 중세 천년사를 이끈 16개 세력
댄 존스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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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세인들1

 : 댄 존스

 : 책과 함께

읽은기간 : 2024/01/10 -2024/01/20


요즘 중세에 대한 책들이 쏟아진다.. 덕분에 읽을 수 있는 중세관련 책들이 많아졌다.

중세는 관광지 상품으로나 알려져있지, 그 시대 자체는 폄하되고 인정받지 못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새롭게 중세를 보는 책들도 많아지고 연구들도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다.

유럽과 이슬람의 이야기가 주류였는데 훈족의 이동에 따른 혼란들을 설명하면서 동서양의 만남도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다. 

특히 십자군은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을 고려해가며 설명하고 있어, 훨씬 입체적이다. 

2권을 빨리 읽어야겠다. 


p14 훈족의 왕 아틸라부터 잔 다르크까지 수많은 남자와 여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역사의 적어도 10여개 분야(전쟁과 법에서 미술과 문학에 이르기까지)에 무모하게 뛰어들게 될것이다.

p29 아우구스투스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로마인의 생각은 갈렸다. 고상한 선지자이자 비길데 없는 정치군인인가, 아니면 부패하고 잔인하며 믿을 수 없는 폭군인가? 역사가 타키투스는 이렇게 물었으나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황제로서 이룬 성과는 부정하기 어렵다

p36 세계를 강타한 자들이 도시를 약탈해 육지가 남아나지 않았는데, 그들이 바다를 털고 있다. 적이 부유하면 그들은 탐욕을 부리고, 적이 가난하면 그들은 지배하려 한다. 동쪽도 서쪽도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만이 빈자와 부자에 대해 똑같은 열의로 탐낸다. 그들은 강도와 살육과 약탈에 제정이라는 거짓이름을 붙인다. 그들은 황무지를 만들어놓고 이를 평화라 부른다

p40 이 주장의 핵심에는 태고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왕국의 지배자들을 고무해온 두 가지 오래된 논쟁이 있다. 국가가 이전의 적을 어떻게 자기네 사회에 끌어들일 것인가. 그리고 국가 또는 사회의 구성원 자격에 대한 문호를 외국인에게 개방하는 것이 그들의 혈통과 특성을 강화하는가, 희석하는가? 이는 로마의 수백 년 제정 시대를 시끄럽게 했던 논쟁이었고, 중세와 그 이후까지 유산을 남겼다.

p57 데키우스 치하에서, 그리고 이후 발레리아누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 치하에서 기독교도는 채찍질을 당하고 가죽이 벗겨지고 야생동물에게 던져졌으며 여러 창의적인 방식으로 살해당했다

p65 훈족은 전문적인 기마궁술을 이용해 잔인한 도살자의 명성을 쌓았고 스스로도 그것을 열렬하게 강조했다. 그들은 전사 계급이 이끌고 혁명적인 군사기술을 이용할 수 있었던 유목 문명이었다.

p67 티베트고원의 칭하이성에서 나온 치렌향나무 표본이 제공한 나이테 자료에 따르면 아시아 동부 지역은 350년에서 370년 사이에 큰 가뭉을 겪었던 듯하다. 이 가뭄은 지난 2000년 동안 기록된 가뭄 가운데 가장 심한 것이었다.

p110 티우다레익스는 대왕이라는 별호를 가질 운명이었고, 자신이 알았던 대로의 삶을 살았다. 수도 라벤나 같은 시범 도시들에서 그는 방어 성벽, 거대한 궁궐, 대성당, 영묘, 공공건설에 막대한 투자를 했다.

p120 여 해 동안 믿음직한 제국 행정 요원이었던 프로코피오스는 유스티니아누스의 전쟁과 대민 행정에서의 업적에 관한 역거운 기록 몇 가지를 썼다. 역사 이야기와 뻔뻔한 선전을 섞은 것들이었다.

p123 이들 법률가는 유스티니아누스가 즉위한 지 불과 20개월 만에 이 법률들을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으로 알려진 로마법의 단일 확정본으로 요약하고 편집하고 정리했다. 이 법전은 529년 4월 7일 반포되었으며, 제국의 모든 속주에 전달되어 그곳에서 자동적으로 다른 모든 법전을 대체했다.

p127 유스티니아누스는 그 후 어디서든 동성애자와 남색으로 드러난 자들을 거세한다는 포고를 내렸다. 많은 사람이 고통스럽게 죽었다. 말랄라스는 이렇게 썼다. “그때 이후로 동성애 욕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공포심이 생겨났다”

p143 539년(또는 540년)에 또 하나의 거대한 화산 분출이 있었다. 아마도 현대 엘살바도르의 일롱팡고였을 것이다. 이런 자연적인 폭발이 한데 합쳐져 수천억 세제곱미터의 돌을 토해내고 100만톤 이상의 유황과 재를 지구의 하늘로 뿜어 올렸다. 이로 인해 인류 역사상 가장 격심한 지구 환경 위기 가운데 하나가 발생했다.

p147 영광스러운 이 새 성당을 장식한 근사한 모자이크 가운데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은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와 황제 테오도라의 초상 차지가 되었다.

p164 7-8세기 이슬람 정복전쟁의 많은 부분이 그렇듯이, 다마스쿠스 포위전에 관한 당대(그리고 당대에 가까운 시기)의 기록은 뒤엉켜 있어 정리하기 어렵다. 그러나 약간의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랜 기다림 끝에 할리드 이븐알왈리드와 아라비아군이 다마스쿠스인의 저항을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줄여갔다는 것이다.

p167 632-642년 아라비아인의 시리아 정복은 그 시기의 가장 놀라운 성과 가운데 하나였다. 우선 그것은 동로마 제국의 동쪽 날개를 최종적으로 그리고 영구히 잘라버렸다. 700년 가까이 로마 영토였던 곳이었다. 동로마의 국경은 이제 소아시아 동쪽 끈의 아마누스산맥(현재의 누르산맥)으로 후퇴했다. 중세 시기에 이르면 그 너머로 진출하는 일이 거의 없다.

p169 다마스쿠스는 630년대에만 포위된 것이 아니었다. 그곳은 1120년대 2차 십자군 병사들에게 공격당했고, 1400년에 몽골족과 튀르크족 이슬람교도들에게 포위당했고, 1840년대와 1860년대에 종교적 대량 학살을 겪었고, 1920년대에 프랑스의 폭격을 당했고, 현재의 시리아 내전에서 여러 파벌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들 충돌 가운데 마지막 것에서는 야르무크 수용소로 알려진 다마스쿠스의 한 지역에서 악명 높은 전투가 벌어졌다.

