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진실과 반전의 역사 - 유물과 유적으로 매 순간 다시 쓰는 다이나믹 한국 고대사 서가명강 시리즈 12
권오영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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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시대, 진실과 반전의 역사

 : 권오영

 : 21세기북스

 : 2022/08/07 - 2022/08/11


이런 책을 읽어야 성장하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학교를 졸업하고 이곳저곳에서 책읽고 강의듣고 했던 내용보다 책 한권에서 얻은 지식이 훨씬 크다.

그만큼 유물조사 및 고고학에 의한 역사발견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페이스북이나 유튜브를 보면 그저 우리나라 만세를 외치는 국뽕주의자나 일본이나 미국에 경도된 바보들이 정말 많은데 그런 엉터리 사이에서 역사학자들이 어떻게 역사를 발견하고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지를 알 수 있었다. 

올해 읽은 책중 가장 재미있고 유익했던 책 가운데 하나다.

좋다.. 


p7 일본의 정사서 일본서기를 바탕으로 전개되면서 한일 역사학계에서 오랜 기간 논란이 되었다가, 가야 고분군의 발굴 등으로 유물들이 발견되면서 2010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폐기되었다

p13 상고사는 전문 연구자만이 아니라 역사에 관심이 많은 일반 시민들이 수많은 설을 자유롭게 주장하는 백가쟁명의 장이기도 하다. 수십 년간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연구자나 종교적 신념에 사로잡힌 유투버가 등가로 취급받는 분야이기도 하다

p22 두 책에 의하면 고대부터 일본 천황은 대단히 높은 지위를 누렸고 백제와 신라, 가야 왕들은 천황에게 굽신거리는 낮은 지위에 머물렀다. 이 내용이 사실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이 책을 이용해서 한국 고대사나 한일 관계사를 연구하려면 독이 가득한 알을 제거하고 복어를 섭취하듯 왜곡된 내용을 전부 걸러내야 한다

p22 이처럼 급변하는 게 고대사이다 보니, 수십 년 전 진실이라 여겼던 역사적 사실을 줄기차게 주장하는 이의 말은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게 되었다. 통설은 계속 무너지고 있다

p30 기원전 1세기 무렵 한반도 남해안에는 원거리 국제 교섭을 관장하던 세력이 있었고, 엄청난 부를 독점하던 지배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p36 고고학 자료는 금석문이나 목간처럼 요리하기 좋은 재료가 아니기에 연구자는 자료가 충분히 말을 하도록 자꾸 대화를 걸고 흔들어 깨워야 하는데 그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p47 대표적인 예로 비늘 갑옷을 들 수 있다. 4~5세기 무렵 일본에서도 쇠판으로 만든 갑옷을 많이 사용했지만, 대성동을 비롯한 가야무덤에서 발견한 갑옷들은 그보다 훨씬 발전된 개량 기술로 만든 것이다. 이외에도 기마전에서 사용한 재갈, 발걸이 등 마구류와 철제 무기류는 일본을 압도하는 양과 기술을 보여주었다. 결론적으로 갑옷, 마구, 무기 제조술에서 나타난 우열의 차이를 감안한다면 왜가 군사적 우위로 가야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은 도저히 성립할 수 없다

p57 익산 미륵사가 무왕과 신라 출신 선화공주의 협력으로 조성되었다고 우리에게 말해준 문헌은 13세기에 쓰여진 삼국유사인데, 미륵사지 서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사리봉안기가 발견되면서 800년 통설이 무너졌다. 문헌에는 보이지 않던 사택씨 왕후가 등장했고 무왕의 왕비가 누구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시작됐다

p61 무엇보다도 인천공항을 향할 때마다 근심걱정보다 가슴 설레는 체질이라면 고고학 연구에 안성맞춤일 것이다

p72 경산 임당동 고분군은 진한에서 신라에 걸쳐 장기가 만들어진 무덤들인데, 발굴 결과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인골이 출토되었다. 현재 발견된 인골 대부분은 영남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200여 개체의 인골 중에서 편두를 한 두개골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진한과 변한은 물론 신라와 가야에서도 편두를 실시했음을 알 수 있다.

p101 옥전 M3호분이라고 명명된 다라국 왕릉에서는 고령 지산동만큼의 순장자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쇠도끼 수십 점, 말 갑옷과 투구, 사람 갑옷과 투구, 용과 봉황을 화려하게 장식한 고리자루칼이 4점이나 나왔다. 비슷한 시기의 백제 무령왕릉에서 용봉문 고리자루칼이 한 점밖에 나오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옥전 M3호분의 후장은 분명 지나치다. 아마 망자의 내세를 위해 현세의 삶을 망가뜨린 것이다.

p127 왕성 자체가 산성의 형태를 취한 고구려의 오녀산성과 환도산성 외에도 평지에 있는 왕성을 보호하기 위해 주변에 위성처럼 여러 개의 산성을 배치했다.

