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티움 해전 - 로마 제국을 만든 전쟁
배리 스트라우스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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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악티움 해전

 : 배리스트라우스

 : 책과함께

읽은기간 : 2023/08/03 -2023/08/16


악티움 해전은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를 이기고 로마의 초대 황제가 되는 분수령이 된 전쟁이다. 

카이사르,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아그리파, 클레오파트라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영웅들이 활약하던 시기라서 그런지 재미있게 읽었다.

특히 여러 문헌을 비판적으로 그리고 꼼꼼하게 읽어가며 내용을 정리해서인지 조감도를 보는 느낌으로 악티움 해전을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아그리파가 멋지게 안토니우스를 이긴걸로 알았는데 사실 해전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전세가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만큼 아그리파가 안토니우스의 아픈 곳을 잘 찔러서 꼼짝을 못하게 해놓았다는 뜻일게다.

그리고, 안토니우스쪽의 장군들과 클레오파트라와의 분쟁도 안토니우스가 바른 의사결정을 내리는 데 악영향을 끼쳤다. 결국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가 아니었다. 

클레오파트라의 능력도 매우 뛰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영리하고 멋진 여자인 줄은 알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다시 번성하게 하고, 이집트를 다시 이집트로 만들어낸 그녀의 공은 결코 작지 않다. 

남에게 의지하는 병력은 끝까지 잘되기 어렵다는 것도 배운다..

올해의 책으로 꼽는다. 재미있었다. 


p25 후대에 전해지는 문헌은 플루타르코스의 안토니우스의 생애가 유일하며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헌사료다. 뛰어난 저술가인 플루타르코스(서기 120년 이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루키우스 메스트리우스 플루타르코스)의 안토니우스의 생애는 대단한 걸작으로, 그가 집필한 플루타르코스 영중전에 들어 있는 고대 그리스-로마인 50명의 전기 중 백미다

p60 클레오파트라는 전반적으로 매력적인 모습이지만, 정말로 중요한 특징은 위풍당당함이다.

p65 정복 장군과 여왕 사이에는 화학적 결합 이상의 것이 작용했다. 52세 장군과 21세 여왕의 나이 차이, 혹은 이집트 왕조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그들의 관계가 설명되지 않는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는 그 시대의 가장 뛰어난 개인들이다. 둘의 만남은 서로를 알아보는 진정한 두 마음의 결합이라는 아주 희귀한 현상이었다. 만난 지 한 달 만에 클레오파트라는 임신했다.

p95 그 이야기는 정적들의 프로파간다였을 것이다. 벤티디우스는 로마로 돌아와 개선식을 거행했다. 그는 그 개선식을 부재중인 사령관 안토니우스와 함게 나누어 받았다. 당시 안토니우스는 여전히 동방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벤테디우스 이후 로마의 장군이 파르티아를 상대로 다시 승리를 거두기까지는 150년이 걸린다.

p98 자신의 이익이 중요하다고 해도 능숙한 조정 과정이 없으면 언제나 효력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며, 당시 로마에서는 옥타비아 같은 엘리트 여성이 그 같은 중개자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옥타비아가 타렌툼 조약의 배후 설계자까지는 아닐지라도 공식 중개인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p107 로마의 과거 역사를 살펴보면 정적들 사이의 평화적 공존은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마리우스와 술라,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를 보라. 이들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양상은 뚜렷하다. 권력자들 간의 파트너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p110 옥타비아누스가 3월 15일의 카이사르 암살 사건 직후 한 달 만에 정계에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내전이 종식되는 시점에 이르기까지, 두 정적과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중상모략의 비난이 활발하게 오갔다.

p149 옥타비아가 다가오는 전쟁을 슬퍼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런 전쟁의 원인인 양 비난받을 것을 슬퍼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약 이 기록이 그녀의 진짜 마음이었다면, 로마인들이 자신의 평판을 대단히 중요시했다는 사실과 부합한다.

p159 홍보전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집트 여왕은 거의 완벽한 적이었다. 여자, 외국인, 그리스인, 이집트인, 군주인 여왕은 로마의 편견이 완벽하게 표적으로 삼을 수 있는 좋은 텃밭이었다.

p169 아드리아아해와 이오니아해의 동쪽 해안은 항구, 섬, 지형지물, 좋은 정박지 등이 많은 데다 순풍이 불었다. 이 해역은 이탈리아의 동부 해안이 갖추지 못한 것들이 다 갖춰져 있었다.

p186 과거에 안토니우스는 굉장히 공격적인 지휘관이었으나, 아무리 호전적인 전사라 할지라도 모든 게 걸린 위중한 상황이라면 조심스러워지는 법이다. 더욱이 경험은 때때로 가혹한 선생이다.

p192 훌륭한 전략은 칼보다는 배고픔으로 적을 압박하는 것이다. 실제로 로마의 사령관들은 이미 기원전 3세기에 카르타고를 상대로 이런 작전을 구사한 적이 있다.