p189 우마이야 왕조는 100년도 못 되는 기간 동안 권력을 행사했지만, 이 시기는 흥미로운 전화기였다. 이슬람 세계의 수도가 마디나에서 다마스쿠스로 옮겨 갔고, 이슬람교도 거주지의 경계가 서방 이방인이 사는 남프랑스까지 멀리 뻗쳤다.

p194 우마이야는 로마를 모방하려는 의욕이 강했기 때문에 660년대에서 710년대 사이에 반복적으로 옛 로마 국가를 대대적으로 탈취하려 했다. 그 결과로 서아시아와 남부 지중해 일대에서 광범위한 전쟁이 벌어졌고 100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p197 이 경험은 소아시아에서 가졌던 우마이야의 야심을 영원히 좌절시켰고, 이를 돌이켜 본 많은 역사가가 두 번째 포위전의 실패를 서방 역사의 전환점으로 보았다. 이슬람 군대의 첫 번째 발칸반도 확산이 멈춘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중세 말까지 기독교도의 손에 남았고, 이슬람교도는 15-16세기에 이르러서야 오스만의 정복으로 옛 로마 영토에 뛰어들어 동유럽에 진출했을 뿐이다

p205 우마이야 이슬람 사원이 이런 점에서 이국적이고 낯설어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또한 수백 년에 걸쳐 현지 양식을 흡수해 이슬람 특유의 요소와 융합한 여러 대형 이슬람 사원의 선구이기도 했다.

p225 왕릉 주위에 건설되어 몇 킬로미터 밖에서도 볼 수 있었다. 힐디릭 1세의 무덤은 프랑크인이 단순한 떠돌이 전사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 지배자들은 5세기 말에 이미 왕으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고, 사방으로 말을 타고 며칠 거리에 이르는 지역의 통치자로 자임했다

p228 743년 샤를 마르텔이 죽고 그의 아들들 및 친척들이 그 유산과 상속을 놓고 다투게 되자 불운한 힐디릭 3세가 테우데릭의 후계자로 점지되었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힐디릭 3세는 메로빙 왕조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751년, 그의 머리칼은 마르텔의 아들 고마 페팽의 명령에 따라 잘렸다. 그리고 이와 함께 왕조가 멸망했다

p232 스테파투스 교황의 방문 이듬해에 이 프랑크왕은 두 번 이탈리아로 진격했고, 두 번 모두 랑고바르드와 그 왕 아이스톨프를 매우 강력하게 응징했다. 역사 기록자 프레데가리우스는 이렇게 썼다. “그는 이탈리아땅을 사방으로 광범위하게 파괴하고 불태워 이 지역을 초토화했다. 랑고바르드의 모든 요새를 무너뜨리고 많은 금은보화와 수많은 장비, 그들의 모든 천막을 빼앗아 가졌다”

p237 샤를마뉴의 군대는 피레네산맥의 론세스바에스 고개에서 몰라 그 뒤를 추격한 적의 매복 공격을 받았다. 프랑크군은 기습에 허를 찔렸다. 그들의 보급품을 노획당했다. 그들의 후위는 포위당해 잘려 나가고 긴 시간의 싸움 끝에 살육당했다. “그 죽음에 대해서는 복수를 할 수 없었다”라고 아인하르트는 썼다. 공격자들이 어둠 속으로 재빨리 달아났기 때문이다. 이일은 굴욕으로 기억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샤를마뉴 군대의 사망자 가운데 흐로딜란트(프랑스어로 롤랑)라는 장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p262 869년에 이스트앵글리아왕 에드먼드가 노르드인의 손에 죽었다. 880년대가 되면 잉글랜드의 절반 정도가 스칸디나비아인의 통제하에 들어가거나 직접 지배를 받았다. 노르드인의 전진은 웨식스왕 앨프레드가 색슨쪽에서 용감하게 이끈 긴 투쟁 끝에야 저지되었다.

p270 멍청이 샤를에게 공식적으로 항복을 할 시간이 되자 흐롤프르는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다른 사람의 무르ㅠ 아래 무릎을 꿇지 않을 것이고, 누구의 발에도 키스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그는 부하 하나를 시켜 자기 대신 그일을 하게 했다. 뒤동은 이렇게 썼다. 그 전사는 “즉각 왕의 발을 붙잡아 그것을 자기 입까지 올린 뒤 거기에 키스를 했다. 그는 여전히 선 채였다. (그 때문에) 왕은 벌러덩 나자빠졌다. 그러자 커다란 웃음이 터졌고, 사람들은 크게 고함을 질렀다.”

p278 유의 대표 수도원으로 발전하는 것은 바로 클뤼니였다. 부르고뉴에 있었지만 프랑스 전역과 함께 잉글랜드, 이탈리아, 이베리아반도, 독일 서부가지 영향력을 확대했다. 10세기 중반 이후 이곳은 한창때 수백군댕의 부속 수도원을 거느린 국제 조직의 본부였다.

p291 오동의 조치가 지금은 가혹해 보이겠지만 그런 개혁의 필요성은 컸다. 카롤링 지배자들이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사람이) 수도원이 제대로 운영되어야 하고 베네데토 규칙이 준수되어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요구했지만, 지금 남아 있는 당시의 자료에는 수도원의 표준이 무너진 충격적인 사례가 많다. 수행자와 수녀가 조금 편해지려 하고 세상으로부터의 고립을 즐기려 한 때문이다.

p304 이상한 일이지만 클뤼뉘에 있는 모수도원은 이들에 필적할 만큼 훌륭한 유물을 기증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 수도원이 그러한 개혁된 수도원의 거대한 피라미드 꼭대기에 올라선 10-11세기에 클뤼니는 엄청나게 부유해졌다.

p315 어떤 의미에서 이것들이 모두 개인적인 것은 아니었다. 베르나르와 피에르는 경쟁자로서 충돌했지만 적으로서 충돌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양피지 위에서 번갈아 상대를 후벼 파고, 생색을 내고, 무시하고, 아는 체하고, 헐뜯고 노골적인 무례를 저질렀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서로를 존경했으며, 1150년에는 예수 탄생 기념일을 함게 보내기도 했다. 물론 극도로 금욕적인 클레르보가 아니라 안락한 클뤼니에서였다. 그들을 연결해 주는 것(수도원 생활, 명상, 규칙, 질서, 속세의 죄, 천국의 보상, 외교)이 그들을 갈라놓는 것보다 강했다.

p339 그는 완강하고 확고하게 전쟁터에서 자신의 맹렬한 공격 원칙을 고수했으며, 전장을 벗어나면 신사도를 세심하게 지켰다. 그리고 결국 그의 노력은 보상을 받았다. 1094년 6월 15일, 발렌시아가 함락되었다. 로드리고의 부하들은 도시를 열심히 털었고, 시민들로부터 많은 양의 금과 은을 빼앗아 차지했다.

