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이야기 - 신들과 전쟁, 기사들의 시대
안인희 지음 / 지식서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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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세이야기

 : 안인희

 : 지식서재

 : 2021/08/07 - 2021/09/15


시대를 구분해서 역사를 많이 이야기하지만 사실 시대를 구분하는게 쉽지는 않다.

보통은 시대의 특징이 서로 오버랩되면서 시대가 바뀌기 때문이다. 

우리가 중세라고 부르는 시대는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476년부터 동로마제국이 멸망한 1453년으로 나는 알고 있다.

이 책에서는 콜롬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인 1492년까지로 보고 있다.

시대를 어떻게 나누든 중세는 중세만의 특징이 있다.

기독교 중심이라는 것.

기독교가 어떻게 유럽의 중심이 되었고, 그 안에서 삶과 문학, 그리고 전쟁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두껍지 않은 분량에 꽤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어 저자의 필력이 대단함을 느낀다.

특히 그동안 잘 몰랐던 중세 문학, 특히 기사문학에 대해서 배웠다.

롤랑의 노래도 말만 들어봤지 내용이나 그 배경에 대해서는 잘 몰랐었는데 이 책에 자세히 나와 있어서 도움이 됐다.

유럽에 여행을 가게 되면 작은 시골 마을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설명이 중세를 그대로 간직한 동네라는 말이다.

막상 가보면 이게 중세마을인가 싶기도 하지만 내가 보고싶은 유럽은 사실 그런 모습이긴 하다.

지금이야 낭만적으로 보이는 중세시대지만 당시 살던 사람들은 얼마나 고단했을까?

책을 읽으며 낭만만 생각한 내가 조금은 부끄러워진다.

그래도 중세가 이뻐보이고 그런 유럽을 가보고 싶은 맘은 더 커지기만 한다. 


p16 르네상스가 시작할 때에는 중세의 많은 요소가 아직 그대로 남아있었지만, 그 마지막 국민인 미술적 전성기인 16세기는 이미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시작된 다음이었다

p22 인류의 4대 문명 발상지에 속하는 (호전적인)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평화로운) 나일 문명이 만나는 동부 지중해의 크레타 섬이 바로 고대 유럽 문명의 시작 지점이다(기원전 3000년경). 서로 이질적인 두 문명권이 만나는 곳이니, 고대 크레타 문명은 처음부터 매우 역동적이고 이동과 왕래가 빈번하고 활기에 넘쳤다

p34 그동안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이 문명인으로서 유럽 역사의 주역이었다면, 이제 새로 펼쳐지는 중세에는 로마 사람들이 "야만인"이라 불렀던 유럽 북방의 게르만 사람들이 주역으로 등장했다

p38 이베리아반도에서 피레네산맥을 넘어 파죽지세로 북쪽으로 올라가던 아랍 세력을 막아낸 사람이 카를 대제(독일에서는 카를 대제, 프랑스에서는 샤를마뉴, 라틴어로는 카롤루스 대제)의 할아버지 카를 마르텔이다. 800년에 그의 손자 카를 대제가 황제가 되면서 서유럽은 조금 정신을 차리게 된다(이 시기를 카를 대제 시대의 르네상스라는 뜻으로 카롤링 왕조 르네상스라 한다)

p45 최근 연구자들은 주로 언어를 기준으로 문화를 가르고 있다. '프랑스 문화'란 프랑스어 문화를 뜻하는 것으로 본다

p55 메로빙 왕가가 힘없이 끝나고 카롤링 왕가가 시작되었다(751). 따져보면 피핀은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왕권을 찬탈한 인물인데, 유럽 종교 지도자인 로마 주교가 재빨리 그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현실 정치에서 도덕성이 뒤로 밀리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p65 프랑크 왕국의 카를 대왕은 이탈리아의 북부를 비잔틴 제국보다는 서유럽의 북부와 결합시켰다. 그리고 이 대관식은 비잔틴 제국과는 별개로 새로운 유럽의 시작을 알린 일이었다

p66 800년 카를 대제의 대관식은 이것을 상징하는 사건으로서, 이 해는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기억하기에 편하고, 기억하면 매우 쓸모가 있는 연도이기도 하다

p68 하룬 알-라시드는 아바스 왕조의 황제로서, 이베리아반도에 자리 잡은 우마이야 왕조와 대립하고 있었다. 또한 이베리아반도의 이슬람 왕국은 앞에서 보았듯이 카를 대제가 정복하지 못한 적이었다

p81 이 문서는 위조의 시대이던 중세에 나타난 가장 유명한 위조문서의 하나다. 신앙심 깊은 수도사 한 명 도는 여러 명이 750~850년 사이에 교회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문서를 천연덕스럽게 위조했던 것이다.

