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다 다이사쿠 명언 100선 - 풍요로운 삶의 지표
이케다 다이사쿠 지음, 화광신문사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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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케다 다이사쿠 명언 100선」


명언이란 사리에 맞는 훌륭한 말, 이치에 맞는 말을 명언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좋은 말을 했다고 해서 명언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합당하고 이치에 맞아야만이 명언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자신에게 도전을 주고, 희망을 주고 용기와 격려를 주는 말을 가슴에 품고 있다면 이런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이요, 현명한 사람일 것이다.

예로부터 선조들도 말의 중요성에 대해서 아주 많이 언급해 왔다. 한 마디의 말이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어 결국은 죽이는 일도 있다.

이케다 다이사구의 명언집은 그런 의미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고 희망과 용기를 주는 책임에 분명하다. 90년의 세월이 묻어나는 후손들에게 도전을 주고 용기를 주는 책이며, 때로는 자신의 사명을 깨닫게 해 주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특히 교사의 역할에서 교육의 원점은 교사이며 교사의 인격이 바로 교육이라는 가치를 창조하는 근원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바이다. 학생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교육환경은 바로 교사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교사는 자기 계발과 자신의 성정을 위해서 끊임없이 공부하고 도전하고 노력해야 한다.

요즘 교육의 안타까운 현실은 입시 위주로 학생들은 내신 성적을 올려야 하고 하물며 봉사활동 조차도 인성개발과 헌신의 차원이 아닌, 내신 성적을 올리기 위한 거의 형식적인 것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현실이 안타깝다.

지금의 교육은 지식을 전달하고 아는 것에 너무도 치우쳐 있다. 물론 학교마다 현장학습이며, 인성교육이며 여러 가지 봉사활동을 통해 학생들로 하여금 새로운 가치에 도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면도 없이 않지만. 너무도 지식 전달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너무도 안타깝다. 교사의 경험을 학생들에게도 전해주므로 학생들도 교사와 동일한 체험을 통해 스스로 지혜를 터득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남묘호렌게쿄를 기도문으로 삼는 창가학회의 종교적 색체가 다분히 묻어나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른 종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다른 종교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만, 그러나 기독교는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 즉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반응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을 향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다양한 방면에 대해 자신의 경험과 깨달음을 옳겨 놓은 이 책은 반드시 많은 사람들에게 도전과 용기를 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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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의 임재 연습 -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발견하기
앤드류 머레이 지음, 정혜숙 옮김 / 브니엘출판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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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성령님의 임재연습」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되는 필요불가결한 일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이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며,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며, 알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자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하고,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이 온전히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야만 하는 것이다. 내 안에 성령님께서 거하시만 하면 우리는 죄를 이길 수 있다. 또한 세상과 구별하여 거룩함을 유지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힘든 부분이 바로 죄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끊임없이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죄와 짝하게 하려고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리고 죄의 종이 되게 만든다. 그래서 결국은 넘어져서 구원함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하나님과 적이 되게 만든다. 사단의 전략이 그렇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사단과의 대적에서 이길 수가 없다. 오직 성령님만이 우리의 도우심이 되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다.

그럼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고, 성령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그 방법은 사실은 간단하고 명료하다. 우리가 하나님께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면 됱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의 충만함을 구한다고 다 구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인되심을 인정하고 그 분 앞에 머리를 숙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늘 성령으로 충만하게 살아가기를 열망하고 계신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열망 속으로 나 자신을 내어드려야 한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물론 기도하고, 죄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야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열망을 통해 우리가 성령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그 열망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열망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실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성령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이다. 나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인내하고 기다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성령의 임재는 우리를 축복의 길로 인도한다. 하나님과 교통하게 만들어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며, 하나님께서 예비한 것을 마음껏 누리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을 사모하여 성령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계획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성령의 사람 앤드류 머레이를 통해 성령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위대한 설교가인 머레이의 또 다른 깊은 영성을 볼 수 있어서 더욱 귀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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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 이태석 신부 이야기
우광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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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얼마 전에 「울지마 톤즈」라는 다큐 영화를 보고서 눈시울을 적신적이 있었다. 수단의 톤즈에 있는 어린 청소년들과 주민들을 대하면서 해맑게 웃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할 정도로 감명 깊게 본 영화였다.

