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무해한 이슬람 이야기 - 천의 얼굴을 가진 이슬람 문명의 위대한 모험
황의현 지음 / 씨아이알(CIR)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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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체로 무해한 이슬람 이야기

 : 황의현

 : 씨아이알

읽은기간 : 2024/01/03 -2024/01/08


책의 후기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대체로 무해한... 이라는 말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지구를 소개하는 말이다.

그런데 제목에 약간은 속은 느낌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이슬람은 테러를 자행하고, 여성을 억압하는 무도한 종교가 아니라 일반적인 다른 종교와 다르지 않다라는 의미로 쓴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은 이슬람에 대해서 어느정도는 아는 사람을 대상으로 쓴 느낌이다. 

이슬람의 역사와 경전이 후대에 씌여지면서 왜곡되고 윤색된 부분이 많다라는 수정주의의 입장에서 쓰여진 책이다.

그러다보니 세계사개론에서 이슬람에 대해서 좀 읽어본 나같은 초보자에게는 기본도 모르는데 응용을 배우는 느낌이었다. 

새롭게 배운 내용들이 많은데-아라비안 나이트라든가 그림이나 조각에 대한 이슬람 사상등- 이게 이슬람역사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내용인지, 수정주의의 주장인지가 좀 헷갈리기는 하다.

그만큼 내가 이슬람에 대해서는 모르는게 많다는 뜻이겠지.

세계사에 큰 획을 긋고 지금도 많은 이슈를 몰고다니는 이슬람에 대해서 이렇게 무지한 것도 좀 부끄럽다.. 

조금 더 관심을 갖고 공부해봐야할 것 같다..

재미있게 잘 읽었다. 


p4 결국 622년, 무함마드와 추종자들은 메카 유력자들의 박해를 이기지 못하고 메카 인근의 야스립이라는 곳으로 피했다. 히즈라, 즉 이주라고 불린 이 사건으로 역사상 최초의 무슬림 공동체가 야스립에 만들어졌다. 야스립은 예언자의 도시, 줄여서 메디나라고 불리가 된다.

p9 수정주의 해석에 관한 논의를 소개하는 것은 이슬람이 진리인지 거짓인지 평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세계의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이슬람도 다양한 문화가 활발하게 교류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던 환경에서 나타났으며, 현재 모습에 이르기까지 오랜 변화르 ㄹ거쳐 왔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p27 이슬람의 기원에 관해 기존 통념으로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쿠란 구절을 근거로 수정주의 학자들은 쿠란이 아라비아의 히자즈가 아닌 다른 곳에서 형성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대표적으로는 존 완스브로는 쿠란이 메소포타미아, 즉 오늘날의 이라크 지역에서 완성되었다고 주장한다.

p33 오늘날 많은 학자는 무슬림 기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완스브로의 문제의식에는 공감한다. 그러나 쿠란의 형성과 이슬람의 기원에 관한 완스브로의 설명 역시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정설과는 거리가 멀다.

p35 쿠란을 읽는 방식은 알핫자즈의 정본 외에도 여러 개가 존재했으며, 9세기가 되어서야 이븐 무자히드라는 인물에 의해 7개의 정통 독법이 확립된다. 오늘날 정본으로 쓰이는 쿠란은 이 7개 독법 중 하나를 따라 1924년 이집트에서 만들어진 판본이다.

p85 이븐 할둔에 따르면 우마르가 쿠란 이외의 다른 책은 필요하지 않다고 선언하며 파괴한 것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아니라 페르시아의 도서관이었다. 우마르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의 도서관도 똑같은 이유로 파괴한 것일까?

p133 여 칼리프가 권력을 되찾고 노예 군대를 견제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결국 칼리프의 권력은 936년 칼리프 알라디가 투르크 노예 출신의 장군인 무함마드 이븐 라이크에게 전권을 맡길 정도로 추락했다

p137 중세 이슬람권에서 대중이 존경을 바치고 따르던 대상은 권력을 가진 재상이나 장군이 아니라 권력과 거리를 두고 경건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쿠란과 무함마드의 전승에 해박하고 올바른 무슬림이 따라야 하는 규범이 무엇인지 제시하는 울라마, 신과의 하나됨을 추구하는 신비주의 신앙을 가츠리는 스승들은 대중 사이에서 누리는 인기, 존경, 영향력을 바탕으로 통치자와 대중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p152 국가의 지원이 법학과 종교학을 가르치는 마드라사에 집중되고 울라마가 통치자와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에서 외부의 지원을 받지도 못하고 후학을 양성할 제도적 기반도 없던 자연과학이 여전히 활력을 유지했다면 그것이 더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p172 무슬림의 지배는 분명히 기독교도에게 축복이 아니었지만, 비무슬림에 대한 탄압이 정점에 이르렀던 맘루크 시대에도 기독교도를 완전히 말살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이슬람을 순수한 관용과 평화의 종교로 이상화하거나 다른 종교와 끝없이 충돌해온 폭력적인 종교로 비난하는 단편적인 관점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무슬림과 비무슬림의 관계가 가진 다면적 성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p181 투르크인은 이슬람권에 종말을 가져오지 않았다. 하지만 투르크인으로 대표되는 초원의 유목민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두려움은 여전히 남아있었던 것 같다. 정주 지역의 무슬림이 유목민에 대한 품은 공포와 두려움은 몽골인이 저지른 무시무시한 학살과 파괴로 현실이 되었고, 이와 함께 유목민을 종말을 가져올 야만인, 파멸을 알리는 전조로 보던 전통 또한 다시 살아났다.

p186 몽골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지역에서는 칭기스칸과 몽골인은 여전히 이슬람과 무슬림의 적, 파괴자이자 학살자, 곡과 마곡과 같은 사악한 존재였다. 오늘날 일반적인 시각, 즐 이슬람권 문명이 쇠퇴하고 중동이 퇴보한 책임은 모두 몽골인에게 있다는 시각은 몽골 지배를 받지 않았던 무슬림의 해석과 관점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러나 몽골의 지배를 받는 지역에서는 칭기스칸과 몽골인을 구원자이자 이슬람의 보호자로 바라보는 완전히 다른 기억과 해석방식이 존재했다.

p191 몽골 지배 아래에서 중동의 수학과 과학적 성취가 중국으로 전파되었고 중국의 회화가 페르시 회화에 영향을 미쳤다. 몽골인들의 직접적 지배가 미치지 ㅇ낳은 예멘에서도 아랍어, 페르시아어, 투르크어, 몽골어, 그리스어, 아르메니아어 6개 언어로 된 백과사전이 편찬되기도 했다.