p83 강력한 통치권을 기반으로 한 왕이 황제가 될 경우에만 황제의 지위도 튼튼했는데, 이 경우에도 그의 힘은 황제라는 지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질적으로 지닌 영통의 통치권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p84 8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서유럽에 출몰하기 시작한 북쪽의 해적들은 해안 지역에서 주로 수도원과 교회들을 약탈했다. 9세기가 되면서 그들의 출몰 횟수가 더욱 늘었고, 10세기가 되자 그들 중 일부가 약탈하던 지역에 차츰 눌러앉기 시작했다.

p108 1060년까지 14년동안 그는 거의 끊임없이 온갖 전쟁을 겪었다. 프랑스 왕과 앙주 백작의 합작 공격까지 막아내고 나서야 마침내 윌리엄은 확고한 승리를 거두었다

p117 이 전투에서 해럴드 왕과 두 형제가 노르만 기사들의 손에 전사했다. 윌리엄은 나중에 해럴드 왕이 쓰려져 죽은 바로 그 자리에 거대한 기념교회를 건설하게 했다. 이것이 배틀 수도원이다.

p122 그의 시대에 잉글랜드의 인구 및 재산 상태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나왔다. 이 기록은 원래는 왕의 두루마리라 불리는 것이지만, 자주 최후의 심판 책이라고도 불린다. 마치 최후의 심판을 위한 것처럼 그 무엇 하나 빼지 않고 기록했다는 뜻이다.

p129 프랑스 노르망디로 여행을 한다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외 자수 박물관을 찾아가 보자. 저 유명한 정복자 윌리엄의 이야기를 새로운 눈길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p138 로마에서 하인리히 4세(당시 독일 왕이자 이탈리아 왕)에게 밀린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에게서 다급한 구조 요청이 왔다. 교황의 봉신이던 로베르는 아드리아해안을 버려두고 서둘로 로마로 달려가서 하인리히 4세를 쫓아내고 교황을 구출했다. 대신 그의 부하들은 로마를 잔인하게 약탈해서 교황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p143 매우 뛰어난 교육을 받고 당대의 기독교와 아랍 세계에서 좋은 점을 모조리 받아들인 로저2세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통치자였으며, 서방에서는 예가 없는 하렘을 거느렸다.

p150 인기가 없는 교황이었다. 이 교황처럼 당대의 부자, 권력자, 왕 들과 대립하면서 그들의 권력을 제한한 개혁가가 고위층 사이에서 인기를 얻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다. 다만 평신도들은 그의 개혁을 몹시 반겼다.

p165 로마카톨릭의 기틀을 세운 위대한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살레르노에서 쓸쓸히 죽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다. 나는 옳은 일을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했다. 그래서 나는 유배지에서 죽는다

p182 마라트에서 한 행위는 아랍 세계에 이교도(기독교) 침입자들의 야만성과 잔인성을 알리는 예로 널리 퍼졌다고 한다. 오늘날까지도 아랍의 노래에는 "인육을 먹는 자들"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그 옛날 십자군 전쟁 시기에 쳐들어온 프랑크 기사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p196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이렇게 큰일을 벌여서 마련한 권력과 재물의 이점을 그리 오래 누리지는 못했다. 자크 드 믈레가 죽던 같은 해에, 극히 우유부단하던 클레멘스 교황도 죽고, 필리프 왕까지 죽었기 때문이다

p198 카페 왕조의 필리프 4세는 중세 프랑스의 왕권을 강력하게 만든 왕으로서, 교황청을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겨간 사건(아비뇽 유수, 1309~1377)과 성전기사단을 파괴한 일 덕분에 특별한 역사적 의미를 얻었다

