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잡사 - ‘사농’ 말고 ‘공상’으로 보는 조선 시대 직업의 모든 것
강문종 외 지음 / 민음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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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조선잡사

작가 : 강문종

출판사 : 예문 아카이브

읽은날 : 2021/03/16 - 2021/03/28


조선에는 사농공상의 직업이 있었다.

선비와 농부는 많이 들어봤지만 그외의 직업과 관련해서는 장영실이라는 사람 외에 들어본 이름이나 직업이 없었다.

이 책은 공상의 직업에 대한 내용이다. 

책을 읽어보면 조선이라는 나라는 백성들이 참 살기 힘든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기술자들은 천대받으며, 기술이 있다는 이유로 착취당하고 고통받는다.

기술을 저주하며 손을 자르기도 하고, 도망가기도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자명종을 만들 기술도 있었고, 고려청자의 상감기법의 기술도 있었지만, 그 누구도 대접받지 못했다.

결국 조선은 성리학을 강조하다 멸망한다.

기술자를 대우할 때 기술이 발달하고, 사람의 생활도 윤택해진다.

좋은 기술이 있음에도 시대를 잘못 만나 고생만 하다 사라진 백성들이 참 안타깝다.


p14 고급의류는 전부 뜯어서 세탁해야 했으므로 빨래 한번 하면 바느질감이 수북이 쌓였다. 일자리가 필요한 여성들은 이 틈새를 파고들었다. 솜씨 좋은 사람은 선수로 불렸다

p19 이덕무의 김시부부전이라는 결혼식 기록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신랑 신부가 맞절을 하면 수모가 합환주를 마시게 한 다음 덕담을 하며 축복한다.

p27 고죽 초경창고 그의 방직기 홍랑이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에게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도 여기소서

p65 백정들은 소를 잡는 도축장을 천궁이라고 불렀다. 죄를 지어 땅으로 내려온 옥황상제의 자식을 하늘로 돌려보낸다고 빋었던 것이다. 도축은 승려가 독경하는 가운데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p75 입산 전부터 목욕재계하고 음식을 가리며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다. 산에 도착하면 산신령에게 제사부터 지낸다. 산삼을 캐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살아서 돌아오기 위해서다

p77 인삼 상인은 헐값에 산삼을 사들여 사신단을 따라 중국에 가서 팔거나 동래 왜관의 일본인들에게 팔아 엄청난 이익을 보았다.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이 따로 있고 이득을 보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p84 매골승은 불교식 장례인 화장을 주관하고 풍수에 맞게 묏자리를 잡아 주었다. 묘를 어떻게 쓰는가에 후손의 번성이 달렸다고 믿었던 당시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고려 말의 요승으로 알려진 신돈도 원래는 매골승이었다

p94 세종 때 기록에 따르면 서울에 화재가 한번 발생하면 100채 정도는 금세 타 버렸다고 하니 화마는 무서운 재앙이었다.

p95 장비가 열악할 뿐 아니라 목조 주택은 복구할 수가 없었기에 화재를 직접 진압하기보다 불이 난 건물을 무너뜨려 불길이 번지지 않도록 했던 것이다.

p99 술 잘 먹구 돈 잘 쓸 때는 금수강산일러니 술 안 먹고 돈 떨어지니 적막강산일세

p117 18세기 조선은 소설에 빠졌다. 임금이 사는 궁궐에서 촌구석까지 소설을 즐기지 않는 곳이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따르는 법. 당시 서울에는 열다섯 곳에 이르는 책 대여점, 즉 세책점이 성업했다

p130 사당패의 기원은 재승이다. 재승은 사찰에서 열리는 불교 행사에서 각종 공연을 보여 주는 승려로 불경 간행, 법당 중수, 비석 건립 등에 쓰일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절 밖으로 나와 공연을 했다

p142 요취곡과 영산회상의 변주곡을 연주하면 귀공자들은 알지도 못하면서 "좋다. 좋아!"하고 외쳤다. 유우춘은 속으로 그들을 비웃었다. 음악성을 추구하자니 수입이 줄고, 대중성을 추구하면 천박하다는 비판이 뒤따랐다. 경제적 문제 앞에서 예술성을 고민한 직업 연주자의 초상이다

p164 조선의 기술자는 천대받았지만 궁인과 시인만은 예외였다. 대우가 좋으면 인재가 모이고 기술이 발전하는 법. 조선의 활이 최고의 평가를 받았던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p168 소박한 아름다움을 추구한 것과 소박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도 구분해야 한다. 실학자들은 문헌을 조사하다가 고려 청자가 비색자기로 일컬어지며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의문을 제기했다. 고려 청자를 만들던 우수한 기술은 어디로 가고 우리는 소박한 백자밖에 만들지 못하는가? 우수한 기술은 우수한 장인에게서 나오고 우수한 장인은 우수한 대우에서 나온다.