p212 이스마일파는 쿠란에서 외면적으로 드러난 가르침과 오직 소수의 이맘에게만 허용된 쿠란 속에 숨겨진 진정한 진리를 열두 이맘파보다 엄격하게 구분한다. 모두에게 열린 율법과 규범인 샤리아는 표면적인 계시일 뿐 참된 진리는 오직 이맘만이 할 수 있는 신비한 해석을 통해 드러날 수 있다.

p225 맘루크 왕조와 일칸국의 전쟁은 이제 무슬림과 무슬림 사이의 전쟁, 원칙적으로는 있어서는 안되는 전쟁이 되어버린 것이다. 가잔은 또한 이슬람으로 개종했을 뿐만 아니라 이슬람의 군주를 자처하며 맘루크 술탄의 종교적 정통성에 도전했고, 심지어는 맘루크 통치자들이 이슬람법을 어겼다고 주장하며 시리아를 침공하기도 했다.

p227 쉬아파를 상대로 이븐 바투타가 보여주는 강경한 태도는 이븐 바투타보다 앞선 시대의 여행가인 이븐 주바이르가 쉬아파에 별다른 적의나 반감을 드러내지 않는 것과 대비된다. 이븐 주바이르는 그의 여행기에 쉬아파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도 않으며 이븐 바투타와 달리 모든 쉬아파를 라피다와 같은 비하 표현으로도 부르지 않는다.

p230 종파 차이는 그 자체만으로 갈등을 만드러애지 않는다. 차이는 외부의 위협, 정세 불안정, 권력 관계의 역전과 같이 종파 간 관계를 악화시키는 변화가 나타날 때 비로소 갈등의 원인이 된다.

p239 몽골의 바그다드 함락과 압바스 칼리프조의 멸망에 관해 이처럼 서로 다른 기록은 중세 이슬람권에서 역사 기록과 문학 사이의 경계가 흐릿했음을 보여준다. 중세 이슬람권의 역사가들은 과거 사실의 객관적 전달보다는 기록자 개인이 지닌 특정한 관점에 따라 특정한 목적과 의미를 전달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p265 우마이야 시대만 하더라도 항상 전염병이 유행하던 시리아에서는 압바스 칼리프조가 세워진 이후에는 10세기까지 전염병 유행이 없었다고 한다. 압바스 가문은 이러한 우연의 일치를 선전전에 활용했다. 다마스쿠스에 입성한 뒤 압바스 가문의 한 장군은 “다마스쿠스 시민은 신에게 감사해야 한다. 압바스 가문이 집권한 이후 전염병이 사라졌기 때문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p270 이집트와 시리아의 흑사병 유행은 일시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후 흑사병은 이 지역의 풍토병으로 자리르 ㄹ잡아 시도 때도 없이 유행했다. 돌스에 따르면 1347년부터 1517년까지 이집트에서는 총 28번, 즉 5년에 한 번 꼴로 흑사병 유행이 있었다.

p273 무슬림은 흑사병 유행 상황에서도 이슬람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 즉 올바른 의례와 규범을 지키고 공동체의 결속을 유지하는 것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p276 영혼이 기쁨, 고요, 휴식, 희망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다. 유쾌하고 매력적인 벗과 함께 해야 한다. 물론 가장 좋은 벗은 쿠란이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관심을 도릴 수 있는 역사책이나 재미있는 이야기책, 사랑 이야기도 좋다. 슬픈 이야기와 흥분은 피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은 신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p282 천주교도와 정교회 신도가 집에 성상과 성화를 모신다면 무슬림은 신의 이름과 쿠란 구절 또는 무함마드와 그의 교우들의 모습을 묘사한 글인 힐야를 벽에 걸어둔다

p292 크레스웰은 질문을 던진다. 시각 예술에 관한 금기는 실제 무함마드의 명령이 아니라 압바스 시대 무슬림이 그림과 조각에 대해 가졌던 부정적 시각을 반영한 결과일 수도 있지 않을까? 달리 말하자면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그림과 조각을 금기시하는 이슬람은 사실 무함마드의 가르침이 아닌 압바스 시대에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p303 이븐 알나딤과 역사학자 알마스우디 오묻 아라비안나이트가 원래 고대 페르시아의 왕과 영웅들을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전한다는 점 역시 아라비안 나이트가 원래 페르시아 지역에서 만들어졌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아라비안 나이트보다는 페르시안 나이트에 가까운 셈이다

p307 19세기 이후 발견된 아랍어 원본들이 진짜 원본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사실 이 원본들은 갈랑의 프랑스어 번역본을 다시 아랍어로 번역한 결과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단 한 권도 발견되지 않은 아라비안나이트의 아랍어판이 18세기 이후 갑자기 우후죽순 등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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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 - 행운, 그리고 실력주의라는 신화
로버트 H. 프랭크 지음, 정태영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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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

 : 로버트 H 프랭크

 : 글항아리

읽은기간 : 2023/12/24 -2024/01/02


행운이 얼마나 큰 영향력이 있는지 알려주는 책

모든 시장에서 다 그렇다는건 아니고, 경쟁이 치열하면서 승자독식시장에서는 그렇다는 것.

그런데 요즘 많은 시장이 이렇다..

특히 네트워크 효과로 인해 이런 작은 행운이 전혀 다른 승자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인생은 불공평하다'같은 말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내가 승자가 됐다고 해서 오만할 이유가 없고, 비록 패자가 된다해도 그 행운이 나를 찾아올 수 있으니 잘 준비해야겠다는 교훈을 얻는다.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사람들을 계속 보는 것이 좋지는 않지만, 그 행운이 또 누군가의 손을 들어줄 것을 믿고 오늘도 열심히 살아본다. 

