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 - 물이 평등하다는 착각
맷 데이먼.개리 화이트 지음, 김광수 옮김 / 애플북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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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공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수 조건이다. 이 두 가지가 결핍되면 인류는 물론 지구상의 어떤 생명체도 모두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이 물질이 늘 곁에 있으니까 중요한 생존 필수물질이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지나갈 뿐이다. 특히 세계 여러 나라에서 물 부족으로 생명을 잃어간다고 하고, 물 공급 대책을 여러가지로 세우기도 한다는 점도 갑자기 생긴 일은 아닌데 우리가 잊고 있었던 문제일 뿐이다. 여전히 물이 부족하고 공기도 날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물 없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은 가르치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이다. 다만 우리는 식수가 없어 고생한 적이 없기 때문에 물 없는 세상을 생각해보지 않는다. 물 없는 세상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아마 물이 없었다면 인류의 생존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그 중요성을 느끼지 못한 채 물로 매일 몸을 씻고, 설거지하고, 커피를 내려 마시며 크고 작은 볼일을 처리한다. 하지만 전 세계 7억~8억 명의 사람들은 여전히 마실 물을 찾아 이곳저곳을 헤매고 17억 명은 화장실조차 제대로 사용할 수 없다고 통계로 나와 있다. 누구나 당연히 사용할 권리가 있는 필수 자원이 지구촌의 수많은 이들에게는 여전히 불평등한 상태로 빈곤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게 문제다. 이래 놓고도 인류 문명, 문명의 위대함을 떠든다는 게 사실은 불합리하고 우스운 얘기일 뿐이다.

 


 

이 책 『워터』는 세계적인 록 밴드 U2의 메인 보컬인 보노의 권유로 잠비아를 방문하게 된 할리우드 배우 맷 데이먼(MATT DAMON)이 그곳에서 물로 인해 고통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목격하고 그들에게 도움이 될 아이디어를 고민한 데서 비롯된다. 책의 부제 「물이 평등하다는 착각」 역시 물 문제를 잘 지적하고 있다. 물 문제를 둘러싼 사회적, 기술적, 정치적 역학관계를 알게 된 데이먼은 물 전문가인 개리 화이트(GARY WHITE)와 힘을 합쳐 워터닷오알지(WATER.ORG)라는 비영리단체를 조직한다.

책에 따르면 1980년, 유엔은 ‘국제 식수 공급 및 위생의 10년’이라는 목표를 정하고 향후 10년 안에 전 세계 사람들이 깨끗한 물과 위생 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장 10년 안에는 힘들겠지만 그 다음 10년까지는 물 부족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상적인 바램이었다. 인구 증가와 산업화로 인한 환경 훼손과 세계 경제 침체로 물과 위생에 필요한 재원이 줄면서 깨끗한 물을 얻기가 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물 부족 현상은 기후 온난화가 초래하는 가장 파괴적인 결과 중 하나이면서 극심한 빈곤의 원인으로 해마다 세계 경제에 2,600억 달러의 손실을 입힌다. 수인성 질병인 설사는 말라리아, 홍역, 에이즈를 합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아이들 목숨을 앗아가고 있다.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는 인도의 일부 지역은 물이 너무 귀한 나머지 매일 하루종일 가족을 위해 ‘물 담당 아내“를 따로 들인다고 한다.

 


 

데이먼은 잠비아에서 목격한 상황의 충격과 함께 물 부족 국가에서 물의 권리를 찾는 일은 언제나 여성의 몫으로 남는다는 것도 확인했다. 매일같이 생명의 물을 길어 나르느라 여자아이들은 제대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성인 여성은 일터에 나갈 시간조차 없다. 잠비아에서 돌아온 맷 데이먼의 머릿속에는 그곳에서 만난 파란 원피스의 소녀와 우물까지 걸어가던 장면이 자주 떠올랐다. 그는 소녀가 처한 상황과 물에 대해 배운 것들을 생각할수록 물이 다른 모든 것들의 근간임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이후 그가 에티오피아를 방문했을 때에는 땅 파는 데만 거의 1만 달러의 비용을 들여 설치했던 우물이 고장 난 채 그대로 방치된 현장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기도 했다. 고장난 우물을 고칠 능력이 없었던 현지 주민들은 마침 바로 그 옆에 또 다른 우물을 손으로 직접 파는 중이었는데 아이들은 손으로 판 그 우물 곁에 모여 초콜릿 우유처럼 보이는 흑갈색의 오염된 물을 허겁지겁 마시고 있었다. 개리 화이트가 과테말라에서 만났던 한 여성은 평생 단 한 순간도 물과 위생 시설에 다가갈 수 없는 현실에서 살아왔다. 그녀는 새벽 4시에 일어나 날이 밝기 전에 남들 눈을 피해 들판에서 볼일을 봐야 했고, 낮에는 온종일 물을 긷다가 밤이 되면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그대로 잠들곤 했다.