p204 3차 십자군 전쟁의 마지막에 리처드가 귀국하다 같은 편에게 포로로 잡혔다는 사정은 십자군에 동참한 유럽 영주들의 개인적 이권이 기독교 공통의 전투라는 전체 이념과 동일한 것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p208 전 유럽에서 종교수호를 위해 모였들었다는 연합 군대가 성지 회복은 커녕 같은 기독교 도시를 공격하여 약탈하고 지배하는 깡패 집단으로 변질된 것이다. 이미 한 번 시작된 약탈의 버릇은 더욱 고약한 방향을 잡았다

p213 프랑크 사람들은 황금 장식품의 약탈에 열성이었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은 예술품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탐색조를 구성해서 가장 가치 있는 물품들을 베네치아로 가져갔다. 오늘날에도 베네치아의 총독궁전에 그때의 보물 일부가 장식 또는 전시되고 있다

p225 아키텐 공작 윌리엄 9세는 총 11편의 노래들을 남겼는데 이들이 모두 그의 작품인지 아주 분명하지는 않다. 어쨋든 그의 이름을 달고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p226 이런 모진 시험을 거친 끝에 여인들은 나그네가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 말도 전하지 않으리라 믿고 그가 마음에 들어서 자기들이 하고 싶은 일을 했다. 그러니까 목욕물을 마련하고 좋은 시간을 위한 준비를 했다. 그는 거기서 8일 이상을 머물며 그들과 188번이나 섹스를 했단다

p233 앞서 3차 십자군 전쟁 이야기에서 만나본 사자심장 리처드는 헨리와 엘레오노르 사이에 태어난 셋째 왕자다. 그의 이야기와 또 다른 유명한 전설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 이야기의 상당수는 잉글랜드가 아닌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다

p238 베네딕트 수도원 노래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카르미나 부라나의 중세 필사본이 발견되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 수록된 작품들은 11,12,13세기에 쓰인 것들이다. 주고 (깨진) 라틴어와 중세 도이치어가 뒤섞여 있고, 많은 작품들은 일부 또는 상당 부분이 소실되어 몹시 불완전한 형태다. 옛날 필사본에 적힌 작품들이 지닌, 피하기 힘든 운명이다

p246 역사적으로는 기독교도들끼리의 싸움이던 것이 서사시 <롤랑의 노래>에서 갑자기 기독교와 이교도의 전투로 바뀌었다

p258 중세 시대를 논하려면 정교와 카톨릭을 나누어 생각해야 한다. 정교와 카톨릭이 중세 시대인 1054년에 나뉘기 때문이다.

p265 이교도 기사나 기독교 기사나 가리지 않고 중세 기사 이야기들은 판타지 요소를 띠게 되었다. 중세 문학의 특성 중 하나가 바로 이런 판타지 요소를 지닌다는 점이다. 진지한 역사인 듯이 꾸민 이야기들에도 대부분 판타지 요소가 많이 섞여서 등장한다.

p272 크레티앵의 작품들은 1190년 무렵부터 활발해지는 중세 도이치 궁정 기사소설의 내용과 형식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도이치 소설 내용의 일부가 다시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작품인 에다에도 스며든 만큼, 크레티앵을 전성기 중세 유럽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선구자라고 부를만하다

p279 그들의 사랑은 처음부터 간통 이야기인데, 그들은 죽을 때까지 자기들의 사랑을 보존할 뿐만 아니라 죽은 다음 두 사람의 무덤에서 자라난 나무들까지도 서로 뒤엉켜서 굳건히 하나가 된다. 성직자 계층의 작가가 이런 간통 소설을 쓰고, 게다가 그 사랑을 찬미한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이상하고 이해하기 힘든 일이기는 하다

p284 오늘날 우리는 종교가 지배한 중세 시대 유럽 여성을이 억압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물론 억압을 받았지만) 중세 전문가 르 고프에 따르면 중세 시대는 전반적인 생활이 후세보다 훨씬 불편한 상황에서도 여성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더 평등한 사회였다고 한다. 물론 완전한 평등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p286 운문 에다의 시편들은 대략 800년대부터 130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긴 시간 동안 스칸디나비아반도와 아이슬란드의 여러 시인들이 쓴 시편들을 수집하여 새로 정리한 것들이다. 여기에는 40편 이상의 장시가 들어있다. 그중 16편까지가 신들의 노래이고, 그 뒤는 영웅들의 노래다

