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역사의 보물창고 백제왕도 공주 - 웅진백제 발굴 이야기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엮음 / 메디치미디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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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백제왕도 공주

 : 충청남도역사문화원

 : 북스고

 : 2021/08/16 - 2021/08/19


백제는 책만 좀 읽었지 사실 잘 모른다. 

일본과 중국과 교류가 활발했고, 나름 강성했지만 나당 연합군의 공격에 결국 무너진 비운의 제국이라는 것 정도가 알고 있는 백제역사의 전부다.

공주와 부여가 백제의 수도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서울이 백제의 수도로 제일 오래된 거 아닐까?

공주야 약 60여년 정도 수도로 있다가 부여로 옮겼지만 서울은 500년 이상을 수도로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서울의 백제유적이라고 해봐야 몽촌토성, 풍납토성이 전부고 대부분의 유물과 유적은 공주와 부여에 있다.

그것도 도굴된 상태로...

이 책을 보면 공주의 백제유적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말만 들었던 능산리 고분군에 대해서도 많이 배웠다. 

공산성에 대해서도 많이 배웠다.

공주가 이렇게 대단한 곳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별 생각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대어를 낚은 기분이다.

재미있다. 


4% 송산리 고분군의 수로 정비 작업을 하다 우연히 발견한 무령왕릉의 발굴은 한국 고고학계의 일대 사건이라 할 만하다

11% 장선리 유적에서는 이렇듯 개미굴 같은 구덩이 유구가 무려 39기나 한꺼번에 발견되었다

15% 고고학계에서는 흔히 수촌리 유적 발굴을 무령왕릉 발견 이후 최대의 성과라고 일컫는다. 그도 그럴 것이 무덤을 하나하나 열 때마다 이전까지 좀처럼 보기 어려웠던, 백제 최고 지배층의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화려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28% 웅진은 차령산맥과 금강의 이중 방어선으로 보호받으며, 왕도 외곽을 둘러싼 능선을 따라 적들의 침입에 대응할 수 있는 방어 기능을 갖춘 곳이었다

46% 공산성은 시대를 초월해서 행정, 군사, 지리적으로 중요한 거점지 역할을 해왔다. 그 덕분에 오늘날까지 많은 역사적 기록과 유물, 유적을 공산성에서 만나볼 수 있다. 현재 공산성은 우리나라의 사적 제12호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52% 6호분은 무령왕릉 못지않게 중요한 무덤일 수도 있었다. 6호분은 송산리 고분군에서 발견된 다른 무덤들과 달리 벽돌로 지은 무덤이었기 때문이다

53% 비록 송산리 고분군의 무덤 안으로 직접 들어가서 볼 수 없고, 상당수의 유물이 유실되거나 도굴된 것도 사실이지만, 따로 전시관을 마련해서 5-6호분의 내실 모형과 남은 문화재 등을 함께 전시해뒀기 때문에 간접적으로나마 무덤을 살펴볼 수 있다

63% 무령왕릉에 들어간 벽돌들은 정확한 설계에 의해서 생산됐고, 정해진 곳에 순서대로 쌓았다는 의미다. 각 글저들은 해당 글자의 틀을 만들어 꾹 누루는 방식인 압출기법으로 문자를 새겨 넣었다

73% 이렇게 잘 만들어진 팔찌를 선물했다는 것은 아마도 520년이 왕비의 기념적인 해였거나 무슨 경사가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선물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렇듯 무령왕릉은 아주 많은 유물과 이야깃거리를 우리에게 안겨줬다

78% 정지산 유적이 웅진백제기의 유적지 중에서 매우 독특한 시설이었으리라는 증거는 발굴 과정에서 드러난 건물터의 특이한 흔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91% 고려시대 명문와의 등 면에는 대통사 혹은 대통지사라는 글자를 세로로 쓴 것도 있다. 이는 대통사가 고려시대까지 분명히 존재했고, 건물의 유지, 보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단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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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당신이 원했던 조선 갈등사 - 왕들의 사사로운 이야기를 들춰 보다 어쩌면 당신이 원했던 시리즈
신정훈 지음, 김선우 감수 / 북스고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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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갈등사

 : 신정훈

 : 북스고

 : 2021/08/10 - 2021/08/16


조선 갈등사라고 하지만 역대 조선왕들의 이야기를 죽 기록한 책이다.