나에게 그 행운이 올 날을 기다리며..


p13 2001년, 이 책을 되돌아보는 칼럼에서 그는 “직장에서 사람들을 능력에 따라 채용하는 것은 타당하지만, 일단 이들이 어떤 일에 유능하다고 인식되고 나면 다른 사람이 들어올 여지가 없는 새로운 사회 계층으로 굳어지는데, 이런 상황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p25 지금까지도 하늘이 도왔다는 식으로 넘겨버리기엔 뭔가 설명이 부족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날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만큼 운이 좋았기 대문에 지금 이 순간 살아 숨 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p34 경제학자 브란코 밀라노비치가 예상한 바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개인 간에 나타나는 소득 격차의 온갖 문제는 그 사람이 살고 있는 국가와 그 국가 내부의 소득 분매, 이 두 요인만으로 거의 절반을 설명할 수 있다. 언젠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말한 것처럼, “기회가 없다면 능력이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p38 승자 독식 시장이 계속 뻗어가면서 행운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이들 시장에서 소수의 승자에게 돌아가는 막대한 보상은 결국 엄청나게 많은 경쟁자를 끌어들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경쟁자가 많아질수록 행운이라는 요인은 더욱 중요해진다

p57 와츠가 상식의 배반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모나리자가 X, Y, Z의 속성을 모두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작품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말은 모나리자가 유명한 이유가 다른 무엇보다 가장 모나리자답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p67 결코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일련의 우연한 사건들이 없었다면(애초에 코넬대학에 채용되지 않았다면), 네드 그램리치가 초빙교수로 오지 않았다면, 초기 논문들이 나중에 그랬던 것처럼 학술지에 실리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면 또는 편집자들이 보통 때처럼 느긋하게 시간을 쓰면서 마음 내킬 때 내 논문을 검토했다면 나는 지난 수십 년간 수많은 학생과 동료를 벗 삼아 지적인 자극을 주고받으며 사귀는 즐거움을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p90 네트워크 효과는 때로 한 회사의 사소한 강점으로 하여금 경쟁 회사의 뛰어난 제품에 패배의 아픔을 안기도록 한다.

p95 수많은 음악가는 (상당수가 최고의 음악가와 비슷한 수준인데도) 초등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듯이 빠듯하게 살아가는 반면, 극소수의 음악가는 일곱 자리나 되는 금액이 적힌 녹음 계약서에 서명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p98 여러 웹사트나 유튜브에 올라온 노래와 이야기를 거의 모든 사람이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세상이다. 이런 채널들은 미래의 슈퍼스타를 만들어내는 새로운 마이너리그가 되었다. 그러나 아무나 무료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이처럼 다양하고 창의적인 시도를 아우르는 시장은 예전보다 훨씬 더 실력이 좋은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다

p101 1980년까지만 해도 노동자의 평균 임금보다 42배 많은 보수를 받던 미국 거대 기업의 CEO들은 이제 400배를 받는다. 사소해 보이는 우연한 요소가 결과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를 초래하는 현상이 다시 한번 확인되는 대목이다.

p118 내가 믿는 진짜 메시지는 이보다 훨씬 단순하다. 여러분도 상당히 오랜 세월을 살다보면 도무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어떤 사건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p123 전체 성과에서 행운이 매우 작은 부분만 좌우한다고 해도, 경쟁자가 많은 상황이라며, 가장 유능한 사람이 승리하는 경우는 드물고,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 승리하는 게 보통이다

p129 저는 일주일 내내 매일 밤 숫자 7이 나오는 꿈을 꿨습니다. 뭐, 7이 일곱 번 나왔으니 7 곱하기 7은 48이죠. 복권에 당첨된 이 사람은 전통적인 경제 모델에 등장하는 이성적이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사람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p134 사람들은 실패를 설명할 때는 운이 나빴다는 사실을 기꺼이 그리고 재빨리 받아들이지만, 성공을 설명할 때는 행운의 영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p137 그는 부학장이라는 직책 탓에 동료들보다 덜 행복해졌지만 더 부유해졌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생존을 위한 다윈주의적 투쟁에서는 얼마나 행복한가보다 무엇을 가졌느냐가 더 중요하다고도 했다. 마노브 자신이 생각하는 그 경험의 교훈은 순진한 낙관주의가 필요한 때도 있다는 것이다

p140 거의 모든 분야에서 그렇다. 고된 훈련이란 여러분이 아직 터득하지 못한 능력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시행착오를 수없이 반복한다는 의미다.

p147 우리가 성공에 있어서 자신의 기여도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해서, 자신이 이룬 성취를 자랑스럽게 여기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설령 커다란 행운처럼 외적인 요소가 성공의 결정적인 밑거름이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거둔 성공에 대해 느끼는 자부심이야말로 또 다른 성공을 위해 가일층 노력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되기 때문이다.

p161 만약 여러분 혼자서 소득 감소를 경험하게 된다면, 원하는 것을 사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소득이 일제히 감소한다면, 상대적인 구매력은 조금도 영향을 맏지 않는다. 희소가치가 높은 재화의 구매자를 결정하는 것은 상대적인 구매력이다.

p168 실제로 대개 감세가 이뤄지는 곳은 감세가 정말 이뤄져야 하는 곳이 아니라 감세로 인해 손해를 보는 사람들이 가장 적게 반발하는 곳이다. 그리하여 화살은 우리 미래를 위한 투자로 향하게 된다. 이로 인해서 피해를 입는 국민은, 안타깝지만 조금도 저항할 수가 없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국민이기 때문이다.

p193 오늘날 미국의 수많은 중산층 아이들은 생일 파티에 전문 광대나 마술사가 출연하지 않으면 실망한다. 부모에게는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p199 누진소비세는 더 나은 기간시설을 위해 투자할 추가적인 세수를 창출할 수 있다. 현재의 세금 체계 아래서는 부자들이 페라리를 타고 노면이 엉망이 도로를 달려야 한다. 페라리를 타고 구멍이 푹푹 팬 도로를 달리는 것보다 포르셰를 타고 잘 정비된 도로를 달리는 것이 훨씬 더 만족스럽다

p208 봉투가 두툼한 이유는 프리드먼이 1943년 아메리칸 이코노믹 리뷰에 발표한 자기 논문의 사본을 동봉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논문에서 당시 제2차 세계대전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 재원을 모으는 최선의 방법은 누진소비세라고 주장했다.

p215 뛰어난 재능과 열심히 일하겠다는 마음가짐이야말로 팀원으로서 지녀야 하는 긍정적 특성이다. 이는 엘리트 팀의 구성원 대부분이 보유한 특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성공적인 팀워크란 또한 자신의 동료를 신뢰하는 능력과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동료가 자기 이익보다 팀의 이익을 우선시할 것이라고 믿는 능력을 전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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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역사 - 신의 탄생과 정신의 모험
카렌 암스트롱 지음, 배국원 외 옮김 / 교양인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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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기간 : 2023/11/23 -2023/12/28


신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고, 신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역사에서 신의 개념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분석한 책이다.

