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경주 여행 - 개정증보판 일상이 고고학 시리즈 2
황윤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20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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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 혼자 경주여행

 : 황윤

 : 책읽는고양이

 : 2022/07/11 - 2022/07/15


재미있는 스타일의 여행에세이가 있어서 읽기 시작했다.

혼자 유적지를 돌아다니는 1인 투어

주로 대중교통을 이용해 답사를 하는 컨셉이다. 

경주는 이탈리아의 로마, 일본의 교토처럼 문화유산으로 가득한 곳이다.

이 말은 하루이틀로 다 볼 수 있는 곳이 아니란 말이다.

저자는 일박이일로 경주를 다니며 경주의 문화유산 중 몇 가지를 소개한다.

유명한 불국사, 석굴암을 포함하여 거대고분군, 남산 그리고 최근에 핫한 황리단길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꼭 가야할 유적지가 많이 있지만 초보자나 가벼운 답사자가 다녀야 할 곳은 거의 다 흝는 것 같다. 

아는만큼 보인다고 했는데 문무왕릉으로 알려졌던 원성왕릉이 현재의 대왕암으로 바뀌는 에피소드는 참 재미있었다. 이런 에피소드를 유적지에서 해야 하는데...

다른 시리즈도 계속 읽어봐야겠다.

역시 스토리텔링이 잘 된 책이 읽기도 쉽고 재미있다. 


p19 봉황대와 황남대총 같은 거대한 무덤이 만들어지던 시기는 신라 시대 마립간이라 불리던 왕들이 즉위하던 때로, 17대 내물왕부터 22대 지증왕까지의 기간이다

p23 당시 일본인들은 고분 안에 묻혀 있던 유물에만 관심이 있었기에 봉분은 대충 걷어내어 놀랍게도 경주 철도 공사에 필요한 흙과 돌로 사용해버렸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황당하지만 당시 문화재에 대한 인식 수준 및 식민지를 낮춰 보는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는 직접적 증거이기도 하다.

p36 다만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서예가이자 고증학자였던 추사 김정희는 경주 대릉원과 봉황대의 언덕을 왕릉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니, 완당집에 따르면 “경주에 조산이 하나 무너졌는데, 석축이 나온 것으로 보아 왕릉이 틀림없다”하며 남다른 그의 통찰력을 남기고 있다

p37 발굴된 5개의 금관 중 3개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중이며, 나머지 2개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3개의 금관은 각각 금관총, 서봉총, 천마총 금관이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은 황남대총, 금령총 금관이다.

p49 신라 왕릉으로 알려진 고분은 38기이고 이중 경주 내 왕릉으로 알려진 고분은 총 36기인데, 이 중 상당수는 위치가 삼국사기 또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맞지 않아 근현대들어와 여러 연구자들이 위치를 새롭게 비정하기도 했다. 다만 학자마다 주장들이 조금씩 달라서 정확하게 누구의 무덤이다라고 판단하기가 쉽지는 않다.

p69 5-6세기 초반 마립간 시대 신라 왕들이 경주 중앙에 거대한 고분을 만들어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면, 6-7세기 신라왕들은 평지에 거대 사찰을 만들어서 왕가의 힘을 과시했다.

p73 이렇게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황룡사 9층 목탑은 고려시대인 954년, 벼락을 맞고 불타 사라지면서 약 300년 간의 생애를 마감한다. 그럼 역사책에서 배운 몽고 침입으로 불타서 없어졌다는 황룡사 9층 목탑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몽고에 의해 불타 사라진 목팝은 고려 시대 때 복원한 황룡사 9층 목탑으로 고려 현종 때인 1012년, 이전에 벼락을 맞아 사라진 탑을 새로 올리며 만든 것이다. 다름 아닌 이것이 1238년, 몽고 침입으로 사라지게 된다. 결국 신라가 만든 탑은 300년, 고려가 만든 탑은 200년, 총 합쳐서 약 500년을 경주의 기둥으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p81 황룡사가 진흥왕과 선덕여왕의 전설이 함께하는 절이라면 분황사는 선덕여왕이 만든 절이다

p100 문무왕은 이처럼 위급하던 674년, 이곳에 못을 파고 인공 산을 만들며 화초와 진기한 동물을 기르려 하고 있었다. 여유를 부리 ㄴ것이 아니라 문무왕은 신라 왕으로 봉해진 동생의 저택을 왕실 정원으로 만들어버려 내부 반발을 막고자 한 것이다. 당 편에 선다면 왕의 동생일지라도 신라에 돌아올 자리는 없다는 의미였다

p113 항복 문서를 보내고 그대로 항복했으면 한반도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수도 있겠으나, 문무왕은 이후 한반도 역사에서 익숙하게 보이는 그런 왕들과는 격이 달랐다. 반드시 해내야 할 일은 해내는 인물이었기에 뒤로 물러나는 척하며 준비한 반격을 통해 결국 당나라로부터 승리를 거둔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가장 걸맞는 인물이 한반도에서는 문무왕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는 실리를 위해서는 잠시 고개를 숙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난 저 비굴한 표문에 오히려 문무왕의 진면목이 숨겨 있는 듯하여 좋아한다

p118 문무왕은 당시 사람들의 불교 세계관으로 볼 때 인간에서 오히려 짐승으로 격하될지라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짐승도 될 수 있다는 사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전 성골 의식이나 부처 재림을 이야기하던 신라 왕들과는 확실히 인품의 격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p125 고고학자 황수영 박사는 동국대 총장 시절인 1982년, 한국 종의 유별난 개성에 대하여 이는 만파식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이에 따르면 원통형 긴 음통은 다름 아닌 피리를 형상화한 것이며 용은 피리를 전해준 문무왕을 의미한다 하겠다. 즉 삼국 통일의 영웅이자 만파식적의 주인공인 문무왕의 업적을 종에 장식한 것으로 보자 만파식적이 단순한 전설이 아닌 구체적 모습으로 다가오는 느낌이다

p151 석가탑뿐만 아니라 신라의 석탑에서 무구정경 혹은 소탑이 봉안된 사례가 여럿 발견된다. 결국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석탑을 짓고 관리, 유지시키는 데에 거대한 원동력이 된 경전이었던 것이다.

p165 절이 많아지자 이렇듯 본래 신성되던 남산이 더욱 신성시되면서 불국토의 중심에 위치한 중요한 장소로서 인식되어진다. 이에 거의 300여 년 동안 특히 통일신라 시대 동안 경주 사람들은 자신의 가문과 집안을 위한 사찰, 또는 사찰이 자금상 한계가 있다면 탑이라도, 그것도 힘들면 돌에 부처를 조각하는 마애불이라도 새기면서 기복 신앙의 꽃을 피웠다. 김대성이 불국사를 만든 것처럼 신라인 하나하나가 남산에 자신만의 불국사를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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