그동안 드라마에서 봤던 내용들이 총 망라되었다..

용의 눈물, 정난정, 왕의 남자, 동이, 명성황후 드라마를 본 느낌이다.

처음 조선역사를 접한 사람들에게는 재미있을지 모르겠지만 대하사극을 보던 사람이나 역사이야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책.

통사를 읽으려면 한권으로 된 조선왕조실록이나, 최태성 아저씨의 한국사책을 읽는게 나을 것 같고, 에피소드를 보려면 드라마가 더 나을것 같다.

이 책의 미덕은 모든 스토리가 짧고 간결하다는 것.

가볍게 빨리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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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인간의 탐험 - 너머의 세계를 탐하다
앤드루 레이더 지음, 민청기 옮김 / 소소의책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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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의 탐험

 : 앤드루 레이더

 : 페이퍼로드

 : 2021/07/28 - 2021/08/13


아주 재미있는 책을 읽었다.

탐험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인류사를 풀었다.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우리 인류이제는 전세계에 퍼져 살고 있다.

최상위 포식자로서...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아시아로... 그리고 아메리카로 건너간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로 들어가기 전에 이미 폴리네시아인들이 아메리카를 건너간 것 같은 흔적들이 있다.

또한 바이킹이 콜롬버스보다 먼저 아메리카를 방문했을 것 같은 신화들이 아메리카에 있다.

인류는 탐험을 끊임없이 추구했다. 

이제는 우주를 탐험하기 위해 우주선도 보내고 위성도 띄운다.

나 역시 이런 호기심이 가득했을 때가 있었는데...

아직도 늦지 않았다. 잠든 호기심을 깨워야 할 듯한 책이다.

올해의 책 후보다. 



3% 인류는 모두 동아프리카의 그레이트 리프트 밸리에서 수백만 년 동안 진화했던 소규모 영장류 집단의 후손이다

4% 네안데르탈인 게놈 프로젝트의 연구 결과를 보면 현생인류에게도 네안데르탈인의 DNA가 상당 부분 남아 있다

6% 아메리카 원주민이 질병에 취약했던 또 다른 이유는 서로 유전적으로 비슷했기 때문이다. 유전적 다양성이 높을수록 질병이 퍼지기 어렵다

7% 인류의 탐험 역사에서 가장 놀라운 업적은 아마도 하아이와 이스터 섬, 뉴질랜드를 연결하는 폴리네시아 삼각지대에 정착한 일일 것이다. 폴리네시아 삼각지대의 면적인 아프리카와 거의 비슷하고 미국의 네 배에 달하는데, 그 넓은 곳에서 불과 1,000년 남짓한 시간에 단일 문화권이 형성되었다

11% 언어가 통하지 않고 서로 신뢰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역을 하기 위해, 페니키아인은 현지 원주민 마을에서 가까운 해안에 거래할 상품을 일렬로 늘어놓았다. 원주민들은 그들이 거래를 원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페니키아인의 상품과 충분히 교환할 만하다고 여기는 상품을 그 옆에 늘어놓았다

12% 우리가 아는 것은 고대의 문명인이 매우 열정적인 탐험가이자 과학자였고, 지금의 우리만큼이나 세상에 호기심이 많았다는 것이다

14% 찬란했던 고대 그리스와 비교하여 독재국가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페르시아는 매우 포용력 있는 국제적 사회공동체였다. 하나의 국가라기보다는 다민족 연합체에 가까웠던 것이다

16% 로마의 학자들은 그리스어로 말하고 그리스어로 읽고 아이들에게 그리스인 가정교사를 붙여주었다. 많은 로마 황제가 실제로 그리스인이었으며 나중에는 권력이 콘스탄티노플로 넘어감에 따라 모든 황제가 그리스인이었다

16%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아시아를 정복하러 진군하던 무렵, 전혀 다른 그리스인 한 명이 순수한 호기심에 끌려 세상의 다른 쪽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그는 북유럽을 지나 브리튼 섬을 한 바퀴 돈 다음 게르만민족의 땅을 거쳐 한밤중에도 태양이 떠 있는(이 현상을 처음 기록한 사람도 바로 그였다) 북극에 도달했다. 그의 이름은 피테아스였다