p143 1980년대에 서울 몽촌토성과 하남 이성산성을 발굴조사하면서부터 대부분의 연구자는 하남 위례성이 있던 곳으로 몽촌토성과 이성산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결국 1999년에 진행한 풍납토성 동벽 조사로 인해 위례성 위치 논쟁을 종결할 수 있었다. 전체 둘레 3.5킬로미터, 기저부 폭이 40미터 이상, 높이 12미터 이상인 초거대 토목구조물을 축조하며 동원된 노동력은 200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왕성이 아니고서야 이처럼 큰 규모의 성을 쌓을 이유가 없다.

p146 이런 최첨단의 판축공법과 부엽공법은 백제인에 의해 일본으로 전래되 토성과 궁궐, 고분, 제방 축조에 활용되었다. 이렇게 풍납토성을 짓는 데는 최첨단 기술과 최고의 기술자가 동원되었다. 풍납토성이란 걸작을 만든 이들은 당대 최고의 기술자임에 틀림없다

p155 무령왕릉을 발굴한 학자들은 최고의 영예와 행복을 누렸을 것 같지만 제대로 조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최대의 발견, 최악의 발굴이라는 야유와 빈정거림 속에 살아야 했다. 모든 유적은 소중하며,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이기에 유적 발굴조사에 임하는 사람은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의 자세를 본받아야 한다

p162 동북아시아를 바라보는 시야를 넘어서 유라시아 동부라는 안경을 쓰고 역사를 보면 다른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한이라는 초강대국에 맞서 싸운 세력은 동쪽의 고조선만이 아니었다. 북쪽의 흉노가 한을 압박했고, 서쪽에는 오손, 월지, 사카란 세력이 있었다. 미얀마 쪽에는 퓨라는 종족이, 중국 운남성 지역에는 디안이, 그리고 지금의 중국 광동, 광서, 베트남 북부에는 남월이, 복건성의 민월 등이 마치 사나운 호랑이 한 마리를 둘러싼 진돗개 무리처럼 한을 둘러싸고 계속해서 긴장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p167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면서 위구르족,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이 모두 투르크계 국가이다. 투르크 벨트의 동쪽에 해당하는 카자흐스탄 사람들은 우리와 가장 비슷한 생김새를 지녔다. 그리고 서쪽으로 갈수록 백인에 가깝다. 이런 양상은 돌궐족의 이동과정 중 생성된 변화다

p169 2018년 국립중앙박물관은 황금인간전이란 이름으로 기원전 6세기에 살았던 사카족 왕자의 무덤, 즉 쿠르간에서 출토된 부장품을 전시했다. 그런데 이 무덤의 구조와 부장품을 5세기 무렵의 신라 왕릉인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것들과 매우 유사한다. 문제는 두 유적 사이에 천 년이란 시차가 있다는 것이다.

p175 내게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을 몇 군데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 사막길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와 이란의 이스파한을 꼽는다. 특히 사마르칸트에 있는 비비하눔 모스크의 눈 내리는 풍경은 잊을 수가 없다.

p178 국제도시 장안에서는 복장, 음악, 음식 등 많은 분야에서 소그드와 페르시아의 호풍 문화가 크게 유행했다.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왕이 동정했을 때 혼인한 현지의 여성도 소그드인이었고, 당나라를 뒤흔든 안록산-사사명의 반란을 주도한 안록산 역시 소그드와 돌궐의 혼혈이었다.

p184 카타콤 내부에서는 신장 180센티미터가 넘고 편두를 한 장신 여성이 온몸에 상처투성이가 된 채 무기를 잔뜩 보유하고 누워 있는 모습도 찾아냈다. 여성 전사였던 것이다. 아제르바이잔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이 카타콤에 묻힌 이들은 알란과 사르마티아라고 하는 유목 기마민족이었음을 알아냈다.

p190 사기에 등장하는 한나라의 누선장군 양복은 남월 공략을 마무리하고 곧바로 위만조선 침략전에 나섰다. 이 양복이란 인물에 의해 남월과 위만조선이 연결되었다. 그렇기에 남월의 역사를 왜 알아야 하느냐 묻는다면 위만조선을 아는데 남월국의 역사가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 답할 수 있다.

p192 참파는 한자로 임읍이라 불리던, 베트남 중부의 다낭과 호이안을 무대로 발전한 항시 국가다. 372년 참파가 동진에 사신을 보낸 기사가 남아 있는데 이 기사에는 백제 근초고왕이 사신을 보낸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p197 아르잔 2호분은 러시아와 독일 연구팀이 공동조사한 것으로, 세계사 서술을 바꿀만한 위대한 발견을 이뤄냈다. 기원전 6세기 무렵 흑해 연안에서 발생한 스키타이 문화가 점차 동으로 퍼졌다는 기존의 정설을 뒤집은 것이다. 기원전 9-8세기에 이미 스키타이 문화는 아르잔에서 발생하였으며 점차 서쪽으로 퍼져나간 사실이 입증되었다.

p206 우리 민족 제일주의에 입각한 우리의 고대사 연구가 지나친 민족주의적 편향으로 인해 세계 학계의 우스갯거리가 되어가고 있음도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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