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에 읽는 한국 근현대사 - 개정 증보판 페이퍼로드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최용범.이우형 지음 / 페이퍼로드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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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룻밤에 읽는 한국 근현대사

 : 최용범

 : 페이퍼로드

 : 2021/07/24 - 2021/08/01


하룻밤에 읽는 ~~ 시리즈..

한국 근현대사는 어렵다. 우선 사실보다는 증오와 감정이 앞서는 분야다.

사실을 이야기해도 믿지 않는다. 욕이나 안먹으면 다행이다.

그러나 모르면 안되는 분야다. 

일제 식민지시대와 독재시대, 전쟁을 거치면서 우리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자유와 독립을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똑똑히 배워야 한다.

민족주의자들이 어떻게 개량주의자가 되고 친일파가 되었는지를 알지 못하면 나 역시 역사와 후손에게 죄를 지을 수 있다. 

우리 아이가 나중에 "아빠는 그 때 뭐했어?"라고 물어볼 때 부끄럽지는 말아야겠다.

근현대사를 읽고 배워야 하는 이유다.

내가 알고 있는 북한의 역사하고는 좀 다르다. 

내가 알기로는 북한은 친일파 처단과 토지배분에 열심을 냈기 때문에 지지율도 높았다. 또한 빠르게 경제개발에 성공해서 60년대에는 세계적으로도 성공연구사례였던 걸로 아는데 이런 내용은 모두 빠져서 북한을 더 안좋게 기술했다. 

근현대사를 주마간산으로 보기에는 괜찮다.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많은 역사책처럼 남한을 좀더 좋게 기술했다는 것만 알고 본다면 말이다. 


p47 군란 때 피살된 일본인에 대한 위문금과 일본 시설에 대한 피해보상금 50만 원을 지불하고, 일본군을 공사관에 주둔시킨다는 내용의 제물포조약이 하나부사의 주도로 체결됐다

p78 시해의 현장에 대원군과 훈련대 병사가 있었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못할 우리 역사의 치부다. 비록 대원군이 30년간 며느리와 숙적 관계에 있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p84 청일전쟁 직후 두 나라 사이에 맺어진 시모노세키조약에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 포기 조항이 들어간 것을 기념하는 사업이었다

p93 1899년 제정된 대한국국제 곧 국가의 기본법에는 황제권을 제약할 여지가 있는 국민의 참정권이나 의회 설립 등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p107 대다수 애국계몽운동가들이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을 수용하여 국권 피탈의 원인을 우리 민족에게서 찾으면서, 독립을 위한 비타협적 투쟁노선을 표방하지 못한 것은 분명한 한계였다

p128 단발령 때문에 생겨났던 이발소에서 상투를 틀어주기도 하고, 머리를 깎아주기도 하는 희한한 상황이 발생했던 것이다

p133 이들 시설은 모두 일본과 중국 등 열강의 군사력 필요나 경제적 이권 확보의 일환으로 개설된 것이었다. 우리 근대화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p150 최남선과 이인직의 이런 반역사적인 작품이 문학적으로 새롭고 의미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p175 1882년 관계에 진출한 이래 이완용은 친러, 친미, 친일을 두루 거친 변신의 달인이었다. 그런 그가 마지막 순간 택한 이력은 일제가 하사한 직책이었다

p179 문제는 이광수 개인의 변심에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최남선, 최린, 송진우, 김성수 등 3.1운동의 실패 이후 동요하던 민족 인사들 역시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신의 본심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이들의 주장은, 독립은 이미 물건너갔으니 조선은 일제의 지배를 인정한 다음 그에 걸맞은 운동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p196 신용하 교수에 따르면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조선총독부의 소유지가 된 땅은 국토 총면적의 약 50.4퍼센트에 해당했다

p213 1910년대 국내에서 활약했던 대표적인 독립투쟁 단체 대한 독립의군부(독립의군부)는 그렇게 탄생했다

p219 이들은 서간도 일대에 자리를 잡고 한인 자치 사회의 경제적 부흥과 독립운동 거점 마련에 힘을 쏟았다. 경학사와 부민단은 이 과정에서 탄생한 대표적인 단체였다

p232 독립을 위한 유일한 방책이 강대국의 시혜가 아닌 민족 자신의 투쟁뿐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짐으로써 이후 민족운동은 더욱 비타협적인 투쟁을 벌여나갈 수 있게 되었다

p275 역사학자 장세윤에 따르면 이 시기 만주 지역 무장투쟁은 확산되어 가던 패배주의와 개량주의 움직임에 못을 박고, 우리 민족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살린 민족해방운동의 꽃이었다

p300 신간회 해소 이후 전투성을 잃지 않았던 민족주의 세력은 사분 오열되었고 이것은 오히려 민족주의 우파 인사들이 적극적인 친일로 돌아서는 계기가 되었다

p310 원산노련은 1월 22일 산하의 모든 노동단체와 함께 총파업을 단행하기로 결성했다. 이 방침에 따라 해륙, 운반, 중사, 제면 노동조함 등은 물론, 우너산노련에 소속되지 않은 자유노동자들까지 파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노동운동의 역사상 기념비가 될 노동자들의 대규모 총파업 투쟁이 발발한 것이다

p319 이 같은 농민투쟁의 전통이야말로 1949년 이승만 정부가 농지개혁에 나서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한 요인이었다

p333 장지필, 이학찬과 같은 백정 출신 인사는 물론 양반 출신 천석꾼의 자제이자 동아일보 진주 지국장인 강상호 등 비백정 출신 선각자들이 적극 호응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모인 80여 명의 인사는 1923년 4월 25일 진주 대안 등에서 대회를 열어 형평사를 창립했다

p349 1934년 카프의 중심 인물이던 박영희가 얻은건 이데올로기요 잃은 건 예술이다라고 말했던 건 이들이 직면했던 딜레마를 압축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p360 좌우를 망라한 모든 세력의 통일, 단결을 통한 정부 수립의 실패, 그 후폭풍은 거셌다.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었던 좌우대립이 격화되었고, 이것은 결국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동족상잔의 비극으로까지 나아갔던 것이다

p370 통치의 효율성을 꾀하던 미 군정에게 이들의 친일 경력은 문제 되지 않았다. 이들은 대거 미 군정의 고문직에 취임했고, 그 주위로는 살 길을 찾아 헤매던 수많은 친일파와 기회주의자들이 몰려들었다

p380 메논은 왜 입장을 바꿨던 것일까?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것은 이승만과 모윤숙의 미인계 때문이었다

p398 남과 북 공히 집단 처형과 학살을 무차별적으로 자행함으로써 가장 추하고 더러운 전쟁이었다는 오명도 함께 뒤집어쓰게 되었다. 같은 민족의 소행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잔혹한 인명살상 행위가 아무런 죄의식 없이 저질러졌던 것이다

p409 뼛속까지 친일파였던 박정희가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로 이를 해결하려 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동북아시아에서 공고한 반공 블록을 구축하려 한 미국의 강력한 요구는 국교 정상화를 압박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었다

p461 전쟁 개시를 결정했으며 전쟁의 총책임자였던 김일성은 숙청을 통해 오히려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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