17% 로마라는 이 작은 도시가 성장하여 지중해의 패자가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로마인에게는 중요한 장점 하나가 있었으니, 바로 호기심이었다. 로마는 새로운 생각에 개방적이었고 그것을 바로 현실에 적용했다

19% 로마와 중국의 교류가 산발적이기는 했지만 꾸준히 계속되었고 가끔 무역을 했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21% 그들은 793년 6월 8일에 갑작스레 유럽으로 밀려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 북부 잉글랜드에 상륙한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 기습부대는 린디스판 수도원의 수도사들을 학살하고 값진 물건을 남김없이 약탈했다

21% 바이킹의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 데 린디스판 수도원 습격만큼 큰 영향을 준 사건은 없었다

22% 바이킹 족장들은 러시아에서 강을 따라가다 발견한 전략적 요충지에 왕국을 건설했다. 당시 드네프르 강가의 키예프에 건설한 왕국이 나중에 키예프 공국이 되었는데, 1598년까지 류리크 왕조의 통치가 이어지면서 현대 러시아의 기반이 되었다

23% 대학교수이자 작가인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자신의 저서 문명의 붕괴에서 주교직을 유지하려면 수입 예복과 황금 잔, 미사용 포도주 등 상당한 물자가 들었는데, 이는 그린란드인들이 그들의 뿌리가 유럽이라는 데 얼마나 집착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25% 고구마를 전 세계에 퍼뜨린 것은 스페인 사람들이지만 폴리네시아인에게는 유럽인이 오기 전부터 이미 고구마가 있었다는 것이다

25% 콜럼버스 이전에 폴리네시아인이 아메리카 대륙에 갔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지만, 폴리네시아인에게는 충분히 그럴만한 능력이 있었다

26% 그렇게 빼앗은 배는 스페인 사람들의 배와 크기가 비슷하고 바다를 항해할 목적으로 만든 커다란 뗏목이었다. 통나무를 나란히 붙여서 묶은 뒤 나무 갑판을 올렸으며, 그 위에 견고한 돛대를 세우고 넓은 돛을 단 배였다고 한다

26% 헤위에르달은 고대인이 간단한 기술로 광활한 바다를 건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27% 흥미롭게도 스페인 사람들의 설명에 나오는 케찰코아틀은 금발에 푸른 눈동자인데, 이런 모습은 스페인 사람들과 다르지만 바이킹과는 딱 들어맞는다. 케찰코아틀이 걸친 망토도 우리가 생각하는 당시 스페인 사람들의 옷차림보다는 중세 바이킹의 옷차림에 더 가깝다

28% 인도양은 고대부터 지중해보다 더 부유한 문명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였으며 인도양을 통해 아프리카와 중동, 인도, 중국, 동남아시아간에 사치품이나 각종 기술 및 사상이 오갔다

29% 불교는 인도에서 탄생했지만, 인도와 스리랑카의 뱃사람들에 의해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래서 인도네시아나 태국, 말에시아도 스리랑카나 인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지만 언어나 건축 등 문화적인 측면에서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29% 여러 해상 왕국이 등장해 해상 무역로를 장악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했던 수마트라 섬의 브리비자야 왕국과 동자바 섬의 마자파힛 왕국은 페니키아나 고대 그리스처럼 바다를 제패했다

30% 이븐 바투타는 중동과 러시아, 아프카니스탄, 인도를 지나 마침내 중국까지 갔다

30% 이븐 바투타가 남긴 여행 기록인 경이로운 도시와 놀라운 여행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선물은 이슬람 세계에서 수많은 책과 영화, 시, 심지어 비디오게임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이븐 바투타는 일상적인 여행가의 대명사가 되었다

31% 그는 한 자밤의 소금과 후추 외에 다른 양념은 먹지 않았으며 궁중의 주방에서 다른 향신료를 전부 없애버렸다. 유럽 전역의 귀족들이 루이 14세를 따라하면서, 후추와 소금을 섞어 먹는 루이 14세의 취향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식 만찬에서 하나의 관례로 자리잡았다

33% 송나라 때는 중국 무역선이 마다가스카르와 이집트를 정기적으로 왕래했으며, 페르시아 만을 지나 아바스 왕종의 수도인 바그다드까지 가서 무역을 했다