우리나라 복음 초창기에 이 땅에 복음을 심었던 수많은 선교사들이 어쩌면 이태석 신부님과 같은 헌신과 사랑과 실천을 가지고 이 땅에 오늘날과 같은 복음을 심지 않았는가 싶기도 한다. 의사로서, 음악과 운동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면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그래서 자신의 삶은 이 나라의 상류층으로서 얼마든지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늘 어려서부터 신부님의 뇌리 속에 각인되어 온, 십자가에서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매달려 있던 예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신부로 헌신하게 되고, 예수님께 받은 사랑을 이제는 많은 성자들처럼 되돌려 주기를 원하는 이 땅의 진정한 참 사람. 사랑을 전하기 위해 그토록 몸부림쳤던 절규하는 모습

사랑은 함께 있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고통까지 함께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라는 다미안 신부의 마지막 말처럼 톤즈의 주민들과 청소년들의 아픔, 아니 세상의 모든 사람의 아픔을 함께 느끼기를 원했고, 그러한 사랑은 그의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들을 돕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는 회고에서도 잘 알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집에서 실과 바늘을 가지고 나가 한 걸인의 옷을 꿰매준 일화는 참으로 어렸을 때부터 사랑이 넘치고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우리가 다큐 영화를 통해서, 글을 통해서 이태석 신부님의 길지 않은 일대기를 보면서 감동을 받기는 하지만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아무나 쉽게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아닌, 어쩌면 이태석 신부님만이 걸어갈 수 있는 그 길이기에 더 안타까움이 남는다.

이제 이태석 신부님이 떠나버린 톤즈의 청소년들과 주민들은 누가 돌본다는 말인가?

울지마 톤즈를 보면서 이태석 신부님이 떠나버린 톤즈의 모습을 본적이 있었다. 그런데 신부님이 계실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벌써부터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너무도 황량했고, 전혀 생기를 찾아볼 수 없는, 웃음이라고는 어디에도 볼 수 없는 그런 곳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만큼 이태석 신부님의 자리가 컸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로, 아니면 물품으로 헌신하는 것, 어쩌면 쉽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을 전하는 것이야말로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그들의 환부를 직접 만져 고름을 짜주고,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면서 그들과 똑같이 한센병 앓기를 염원했던 다미안 신부처럼, 톤즈에 있는 주민들과 함께 고통과 사랑을 나누며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다 짧은 생을 마감하신 이태석 신부님.

당신의 빈자리가 너무도 큽니다. 여기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알려주고 느끼게 해 주신 당신의 사랑 결코 잊지 않으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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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대에서 만난 하나님 - 갈대상자 속 한동인들의 이야기
김대일 지음 / 두란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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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대에서 만난 하나님」


몇 년 전에 「갈대상자」의 저자이신 김영애 사모님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었다. 매 순간마다 무릎을 꿇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고, 한동대학교가 지금까지 올 수 없었다고 간증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내 귀에 들린 듯하다.

어쩌면 그 당시 안정적이고, 평안하게 학자로서의 길을 갈 수도 있었지만,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새로운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기독교적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허허 벌판, 광야같은 곳으로 모든 삶의 터전을 옮기고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오늘에까지 이르게 하신 두 분의 열정과 헌신에 깊은 감동을 받았었다.

그런데 「갈대상자」는 어쩌면 설립자로서의 감동과 눈물과 기적을 보았다고 하면, 「한동대에서 만난 하나님」이라는 책은 어쩌면 아버지가 한동대의 부총장이지만 지극히 평범한 한 학생의 일기를 만난 것같은 느낌에 단숨에 읽을 수가 있었다. 책에서 저자는 자신의 일기가 세상에 공개된 것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고 하는데, 만약에 이 책이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다고 하면, 이 땅의 젊은이들이, 도전받고 새로운 비전을 꿈꿀만한 한권의 책이 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대학생들을, 아니 젊은이들을 볼 때, 우리나라의 미래를 걱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김대일 형제와 한동에서 공부하고 있는 젊은이들을 볼 때, 결코 이나라의 미래가 어둡지만은 않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많은 기독청소년들이 가고 싶어하는 대학이 바로 한동대일 것이다. 그러나 대일 형제가 소개하고 있는 그러한 젊은이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과의 끊임없는 싸움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하나님의 도를 따르는 젊은이들, 기독교 가치관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하는 젊은이들, 코피가 터지면서도,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참아가면서도 새벽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만나기를 원하는 젊은이들이 있기에 우리나라에는 소망이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

지금도 갈대상자속의 한동인들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기적을 체험하고 있다. 하나님의 도를 따르는 것이 무엇일까?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우리의 삶은 어떤 것일까? 모든 기독교인, 특히 기독 젊은이들이 끊임없이 고민하고 기도해야 할 기도제목이다. 어쩌면 대일 형제를 비롯한 한동인들을 그것에 대한 해답을 찾았고, 자신들이 찾은 그길을 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모습이 이 책을 통해 볼 수가 있었다.