p291 대부분 젊은 대학생들로 이루어진 낭만주의 작가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와는 다른, 게르만 언어와 문화의 뿌리를 중세 문헌에서 찾으려 했다. 그리고 야코프 그림의 열혈 제자 하나가 에다 문헌을 번역해서 스승에게 헌정햇다

p292 잔인하고 난폭한데도 여전히 점잖고 게다가 죽지 않는다는 그리스 신들에 비해, 게르만 신들이 지닌 그로테스크한 야만성은 현대인이 가상 세계에서 폭발시키는 난폭함과 코드가 잘 맞는 모양이다. 어쨋든 이들 게르만 신들과 수많은 중세 이야기들은 현대의 판타지 세계에서 기묘한 모습으로 부활했고, 또한 각종 변형까지도 경험하는 중이다

p296 페스트는 1347년에 시칠리아와 제노바를 거쳐 유럽 대륙에 상륙했다. 이듬해에는 벌써 피렌체, 베네치아 등 북부 이탈리아와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이보다 몇 해 앞서서 인도와 중국에서 수많은 사람이 괴질로 쓰러졌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p305 언제나 큰 재앙의 시기에는 생각 없는 인간들이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고 싶어 하는데, 이 또한 예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덕분에 인간이 손쓸 수 없는 두려운 상황에다가 인간의 불필요한 잔혹 행위까지 더해져서 전염병 시대의 삶은 더욱 끔찍해진다

p308 많은 이들이 좋은 것들을 소중하게 아끼고 간직했으나, 전염병이 닥치자 즐기지도 못한 채 죽거나 도망쳐야 했다. 내일을 위해 비축해 둔 것이 아무 소용 없음을 거듭 목격하고 보니, 차라리 지금 이 순간을 과도하게 즐기자는 생각이 든 것도 이해가 된다

p320 그녀는 푸아티에에서 3주에 걸쳐 성직자와 고위직 인사들의 신뢰성 검사를 통과하고, 시녀들이 수행한 처녀성 검사도 통과했다

p321 2차 종교재판에서도 그녀는 다시 이단 판정을 받은 끝에 1431년 5월에 루앙의 시장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사후에 추종자들이 그녀를 순교자로 여겨 숭배할 성유물이 나올까봐 불에 타고 남은 재는 센강에 뿌려졌다

p340 이런 사유의 맨 앞장에 선 인물이 페트라르카다. 그는 섬세한 감수성을 소유했던 듯하다. 자연에 대한 미적 안목을 지니고 풍경과 자연을 즐기면서 그런 즐거움을 글로 남겼거니와, 유적지나 고전 서적에 대해서도 특별한 애착을 느꼈다

p348 출신을 가리지 않고 뛰어난 재능을 후원했다는 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가장 중요한 원동력 중 하나다

p350 르네상스 시대 전제군주들은 학자들과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일을 놓고 서로 경쟁을 벌였다. 이런 경쟁 상황에서 특별히 유명한 통치자 집안들과 통치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이 인문주의자와 작가들을 후원했고, 학자와 작가들은 그들의 업적을 기록하고 찬미하며 후세에 남겼다. 다만 그들이 행한 악행의 기록들도 비교적 상세히 남아있다. 자기 힘을 과시하기를 좋아한 통치자들이 건축가, 조각가, 화가 등 예술가들을 후원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p364 15세기 초에 태어난 마사초는 원근법을 거의 창안하다시피 하면서 미술에서 완전히 새로운 표현의 길을 열었다. 그때까지의 그림들이 2차원 화폭에서 2차원적인 표현만이 가능했다면, 28살에 요절한 이 젊은 화가는 그림에 깊이와 축을 만들어내면서 3차원의 모습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p384 이들 부부 카톨릭 왕들은 교황의 칙서에 따라, 통합된 에스파냐 왕국에 종교재판 제도를 도입했다. 그들의 뒤를 이은 에스파냐 왕들은 유럽에서 가장 지독한 종교재판과 이교도 및 이단 탄압 정책을 계속해서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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