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무해한 이슬람 이야기 - 천의 얼굴을 가진 이슬람 문명의 위대한 모험
황의현 지음 / 씨아이알(CIR)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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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체로 무해한 이슬람 이야기

 : 황의현

 : 씨아이알

읽은기간 : 2024/01/03 -2024/01/08


책의 후기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대체로 무해한... 이라는 말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지구를 소개하는 말이다.

그런데 제목에 약간은 속은 느낌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이슬람은 테러를 자행하고, 여성을 억압하는 무도한 종교가 아니라 일반적인 다른 종교와 다르지 않다라는 의미로 쓴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은 이슬람에 대해서 어느정도는 아는 사람을 대상으로 쓴 느낌이다. 

이슬람의 역사와 경전이 후대에 씌여지면서 왜곡되고 윤색된 부분이 많다라는 수정주의의 입장에서 쓰여진 책이다.

그러다보니 세계사개론에서 이슬람에 대해서 좀 읽어본 나같은 초보자에게는 기본도 모르는데 응용을 배우는 느낌이었다. 

새롭게 배운 내용들이 많은데-아라비안 나이트라든가 그림이나 조각에 대한 이슬람 사상등- 이게 이슬람역사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내용인지, 수정주의의 주장인지가 좀 헷갈리기는 하다.

그만큼 내가 이슬람에 대해서는 모르는게 많다는 뜻이겠지.

세계사에 큰 획을 긋고 지금도 많은 이슈를 몰고다니는 이슬람에 대해서 이렇게 무지한 것도 좀 부끄럽다.. 

조금 더 관심을 갖고 공부해봐야할 것 같다..

재미있게 잘 읽었다. 


p4 결국 622년, 무함마드와 추종자들은 메카 유력자들의 박해를 이기지 못하고 메카 인근의 야스립이라는 곳으로 피했다. 히즈라, 즉 이주라고 불린 이 사건으로 역사상 최초의 무슬림 공동체가 야스립에 만들어졌다. 야스립은 예언자의 도시, 줄여서 메디나라고 불리가 된다.

p9 수정주의 해석에 관한 논의를 소개하는 것은 이슬람이 진리인지 거짓인지 평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세계의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이슬람도 다양한 문화가 활발하게 교류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던 환경에서 나타났으며, 현재 모습에 이르기까지 오랜 변화르 ㄹ거쳐 왔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p27 이슬람의 기원에 관해 기존 통념으로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쿠란 구절을 근거로 수정주의 학자들은 쿠란이 아라비아의 히자즈가 아닌 다른 곳에서 형성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대표적으로는 존 완스브로는 쿠란이 메소포타미아, 즉 오늘날의 이라크 지역에서 완성되었다고 주장한다.

p33 오늘날 많은 학자는 무슬림 기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완스브로의 문제의식에는 공감한다. 그러나 쿠란의 형성과 이슬람의 기원에 관한 완스브로의 설명 역시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정설과는 거리가 멀다.

p35 쿠란을 읽는 방식은 알핫자즈의 정본 외에도 여러 개가 존재했으며, 9세기가 되어서야 이븐 무자히드라는 인물에 의해 7개의 정통 독법이 확립된다. 오늘날 정본으로 쓰이는 쿠란은 이 7개 독법 중 하나를 따라 1924년 이집트에서 만들어진 판본이다.

p85 이븐 할둔에 따르면 우마르가 쿠란 이외의 다른 책은 필요하지 않다고 선언하며 파괴한 것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아니라 페르시아의 도서관이었다. 우마르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의 도서관도 똑같은 이유로 파괴한 것일까?

p133 여 칼리프가 권력을 되찾고 노예 군대를 견제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결국 칼리프의 권력은 936년 칼리프 알라디가 투르크 노예 출신의 장군인 무함마드 이븐 라이크에게 전권을 맡길 정도로 추락했다

p137 중세 이슬람권에서 대중이 존경을 바치고 따르던 대상은 권력을 가진 재상이나 장군이 아니라 권력과 거리를 두고 경건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쿠란과 무함마드의 전승에 해박하고 올바른 무슬림이 따라야 하는 규범이 무엇인지 제시하는 울라마, 신과의 하나됨을 추구하는 신비주의 신앙을 가츠리는 스승들은 대중 사이에서 누리는 인기, 존경, 영향력을 바탕으로 통치자와 대중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p152 국가의 지원이 법학과 종교학을 가르치는 마드라사에 집중되고 울라마가 통치자와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에서 외부의 지원을 받지도 못하고 후학을 양성할 제도적 기반도 없던 자연과학이 여전히 활력을 유지했다면 그것이 더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p172 무슬림의 지배는 분명히 기독교도에게 축복이 아니었지만, 비무슬림에 대한 탄압이 정점에 이르렀던 맘루크 시대에도 기독교도를 완전히 말살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이슬람을 순수한 관용과 평화의 종교로 이상화하거나 다른 종교와 끝없이 충돌해온 폭력적인 종교로 비난하는 단편적인 관점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무슬림과 비무슬림의 관계가 가진 다면적 성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p181 투르크인은 이슬람권에 종말을 가져오지 않았다. 하지만 투르크인으로 대표되는 초원의 유목민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두려움은 여전히 남아있었던 것 같다. 정주 지역의 무슬림이 유목민에 대한 품은 공포와 두려움은 몽골인이 저지른 무시무시한 학살과 파괴로 현실이 되었고, 이와 함께 유목민을 종말을 가져올 야만인, 파멸을 알리는 전조로 보던 전통 또한 다시 살아났다.