34% 이 초원의 무시무시한 기병들에게는 호기심과 새로운 생각에 대한 열린 마음, 그리고 종교적 관용이 있었다

37% 명나라 집권기였던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정화 제독이 지휘하는 함대가 인도양으로 일곱 차례 원정을 떠났다. 원정대의 임무는 외국과의 교역이었지만, 그보다는 명나라의 힘을 과시하려는 목적이 더 컸다

37% 보수적인 유학자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나라의 문을 걸어 잠갔으며 외국과의 접촉은 차단되었다

39% 항해왕으로 유명한 엔히크는 포르투갈이 해양으로 세력을 팽창하도록 적극 권장하고 후원했다. 포르투갈 국왕 주앙 1세의 셋째왕자였던 그는 왕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포르투갈의 외교정책을 좌우했다

42% 다 가마의 원정은 비록 큰 손실을 입었지만, 로마 시대 이래로 유럽에서 최초로 인도에 갔다는 측면에서는 큰 성공으로 평가받았다

42% 포르투갈의 목표는 유럽에서 동아시아로 이어지는 무역로를 따라 기지를 세워 수천 년간 지속된 인도양 무역로를 독점하는 것이었다

43%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중세 천문학의 기반이었으며, 별의 위치로 길을 찾고 매일 수평선의 곡률을 관찰하는 뱃사람들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45% 남아메리카인이 식인종인지는 모르지만, 유럽인이 그보다 더 나쁜 죄를 지었다고 말했다. 식인종은 죽은 사람의 살을 먹는 반면, 유럽인은 종교적 신념 대문에 사람을 산 채로 고문하고 불에 태웠기 때문이다

46% 라스 카사스는 소책자와 저서를 통해 신대륙에서 스페인 사람들이 저지르고 있는 끔찍한 만행과 철저하게 짓밟히고 있는 원주민 사회의 실상을 공개했다

47% 아스텍 제국에는 적이 많았고, 많은 멕시코 원주민이 코르테스의 편에 서서 압제자 아스텍 제국과 싸웠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스페인군이 테노치티틀란으로 진군할 무렵, 그들과 함께한 원주민 동맹군은 수천 명에 달했다

48%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유럽인의 도착은 그야말로 대재앙이었다. 역사상 인간에게 일어난 가장 큰 재양이라 할 만했으며, 그로 인해 원주민 인구의 90퍼센트가 사라졌다

49% 역사상 가장 위대한 두 차례의 탐험 모두가 심각한 무지에서 비롯되었던 셈이다. 과학에서 그랬듯이, 지리학에서도 가장 위대한 발견이 가장 큰 오류에서 비롯되었다

50% 빅토리아 호는 사상 최초로 세계를 일주하고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빅토리아 호의 세계 일주는 분명 역사상 가장 위대한 탐험이었으며 인간의 인내력에 대한 가장 위대한 시험이었다

50% 마닐라의 전초기지는 유럽 뿐 아니라 중국, 일본, 인도, 베트남도 탐내는 곳이었다. 그 뒤로 250년 동안 마닐라와 멕시코 아카플코간에 갤리언선이 오가면서 아메리카의 은과 중국의 도자기, 칠기, 비단을 교역했다

51% 1700년대에 시계공인 존 해리슨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항해 분야에서 사상 최대의 난제인 경도 측정 문제를 해결했다

52% 네델란드 사회는 유럽에서 가장 관용적이었으므로 지식인들이 종교나 정치적 박해를 피해 홀란드로 모여들었다.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을 네델란드에서는 반갑게 맞이했다

52% 역사적으로 모든 문명에는 저마다 노예제가 있었다. 그런데 유럽인은 노예를 강제로 배에 태워 대서양 너머로 실어나르고 열악한 환경에서 죽을 때까지 부려먹는 등 아주 가혹하게 착취했다

56% 마침내 태평양에 도달했지만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일행은 겨울 야영지의 위치를 투표에 부쳤다. 대원들 모두가 투표했고새커커위아와 요크라는 노예도 표를 던졌다. 아마도 미국에서 여성과 흑인이 참여한 최초의 투표였을 것이다

58% 나중에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유럽인보다 훨씬 행복했다. 유럽인이 많이 찾는 잉여물이나 문명의 이기를 전혀 접해보지 못해서 그런 것들의 효용을 몰랐기 때문이다. 불평등이란 것을 몰랐기에 아주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고 말했다