유명한 책이라고 하더니 꼼꼼하게 역사를 추적해가며 썼다.

신이 없다고 생각하고 책이 쓰여 있어서 종교인이 읽으면 좀 반감이 갈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시대별로 신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알기에 이만한 책이 없을 것 같다. 

작가의 믿음과 신념의 결정체인 책을 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무조건 거부하기보다는 새로운 시각을 볼 수 있어서 좋다...

여러번 읽으면서 공부해야 할 책이다. 


p47 성서는 우리가 고대 이스라엘 민족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주로 모세의 신 야훼에 대한 충성심으로 결속한 여러 다양한 종족 집단의 연합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말해준다.

p67 서는 이스라엘인들이 계약에 충실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전시, 즉 야훼의 능숙한 군사적 보호가 필요한 때에는 계약을 기억했으나 평시에는 옛 관습을 좇아 바알, 아나트, 아세라를 숭배했다.

p74 우리가 흔히 힌두교라고 부르는 종교는 체계를 피하는 데다 한 가지 해석만 적절하다는 배타적 입장을 거부하기에 일반화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우파니샤드는 신을 초월하지만 만물 안에 밀접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독특한 신성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p77 신들과 마찬가지로 이성은 부정되기보다 초월된다. 브라흐만이나 아트만의 경험은 음악이나 시의 경우처럼 이성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예술작품은 창작하고 감상하는 데 지성을 필요로 하지만 순전히 논리적 능력이나 두뇌의 기능을 넘어서는 경험을 제공한다. 이는 신의 역사에 변함없는 주제가 될 것이다.

p97 예언자는 주로 신의 임재를 대신하는 사람이지만 이 초월적 경험은 불교에서처럼 앎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어진다. 예언자는 신비로운 깨달음이 아니라 복종으로 특징지어질 것이었다.

p104 그 계약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며, 따라서 모두가 온당하게 취급되어야 함을 의미했다. 신은 단순히 이스라엘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 정의를 위해 역사에 개입한 것이었다.

p128 야훼는 유일신이 되었다. 그의 주장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늘 그렇듯 새로운 신학이 성공하는 이유는 합리적으로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절망에 빠지는 것을 막고 희망을 고취하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p139 한 유대인이 지혜서를 써서 동료 유대인들에게 주변의 유혹적인 그리스 문화에 저항하고 그들의 전통에 충실하라고 경고했다. 참된 지혜를 구성하는 것은 그리스 철학이 아니라 야훼를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p147 탄나임은 구전 율법-모세의 율법을 시대에 맞춰 새롭게 해석해 온 것이다-을 성문화한 미슈나를 편찬했다. 이후 아모라임으로 불린 학자들이 미슈나에 주석을 달기 시작ㅎㅆ고, 이를 집대성해 탈무드를 만들었다.

p154 랍비들은 신은 인간이 고통받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인간의 육체는 신의 모습이기 때문에 존중받고 보호받아야 했다. 신이 인간의 기쁨을 위해 선물한 술이나 성관계 등 즐거움을 기피하는 것은 죄가 될 수도 있었다.

p180 로마인의 에토스는 보수적이어서 가부장제 전통과 고대 관습의 권위를 존중했다. 진보란 옛 황금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이지, 미래를 향해 겁 없이 행진하는 것을 뜻하지 않았다.

p215 아타나시우스는 자신을 지지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압력 덕분에 공의회 참석 덕분에 공의회 참석자들의 지지를 얻는데 성공했고, 니케아 신조가 그의 신학적 입장에 근거해 작성되고 공표되었다.

p225 성부, 성자, 성령은 신이 자신을 드러내는 활동(에네르게이아)에 대해 말하기 위해 “우리 인간이 쓰는 용어”일 뿐이다. 하지만 성자, 성부, 성령이라는 용어는 불가해한 실재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이미지로 옮겨준다는 점에서 상징으로서 가치가 있었다. 인간은 신을 초월자(접근할 수 없는 빛 속에 숨은 성부), 창조자(로고스), 내재자(성령)로 경험해 왔다

p227 그리스 정교도와 러시아 정교드들은 삼위일체를 관조를 통한 종교적 영감의 경험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많은 서방 기독교인은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데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다. 가파도키아 신학자들이 삼위일체의 케리그마적 속성이라고 부른 것만을 고려했기 때문일 수 있다.

p238 아우구스티누스는 서구인들에게 곤혹스러운 유산을 남겼다. 인간성의 만성적 결함을 가르치는 종교는 사람들을 자기 소외에 빠뜨릴 수 있다. 그의 원죄론에서 비롯된 인간 소외는 섹슈얼리티의 폄하, 특히 여성에 대한 폄하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본래 기독교는 여성을 긍정적으로 생각한 종교였으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대부터 서구 문화에 여성혐오의 경향이 만연하기 시작했다.

p266 아랍어의 특별한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없는 서구인에게 쿠란은 반복적이고 지루해 보인다. 쿠란은 같은 주제를 몇 번이고 반복하는 것 같다. 그러나 쿠란은 개인이 정독하는 것이 아니라 전례에서 암송을 위한 것이다.

p271 쿠란은 신의 징표와 메시지를 해독하는 지성이 필요함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무슬림은 이성을 버릴 것이 아니라 세상을 주의 깊게 그리고 호기심을 푸고 바라봐야 한다. 이러한 태도 덕분에 훗날 무슬림은 자연과학의 건강한 전통을 세울 수 있엇고, 기독교와 달리 자연과학이 종교를 위협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p289 무슬림은 이슬람 시대의 시작을 무함마드가 탄생한 해나 그가 계시-결국 새로운 것은 없었다-를 처음 받은 해가 아니라 이슬람을 정치적 현실로 만듦으로써 신의 계획을 역사에 구현하기 시작한 히즈라의 해로 본다.

p295 기독교인이 무슬림의 정치에 대한 관심을 이상하게 여긴다면, 난해한 신학적 논쟁에 대한 자신들의 열정이 유대인이나 무슬림에게 똑같이 이상하게 보인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p302 우리가 신을 이해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신이 될 수 없으며 단지 인간의 투영일 뿐이다. 신은 선과 악에 대한 인간의 관념을 초월하며 인간의 기준과 기대에 얽매이지 않는다.

p325 그리스 정교도에게 타보르산의 그리스도가 신화된 인간을 나타낸 것처럼, 붓다가 모든 인류가 이룰 수 있는 깨달음을 구현한 것처럼, 이맘의 인간 본성도 그가 신을 완전히 받아들임으로써 변모되었다.