p355 크레티엥 드트루아의 아서 로망스 수레의 기사 랜슬럿에서 비극적이고 용감한 기사 렌슬럿은 자신의 기사도적인 귀네비어 왕비 숭배를 갈 데까지 간 연애로 변질시킴으로써 아서왕을 배신했다. 반복되는 이 로망스의 주제는 바로 순결하고 품격 있는 사랑과 실제의 간통 및 불륜 사이에 선을 긋기가 이렇게 어렵다는 것이다.

p369 중세 분장놀이에 탐닉한 잉글랜드 왕은 헨리가 마지막이 아니었다. 런던탑에는 또한 찰스 1세와 제임스 2세를 위해 만들어진 멋지고 화려하게 장식된 갑옷도 전시되어 있다. 그들의 치세가 다사다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갑옷들은 의례에서 과시하는 외에는 중세의 갑주로서 실제로 사용되지 않았다.

p392 그들이 서로를 짖어발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십자군과 이슬람 교도가 서로 목을 베고 불태워 죽일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고 가까이 사귀고 교역하고 교류하던 시기와 장소가 매우 많았다. 이것은 십자군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쓰자는 것이 아니다. 그저 중세사에서 십자군의 중요성과 그것이 현대 세계에 남긴 유산에 대해 너무 흔히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이며 그 이상은 없다는 식으로 잘못 이해되고 있음을 말하려는 것일 뿐이다.

p402 라인란트의 새로운 세대 유대인이 매 맞고 강탈당하고 불구가 되고 눈이 멀고 살해되거나 쫓겨다니다가 결국 자살했다. 어처구니없는 규모의 역사 재연이었다.

p419 자기네가 십자군에 들인 경비를 돌려받은 베네치아인은 알렉산드리아나 그 밖의 어느 곳으로도 가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닻을 올리고 고국으로 돌아가 딴 돈을 계산했다. 그리스 역사 기록자 니케타스 코니아테스는 이 모든 것을 폭거라고 표현했다.

p421 카타리파는 서방 교회의 위계를 거부하고 자기네 스스로 독자적인 성직자를 택했으며, 성찬식과 세례, 기타 교회 의식을 거부함으로써 기독교 금욕주의에서 이단으로 넘어갔다. 이는 그들을 매우 용인할 수 없는 처지로 내몰았다. 특히 인노켄티우스처럼 교회 전반에 명령과 통제의 권위를 강제하려고 심하게 집착했던 교황에게는 말할 것도 없었다.

p428 프리드리히 호엔슈타우펜은 일생 동안 교황들과 끊임없이 다투었고, 놀랍게도 네 번이나 파문당했다. 사실 그가 1229년 성묘교회에서 예루살렘왕으로 즉위하던 그 순간에 그는 서류상 로마 교회와 교신이 금지된 상태였다.

p431 이것은 십자군이라는 말의 마지막 언급은 결코 아니었다. 십자군은 중세가 끝난 뒤에도 이어졌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극우, 신나치주의자, 이슬람 테러리스트가 좋아하는 표현법이다. 이 모두는 그것이 1000년 동안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관계를 규정했다는 생각(분명히 허점이 많은 생각이다)을 고수하고 있다. 그들은 옳지 않지만, 그 잘못이 그들의 독창인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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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 우리가 사랑한 노래들
배기성 지음 / 흠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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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기간 : 2024/01/09 -2024/01/09


지금이야 세계적인 가수들이 많지만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만의 가수들이었다..

그래도 너무 멋진 가수들이다. 

내가 어릴때 즐겨 듣고 부르던 노래들이 이젠 역사가 되어 책에 나온다. 

신기하다. 

암울한 시기였지만 대중가요는 힘없이 굴복하지 않았다... 

가수들도, 노래들도, 나도 참 열심히 그리고 잘 살았다.. 

좋다.. 


p23 가왕 조용필에 대해 세간에서 말하는 것이 있다. “조용필은 항상 가장 먼저 호명되고 가장 마지막에 나온다”

p39 1986년 무렵부터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에 자리 잡은 것이 있다. 다른 아닌 전형이다. 우리는 각자의 개성을 점차 잃어버리고 매스미디어에 나오는 삶에 우리 자신의 삶을 맞추기 시작했다.

p44 오직 시국 사건에만 비상한 능력을 발휘하던 대한민국 경찰은 이 박종운을 추적하던 중 그가 박종철의 집에서 하루 묵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박종철은 곧바로 체포되었고, 차가운 남영동의 대공분실에서 잔혹한 물고문을 당하다가 질식사했다.

p77 같은 시대 같은 문화권에서 같은 언어를 쓰고 살아도 어떤 이는 이들의 음악을 방탕하다며 배척했고 어떤 이들은 순순하고 열정적이라고 느끼며 열광했다

p81 이는 정확히 유신 철권통치와 제5공화국이라는 희대의 독재정권을 포괄하는 기간인데, 이 시기 대한민국은 중앙정보부와 대통령경호실 그리고 대통령비서실 이 세 기관에 의해 강압적이고 획일적으로 다스려졌다.

p149 신중현은 1960년대 펄 시스터즈를 시작으로 1969년 김추자, 1971년 김정미 두 섹시스타를 길러내 큰 성공을 거둔다

p165 주기철 목사는 전국의 수많은 종교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용기를 내서 신사참배 거부 의사를 밝히는 이들이 많아졌고, 기독교인을 예수쟁이라고 일컫는 기자들도 줄었다. 일제가 무력으로 기독교를 탄압하려 했던 것이 도리어 이 땅에 기독교가 보편 종교의 하나로 자리하는 데 결정적 계기로 작용한 것이다.

p178 1966년 발표된 이금희의 키다리 미스터 김이라는 노래다. 이런 노래가 어째서 금지곡 신세가 되었을까. 이 노래가 금지곡이 된 이유는 놀랍게도 단신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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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무해한 이슬람 이야기 - 천의 얼굴을 가진 이슬람 문명의 위대한 모험
황의현 지음 / 씨아이알(CIR)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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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체로 무해한 이슬람 이야기

 : 황의현

 : 씨아이알

읽은기간 : 2024/01/03 -2024/01/08


책의 후기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대체로 무해한... 이라는 말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지구를 소개하는 말이다.

그런데 제목에 약간은 속은 느낌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이슬람은 테러를 자행하고, 여성을 억압하는 무도한 종교가 아니라 일반적인 다른 종교와 다르지 않다라는 의미로 쓴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은 이슬람에 대해서 어느정도는 아는 사람을 대상으로 쓴 느낌이다. 