 


 

이 책은 데이먼과 개리 화이트의 물 문제 국제 협력에 동참하면서 겪은 일과 과정을 차분하게 정리하며 이 책을 썼다. 두 사람은 물 문제 해결 기구 조직 활동으로 세계 물 부족 상황을 겪고 있는 나라라면 어디를 막론하고 뛰어다녔다. 인도의 경우 대부분의 빈민촌 가구는 화장실을 설치할 돈이 없어서 매번 유료 공중화장실을 이용한다고 한다. 이를 연간으로 계산해보면 위생에 지출하는 ‘대처 비용(coping costs)’이 화장실 하나를 설치하는 것보다 더 많아지는 셈이다.

매년 전 세계에서 쏟아붓는 이러한 대처 비용은 무려 3,000억 달러에 달한다. 잘못된 시스템 속에서 돈이 낭비되는 것이다. 감성을 자극하는 TV 구호단체 광고는 물 부족 세상으로 우리의 관심을 끊임없이 유도하지만 늘 참여를 주저하게 만든다. 마치 이웃집에 불이 났는데 자기 집 앞마당만 지키는 느낌처럼 마음 한편에 죄책감이 있으면서도 남 일처럼 슬쩍 넘어가는 식이다. 최근 한 조사에 따르면 이러한 물 부족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향후 10년간 매년 약 1,140억 달러 정도가 필요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단순히 기부만으로는 해결하기가 어려운 금액이다. 이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순간이다.

 


 

데이먼은 할동 중에 유조차로 날라온 더러운 물을 비싼 돈을 주고 사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각 가정에 수도꼭지와 위생 시설을 설치하여 비용상 효율적으로 전환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양질의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알게 됐다. 개리 화이트는 무하마드 유누스의 소액 대출 은행에 영감을 받아 물 문제 해결에도 비슷하게 적용할 수 있는 워터크레딧(Water Credit)를 시작한다. 물과 위생 시설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시설을 설치하도록 최소 금액을 빌려주고 이후 다시 상환토록 하는 이러한 방식은 자연스럽게 작동하여 상환된 대출금은 미래의 다른 대출자를 위한 자금으로 다시 사용된다.

두 저자는 이 세상에는 소득이 낮은데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물과 위생 문제 해결을 위해 기꺼이 비용을 지출할 의사가 있는 사람이 수억 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덕분에 임시방편인 ‘모금을 통한 구호’가 아닌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한발 다가서게 된 것이다. 잠비아에서의 특별한 만남 이후 맷 데이먼은 리비아에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주민들이 물과 위생 시설을 사용하도록 현지 단체에 기금을 지원하는 H2O 아프리카재단을 설립한다. 하지만 기금이 쌓여가면서 재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 그는 한 팀으로 더 많은 일을 효율적으로 해낼 수 있는 물 전문가가 절실해졌다.

 


 

물 부족 위기에 대한 UN의 관심과 재원이 점점 말라가던 1990년대에 개리 화이트는 개발도상 국가에 깨끗한 물과 위생 시설을 담당하는 현지 단체들과 파트너십을 맺고 워터파트너스(WaterPartners)라는 단체를 세운다. 하지만 조직이 커질수록 개리에게도 가장 필요한 존재는 맷처럼 뛰어난 커뮤니케이터였다. 그때까지 이룩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물 부족 위기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은 그에게 언제나 힘든 숙제였다.