p343 어떤 사람들은 이성보다 더 높은 힘을 지니는데, 알-가잘리는 이를 예언자적 정신이라고 불렀다. 이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예언자적 정신이 존재함을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

p363 안셀무스는 언젠가 신조가 이해되기를 바라며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자고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주장은 사실 이렇게 번역되어야 한다 “이해할 수 있기 위해 나 자신을 헌신한다”

p368 그러므로 인간이 신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은, 신이 인간 이해의 영역을 초월함을 깨닫고 인간이 신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아퀴나스가 신학대전의 마지막 문장을 구술할 때 갑자기 탄식하며 머리를 양손으로 감쌌다는 이야기가 있다. 필경사가 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는 자신이 본 것에 비하면 자신이 쓴 모든 것이 지푸라기라고 말했다고 한다

p401 이 글은 라비아의 유명한 기도문과 유사했다. “오 신이시여, 만일 제가 지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당신을 섬긴다면 차라리 저를 지옥 불에 태워 없애소서. 만일 제가 낙원에 대한 욕심 때문에 당신을 섬긴다면 저를 낙원에서 쫓아내소서. 그러나 만일 제가 오직 당신의 영광을 위해 당신을 섬긴다면 당신의 영원한 아름다움의 은총을 제게서 거두어 마소서”

p411 신비주의는 유일신 종교에 더 고요한 영성을 도입하고 있었다. 외부의 실제와 충돌하는 대신 신비주의자 내면에서 빛이 나왔다. 사실의 전달은 없었다. 그보다 인간의 상상력을 발휘해 ‘순수한 이미지의 세계’인 알람 알-미탈을 도입함으로써 사람들이 신에게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p417 이븐 알-아라비도 수피즘을 신봉하는 이슬람 신비주의자들과 유사하게 인간의 상상력에 중심을 둔 고도의 개인적 영성 수행에서 출발해 초인격적 신 이해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는 신 이해와 관련해 여성의 이미지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남달랐다

p452 에스파탸 무슬림은 오랜 세월 유랑 생활을 한 유대인들은 그들의 몰락을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 유대인에게 닥친 가장 큰 재앙으로 여기며 슬퍼했다. 에스파냐 유대인의 추방 경험은 그 어느 때보다 유대 종교의식에 깊이 자리 잡았고, 새로운 형태의 카발라와 새로운 신 개념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p455 15세기와 16세기에 세 개의 새로운 무슬림 제국이 창건되었다. 소아시아와 동유럽의 오스만 튀르크, 이란의 사파비, 인도의 무굴. 이러한 새로운 모험은 이슬람 정신이 결코 죽어 간 것이 아니라 재앙과 붕괴 이후에도 무슬림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영감을 불어넣었음을 보여준다.

p460 아크바르는 자신이 만든 수피 교단인 신성한 유일신교에 헌신했는데, 올바르게 인도된 종교라면 어느 종교에서든 유일신이 자신을 드러낸다는 신념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p478 1484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는 교서를 내렸다. 이는 16세기와 17세기 유럽 전역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마녀사냥 광풍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공동체를 똑같이 괴롭힌 마녀사냥은 서구 영성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냈다. 이 끔찍한 박해 속에서 수천 명의 남성과 여성이 놀라운 죄를 자백할 때까지 잔혹하게 고문받았다.

p491 성서를 상징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 시작하면 그 신을 이해하기는 불가능해진다.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말 그대로 책임이 있는 신을 상상하는 것은 모순을 초래한다. 성서의 신은 초월적 실재의 상징이 되기를 멈추고 잔혹하고 독재적인 폭군이 된다. 에정설은 그러한 인격화된 신의 한계를 드러낸다

p497 16세기와 17세기에 무신론자라는 말은 논박을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무정부주의자나 공산주의자로 부른 것과 거의 마찬가지로 어떤 적이든 무신론자로 부르는 것이 가능했다

p500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카톨릭 교회가 지동설을 비난한 것은 창조자 신에 대한 믿음을 위협해서가 아니라 성서에 나오는 신의 말씀과 모순되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p514 본질적으로 비주의적인 이 체험은 파스칼의 신이 이 장에서 고찰한 다른 과학자나 철학자의 신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신은 철학자의 신이 아니라 계시의 신이었다.

p517 기독교인은 삶의 무의미와 절망에 직면하여 신앙을 키우고 신에 관한 감각을 쌓음으로써 인생의 의미를 재발견할 것이다. 파스칼에게 신은 살아 움직이는 실체였으며, 신앙은 지적 확실성의 문제가 아니라 막연한 어둠의 심연 속으로 뛰어드는 용기 있는 결단이자 윤리 의식을 일깨우는 체험이었다.

p536 스피노자는 유럽의 어떤 종교 공동체에도 속하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서구에서 하나의 추세가 될 자율적이고 비종교적인 이념의 원형이었다. 20세기 초 많은 사람들이 스피노자를 근대성의 영웅으로 존경했는데 그의 상징적 추방과 소외, 비종교적인 구원을 위한 탐색에 친밀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p544 웨슬리가 전한 신앙은 거듭남의 체험이 핵심이었다. 그는 이 체험을 끊임없이 인간 영혼 속에 살아 숨 쉬는 신을 경험하는 것이며, 넘치는 감사의 마음으로 신을 사랑하고 온유와 인내의 마음으로 신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p550 조지 폭스는 퀘이커교도에게 침묵 속에서 신을 기다릴 것을 가르쳤는데, 그것은 동방 정교회의 헤시카즘 또는 중세 철학자의 부정의 길을 연상시켰다. 삼위일체 신이라는 오래된 개념이 무너지고 있었다.

p587 내가 비록 무신론자들과 잘 지내지만, 나는 신을 믿습니다. 독미나리를 파슬리로 착각하는 건 매우 중요한 문제지만, 신을 믿거나 안 믿거나 하는 문제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디드로는 본질적인 문제를 매우 정확히 짚었다. 신은 개인의 주관적 체험 속에서만 존재한다.

p592 디드로, 돌바크, 라플라스는 그러한 시도로부터 고개를 돌렸고, 극단적인 신비주의자들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저편 어딘가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로부터 머지않아 다른 과학자들과 철학가들이 의기양양하게 신의 죽음을 선언하게 된다.