이슬람의 역사와 경전이 후대에 씌여지면서 왜곡되고 윤색된 부분이 많다라는 수정주의의 입장에서 쓰여진 책이다.

그러다보니 세계사개론에서 이슬람에 대해서 좀 읽어본 나같은 초보자에게는 기본도 모르는데 응용을 배우는 느낌이었다. 

새롭게 배운 내용들이 많은데-아라비안 나이트라든가 그림이나 조각에 대한 이슬람 사상등- 이게 이슬람역사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내용인지, 수정주의의 주장인지가 좀 헷갈리기는 하다.

그만큼 내가 이슬람에 대해서는 모르는게 많다는 뜻이겠지.

세계사에 큰 획을 긋고 지금도 많은 이슈를 몰고다니는 이슬람에 대해서 이렇게 무지한 것도 좀 부끄럽다.. 

조금 더 관심을 갖고 공부해봐야할 것 같다..

재미있게 잘 읽었다. 


p4 결국 622년, 무함마드와 추종자들은 메카 유력자들의 박해를 이기지 못하고 메카 인근의 야스립이라는 곳으로 피했다. 히즈라, 즉 이주라고 불린 이 사건으로 역사상 최초의 무슬림 공동체가 야스립에 만들어졌다. 야스립은 예언자의 도시, 줄여서 메디나라고 불리가 된다.

p9 수정주의 해석에 관한 논의를 소개하는 것은 이슬람이 진리인지 거짓인지 평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세계의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이슬람도 다양한 문화가 활발하게 교류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던 환경에서 나타났으며, 현재 모습에 이르기까지 오랜 변화르 ㄹ거쳐 왔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p27 이슬람의 기원에 관해 기존 통념으로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쿠란 구절을 근거로 수정주의 학자들은 쿠란이 아라비아의 히자즈가 아닌 다른 곳에서 형성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대표적으로는 존 완스브로는 쿠란이 메소포타미아, 즉 오늘날의 이라크 지역에서 완성되었다고 주장한다.

p33 오늘날 많은 학자는 무슬림 기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완스브로의 문제의식에는 공감한다. 그러나 쿠란의 형성과 이슬람의 기원에 관한 완스브로의 설명 역시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정설과는 거리가 멀다.

p35 쿠란을 읽는 방식은 알핫자즈의 정본 외에도 여러 개가 존재했으며, 9세기가 되어서야 이븐 무자히드라는 인물에 의해 7개의 정통 독법이 확립된다. 오늘날 정본으로 쓰이는 쿠란은 이 7개 독법 중 하나를 따라 1924년 이집트에서 만들어진 판본이다.

p85 이븐 할둔에 따르면 우마르가 쿠란 이외의 다른 책은 필요하지 않다고 선언하며 파괴한 것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아니라 페르시아의 도서관이었다. 우마르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의 도서관도 똑같은 이유로 파괴한 것일까?

p133 여 칼리프가 권력을 되찾고 노예 군대를 견제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결국 칼리프의 권력은 936년 칼리프 알라디가 투르크 노예 출신의 장군인 무함마드 이븐 라이크에게 전권을 맡길 정도로 추락했다

p137 중세 이슬람권에서 대중이 존경을 바치고 따르던 대상은 권력을 가진 재상이나 장군이 아니라 권력과 거리를 두고 경건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쿠란과 무함마드의 전승에 해박하고 올바른 무슬림이 따라야 하는 규범이 무엇인지 제시하는 울라마, 신과의 하나됨을 추구하는 신비주의 신앙을 가츠리는 스승들은 대중 사이에서 누리는 인기, 존경, 영향력을 바탕으로 통치자와 대중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p152 국가의 지원이 법학과 종교학을 가르치는 마드라사에 집중되고 울라마가 통치자와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에서 외부의 지원을 받지도 못하고 후학을 양성할 제도적 기반도 없던 자연과학이 여전히 활력을 유지했다면 그것이 더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p172 무슬림의 지배는 분명히 기독교도에게 축복이 아니었지만, 비무슬림에 대한 탄압이 정점에 이르렀던 맘루크 시대에도 기독교도를 완전히 말살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이슬람을 순수한 관용과 평화의 종교로 이상화하거나 다른 종교와 끝없이 충돌해온 폭력적인 종교로 비난하는 단편적인 관점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무슬림과 비무슬림의 관계가 가진 다면적 성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p181 투르크인은 이슬람권에 종말을 가져오지 않았다. 하지만 투르크인으로 대표되는 초원의 유목민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두려움은 여전히 남아있었던 것 같다. 정주 지역의 무슬림이 유목민에 대한 품은 공포와 두려움은 몽골인이 저지른 무시무시한 학살과 파괴로 현실이 되었고, 이와 함께 유목민을 종말을 가져올 야만인, 파멸을 알리는 전조로 보던 전통 또한 다시 살아났다.

p186 몽골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지역에서는 칭기스칸과 몽골인은 여전히 이슬람과 무슬림의 적, 파괴자이자 학살자, 곡과 마곡과 같은 사악한 존재였다. 오늘날 일반적인 시각, 즐 이슬람권 문명이 쇠퇴하고 중동이 퇴보한 책임은 모두 몽골인에게 있다는 시각은 몽골 지배를 받지 않았던 무슬림의 해석과 관점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러나 몽골의 지배를 받는 지역에서는 칭기스칸과 몽골인을 구원자이자 이슬람의 보호자로 바라보는 완전히 다른 기억과 해석방식이 존재했다.

p191 몽골 지배 아래에서 중동의 수학과 과학적 성취가 중국으로 전파되었고 중국의 회화가 페르시 회화에 영향을 미쳤다. 몽골인들의 직접적 지배가 미치지 ㅇ낳은 예멘에서도 아랍어, 페르시아어, 투르크어, 몽골어, 그리스어, 아르메니아어 6개 언어로 된 백과사전이 편찬되기도 했다.

p212 이스마일파는 쿠란에서 외면적으로 드러난 가르침과 오직 소수의 이맘에게만 허용된 쿠란 속에 숨겨진 진정한 진리를 열두 이맘파보다 엄격하게 구분한다. 모두에게 열린 율법과 규범인 샤리아는 표면적인 계시일 뿐 참된 진리는 오직 이맘만이 할 수 있는 신비한 해석을 통해 드러날 수 있다.

p225 맘루크 왕조와 일칸국의 전쟁은 이제 무슬림과 무슬림 사이의 전쟁, 원칙적으로는 있어서는 안되는 전쟁이 되어버린 것이다. 가잔은 또한 이슬람으로 개종했을 뿐만 아니라 이슬람의 군주를 자처하며 맘루크 술탄의 종교적 정통성에 도전했고, 심지어는 맘루크 통치자들이 이슬람법을 어겼다고 주장하며 시리아를 침공하기도 했다.