2008년 클린턴글로벌이니셔티브CGI에 참가한 맷 데이먼과 개리 화이트는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물 부족 문제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확인하고는 두 단체를 하나로 합쳐 워터닷오알지 재단을 설립한다. 그들의 목표는 ”자신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물 부족 위기를 해결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문제가 해결 가능하다는 확신과 이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자원이었다. 두 사람은 좋은 의도로 시작한 일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더 나은 결과를 위해 지금도 계속해서 방법을 찾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수많은 자선단체가 주도하는 물 프로젝트는 근본적인 해법은커녕 일차적인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아직 세상에는 물과 위생 시설이 필요한 사람들이 십수 억 명에 달한다. 이들에게는 자신의 삶을 개선하려는 근원적인 욕구가 있다. 바닷물이 모두 고요하면 파도가 일어날 수 없다. 궁극적으로 그들의 삶을 바꾸기 위해서는 지금 깨끗한 물을 사용할 수 있는 세계 인구의 3분의 2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만 가능하다.

 


 

"'물은 생명이다'라는 격언을 또 한 번 되새겼다. 어떤 이들은 이 말을 인간이 살기 위해 물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깨끗한 식수원은 단순히 생존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물은 자유를 부른다. 물은 기쁨을 부른다. 물은 살아가기 위한 기회를 부른다."(p.249)

이 책 『워터』(원제 THE WORTH OF WATER)는 ‘지구촌 물 부족 위기’를 종식시킨다는 담대한 목표를 갖고 지난 10여 년간 이어져 온 두 남자의 위대한 도전 과정을 담은 책이다. ‘깨끗한 물’을 사용하지 못하는 전 세계 30%의 비참한 실상을 통해 우리가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에 대한 경각심과 함께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라는 공동의식을 갖도록 한다.

 

저자 : 맷 데이먼

할리우드 배우, 프로듀서, 시나리오 작가. 워터닷오알지Water.org & 워터에쿼티WaterEquity 공동 설립자.물로 인한 불평등한 세상을 널리 알리고 싶어 2006년 H20 아프리카 재단을 설립했다. 이후 개리 화이트와 함께 Water.org & WaterEquity의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물과 위생 문제에 관한 세계적인 전문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난 맷 데이먼의 영화데뷔작은 「미스틱 피자(1988)」인데, 거기서 비슷하게 막 발돋움하던 스타 줄리아 로버츠와 함께 작은 역할을 맡았다. 작은 역할들을 통해 꾸준히 성공의 길을 밟아가던 그는 졸업을 얼마 앞두고 하버드 대학을 떠났다. 이런 결정은 헤로인 중독의 걸프전 참전용사를 연기한 「커리지 언더 파이어(1996)」에서 호평을 받음으로써 그만한 가치가 있는 도박이었음을 증명했다. 그러나 그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영화는 벤 애플렉과 함께 직접 대본을 쓰고 함께 출연한 「굿 윌 헌팅(1997)」이었다. 그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하고 남우주연상 후보에도 올랐다. 그 후 조지 클루니와 함께 출연한 「시리아나(2005)」에서 갈등에 빠진 컨설턴트 역으로 다시 독립영화의 영역으로 돌아왔는데, 클루니는 「오션스 일레븐(2001)」과 그 속편에서도 함께 작업했고 데이먼이 출연한 「컨페션(2002)」을 감독하기도 했다. 데이먼이 선한 역과 악역을 번갈아가며 연기한 적이 많았던 점을 감안하면, 마틴 스콜세즈 감독의 「디파티드(2006)」에서 경찰로 위장한 범죄자 콜린 설리번은 그에게 가장 이상적인 역할이라고 볼 수 있겠다.

 

저자 : 캐리 화이트

물과 위생 시설 전문가. 1991년 국제적 NGO 단체 워터파트너스(WaterPartners)를 설립했다. 맷 데이먼과 함께 워터닷오알지와 워터에쿼티를 공동 설립하고 현재 CEO로 활동하고 있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물과 위생 시설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으며 시장 중심의 솔루션을 위한 자금 조달 방식에서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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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역류하여 강이 되다
궈징밍 지음, 김남희 옮김 / 잔(도서출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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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폭력, 청소년 문제의 소설이란 말에 으레 그렇듯 아날로그 세대들에게 이른바 '불량학생(?)'으로 일컬어지는 학생들의 일탈 문제를 다룬 소설로 생각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이들 청소년의 가정은 결손 가정이거나 환경적으로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 학생들이 학교 생활에 부적응해서 벌어지는 문제들이 대부분이었다. 요즘은 '일진'이라고도 하고, 학교를 벗어나면 대부분 폭력 조직이나 지하 세계에 몸담게 되는 수순으로 이어진다. 학교에서 교사들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하기 힘든 사회 문제로 비화하기 때문이다. '어둡고 칙칙한 동굴 속' 같은 「프롤로그」가 지나면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제는 기억하기도 쉽지 않은 그 일들은 창백하고 적요한 어느 겨울날 시작되었다.”