p608 서방 기독교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인간의 죄와 악, 투쟁과 고통을 강조했는데, 이런 경향은 가령 동방 정교회 신학에서는 낯선 것이었다. 좀 더 낙관적인 인간관을 지녔던 포이어바흐와 오귀스트 콩트 같은 철학자들이 과거 기독교인들에게서 자신감을 빼앗아 갔던 이 같은 신을 제거하고 싶어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p613 아들러에게 신은 (인간이 추구하는) 탁월성을 보여주는 훌륭하고 효과적인 상징이었다. 카를 융의 신은 각 개인이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심리적 진실이었다는 점에서 신비주의자의 신과 닮았다

p620 프로이트는 현명하게도 어떤 식으로든 종교를 강제적으로 억압하는 것은 파괴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섹슈얼리티와 마찬가지로 종교도 삶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끼치는 인간의 욕구에 해당한다. 종교에 대한 억압은 극심한 성적 억압 못지않게 폭발적이고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p645 미국의 종교 사회학자 피터 버거의 역사 해석에 대한 지적은 매우 의미심장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는 우리가 과거의 역사를 당대와 비교할 때 흔히 이중 기준을 지니게 된다고 지적한다. 인간은 역사적 과정을 이해할 때, 과거는 철저히 상대화해 분석하지만 현재 상황은 절대화해 분석 대상에서 제외하고는 한다.

p659 순례자는 카바에 도착해 신전이 비어 있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는다 “이곳은 너의 종착지가 아니다. 카바는 길을 잃지 않도록 방향을 제시해주는 이정표다” 카바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었으며 신에 대한 모든 인간적 표현을 초월하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줬다.

p674 신비주의자들은 신을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객관적 사실로 보는 대신 존재의 바탕에서 신비롭게 경험되는 주관적 체험이라고 주장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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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역사를 품은 여행 - 경주 문화유적 답사 기행의 길잡이
심상섭 지음 / 책과나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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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 역사를 품은 여행

 : 심상섭

 : 책과나무

읽은기간 : 2023/12/20 -2023/12/23


경주는 여러번 갔었는데 남산을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이 책의 글과 사진을 보니 후회됐다.

경주 남산을 가지 않으면 경주를 다녀왔다고 이야기하면 안될 것 같다.

사진찍기 좋은 시간대도 알려주고, 또 경주에서 왜 이런 유적이 의미있는지도 배웠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는데, 나는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돌아다녀야겠다. 

대충 아는 건 좀 있는데 제대로 아는것, 또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모른다..

반성한다. 

내 생각을 바꾸고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은 좋은 책이다. 

이 책은 좋은 책이다. 


p5 삼국유사에는 경주 남산을 두고 사사성장 탑탑안행이라고 표현했는데, ‘절 집의 불빛은 별빛처럼 빛나고, 탑들은 기러기처럼 줄지어 서 있다는 뜻이다. 그만큼 사찰과 탑이 많다는 이야기다

p22 아들 출산과 관련해서 이 불상의 뒷면에도 비밀이 숨어 있다. 이 불상은 뒤에서 보면 남근석을 연상케 한다. 우리 옛 여인들은 아들 낳기를 소원하면서 남근석에서 기도를 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 불상은 아들 출산을 도와주는 부처인 안산불이라고도 한다.

p37 저녁이 되면 이요당과 못가에 조명이 들어온다. 이때 연못에 비친 이요당의 반영은 더 이상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낸다. 그래서 요즘은 야경 촬영지로도 각광받고 있다

p44 경주 남산에는 147곳의 절터에 불상 129구, 석탑 99기, 석등 22기 등 무수히 많은 유물들이 산재해 있다. 그중에서 국가지정문화재로는 국보 1점과 보물 16점 그리고 사적 15개소가 있다. 남산에 있는 수많은 문화재 중에서 유일한 국보가 바로 칠불암 마애불상군이다.

p54 사실 이 보살상은 수십 길 낭떠러지 위에 있는 바위 면에 새겨져 있어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따라서 발아래의 구름무늬와 잘 어우러져 마치 보살이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듯한 모습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p56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에는 일출 때 사진 촬영을 많이 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일출 사진뿐만 아니라 색다른 사진을 촬영할 수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겨울철 오후에 해가 넘어가면 보살상에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그때 보살상에 부분적으로 빛이 들어오는 순간을 경험하게 되었다.

p75 문무왕때 선덕여왕릉 아래에 사천왕사가 건립되면서 그 예언이 맞아떨어졌다. 불교에서 사천왕이 다스리는 사천왕천 위가 도리천이기 때문이다.

p85 결국 이런 경쟁이 두 가문 사이의 싸움으로 번지게 되자, 1730년 경주부윤이었던 김시형이 나서서 박씨 가문과 타협하게 되었다. 그 결과 경주 남산에 있는 왕릉급 무덤 중에서 동남산 지역은 모두 김씨 왕릉으로, 오릉과 서남산 지역은 박씨 왕릉으로 비정하게 되었다. 근거가 부족한 상황에서 편의적으로 무덤의 주인을 지정한 셈이다. 이처럼 확실한 근거없이 주변 상황과 비교해서 지정하는 것을 비정이라고 한다.

p97 석가모니불은 현생의 중생들을 고통 속에서 구제하고자 하는 부처님이며, 아미타불은 중생이 죽었을 때 극락으로 인도하는 부처님이시다. 따라서 선각육존불은 현생과 내세가 연결되고 있음을 동시에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p110 금오신화는 주로 남녀 ㄴ의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단편소설을 묶은 일종의 소설집이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으로 5편이지만, 처음에는 이보다 더 많은 소설이 실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p123 사실 신라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큰바위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따라서 큰 바위가 숭배의 대상이었던 상태에서 마애불이 새겨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부처를 새겨 놓은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바위 속에 있던 부처를 불필요한 부분을 걷어내고 찾아낸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p135 왕은 살짝 비꼬듯이 “스님은 어디 가서 왕과 같이 제사를 지냈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자 스님은 “폐하도 다른 사람에게 진신석가를 봤다고 말하지 마시오” 하면서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때 12살 어린 효소왕이 깜짝 놀라 신하들을 시켜 스님을 찾아가게 했다. 스님이 사라진 곳으로 따라가 보니, 비파바위 위에 지팡이와 발우만 놓고 바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p146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은 온화하면서도 부드럽고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는 아름다움 때문에 신라를 대표하는 불상으로 손꼽힌다. 중앙의 본존불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 있으며, 손 모양은 시무외인과 여원인을 취하고 있다. 또 발은 귀엽게 표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p194 진평왕은 재위 기간이 54년으로 신라 왕 중에서 박혁거세 다음으로 왕위에 오래 머물렀던 왕이다. 진평왕의 큰 딸은 선덕여왕이며, 둘째 달 천명공주는 무열왕의 어머니이다. 그리고 셋째 딸은 백제 무왕과 결혼한 선화공주이다.

p200 이 탑은 국보로 지정될 만큼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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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H. 로렌스 유럽사 이야기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지음, 채희석 옮김 / 페이퍼로드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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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사 이야기

 : D.H 로렌스

 : 페이퍼로드

읽은기간 : 2023/09/03 -2023/12/14


통속소설을 쓰던 양반이 이렇게 멋지게 유럽사 이야기를 쓴다는게 좀 신기하다.