p227 쉬아파를 상대로 이븐 바투타가 보여주는 강경한 태도는 이븐 바투타보다 앞선 시대의 여행가인 이븐 주바이르가 쉬아파에 별다른 적의나 반감을 드러내지 않는 것과 대비된다. 이븐 주바이르는 그의 여행기에 쉬아파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도 않으며 이븐 바투타와 달리 모든 쉬아파를 라피다와 같은 비하 표현으로도 부르지 않는다.

p230 종파 차이는 그 자체만으로 갈등을 만드러애지 않는다. 차이는 외부의 위협, 정세 불안정, 권력 관계의 역전과 같이 종파 간 관계를 악화시키는 변화가 나타날 때 비로소 갈등의 원인이 된다.

p239 몽골의 바그다드 함락과 압바스 칼리프조의 멸망에 관해 이처럼 서로 다른 기록은 중세 이슬람권에서 역사 기록과 문학 사이의 경계가 흐릿했음을 보여준다. 중세 이슬람권의 역사가들은 과거 사실의 객관적 전달보다는 기록자 개인이 지닌 특정한 관점에 따라 특정한 목적과 의미를 전달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p265 우마이야 시대만 하더라도 항상 전염병이 유행하던 시리아에서는 압바스 칼리프조가 세워진 이후에는 10세기까지 전염병 유행이 없었다고 한다. 압바스 가문은 이러한 우연의 일치를 선전전에 활용했다. 다마스쿠스에 입성한 뒤 압바스 가문의 한 장군은 “다마스쿠스 시민은 신에게 감사해야 한다. 압바스 가문이 집권한 이후 전염병이 사라졌기 때문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p270 이집트와 시리아의 흑사병 유행은 일시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후 흑사병은 이 지역의 풍토병으로 자리르 ㄹ잡아 시도 때도 없이 유행했다. 돌스에 따르면 1347년부터 1517년까지 이집트에서는 총 28번, 즉 5년에 한 번 꼴로 흑사병 유행이 있었다.

p273 무슬림은 흑사병 유행 상황에서도 이슬람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 즉 올바른 의례와 규범을 지키고 공동체의 결속을 유지하는 것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p276 영혼이 기쁨, 고요, 휴식, 희망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다. 유쾌하고 매력적인 벗과 함께 해야 한다. 물론 가장 좋은 벗은 쿠란이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관심을 도릴 수 있는 역사책이나 재미있는 이야기책, 사랑 이야기도 좋다. 슬픈 이야기와 흥분은 피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은 신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p282 천주교도와 정교회 신도가 집에 성상과 성화를 모신다면 무슬림은 신의 이름과 쿠란 구절 또는 무함마드와 그의 교우들의 모습을 묘사한 글인 힐야를 벽에 걸어둔다

p292 크레스웰은 질문을 던진다. 시각 예술에 관한 금기는 실제 무함마드의 명령이 아니라 압바스 시대 무슬림이 그림과 조각에 대해 가졌던 부정적 시각을 반영한 결과일 수도 있지 않을까? 달리 말하자면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그림과 조각을 금기시하는 이슬람은 사실 무함마드의 가르침이 아닌 압바스 시대에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p303 이븐 알나딤과 역사학자 알마스우디 오묻 아라비안나이트가 원래 고대 페르시아의 왕과 영웅들을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전한다는 점 역시 아라비안 나이트가 원래 페르시아 지역에서 만들어졌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아라비안 나이트보다는 페르시안 나이트에 가까운 셈이다

p307 19세기 이후 발견된 아랍어 원본들이 진짜 원본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사실 이 원본들은 갈랑의 프랑스어 번역본을 다시 아랍어로 번역한 결과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단 한 권도 발견되지 않은 아라비안나이트의 아랍어판이 18세기 이후 갑자기 우후죽순 등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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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 - 행운, 그리고 실력주의라는 신화
로버트 H. 프랭크 지음, 정태영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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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

 : 로버트 H 프랭크

 : 글항아리

읽은기간 : 2023/12/24 -2024/01/02


행운이 얼마나 큰 영향력이 있는지 알려주는 책

모든 시장에서 다 그렇다는건 아니고, 경쟁이 치열하면서 승자독식시장에서는 그렇다는 것.

그런데 요즘 많은 시장이 이렇다..

특히 네트워크 효과로 인해 이런 작은 행운이 전혀 다른 승자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인생은 불공평하다'같은 말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내가 승자가 됐다고 해서 오만할 이유가 없고, 비록 패자가 된다해도 그 행운이 나를 찾아올 수 있으니 잘 준비해야겠다는 교훈을 얻는다.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사람들을 계속 보는 것이 좋지는 않지만, 그 행운이 또 누군가의 손을 들어줄 것을 믿고 오늘도 열심히 살아본다. 

나에게 그 행운이 올 날을 기다리며..


p13 2001년, 이 책을 되돌아보는 칼럼에서 그는 “직장에서 사람들을 능력에 따라 채용하는 것은 타당하지만, 일단 이들이 어떤 일에 유능하다고 인식되고 나면 다른 사람이 들어올 여지가 없는 새로운 사회 계층으로 굳어지는데, 이런 상황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p25 지금까지도 하늘이 도왔다는 식으로 넘겨버리기엔 뭔가 설명이 부족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날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만큼 운이 좋았기 대문에 지금 이 순간 살아 숨 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p34 경제학자 브란코 밀라노비치가 예상한 바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개인 간에 나타나는 소득 격차의 온갖 문제는 그 사람이 살고 있는 국가와 그 국가 내부의 소득 분매, 이 두 요인만으로 거의 절반을 설명할 수 있다. 언젠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말한 것처럼, “기회가 없다면 능력이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p38 승자 독식 시장이 계속 뻗어가면서 행운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이들 시장에서 소수의 승자에게 돌아가는 막대한 보상은 결국 엄청나게 많은 경쟁자를 끌어들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경쟁자가 많아질수록 행운이라는 요인은 더욱 중요해진다

p57 와츠가 상식의 배반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모나리자가 X, Y, Z의 속성을 모두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작품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말은 모나리자가 유명한 이유가 다른 무엇보다 가장 모나리자답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p67 결코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일련의 우연한 사건들이 없었다면(애초에 코넬대학에 채용되지 않았다면), 네드 그램리치가 초빙교수로 오지 않았다면, 초기 논문들이 나중에 그랬던 것처럼 학술지에 실리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면 또는 편집자들이 보통 때처럼 느긋하게 시간을 쓰면서 마음 내킬 때 내 논문을 검토했다면 나는 지난 수십 년간 수많은 학생과 동료를 벗 삼아 지적인 자극을 주고받으며 사귀는 즐거움을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p90 네트워크 효과는 때로 한 회사의 사소한 강점으로 하여금 경쟁 회사의 뛰어난 제품에 패배의 아픔을 안기도록 한다.

