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으로 읽는 세계사 - 10가지 빵 속에 담긴 인류 역사 이야기
이영숙 지음 / 스몰빅인사이트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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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빵으로 읽는 세계사

 : 이영숙

 : 스몰빅 인사이트

 : 2022/03/26 - 2022/03/31


요즘 이런 책이 유행인가?

비슷한 류의 책들이 많이 나왔다. 단순한 세계사가 아니라 질병, 빵 등 매개체를 통해 세계사를 풀어나가는 책.

나도 음악으로 읽어보는 세계사 이런책을 한번 내보고 싶었는데 출판사에서도 이런 류의 책들이 요즘 트렌드에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빵으로 읽다보니 결국 유럽사가 되어 버렸다.

빵의 이름을 알려주고 그 빵을 어떻게 만드는지 설명이 붙고, 그 빵을 주식으로 하는 지역의 역사가 이어진다.

루이 14세가 후추와 소금을 좋아해서 그것만 넣어서 음식을 먹어서 유럽의 음식문화에서 후추와 소금이 중요해졌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었던 것 같은데 이 책에는 그런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프랑스의 음식문화가 메디치가문의 딸들이 시집오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알려준다.

프랑스가 외부의 음식문화를 잘 버무려 자신들만의 문화로 잘 수용해낸 것 같다.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책을 읽으니 새롭게 알게 된다.

좋다.


9% 빵은 역사가 길다. 세계 최초의 도시로 꼽히는 우르에도 기록이 남아있으니 말이다. 기존에는 빵이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에서 시작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하지만 더 이전에 빵을 먹은 흔적이 속속 발견되면서 언제부터 인간이 빵을 먹었는지는 미궁에 빠져있다

13% 플랫브레드 중 가장 대표적인 라바시는 땅에 묻어놓은 타니르라고 부르는 화덕 벽에 얇게 민 밀가루 반죽을 붙여 구워낸다

13% 너는 왜 빈둥거리고 있느냐? 학교에 가고 숙제를 외워라. 네가 (공부를) 마쳤으면 내게로 오너라. 길거리를 떠돌아다니지 말아라. 내가 지금 하는 말을 알아듣겠느냐? 거의 4,000년 전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당부하고 다그치는 말이다.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촌음을 아껴 공부에 매진하라는 충고다. 오늘날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하는 잔소리와 꽤 닮았다

21% 이집트인들은 이 나일강의 범람 주기와 시기, 그 치수 기술을 위해서 달력과 천문학과 수학이 필요했고, 범람 후 원래의 농지를 구획 짓기 위해 기하학이 필요했다. 나일강이 이집트 문명의 알파요 오메가였던 셈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티그리스와 유프라데스강이 중요했던 것처럼 말이다

23% 토리노 파피루스 문서가 발견된 이후, 람세스 3세가 재위한 지 27년째 되던 해(기원전 1152년)에 급료인 빵을 제때 받지 못한 100여 명의 노동자가 모여 파업했다는 기록을 발견하게 된다. 이후 기존의 역사는 수정되었다. 급료를 받고 일하는 지위라면 노예가 아니라 노동자가 되니 말이다

25% 넷플릭스의 문화 다큐멘터리 COOKED의 3부를 보면 빵과 관련된 영상이 나온다. 모로코의 한 마을에서는 수확한 밀을 가루로 빻을 때 빻은 곡물가루의 10퍼센트를 제분 삯으로 떼어주는 방식으로 마을의 제분소를 이용한다

26% 천연발효종을 이용한 샤워도우 빵은 소화도 쉽고 맛있기 때문이다. 요즈음엔 건강, 웰빙, 소확행 등과 같은 트렌드에 맞추어 제과 제빵소에서도 직접 연구하고 만든 샤워도우를 파는 빵집들도 있다

33% 식문화만 보더라도 유명한 셰프들이 공식 대화를 할 땐 프랑스어로 된 요리용어를 쓸 정도였다. 옛날,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가 이탈리아를 동경하여 이탈리아 메디치가의 딸이었던 카트린을 며느리로 맞았고 그 결과 이탈리아 식문화가 프랑스의 식탁을 업그레이드시켰던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들 정도다

39% 클레멘스 7세의 실정으로 로마는 1527년 에스파냐 황제 카를 5세에게 점령된다. 세계사에서 흔히 로마 약탈로 언급되는 사건이다. 그 후 피렌체에서는 폭동이 일어나고 클레멘스 7세 교황에 대한 여론은 최악으로 치닫는다

40% 카트린은 이름뿐 왕비로 소외당하고 디안이 왕의 총애를 받으며 왕실을 흔드는 상황은 앙리 2세가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카트린은 온갖 꼴을 다 보고 겪으면서도 26년간이나 남편과 디안 뒤에서 묵묵히 참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과 그의 정부에게 맞서거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남편의 관심을 끌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남편 사후에 카트린은 디안에게서 쉬농소 성을 빼앗고 왕으로부터 받은 보석들도 압수한 채 궁 밖으로 내쫓았다

44% 이탈리아만 프랑스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니다. 스페인의 식문화 또한 프랑스에 깃들어 있다. 이 역시 스페인의 두 왕녀가 프랑스로 시집가면서 영향을 끼친 것이다.