p172 기술이 있다고 대접받기는 커녕 그 기술 때문에 갈취의 표적이 되었다

p184 자명종은 서양 과학 기술의 정수였으나 조선에서는 골동품처럼 집안 한구석을 장식하는 비싼 소품이었다

p186 조선의 시계 제작자는 정밀한 기계를 다루는 공학자였다. 이들은 하나같이 무에서 유를 일군 시대의 천재들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시계 제작자는 천대 속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결국 조선은 19세기까지 바늘 하나 만들지 못하는 나라로 남았다

p202 압송을 앞둔 유광억은 과적으로 몰려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자살을 선택한다. 경시관은 유광억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하지 못했고, 주변 사람들도 그의 재능을 아까워했다. 뛰어난 글재주를 지녔지만 부정행위 말고는 달리 재주를 발휘할 곳이 없었던 불행한 문인의 최후였다

p222 사기는 테크닉이 아니다. 사기는 심리전이다. 그 사람이 뭘 원하는지, 그 사람이 뭘 두려워하는지 그것만 알면 된다.

p230 대립군은 대개 몸이 밑천인 날품팔이였던지라 군포를 낼 여력이 없었다. 당연히 자기 군역은 그것대로 또 이행하고, 여기에 더해 다른 사람의 군역까지 맡았으니 대립군은 군에서 먹고 자는 군졸 아닌 군졸이었다

p234 저명한 관료와 학자는 한 번만 만나도 스승으로 떠받들면서 여러해 자기를 가르쳐 준 숙사는 스승으로 여기지 않았다.

p235 조선의 교육을 담당한 것은 퇴계나 율곡 같은 큰 스승이 아니라 이름 없는 숙사들이다. 그런데 숙사의 존재는 무시당하기 일쑤다

p237 우리나라 직장인의 종착지가 결국은 모두 치킨집으로 귀결되는 것처럼, 조선 시대 선비의 종착지는 짚신 삼기 아니면 돗자리 짜기였다

p241 김낙행은 돗자리 짜는 노인으로 여생을 마쳤지만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선비의 뜻만은 잃지 않았다

p245 산가지는 수학 문제를 풀이해 문서로 정리할 때 그리기가 더 쉬웠다. 수학 공식을 일목요연하게 표현하는 데 산가지가 더 적합했던 것이다. 그래서 산원은 주판 사용법을 알아도 산가지를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산원은 단순 계산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공식을 다루는 수학자였다

p296 독자를 매료시킬 작품을 골라 구비해야 했으므로 서책점주는 작품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과 유행을 읽는 감각이 필요했다. 한 권짜리 작품을 여러 권으로 나눠 필사하고, 결정적 장면에서 다음 권으로 넘겨 독자가 계속 빌리게 만들었다. 세책점주는 출판 기획자이자 편집자였다

p298 인기가 많은 책을 여러 사람이 봤으므로 낙서도 많았다. 인신공격, 음담패설은 물론이고 세책점주의 어머니까지 욕했다.

p312 송세흥은 98세까지 장수하고 병 없이 세상을 떠났다. 손자 하나는 무과에 급제했다. 사람들은 베풀기 좋아한 덕이라 했다. 그는 자기 상여를 메 줄 일꾼들이 신을 수십 켤레의 짚신을 만들어 놓고 눈을 감았다.

p320 대동법으로 유명한 잠곡 김육은 나무꾼 출신이다. 그는 젊은 시절 가평 잠곡에 살았다. 매일 나무를 해서 서울에 내다 팔아 입에 풀칠을 했다. 틈틈이 책을 읽어 과거에 합격했다

p324 이처럼 나무꾼의 삶은 고되었지만 고된 가운데 여유가 있었던 탓인지 나무꾼은 은자의 상징이다. 박세당은 나무꾼이 되어 여생을 마치겠다며 호를 서계초수라고 지었다. 수락산 계곡의 나무꾼 노인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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