59% 미국과 연합해 영국에 대항하던 프랑스와 스페인, 네델란드도 쿡 선장의 임무를 지원하기로 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한 사람의 탐험가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항해한다는 취지를 널리 인정받은 것이었다

60% 파이퍼는 매번 여행할 때마다 책을 써서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또 다른 여행을 떠났다. 이전까지의 탐험가와 달리 그녀는 직접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데 중점을 두었고 그중에서도 가정생활과 여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61% 이 모든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거대한 자연의 힘과 빅토리아 여왕 시기의 자만심을 함께 엿볼 수 있다. 근대의 기술로도 북극 정복에 완전히 실패했는데, 사고 지역 주변에서는 이누이트족이 똑같은 환경에서 아주 잘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62% 스콧은 당시에 비극적인 영웅으로 칭송받았지만, 최근 들어서는 무조건 남극점에만 도달하면 된다는 식의 무모한 열정이 대원들의 목숨을 앗아갔다면서 비난을 받고 있다

66% 공학에서는 근본 원리보다 실용적 기술이 더 중요한 경우가 많다. 원리를 이해하지 못해도 활용할 수는 있다. 그래서 때로는 여러 대안을 시험해보는 것이 더 수월하다

68% 우주왕복선은 지구 궤도보다 더 먼 우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수행할 수 있는 임무가 우주정거장 건설 정도밖에 없었다. 따라서 전세계적으로 우주 개발의 목표는 국제우주정거장에 국한되었다. 그것이 최선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69% 소련은 금성에 어떤 집착 같은 것이 생겼는지 1961년부터 1984년까지 열여섯 대의 탐사선을 보냈다. 나중에는 탐사선에 단단한 외피를 장착했기 때문에 일부 탐사선은 금성 표면에 착륙해 사진을 전송했다

72% 테슬라의 CEO인 일론 머스크가 말했듯이, 헤지펀드를 관리하는 인공지능이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소비주를 팔고 방위산업주를 산 다음 전쟁을 일으킬 지 누가 알겠는가

72% 감정이 없거나 인간과 사고방식이 다른 컴퓨터는 본질적으로 소시오패스인 것이다

73% 과학자들이 유방암을 진단하기 위해 허블 망원경으로 블랙홀을 탐색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촬영한 천문 분광 사진이 블랙홀만큼이나 종양을 찾는 데도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유방암 진단에 쓰이게 된 것이다

76% 유럽에서 오스트레일리아까지 배를 타고 가면 보통 한 달이 걸리지만 조만간 몇 분이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오히려 목적지보다 우주 공함까지 가는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앞으로 등장하게 될 재사용 로켓은 우주를 여행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집에 머무는 사람들의 삶에도 직접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

79% 일부 거대한 소행성의 몸값은 지구 전체의 총생산보다 몇 배나 크다. 풍요로운 세상을 원한다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봐야 한다

80% 금성의 구름 속 특정 고도에서는 기압이 지구의 해수면과 비슷해진다. 그곳에서는 호흡할 수 있는 질소, 산소로 구성된 공기가 금성의 고밀도 이산화탄소 대기 속에서 마치 풍선처럼 떠다니므로, 그 높의 구름 속에 도시를 건설할 수 있다

85% 지구 환경이 지구 생명체의 형태를 바꾸기도 했지만, 반대로 지구 생명체가 지구 환경을 바꾸기도 했다

88% 아홉 개의 뇌와 세 개의 심장을 가졌으며 지능이 꽤나 높은 문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외계인의 모습과 다르다

89% 우주에 진보한 문명이 얼마나 많은지, 아니면 얼마나 적은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나 우리 환경이 전혀 특별할 것이 없으며, 그래서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고 가정하는 것이 안전해 보인다

91% 영화 매트릭스처럼, 생물학적인 존재인 우리는 우리가 사는 곳이 현실이기를 바라는 이상한 열망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뇌가 그저 전기 자극을 해석할 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가 가상과 현실을 구별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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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에 읽는 한국 근현대사 - 개정 증보판 페이퍼로드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최용범.이우형 지음 / 페이퍼로드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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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룻밤에 읽는 한국 근현대사

 : 최용범

 : 페이퍼로드

 : 2021/07/24 - 2021/08/01


하룻밤에 읽는 ~~ 시리즈..