47% 마카오는 중국의 식자재로 광둥요리와 포르투갈요리를 퓨전한 매케니즈 음식으로도 유명하다

50% 사그레스 성에는 항해에 필요한 정보와 지리 관련 지식이 각종 지도와 항해 관련 서적, 기행문 등과 함께 수집되었다. 자료가 축적되어가자 이 자료를 보기 위해 세계 도처의 전문가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이 나눈 대화와 연구가 다시 기록으로 남아 사그레스 섬에 보관되었다. 이러한 선순환으로 사그레스 성은 거대한 학교요 도서관이자 천문대로 항해를 준비하는 두뇌 역할을 하게 되었다.

52% 그는 평생 권력 욕심 없이 결혼도 하지 않은 채 그저 탐함과 교육 사업에 헌신했다. 엔리케가 실지로 직접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간 일은 없었지만 해양 탐험에 쏟은 공적들로 인해 그에겐 항해 왕자라는 별명이 붙게 된 것이다. 그의 리더쉽과 용기, 도전은 오늘날에도 자주 언급되곤 한다

63% 일암 이기지가 북경을 방문하고 일암연기는 60년 뒤 연암이 쓴 열하일기의 본이 되었다. 이기지는 박지원, 홍대용, 등 북학파, 실학파들의 롤모델이었을 정도로 후대 북학파 지식인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67% 마젤란의 최후는 끔찍했다. 최정예 병사 60명을 이끌고 포함외교가 무엇인지 보여 주려 했지만, 라푸라푸와 전투를 벌이던 중에 그는 필리핀 부족 병사들에게 머리엔 창, 다리에는 독화살이 박히는 등 심각한 상처를 입는다. 이에 마젤란은 급히 배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결국 라푸라푸 병사들에게 끔찍하게 살육을 당했고,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74% 토르티야에 음식을 완전히 쌌는지, 반으로 접기만 했는지, 돌돌 말았는지, 아니면 부재료 없이 토르티야를 튀겼는지에 따라 케사디야, 타코, 부리또, 나초 등의 음식이 되니, 기승전 토르티야다

76% 콜럼버스와 코르테스, 피사로를 움직이게 한 원동력은 겉으로는 십자가와 탐험 정신이었지만, 속으로는 향신료와 황금으로 대변되는 물욕이었다. 황금을 향한 욕심은 커다란 동기가 되어 침략과 약탈을 추진하게 했다

78% 말린체에게는 정복자를 위해 부역한 배신자라는 차가운 시선 한편으로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운명에 순응했던 여인이란 동정적인 시선도 있다. 식민지 문화의 특성으로 꼽히는 숙명주의를 일컫는 스페인어 말리치스모라는 말도 그녀의 이름에 유래되었다

84% 이슬람법상 무슬림이 먹을 수 있게 허용된 음식인 할랄 식품이 있는 것처럼 유대인들에게도 율법에서 허용된 식품이 있는데, 그것이 코셔다. 유대인들은 유대교 율법에 따라 돼지고기나 조개류 등을 제한하는 코셔 식품을 꽤 까다롭게 지키다 보니 그것이 빵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86% 로스차일드 가문의 유대인 금융인 야콥시프는 러일전쟁 대 일본 국채의 절반을 사서 일본의 전쟁자금을 도왔다. 일본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러시아가 미워서였다. 그랬으니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패배는 러시아가 포그룸으로 유대인을 박해했던 것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결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91% 러시아는 지정학적으로 위도가 높아서 추운 날씨가 오래 계속되다 보니 난로와 그 위에 뭉근히 끓이는 수프가 일상이다. 추운 날 뜨거운 수프에 흑빵을 부수어 넣어 먹으면 속이 확 풀리는 든든한 한 끼가 된다

95% 명칭에서도 느껴지듯이 이 도시는 제정 러시아 때인 1703년 표트르 대제에 의해 만들어진 이래 200년간 로마노프 왕종의 수도가 되면서, 정치, 경제, 문화, 예술의 중심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서구식 발전 모델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표트르 대제 덕에 시인 푸쉬킨은 이곳을 유럽으로 열린 창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을 만큼 유럽의 건축 양식이나 문화와 사상을 받아들인 도시다

95%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당시 레닌그라드라는 작품을 작곡했는데, 우울하거나 비탄에 잠긴 선율이 아니다. 의외로 광기인지 결기인지 베짱인지 모를 힘이 느껴지는 곡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이 느낀 전쟁의 느낌을 그대로 선율로 옮겼다는 말과 함께, 레닌그라드인들을 기억해달라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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