p95 수많은 음악가는 (상당수가 최고의 음악가와 비슷한 수준인데도) 초등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듯이 빠듯하게 살아가는 반면, 극소수의 음악가는 일곱 자리나 되는 금액이 적힌 녹음 계약서에 서명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p98 여러 웹사트나 유튜브에 올라온 노래와 이야기를 거의 모든 사람이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세상이다. 이런 채널들은 미래의 슈퍼스타를 만들어내는 새로운 마이너리그가 되었다. 그러나 아무나 무료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이처럼 다양하고 창의적인 시도를 아우르는 시장은 예전보다 훨씬 더 실력이 좋은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다

p101 1980년까지만 해도 노동자의 평균 임금보다 42배 많은 보수를 받던 미국 거대 기업의 CEO들은 이제 400배를 받는다. 사소해 보이는 우연한 요소가 결과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를 초래하는 현상이 다시 한번 확인되는 대목이다.

p118 내가 믿는 진짜 메시지는 이보다 훨씬 단순하다. 여러분도 상당히 오랜 세월을 살다보면 도무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어떤 사건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p123 전체 성과에서 행운이 매우 작은 부분만 좌우한다고 해도, 경쟁자가 많은 상황이라며, 가장 유능한 사람이 승리하는 경우는 드물고,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 승리하는 게 보통이다

p129 저는 일주일 내내 매일 밤 숫자 7이 나오는 꿈을 꿨습니다. 뭐, 7이 일곱 번 나왔으니 7 곱하기 7은 48이죠. 복권에 당첨된 이 사람은 전통적인 경제 모델에 등장하는 이성적이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사람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p134 사람들은 실패를 설명할 때는 운이 나빴다는 사실을 기꺼이 그리고 재빨리 받아들이지만, 성공을 설명할 때는 행운의 영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p137 그는 부학장이라는 직책 탓에 동료들보다 덜 행복해졌지만 더 부유해졌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생존을 위한 다윈주의적 투쟁에서는 얼마나 행복한가보다 무엇을 가졌느냐가 더 중요하다고도 했다. 마노브 자신이 생각하는 그 경험의 교훈은 순진한 낙관주의가 필요한 때도 있다는 것이다

p140 거의 모든 분야에서 그렇다. 고된 훈련이란 여러분이 아직 터득하지 못한 능력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시행착오를 수없이 반복한다는 의미다.

p147 우리가 성공에 있어서 자신의 기여도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해서, 자신이 이룬 성취를 자랑스럽게 여기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설령 커다란 행운처럼 외적인 요소가 성공의 결정적인 밑거름이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거둔 성공에 대해 느끼는 자부심이야말로 또 다른 성공을 위해 가일층 노력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되기 때문이다.

p161 만약 여러분 혼자서 소득 감소를 경험하게 된다면, 원하는 것을 사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소득이 일제히 감소한다면, 상대적인 구매력은 조금도 영향을 맏지 않는다. 희소가치가 높은 재화의 구매자를 결정하는 것은 상대적인 구매력이다.

p168 실제로 대개 감세가 이뤄지는 곳은 감세가 정말 이뤄져야 하는 곳이 아니라 감세로 인해 손해를 보는 사람들이 가장 적게 반발하는 곳이다. 그리하여 화살은 우리 미래를 위한 투자로 향하게 된다. 이로 인해서 피해를 입는 국민은, 안타깝지만 조금도 저항할 수가 없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국민이기 때문이다.

p193 오늘날 미국의 수많은 중산층 아이들은 생일 파티에 전문 광대나 마술사가 출연하지 않으면 실망한다. 부모에게는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p199 누진소비세는 더 나은 기간시설을 위해 투자할 추가적인 세수를 창출할 수 있다. 현재의 세금 체계 아래서는 부자들이 페라리를 타고 노면이 엉망이 도로를 달려야 한다. 페라리를 타고 구멍이 푹푹 팬 도로를 달리는 것보다 포르셰를 타고 잘 정비된 도로를 달리는 것이 훨씬 더 만족스럽다

p208 봉투가 두툼한 이유는 프리드먼이 1943년 아메리칸 이코노믹 리뷰에 발표한 자기 논문의 사본을 동봉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논문에서 당시 제2차 세계대전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 재원을 모으는 최선의 방법은 누진소비세라고 주장했다.

p215 뛰어난 재능과 열심히 일하겠다는 마음가짐이야말로 팀원으로서 지녀야 하는 긍정적 특성이다. 이는 엘리트 팀의 구성원 대부분이 보유한 특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성공적인 팀워크란 또한 자신의 동료를 신뢰하는 능력과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동료가 자기 이익보다 팀의 이익을 우선시할 것이라고 믿는 능력을 전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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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역사 - 신의 탄생과 정신의 모험
카렌 암스트롱 지음, 배국원 외 옮김 / 교양인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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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의 역사

 : 카렌 암스트롱

 : 교양인

읽은기간 : 2023/11/23 -2023/12/28


신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고, 신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역사에서 신의 개념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분석한 책이다.

유명한 책이라고 하더니 꼼꼼하게 역사를 추적해가며 썼다.

신이 없다고 생각하고 책이 쓰여 있어서 종교인이 읽으면 좀 반감이 갈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시대별로 신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알기에 이만한 책이 없을 것 같다. 

작가의 믿음과 신념의 결정체인 책을 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무조건 거부하기보다는 새로운 시각을 볼 수 있어서 좋다...