한국 근현대사는 어렵다. 우선 사실보다는 증오와 감정이 앞서는 분야다.

사실을 이야기해도 믿지 않는다. 욕이나 안먹으면 다행이다.

그러나 모르면 안되는 분야다. 

일제 식민지시대와 독재시대, 전쟁을 거치면서 우리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자유와 독립을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똑똑히 배워야 한다.

민족주의자들이 어떻게 개량주의자가 되고 친일파가 되었는지를 알지 못하면 나 역시 역사와 후손에게 죄를 지을 수 있다. 

우리 아이가 나중에 "아빠는 그 때 뭐했어?"라고 물어볼 때 부끄럽지는 말아야겠다.

근현대사를 읽고 배워야 하는 이유다.

내가 알고 있는 북한의 역사하고는 좀 다르다. 

내가 알기로는 북한은 친일파 처단과 토지배분에 열심을 냈기 때문에 지지율도 높았다. 또한 빠르게 경제개발에 성공해서 60년대에는 세계적으로도 성공연구사례였던 걸로 아는데 이런 내용은 모두 빠져서 북한을 더 안좋게 기술했다. 

근현대사를 주마간산으로 보기에는 괜찮다.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많은 역사책처럼 남한을 좀더 좋게 기술했다는 것만 알고 본다면 말이다. 


p47 군란 때 피살된 일본인에 대한 위문금과 일본 시설에 대한 피해보상금 50만 원을 지불하고, 일본군을 공사관에 주둔시킨다는 내용의 제물포조약이 하나부사의 주도로 체결됐다

p78 시해의 현장에 대원군과 훈련대 병사가 있었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못할 우리 역사의 치부다. 비록 대원군이 30년간 며느리와 숙적 관계에 있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p84 청일전쟁 직후 두 나라 사이에 맺어진 시모노세키조약에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 포기 조항이 들어간 것을 기념하는 사업이었다

p93 1899년 제정된 대한국국제 곧 국가의 기본법에는 황제권을 제약할 여지가 있는 국민의 참정권이나 의회 설립 등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p107 대다수 애국계몽운동가들이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을 수용하여 국권 피탈의 원인을 우리 민족에게서 찾으면서, 독립을 위한 비타협적 투쟁노선을 표방하지 못한 것은 분명한 한계였다

p128 단발령 때문에 생겨났던 이발소에서 상투를 틀어주기도 하고, 머리를 깎아주기도 하는 희한한 상황이 발생했던 것이다

p133 이들 시설은 모두 일본과 중국 등 열강의 군사력 필요나 경제적 이권 확보의 일환으로 개설된 것이었다. 우리 근대화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p150 최남선과 이인직의 이런 반역사적인 작품이 문학적으로 새롭고 의미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p175 1882년 관계에 진출한 이래 이완용은 친러, 친미, 친일을 두루 거친 변신의 달인이었다. 그런 그가 마지막 순간 택한 이력은 일제가 하사한 직책이었다

p179 문제는 이광수 개인의 변심에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최남선, 최린, 송진우, 김성수 등 3.1운동의 실패 이후 동요하던 민족 인사들 역시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신의 본심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이들의 주장은, 독립은 이미 물건너갔으니 조선은 일제의 지배를 인정한 다음 그에 걸맞은 운동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p196 신용하 교수에 따르면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조선총독부의 소유지가 된 땅은 국토 총면적의 약 50.4퍼센트에 해당했다

p213 1910년대 국내에서 활약했던 대표적인 독립투쟁 단체 대한 독립의군부(독립의군부)는 그렇게 탄생했다

p219 이들은 서간도 일대에 자리를 잡고 한인 자치 사회의 경제적 부흥과 독립운동 거점 마련에 힘을 쏟았다. 경학사와 부민단은 이 과정에서 탄생한 대표적인 단체였다

p232 독립을 위한 유일한 방책이 강대국의 시혜가 아닌 민족 자신의 투쟁뿐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짐으로써 이후 민족운동은 더욱 비타협적인 투쟁을 벌여나갈 수 있게 되었다