p186 몽골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지역에서는 칭기스칸과 몽골인은 여전히 이슬람과 무슬림의 적, 파괴자이자 학살자, 곡과 마곡과 같은 사악한 존재였다. 오늘날 일반적인 시각, 즐 이슬람권 문명이 쇠퇴하고 중동이 퇴보한 책임은 모두 몽골인에게 있다는 시각은 몽골 지배를 받지 않았던 무슬림의 해석과 관점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러나 몽골의 지배를 받는 지역에서는 칭기스칸과 몽골인을 구원자이자 이슬람의 보호자로 바라보는 완전히 다른 기억과 해석방식이 존재했다.

p191 몽골 지배 아래에서 중동의 수학과 과학적 성취가 중국으로 전파되었고 중국의 회화가 페르시 회화에 영향을 미쳤다. 몽골인들의 직접적 지배가 미치지 ㅇ낳은 예멘에서도 아랍어, 페르시아어, 투르크어, 몽골어, 그리스어, 아르메니아어 6개 언어로 된 백과사전이 편찬되기도 했다.

p212 이스마일파는 쿠란에서 외면적으로 드러난 가르침과 오직 소수의 이맘에게만 허용된 쿠란 속에 숨겨진 진정한 진리를 열두 이맘파보다 엄격하게 구분한다. 모두에게 열린 율법과 규범인 샤리아는 표면적인 계시일 뿐 참된 진리는 오직 이맘만이 할 수 있는 신비한 해석을 통해 드러날 수 있다.

p225 맘루크 왕조와 일칸국의 전쟁은 이제 무슬림과 무슬림 사이의 전쟁, 원칙적으로는 있어서는 안되는 전쟁이 되어버린 것이다. 가잔은 또한 이슬람으로 개종했을 뿐만 아니라 이슬람의 군주를 자처하며 맘루크 술탄의 종교적 정통성에 도전했고, 심지어는 맘루크 통치자들이 이슬람법을 어겼다고 주장하며 시리아를 침공하기도 했다.

p227 쉬아파를 상대로 이븐 바투타가 보여주는 강경한 태도는 이븐 바투타보다 앞선 시대의 여행가인 이븐 주바이르가 쉬아파에 별다른 적의나 반감을 드러내지 않는 것과 대비된다. 이븐 주바이르는 그의 여행기에 쉬아파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도 않으며 이븐 바투타와 달리 모든 쉬아파를 라피다와 같은 비하 표현으로도 부르지 않는다.

p230 종파 차이는 그 자체만으로 갈등을 만드러애지 않는다. 차이는 외부의 위협, 정세 불안정, 권력 관계의 역전과 같이 종파 간 관계를 악화시키는 변화가 나타날 때 비로소 갈등의 원인이 된다.

p239 몽골의 바그다드 함락과 압바스 칼리프조의 멸망에 관해 이처럼 서로 다른 기록은 중세 이슬람권에서 역사 기록과 문학 사이의 경계가 흐릿했음을 보여준다. 중세 이슬람권의 역사가들은 과거 사실의 객관적 전달보다는 기록자 개인이 지닌 특정한 관점에 따라 특정한 목적과 의미를 전달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p265 우마이야 시대만 하더라도 항상 전염병이 유행하던 시리아에서는 압바스 칼리프조가 세워진 이후에는 10세기까지 전염병 유행이 없었다고 한다. 압바스 가문은 이러한 우연의 일치를 선전전에 활용했다. 다마스쿠스에 입성한 뒤 압바스 가문의 한 장군은 “다마스쿠스 시민은 신에게 감사해야 한다. 압바스 가문이 집권한 이후 전염병이 사라졌기 때문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p270 이집트와 시리아의 흑사병 유행은 일시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후 흑사병은 이 지역의 풍토병으로 자리르 ㄹ잡아 시도 때도 없이 유행했다. 돌스에 따르면 1347년부터 1517년까지 이집트에서는 총 28번, 즉 5년에 한 번 꼴로 흑사병 유행이 있었다.

p273 무슬림은 흑사병 유행 상황에서도 이슬람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 즉 올바른 의례와 규범을 지키고 공동체의 결속을 유지하는 것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p276 영혼이 기쁨, 고요, 휴식, 희망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다. 유쾌하고 매력적인 벗과 함께 해야 한다. 물론 가장 좋은 벗은 쿠란이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관심을 도릴 수 있는 역사책이나 재미있는 이야기책, 사랑 이야기도 좋다. 슬픈 이야기와 흥분은 피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은 신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p282 천주교도와 정교회 신도가 집에 성상과 성화를 모신다면 무슬림은 신의 이름과 쿠란 구절 또는 무함마드와 그의 교우들의 모습을 묘사한 글인 힐야를 벽에 걸어둔다

p292 크레스웰은 질문을 던진다. 시각 예술에 관한 금기는 실제 무함마드의 명령이 아니라 압바스 시대 무슬림이 그림과 조각에 대해 가졌던 부정적 시각을 반영한 결과일 수도 있지 않을까? 달리 말하자면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그림과 조각을 금기시하는 이슬람은 사실 무함마드의 가르침이 아닌 압바스 시대에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p303 이븐 알나딤과 역사학자 알마스우디 오묻 아라비안나이트가 원래 고대 페르시아의 왕과 영웅들을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전한다는 점 역시 아라비안 나이트가 원래 페르시아 지역에서 만들어졌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아라비안 나이트보다는 페르시안 나이트에 가까운 셈이다

p307 19세기 이후 발견된 아랍어 원본들이 진짜 원본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사실 이 원본들은 갈랑의 프랑스어 번역본을 다시 아랍어로 번역한 결과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단 한 권도 발견되지 않은 아라비안나이트의 아랍어판이 18세기 이후 갑자기 우후죽순 등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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