여러번 읽으면서 공부해야 할 책이다. 


p47 성서는 우리가 고대 이스라엘 민족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주로 모세의 신 야훼에 대한 충성심으로 결속한 여러 다양한 종족 집단의 연합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말해준다.

p67 서는 이스라엘인들이 계약에 충실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전시, 즉 야훼의 능숙한 군사적 보호가 필요한 때에는 계약을 기억했으나 평시에는 옛 관습을 좇아 바알, 아나트, 아세라를 숭배했다.

p74 우리가 흔히 힌두교라고 부르는 종교는 체계를 피하는 데다 한 가지 해석만 적절하다는 배타적 입장을 거부하기에 일반화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우파니샤드는 신을 초월하지만 만물 안에 밀접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독특한 신성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p77 신들과 마찬가지로 이성은 부정되기보다 초월된다. 브라흐만이나 아트만의 경험은 음악이나 시의 경우처럼 이성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예술작품은 창작하고 감상하는 데 지성을 필요로 하지만 순전히 논리적 능력이나 두뇌의 기능을 넘어서는 경험을 제공한다. 이는 신의 역사에 변함없는 주제가 될 것이다.

p97 예언자는 주로 신의 임재를 대신하는 사람이지만 이 초월적 경험은 불교에서처럼 앎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어진다. 예언자는 신비로운 깨달음이 아니라 복종으로 특징지어질 것이었다.

p104 그 계약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며, 따라서 모두가 온당하게 취급되어야 함을 의미했다. 신은 단순히 이스라엘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 정의를 위해 역사에 개입한 것이었다.

p128 야훼는 유일신이 되었다. 그의 주장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늘 그렇듯 새로운 신학이 성공하는 이유는 합리적으로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절망에 빠지는 것을 막고 희망을 고취하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p139 한 유대인이 지혜서를 써서 동료 유대인들에게 주변의 유혹적인 그리스 문화에 저항하고 그들의 전통에 충실하라고 경고했다. 참된 지혜를 구성하는 것은 그리스 철학이 아니라 야훼를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p147 탄나임은 구전 율법-모세의 율법을 시대에 맞춰 새롭게 해석해 온 것이다-을 성문화한 미슈나를 편찬했다. 이후 아모라임으로 불린 학자들이 미슈나에 주석을 달기 시작ㅎㅆ고, 이를 집대성해 탈무드를 만들었다.

p154 랍비들은 신은 인간이 고통받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인간의 육체는 신의 모습이기 때문에 존중받고 보호받아야 했다. 신이 인간의 기쁨을 위해 선물한 술이나 성관계 등 즐거움을 기피하는 것은 죄가 될 수도 있었다.

p180 로마인의 에토스는 보수적이어서 가부장제 전통과 고대 관습의 권위를 존중했다. 진보란 옛 황금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이지, 미래를 향해 겁 없이 행진하는 것을 뜻하지 않았다.

p215 아타나시우스는 자신을 지지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압력 덕분에 공의회 참석 덕분에 공의회 참석자들의 지지를 얻는데 성공했고, 니케아 신조가 그의 신학적 입장에 근거해 작성되고 공표되었다.

p225 성부, 성자, 성령은 신이 자신을 드러내는 활동(에네르게이아)에 대해 말하기 위해 “우리 인간이 쓰는 용어”일 뿐이다. 하지만 성자, 성부, 성령이라는 용어는 불가해한 실재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이미지로 옮겨준다는 점에서 상징으로서 가치가 있었다. 인간은 신을 초월자(접근할 수 없는 빛 속에 숨은 성부), 창조자(로고스), 내재자(성령)로 경험해 왔다

p227 그리스 정교도와 러시아 정교드들은 삼위일체를 관조를 통한 종교적 영감의 경험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많은 서방 기독교인은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데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다. 가파도키아 신학자들이 삼위일체의 케리그마적 속성이라고 부른 것만을 고려했기 때문일 수 있다.

p238 아우구스티누스는 서구인들에게 곤혹스러운 유산을 남겼다. 인간성의 만성적 결함을 가르치는 종교는 사람들을 자기 소외에 빠뜨릴 수 있다. 그의 원죄론에서 비롯된 인간 소외는 섹슈얼리티의 폄하, 특히 여성에 대한 폄하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본래 기독교는 여성을 긍정적으로 생각한 종교였으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대부터 서구 문화에 여성혐오의 경향이 만연하기 시작했다.

p266 아랍어의 특별한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없는 서구인에게 쿠란은 반복적이고 지루해 보인다. 쿠란은 같은 주제를 몇 번이고 반복하는 것 같다. 그러나 쿠란은 개인이 정독하는 것이 아니라 전례에서 암송을 위한 것이다.

p271 쿠란은 신의 징표와 메시지를 해독하는 지성이 필요함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무슬림은 이성을 버릴 것이 아니라 세상을 주의 깊게 그리고 호기심을 푸고 바라봐야 한다. 이러한 태도 덕분에 훗날 무슬림은 자연과학의 건강한 전통을 세울 수 있엇고, 기독교와 달리 자연과학이 종교를 위협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p289 무슬림은 이슬람 시대의 시작을 무함마드가 탄생한 해나 그가 계시-결국 새로운 것은 없었다-를 처음 받은 해가 아니라 이슬람을 정치적 현실로 만듦으로써 신의 계획을 역사에 구현하기 시작한 히즈라의 해로 본다.

p295 기독교인이 무슬림의 정치에 대한 관심을 이상하게 여긴다면, 난해한 신학적 논쟁에 대한 자신들의 열정이 유대인이나 무슬림에게 똑같이 이상하게 보인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p302 우리가 신을 이해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신이 될 수 없으며 단지 인간의 투영일 뿐이다. 신은 선과 악에 대한 인간의 관념을 초월하며 인간의 기준과 기대에 얽매이지 않는다.

p325 그리스 정교도에게 타보르산의 그리스도가 신화된 인간을 나타낸 것처럼, 붓다가 모든 인류가 이룰 수 있는 깨달음을 구현한 것처럼, 이맘의 인간 본성도 그가 신을 완전히 받아들임으로써 변모되었다.

p343 어떤 사람들은 이성보다 더 높은 힘을 지니는데, 알-가잘리는 이를 예언자적 정신이라고 불렀다. 이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예언자적 정신이 존재함을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

p363 안셀무스는 언젠가 신조가 이해되기를 바라며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자고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주장은 사실 이렇게 번역되어야 한다 “이해할 수 있기 위해 나 자신을 헌신한다”

p368 그러므로 인간이 신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은, 신이 인간 이해의 영역을 초월함을 깨닫고 인간이 신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아퀴나스가 신학대전의 마지막 문장을 구술할 때 갑자기 탄식하며 머리를 양손으로 감쌌다는 이야기가 있다. 필경사가 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는 자신이 본 것에 비하면 자신이 쓴 모든 것이 지푸라기라고 말했다고 한다

p401 이 글은 라비아의 유명한 기도문과 유사했다. “오 신이시여, 만일 제가 지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당신을 섬긴다면 차라리 저를 지옥 불에 태워 없애소서. 만일 제가 낙원에 대한 욕심 때문에 당신을 섬긴다면 저를 낙원에서 쫓아내소서. 그러나 만일 제가 오직 당신의 영광을 위해 당신을 섬긴다면 당신의 영원한 아름다움의 은총을 제게서 거두어 마소서”