p275 역사학자 장세윤에 따르면 이 시기 만주 지역 무장투쟁은 확산되어 가던 패배주의와 개량주의 움직임에 못을 박고, 우리 민족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살린 민족해방운동의 꽃이었다

p300 신간회 해소 이후 전투성을 잃지 않았던 민족주의 세력은 사분 오열되었고 이것은 오히려 민족주의 우파 인사들이 적극적인 친일로 돌아서는 계기가 되었다

p310 원산노련은 1월 22일 산하의 모든 노동단체와 함께 총파업을 단행하기로 결성했다. 이 방침에 따라 해륙, 운반, 중사, 제면 노동조함 등은 물론, 우너산노련에 소속되지 않은 자유노동자들까지 파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노동운동의 역사상 기념비가 될 노동자들의 대규모 총파업 투쟁이 발발한 것이다

p319 이 같은 농민투쟁의 전통이야말로 1949년 이승만 정부가 농지개혁에 나서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한 요인이었다

p333 장지필, 이학찬과 같은 백정 출신 인사는 물론 양반 출신 천석꾼의 자제이자 동아일보 진주 지국장인 강상호 등 비백정 출신 선각자들이 적극 호응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모인 80여 명의 인사는 1923년 4월 25일 진주 대안 등에서 대회를 열어 형평사를 창립했다

p349 1934년 카프의 중심 인물이던 박영희가 얻은건 이데올로기요 잃은 건 예술이다라고 말했던 건 이들이 직면했던 딜레마를 압축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p360 좌우를 망라한 모든 세력의 통일, 단결을 통한 정부 수립의 실패, 그 후폭풍은 거셌다.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었던 좌우대립이 격화되었고, 이것은 결국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동족상잔의 비극으로까지 나아갔던 것이다

p370 통치의 효율성을 꾀하던 미 군정에게 이들의 친일 경력은 문제 되지 않았다. 이들은 대거 미 군정의 고문직에 취임했고, 그 주위로는 살 길을 찾아 헤매던 수많은 친일파와 기회주의자들이 몰려들었다

p380 메논은 왜 입장을 바꿨던 것일까?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것은 이승만과 모윤숙의 미인계 때문이었다

p398 남과 북 공히 집단 처형과 학살을 무차별적으로 자행함으로써 가장 추하고 더러운 전쟁이었다는 오명도 함께 뒤집어쓰게 되었다. 같은 민족의 소행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잔혹한 인명살상 행위가 아무런 죄의식 없이 저질러졌던 것이다

p409 뼛속까지 친일파였던 박정희가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로 이를 해결하려 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동북아시아에서 공고한 반공 블록을 구축하려 한 미국의 강력한 요구는 국교 정상화를 압박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었다

p461 전쟁 개시를 결정했으며 전쟁의 총책임자였던 김일성은 숙청을 통해 오히려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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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하늘 - 세계 최고 과학 국가를 만든 세종의 천문 프로젝트
정성희 지음 / 사우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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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세종의 하늘

 : 정성희

 : 사우

 : 2021/07/27 - 2021/08/03


세종이란 분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조선이란 나라의 정통성 확보가 중요했다곤 하지만 천문에 대해서 이렇게 방대하고 자세하게 공부하고 지시해서 우리나라의 천문학을 여러 단계 올린다.

이 책을 읽으면 이런 내용을 알게 된다. 

한국사시간에 이름만 외웠던 많은 천문 도구들 혼천의나 양부일구를 왜 만들었으며 어떻게 설치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알려준다. 

천문을 기록하기 위해 전국 팔도에 별을 관찰할 직원들을 보내고 언제 별들이 출현하는지에 대해 알려준다. 

이순지라는 천재 수학자를 통해 칠정산내외편이라는 조선에 맞는 달력을 만든다. 

제대로 된 천문도구를 만들기 위해 장영실을 1년동안 명나라에 유학을 보내 원나라때 만들어진 천문도구를 관찰하게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나라의 천문학은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심지어 지금은 기술이 부족하고 연구할만한 사람이 없으나 미래세대를 위해 내용을 잘 관찰하고 잘 기록해놓으라고 지시하기까지 한다. 

지도자를 잘 만나니 천재들이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고 이는 조선의 과학기술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다.