유럽사의 통사로 읽는 재미가 있다. 

20세기에 살던 영국의 글쟁이는 자신들 유럽의 역사를 어떻게 보는지 알수 있다. 곰브리치 세계사와는 또 다른 읽는 맛이 느껴진다. 

역시 역사책은 여러 버전을 읽어봐야 한다. 내용이 방대하고 책도 길어서 휴가때 여유있게 몰입해서 읽으면 더 나을 것 같은 책이다.


p10 우리는 사실을 확인하고 검증하는 능력, 즉 사실에 순서와 질서를 부여하는 능력으로서의 역사적 능력을 너무 확신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과학일 수도 있는-의 잡일에 불과하다. 진정한 역사는 참된 예술, 다시 말해 허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드러낸 진실된 예술이다.

p32 수석 아우구스투스인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소아시아와 이집트, 그리스 및 지금은 터키로 알려진 지역을 맡았다. 터키는 아름답고 풍요로우며 역사가 오래된 곳이었다. 막시미아누스는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를 통치했으며, 갈레리우스는 다뉴브 강의 방어와 발칸 반도 통치를 맡았다. 또 콘스탄티우스는 갈리아와 스페인, 영국을 관장하면서 동시에 라인 강과 스코틀랜드 장성 방위를 책임졌다.

p55 로마의 시민들은 유대인의 성물들을 보고도 별로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선민사상에 찌든 유대인의 광적인 자만심에 이미 혐오감을 품고 있던 이들에게 성물은 그저 보기에 좋은 보물 그 이상은 아니었다.

p72 로마 정부는 항상 모든 일에 공정하려 했다. 하지만 재판을 내릴 행정관들조차 기독교도들을 싫어했다. 그들이 범죄를 저질러서가 아니라, 그들이 정부를 적대하기 때문이었다.

p84 로마제국의 힘이 미치지 않는 저 너머에는 위대한 생명력의 원철이라고 할 무리들이 둘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세력은 스키타이족이라고도 불리는 타타르족으로, 이들은 크림 반도에서 중국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흩어져 살았다. 말타기에 능하고 성질이 사나우며 피부가 검은 아시아계 인종인 유목민들로 그 수가 엄청나게 많았다. 이들보다 로마에 좀 더 가까이 있던 종족은 발트 해 주변에 살았으며, 이들이 게르만족의 모체가 되었다.

p93 자유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살기를 좋아하는 게르만족은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거나 다른 사람의 통제를 받는 일을 견디지 못했다. 그들에게 족장은 전쟁에서 그들을 인도하는 사람이었고, 가장 용감한 전사들 중에서 선발된 사람이었다.

p108 로마제국이 내부적으로 파멸하고 있는 동안 외부에서도 불길한 사건이 일어났다. 375년은 세계 역사에서 분기점으로 기록되는데, 이것은 광활한 미지의 아시아 대륙에서 훈족이 등장해 불가강을 건너 유럽으로 쳐들어온 해였기 때문이다.

p117 알라리크는 자신의 위대한 적수가 수치스럽게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어리석은 호노리우스 황제와 교활하게 협상을 하는 척해서 라벤나가 조용히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얻은 틈을 이용해 고트족 군대를 이끌고 플라미니우스 가도를 따라 곧장 로마로 쳐들어갔다.

p121 415년에 알라리크를 이어 왕이 된 아타울푸스는 로마와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개선시킨 후, 서고트군을 이끌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파괴를 일삼는 반달족을 쫓아내기로 결심했다. 원정은 성공했다. 그는 야만적인 반달족을 대파하고 북부 스페인에 왕국을 세웠으며, 바르셀로나를 수도로 정했다.

p128 우리가 언급하지 않은 위대한 야만족이 하나 있는데, 이들의 이름은 고대 세계전역에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대명사가 되었다. 앞에서 375년은 세계의 역사에 새로운 전환점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는데, 그 해가 바로 훈족이 볼가 강을 넘어온 해였다.

p141 만약 452년에 아틸라가 마른 강 인근의 카탈루냐 평원에서 일어난 살롱 대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더라면, 유럽은 타르타르족의 통치 아래 들어갔거나 적어도 신의 회초리한테 아주 끔찍스런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p143 항구 주변의 땅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사막이었다. 아필레이아 시와 인근 마을에서 겨우 도망쳐 나온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얕은 바다 주변의 늪지대와 섬으로 숨어 들어가서 초라한 오두막을 짓고는 생선과 조개 따위를 먹고 살았다. 이것이 훗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다 위의 도시, 베네치아가 형성되는 최초의 시작이 되었다

p160 갈리아에서 카이사르는 300만 명의 갈리아인과 싸웠다고 전해진다. 그 중 100만 명은 죽었고, 100만 명은 노예가 되었으며, 나머지 100만 명은 자유인으로 남았다.

p178 전투는 프랑크군에게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엇다. 미친 듯이 흥분한 상태로 전쟁을 치르다가 자신이 전쟁에 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클로비스는 갑자기 집에 있는 왕비를 생가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만약 클로틸드의 신이 자기에게 승리를 준다면 그녀의 신앙을 받아들이겠노라고 외쳤다. 그는 순간적으로 새로운 기운을 얻어 돌진해서 적군을 휩쓸었고 전쟁은 판도가 바뀌었다. 알레마니군은 극심하게 패주하고 말았다.

p191 샤를마뉴는 여러 면에서 위대한 사람이었다 그는 학문에 조예가 깊었으며, 프랑스어로 받을 수 있는 교육은 모두 받았다. 훌륭한 건물이나 다리, 길도 많이 건설했고, 농업을 장려해서 사람들이 굶어 죽는 것을 막았다. 그는 신하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세상에 견줄 자가 없을 정도로 뛰어나게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 동시대 사람들 중 오직 하룬 알 라시드만이 그와 비교될 수 있었다.