자신의 미래보다는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길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알았다면 자신의 안락함도 포기하고 고난의 길을 가기를 마다하지 않는 모습들

특히 카터 센터에서의 인터직을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인도로 선교 리서치를 떠나는 모습에,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으리라 생각하면서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나라고 하면 과연 그러한 때에 어떤 결정을 했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보면서 말이다.

하나님께서 한동대를 세우시고, 한동대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귀하게 쓰임받을만한 사람들을 키워나가시는 모습에 우리 아들도 도전받았으면 하는 생각에 잠겨본다.

고등학교 상위 2퍼센트 안에 들어가야만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명문대학교.

들어가기보다는 들어가서 더 많은 것에 도전받고 하나님께서 하심을 경험하게 되는 대학교.

전국 최초로 무감독 시험을 실시하면서 학생들에게 정직과 도덕성을 가르치고 새로운 대학문화를 이끌어 가고 있는 신흥 명문대학 파이팅을 외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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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어둡고 긴 그림자 - 성경의 인물에게서 배우는 죄에 대한 교훈
조셉 스톨 지음, 김복기 옮김 / 대장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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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어둡고 긴 그림자」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 인간처럼 어리석은 존재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과 함께 교제하며 사시기를 원하셨다. 그런데 그만, 처음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함으로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서 하나님의 징계의 결과로 살아가게 되었다. 아담과 하와가 무엇이 부족해서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죄를 범했을까? 어리석지 않는가?

죄를 짓지 않았으면 늘 하나님과 마음껏 행복을 만끽하며 살아가고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가 되었을텐데. 그 뿐인가?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우리 인간들은 아담으로 인해 죄를 안고 이 세셍에 태어났고, 그 죄를 안고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죄를 짓고, 또 죄를 지으면서도 자신이 죄와 더불어 동거동락한다는 사실 조차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가?

인간이 죄를 지을 때, 자신의 행동이 죄인줄을 모르고 짓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죄를 반복하여 짓고 있으니, 아담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죄의 습성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실감하게 된다.

저자는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을 통해 우리를 교훈하고자 한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지 않기를 소망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또한 그로인한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을 깨닫게 하고 있다.

죄의 결과는 정말로 무서운 것이다. 하나님과의 단절뿐만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저주했던 것처럼 죄의 결과는 죽음이다. 이 죽음은 단지 육체적인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영이 죽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결국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영원한 구렁텅이에 빠지고 만다.

인류의 죄는 제목처럼 어둡고 긴 그림자이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터널과도 같다. 여기서 터널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냥 그림자로서 늘 따라 다니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암시해 주고 싶다.

사실 우리 인간이 죄로부터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아니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죄는 또다른 죄를 낳고, 결국은 자신을 파멸로 이끌어 간다. 어쩌면 리플리 증후군 환자처럼 죄를 짓고 있음에도 그것이 죄가 아니라 정의라고 생각하게 만드니까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명을 어기고 죄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죄의 종이 된 우리 인간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우리 인간을 위해 보내주셨고,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셨다. 이로인해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해결하신 것이다. 죄의 그림자가 어둡고 긴 그림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에 터널인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우리는 어둡고 긴 터널을 벗어나 빛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이 아니겠는가?

사실 죄는 아주 무서운 것이다. 아담과 하와를 죄짓게 했던 사단은 지금도 교묘히 위장하여우리 인간에게 다가온다. 우리 인간의 힘으로서는 그러한 유혹을 이길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또다른 보혜사를 우리에게 보내주셨다. 바로 성령님이시다. 그 성령님께서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죄의 유혹에서 벗아나게 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늘 성령님께서 죄의 유혹으로 벗어나게 하심을 경험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죄라는 어둡고 긴 그림자가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터널을 벗어나 새로운 빛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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