p411 신비주의는 유일신 종교에 더 고요한 영성을 도입하고 있었다. 외부의 실제와 충돌하는 대신 신비주의자 내면에서 빛이 나왔다. 사실의 전달은 없었다. 그보다 인간의 상상력을 발휘해 ‘순수한 이미지의 세계’인 알람 알-미탈을 도입함으로써 사람들이 신에게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p417 이븐 알-아라비도 수피즘을 신봉하는 이슬람 신비주의자들과 유사하게 인간의 상상력에 중심을 둔 고도의 개인적 영성 수행에서 출발해 초인격적 신 이해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는 신 이해와 관련해 여성의 이미지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남달랐다

p452 에스파탸 무슬림은 오랜 세월 유랑 생활을 한 유대인들은 그들의 몰락을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 유대인에게 닥친 가장 큰 재앙으로 여기며 슬퍼했다. 에스파냐 유대인의 추방 경험은 그 어느 때보다 유대 종교의식에 깊이 자리 잡았고, 새로운 형태의 카발라와 새로운 신 개념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p455 15세기와 16세기에 세 개의 새로운 무슬림 제국이 창건되었다. 소아시아와 동유럽의 오스만 튀르크, 이란의 사파비, 인도의 무굴. 이러한 새로운 모험은 이슬람 정신이 결코 죽어 간 것이 아니라 재앙과 붕괴 이후에도 무슬림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영감을 불어넣었음을 보여준다.

p460 아크바르는 자신이 만든 수피 교단인 신성한 유일신교에 헌신했는데, 올바르게 인도된 종교라면 어느 종교에서든 유일신이 자신을 드러낸다는 신념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p478 1484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는 교서를 내렸다. 이는 16세기와 17세기 유럽 전역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마녀사냥 광풍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공동체를 똑같이 괴롭힌 마녀사냥은 서구 영성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냈다. 이 끔찍한 박해 속에서 수천 명의 남성과 여성이 놀라운 죄를 자백할 때까지 잔혹하게 고문받았다.

p491 성서를 상징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 시작하면 그 신을 이해하기는 불가능해진다.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말 그대로 책임이 있는 신을 상상하는 것은 모순을 초래한다. 성서의 신은 초월적 실재의 상징이 되기를 멈추고 잔혹하고 독재적인 폭군이 된다. 에정설은 그러한 인격화된 신의 한계를 드러낸다

p497 16세기와 17세기에 무신론자라는 말은 논박을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무정부주의자나 공산주의자로 부른 것과 거의 마찬가지로 어떤 적이든 무신론자로 부르는 것이 가능했다

p500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카톨릭 교회가 지동설을 비난한 것은 창조자 신에 대한 믿음을 위협해서가 아니라 성서에 나오는 신의 말씀과 모순되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p514 본질적으로 비주의적인 이 체험은 파스칼의 신이 이 장에서 고찰한 다른 과학자나 철학자의 신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신은 철학자의 신이 아니라 계시의 신이었다.

p517 기독교인은 삶의 무의미와 절망에 직면하여 신앙을 키우고 신에 관한 감각을 쌓음으로써 인생의 의미를 재발견할 것이다. 파스칼에게 신은 살아 움직이는 실체였으며, 신앙은 지적 확실성의 문제가 아니라 막연한 어둠의 심연 속으로 뛰어드는 용기 있는 결단이자 윤리 의식을 일깨우는 체험이었다.

p536 스피노자는 유럽의 어떤 종교 공동체에도 속하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서구에서 하나의 추세가 될 자율적이고 비종교적인 이념의 원형이었다. 20세기 초 많은 사람들이 스피노자를 근대성의 영웅으로 존경했는데 그의 상징적 추방과 소외, 비종교적인 구원을 위한 탐색에 친밀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p544 웨슬리가 전한 신앙은 거듭남의 체험이 핵심이었다. 그는 이 체험을 끊임없이 인간 영혼 속에 살아 숨 쉬는 신을 경험하는 것이며, 넘치는 감사의 마음으로 신을 사랑하고 온유와 인내의 마음으로 신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p550 조지 폭스는 퀘이커교도에게 침묵 속에서 신을 기다릴 것을 가르쳤는데, 그것은 동방 정교회의 헤시카즘 또는 중세 철학자의 부정의 길을 연상시켰다. 삼위일체 신이라는 오래된 개념이 무너지고 있었다.

p587 내가 비록 무신론자들과 잘 지내지만, 나는 신을 믿습니다. 독미나리를 파슬리로 착각하는 건 매우 중요한 문제지만, 신을 믿거나 안 믿거나 하는 문제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디드로는 본질적인 문제를 매우 정확히 짚었다. 신은 개인의 주관적 체험 속에서만 존재한다.

p592 디드로, 돌바크, 라플라스는 그러한 시도로부터 고개를 돌렸고, 극단적인 신비주의자들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저편 어딘가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로부터 머지않아 다른 과학자들과 철학가들이 의기양양하게 신의 죽음을 선언하게 된다.

p608 서방 기독교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인간의 죄와 악, 투쟁과 고통을 강조했는데, 이런 경향은 가령 동방 정교회 신학에서는 낯선 것이었다. 좀 더 낙관적인 인간관을 지녔던 포이어바흐와 오귀스트 콩트 같은 철학자들이 과거 기독교인들에게서 자신감을 빼앗아 갔던 이 같은 신을 제거하고 싶어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p613 아들러에게 신은 (인간이 추구하는) 탁월성을 보여주는 훌륭하고 효과적인 상징이었다. 카를 융의 신은 각 개인이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심리적 진실이었다는 점에서 신비주의자의 신과 닮았다

p620 프로이트는 현명하게도 어떤 식으로든 종교를 강제적으로 억압하는 것은 파괴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섹슈얼리티와 마찬가지로 종교도 삶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끼치는 인간의 욕구에 해당한다. 종교에 대한 억압은 극심한 성적 억압 못지않게 폭발적이고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p645 미국의 종교 사회학자 피터 버거의 역사 해석에 대한 지적은 매우 의미심장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는 우리가 과거의 역사를 당대와 비교할 때 흔히 이중 기준을 지니게 된다고 지적한다. 인간은 역사적 과정을 이해할 때, 과거는 철저히 상대화해 분석하지만 현재 상황은 절대화해 분석 대상에서 제외하고는 한다.

p659 순례자는 카바에 도착해 신전이 비어 있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는다 “이곳은 너의 종착지가 아니다. 카바는 길을 잃지 않도록 방향을 제시해주는 이정표다” 카바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었으며 신에 대한 모든 인간적 표현을 초월하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줬다.

p674 신비주의자들은 신을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객관적 사실로 보는 대신 존재의 바탕에서 신비롭게 경험되는 주관적 체험이라고 주장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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