p196 987년에 칼롤링거 왕조가 끝나자, 프랑스 공작 위그 카페가 자신이 프랑스 왕임을 선포했다. 이것은 그가 여전히 독립적으로 남아 있던 모든 공작들과 백작들을 이끄는 전쟁 사령관이자 지도자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위그 카페와 함께 진정한 프랑스 왕국이 시작되었다.

p246 가엾은 알렉시우스 황제는 투르크인들에 대항하기 위해 로마의 기독교 세계에 도움을 호소했다가 이제는 무섭고 파괴적인 우군이 줄을 지어 떼거리로 몰려와 영토를 짓밟는다는 소식을 접해야만 했다.

p258 십자군은 사흘 동안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이슬람교도들을 학살했다. 피가 기독교도들의 발목까지 차올랐다고 전해지고 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예배당 안에 갇혔다가 불에 타 죽었다. 칼에 찔려 죽은 이슬람교도의 수는 70,000명에 이르렀다.

p295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사들은 다른 수도사들과 달랐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의 격리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들의 의무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갖지 않고, 인류에게 사랑을 준다는 전제 하에서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모든 사람들을 가르치고 돕고 사랑하는 것이었다.

p302 두 명의 교황이 생겨난 셈이었다. 우르바누스는 로마에서, 클레멘스는 아비뇽에서 교황청을 열었다. 하나의 교회 안에 두 파벌의 추기경들이 생겼고 교회의 행정부서도 둘로 나누어졌다. 이로 인해 유럽은 둘로 분열되었는데, 이 사건을 대분열(서방 교회의 분열)이라고 부른다.

p307 그들은 후스에게 화형을 선고했다. 1415년 7월 6일 고결한 심성을 가진 후스는 콘스탄츠의 시장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황제 지기스문트는, 자신이 약속한 안전은 여행의 안전을 뜻한 것이며 콘스탄츠에서의 이단자 처형재판으로부터 보호해준다는 뜻은 아니었다고 변명했다

p321 아마도 유럽의 역사 2,000년 동안 가장 놀라운 세기는 15세기였다. 이시기에는 이전 어느 시기에도 없던 위대한 화가, 시인, 건축가, 조각가, 과학자, 학자들이 존재했다. 이시기 사람들은 민감하고 예민하며, 열정과 상상력이 넘쳤으며, 생명력으로 가득차 있었다.

p324 15세기 이후 국경이 고정된 경계선으로 정착될 때까지, 유럽은 하나로 통일된 교회의 영역이었다.

p332 단테의 위대한 시와 페트라르카의 시는 진정한 근대문학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테프라르카의 친구들은 하찮은 이탈리아 말로 시를 써서 소중한 시간을 낭비한다고 그를 질책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라틴어로 감정을 표현한 글은 모두 잊혔지만, 당시에는 무시당했던 이탈리아어로 쓴 시가 가장 아름답고 가장 생동감 있는 작품으로 읽혀지고 있다

p365 투르크군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침공했다. 그리고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다른 여러 가지 분규들 때문에 황제는 개신교도들과 대치할 입장이 못 되었다. 황제는 이후 12년간이나 종교 개혁가들을 다룰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했다. 그 사이 종교 개혁가들은 독일 안에서 대단히 강력한 세력을 다져나갈 시간을 벌었다

p387 그러나 루이 14세의 긴 통치는 재앙과 악평으로 끝을 맺었다. 오만한 군주는 예외 없이 전쟁을 일으켜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려 든다. 그러지 못하면 위신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p401 프랑스를 혁명의 도가니로 돌고 간 것은 사람들의 고통이 과도해서 아니었다. 물론 불가피하게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혁명의 원인이 된 것은, 눈부신 과거가 있었으나 그것은 사라졌고, 이제는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염원만 남아 있다는 정신적 분노였다. 그것은 자신들의 삶이 어리석음과 낭비를 지탱하기 위해서 이용되었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분노였다.

p423 실제 정부의 운영은 루이 14세 시절과 마찬가지로 교육받은 부유한 시민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가난한 사람들의 위치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혈통 대신 돈이 통치를 하게 된 것이 변화의 전부였다.

p442 1795년 3차이자 마지막이 된 폴란드 분할이 실시되었다.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가 각각 자신들의 몫을 챙기고서는 폴란드라는 이름이 유럽의 지도 위에 다시는 등장하지 않도록 하자고 약속했다.

p476 이탈리아에는 마치니와 가리발디 같은 정치적인 동시에 종교적인 열정에 가득 찬 이상주의자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작게 분열된 나라들을 합쳐 통일된 권력을 장악하겠다는 야심찬 계획과 결심으로 가슴을 채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와 바로우르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p487 다음날 가리발디는 아쉬움을 남긴 채 카프레라 섬에 있는 농장으로 갔다. 가난했던 사람답게 가난을 택한 것이었다. 왕과 그의 일행은 가리발디가 떠난 것을 섭섭해 하지 않았다. 결국 가리발디같은 사람은 그 존재만으로도 그들 계급의 특권에 위협이 되며 왕가라는 몸에 박힌 가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p494 로마제국 다음에는 신성로마제국이 일어났는데, 이 제국은 바르바로사와 프리드리히 2세 때 전성기를 맞았으나 나폴레옹의 등장과 함께 다시 사라졌다. 교황청은 신성로마제국과 함께 대등하게 공존했지만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에 의해 교황들을 바티칸의 좁은 경계선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p511 의회는 파리 시민들을 저지하기로 의결했다. 전쟁에서 막 돌아온 군대를 이끌고 티에르가 앞장서서 파리로 진구해 들어갔다. 프랑스 군대가 프랑스의 수도로 행군해서 프랑스 사람이 프랑스 사람을 사납게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아직 파리에서 철수하지 않은 독일 군대는 두 패로 갈라진 프랑스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참담한 싸움을 지켜보았다.

p514 생산적 노동자대중에 의해 통치되는, 그리고 모두가 물질적으로 평등한 위대한 통일유럽은, 한 사람의 위대한 선택된 인물, 거대한 전쟁을 이끌면서 폭넓은 평화를 다룰 수 있는 영웅의 주변에서 뭉치지 않는 한, 오래 지속되고 굳건하게 남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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