p213 아그리파는 메토네를 점령한 이후 해안에 상륙하러 온 상선들의 움직임을 추적했고, 그리스의 여러 지역에도 기습 공격을 펼쳤다. 이런 일들이 안토니우스를 몹시 심란하게 만들었다

p215 안토니우스는 메토네를 재탈환하지 못했다. 만약 일부 사료들이 말하는 대로 그 성채가 단단한 방어 시설을 갖추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아그리파가 그 요새를 필사적으로 차지하기 위해 꼼꼼하게 준비한 반면에 보구드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 함락의 원인이었을 것이다.

p233 기원전 32년 3월과 4월은 아토니우스에게 불길한 달이었다. 그는 옥타비아누스의 도해를 막지 못했고, 그 군대가 남진하는 것도 방해하지 못했으며, 악티움 북쪽의 고지인 미칼리치를 점령하는 것도 저지하지 못했다. 그것은 리더십의 실패였으나 충분히 만회할 수도 있는 실수였다

p258 설사 독자가 이런 선정적인 역사적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클레오파트라의 존재가 안토니우스 군대의 기강과 사기에 해로웠고 특히 지휘관급 인사들에게 아주 유해했다는 것은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p290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악티움은 로마 역사에서 제대군인들의 이름을 밝혀주는 유일한 전투이기 때문이다. 다섯 비석은 망자들 모두가 악티움 전사라고 알려준다. 이들은 옥타비아누스에게서 이탈리아 북부 식민 도시의 땅을 얻었다

p296 양군의 함대가 가까이 다가서면서 첫 단계로 취한 조치는 약간 거리를 두고서 투석기로 돌을 발사하는 것이었고, 좀 더 가까워졌을 때 화살을 발사하고 창을 던졌다. 때때로 화살과 창이 운 좋게도 적선의 조타수나 선장을 죽이는 수도 있었다. 하지만 움직이는 배에서 그런 무공을 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p301 그리스-이집트 함대가 그런 과감한 이동 작전을 수행할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특히 그 함대를 여자가 지휘하고 있었으니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평생 남자들에게 과소평가된 클레오파트라는 그런 방심의 허를 찌를 줄 아는 영리한 여자였다

p329 악티움 이후에 등장한 새로운 문제는 이집트를 어떻게 공격하여 차지할 것이냐였다. 우리는 이 침공 작전을 악티움 해전의 마지막 단계로 보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이 전쟁을 별개의 것으로 보아 알렉산드리아 전쟁이라고 불렀다

p343 겨울 항해는 가볍게 시도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옥타비아누스가 겨울 바다를 건너가기로 했다는 것은 그만큼 사태가 심각하다는 뜻이다.

p347 그는 여왕을 심각한 위협으로 보았을 것이다. 클레오파트라는 너무 영리하고 적응력이 너무나 뛰어나서 결코 가만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내연 관계였다는 사실도 그에게 위협적이었다.

p360 기원전 31-30년의 겨울, 클레오파트라는 수에즈만에서 새로운 함대를 건조하게 했다. 그 함대를 건조한 목적은 그녀 자신, 안토니우스, 가족을 해외의 안전한 곳, 가령 인도처럼 멀리 떨어진 곳으로 도피시키려는 것이었다.

p362 클레오파트라는 여왕이었고 그녀의 일차적 의무는 왕국을 지키는 것이었다

p378 일본에서 배를 찔러 전통적인 할복자살의 의식을 거행하는 사무라이는 옆에 있는 참수자에게 도움을 받는다. 사무라이가 배를 깊게 찌른 후에 참수자가 뒤에 있다가 그의 목을 쳐주는 것이다

p399 클레오파트라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여성 정치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조국은 200년 동안 쇠퇴와 패배가 계속되었는데 그녀가 그 운명을 바꾸어놓았다

p419 기원전 30년 이후 서로마 제국의 멸망에 이르는 근 500년 동안 지중해는 간단히 ‘마레 노스트룸(우리의 바다)’으로 불렸다. 온 세상을 자기 것이라고 여긴 로마제국다운 오만한 생각의 표현이었다.

p426 세 번의 개선식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 그것은 그의 승리를 널리 알렸을 뿐만 아니라 내전이 종식되었음을 대내외에 선포하는 의례였다.

p433 시인 호라티우스는 아그리파를 가리켜 고상한 사자를 흉내 내는 영리한 여우라고 묘사했다. 아그리파의 교묘한 처신술과 사회적 출세 기술을 잘 요약한 말이다.

p438 그은 9월의 달 이름을 이제 셉템베르에서 아우구스투스로 바꾸려 한다고 대내외에 공지했다. 이는 아우구스투스의 생일이 9월 23일임을 기념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9월보다는 늦여름인 8월(섹스틸리스)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기를 바랐다.

p446 아우구스투스가 임종의 자리에서 했다는 말은 이 도시의 경관을 잘 설명해준다. “나는 벽돌의 도시 로마를 발견했으나 이제 당신들에게 대리석의 도시를 남기노라”

p446 그는 아마도 장엄한 도시의 원형을 제공한 알렉산드리아를 다스렸던 여왕을 떠올렸을 것이다. 탁월한 역설의 감각을 지닌 그런 아마 이런 생각도 했으리라. 악티움 함선들의 충각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한 긴 칼에도 불구하고, 독사의 물어뜯기에도 불구하고, 클레오파트라는 사후에도 로마에 문화의 영향력을 행사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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