그 이후 꽉 막힌 성리학자들에 의해 조선전기때 개발되고 발전한 과학은 모두 사장된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세종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p8 세종은 명이 아닌 조선에 맞는 역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추진한 것이 간의대 건설과 칠정산내외편으로 대표되는 천문 프로젝트였다

p22 이성계는 천문관서인 서운관의 관원에게 고구려 천문도를 돌에다 새기게 했다. 천상열차분야진도라 불리는 천문도가 탄생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p26 태조 이성계가 고구려 천문도를 입수한 뒤에 가장 먼저 찾은 이가 류방택이다. 천문도가 세월이 오래되어 그 도수가 차이가 나므로 이를 새로 측정하여 수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태조의 삼고초려로 류방택은 천상열차분야지도 제작에 참여하였다

p28 천문도에서 중성은 매우 중요하다. 중성이란 해가 질 때와 뜰 때 하늘 정남에 보이는 별을 말한다. 하늘 정남쪽을 다른 말로 남쪽 하늘 자오선 위에 위치한다고 하는데, 이를 천문학에서 남중이라 한다. 따라서 중성이란 남중하는 별이라는 뜻이다

p30 가로 122.8 센티미터, 세로 200.9 센티미터의 돌에 새겨진 천상열차분야지도는 현재 경복궁 내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에 가면 볼 수가 있다

p34 태조 석각본은 1970년대 홍릉에 위치한 세종대왕기념관 과학전시실 진열장에 보존되기까지 약 10년간 창경원 땅바닥에서 벤치 취급을 받았다

p42 과거 그리스 천문학자 히파르코스가 서기전 130년경에 황도상의 별자리를 12등분한 것과 오늘날 천체의 실질적인 위치는 다르다. 그런데도 오랫동안 이어져 온 과거의 별자리를 이용하여 여전히 점을 보고있다

p48 조선 태조 4년에 제작된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소주천문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석각 천문도이다

p55 태백성 외에도 새벽에 동쪽에서 보인다고 하여 계명성 혹은 샛별이라고도 불렸다. 저녁에 보일 때는 장경성 혹은 우리말로 개밥바라기별이라 했다

p62 에밀레 종처럼 사찰에서 치는 종이 중생을 개우치는 방편이었다면, 국가에서 치는 종은 백성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용도였다

p82 태종은 누구보다 냉철한 인물이었지만, 자신이 저지른 과오 때문에 하늘의 재이현상에 민감했고, 그럴 때마다 두려워하며 근신하였다

p93 신하들이 열심히 일하는지 안하는지 몰래 지켜보는 일은 세종의 전대특허였다. 세종은 몰래 첨성대에 행차하여 천문관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p99 노인성은 백두산과 설한점에서는 관측되지 않는 별이었지만, 제주도에서는 특정 시기에 볼 수 있는 별이었다. 윤사응의 이야기를 들으며 세종은 뛸 듯이 기뻤다

p114 세조 쿠빌라이는 곽수경의 말대로 14명의 천문가를 전국에 파견하였다. 당시 세조 쿠빌라이가 파견한 천문가 중 한 사람은 고려까지 왔다. 원나라 천문가는 당시 고려의 북극출지(북극고도)를 관측하여 38도 소라는 관측치를 얻었다.

p114 곽수경이 이룩한 찬란한 업적 중의 최고봉은 수시력이라는 역법을 만든 것이었다.

p120 책력과 천문의 법은 쉽사리 자세히 알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다시 계산법을 연구하여 초안을 작성해서 장래에 이를 잘 아는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리라

p133 장영실 일행이 보고 온 것은 1279년 원나라 천문학자 곽수경이 제작한 천문기기였다. 곽수경의 천문대인 사천대는 13세기 원나라 수도 북경에 세워진 세계 최대의 천문대였다. 당시 사천대는 현재 북경 건국문 북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

p154 이천은 학문이 깊지는 않았으나 사물을 깊이 헤아리고 궁리하여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재능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p169 조선시대 천문은 음양학, 수학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천문관서인 서운관이나 관상감은 천문은 기본이고 음양학과 풍수도 다루는 곳이었다.

p189 현재 만 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자격루는 세종 대에 만든 장영실의 자격루가 아니라 중종 대에 다시 만든 자격루이다.

p224 국립중앙박물관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해시계 잔편이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해시계는 화강석으로 만들어졌으면, 현재는 일부분만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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