이야오와 치밍은 한 골목에서 자라고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지만, 두 사람이 처한 상황은 전혀 다르다. 이야오는 이혼한 아빠에게 버림받고 따뜻한 보살핌은커녕 거친 욕과 매타작을 일삼는 엄마와 살아가며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티고 있다. 반면 치밍은 부모와 교사들, 또래 여학생들의 사랑과 기대를 한몸에 받는 자랑스러운 아들이자 우등생이다. 하지만 치밍은 이야오에게 매일 아침 따뜻한 우유를 건네고 등하교를 같이 하는 것은 물론 늘 혼자인 그녀의 곁을 지킨다. 그렇게 두 사람은 우정인지 사랑인지 모르는 감정이 엇갈린다.

 


 

이 소설 『슬픔이 역류하여 강이 되다』는 학교 폭력과 왕따 등 학원 문제가 주를 이루긴 하지만 이들이 사회에서 어떤 나락으로 빠져들어 가는지 잘 표현해 사회 고발 소설의 성격을 띤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불거진 학교폭력 문제는 우리 사회를 경악시켰다. 언어폭력, 폭행, 지속된 괴롭힘, 집단 따돌림 외에도 사이버 폭력 등 한층 다양해진 방법은 물론이거니와 학교폭력 가해자의 태도가 특히 그랬다. 반성은커녕 아무 일 없다는 듯 뻔뻔한 모습은 마땅히 보여야 할 가해자의 태도가 아니었다. 잘 포장된 이미지로 가까운 곳에서, TV에서 우리의 눈과 귀를 속여 온 것이다. 그들이 거짓된 모습으로 우리를 기만하는 동안 학교폭력으로 고통받은 피해자는 어떨까?

다행히 상처를 극복하고 평안한 삶을 되찾은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여전히 극심한 공포와 분노 속에서 정신과 치료를 병행하며 아물지 않는 상처에 아파한다. 우리 사회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보다 늦게 산업화를 시작한 중국이다. 이젠 세계 2위의 경제대국(G2)으로 올라섰고,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국가를 지속하고 있다. 공산주의 국가라는 말이다. 그곳도 경제 개방화로 사는 것은 나아졌지만 급속한 경제 발전의 뒤안에 남겨진 여러 문제들에는 여전히 노출되어 있다. 이 소설이 사회 고발의 성격을 띈다는 독자의 말에 힘이 실리는 이유다.

 


 

주인공 열일곱 살 소녀 이야오와 같은 골몰에서 함께 자란 동갑내기 소년 치밍 그리고 쌍둥이 남매 구썬시와 구썬샹의 슬픔으로 가득 찬 가슴 아픈 이야기다. 이야오는 뜻하지 않은 임신으로 마음고생을 하다 유산을 결심하고 병원을 찾는다. 그런데 하필이면 치밍을 좋아하여 이야오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탕샤오미에게 들키고 만다. 그때부터 탕샤오미는 교묘하게 이야오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이야오는 돈만 주면 아무하고나 잔다는 소문을 퍼뜨리는데, 구썬시가 그 이야기를 듣고 이야오를 찾아와 돈을 건넨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건 이후 이야오와 구썬시는 조금씩 가까워진다.

구썬시의 쌍둥이 누나 구썬샹은 수학경시대회에서 상을 타고 학생회 일을 하는 우등생이다. 그녀와 치밍은 누가 보더라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예쁘고 공부 잘하는 여자친구가 생긴 치밍을 바라보는 이야오는 마음이 복잡하다. 그 와중에 이런저런 사건을 겪으면서 치밍 대신 자신을 지켜 주는 구썬시에게 마음을 열고 기대기 시작한다. 하지만 불행은 이야오 곁을 떠나지 않는다. 반복되는 학교폭력, 가정불화, 마음을 멍들게 만드는 사소한 오해들이 그녀에게서 떨어질 줄 모르고, 아주 잠깐의 평범한 일상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진다.

 


 

책을 읽을수록 화가 치밀고 눈물을 멈출 수 없는 이 소설은 아주 잠깐 동안의 아주 작은 행복조차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다. 잔인하다.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좀 더 따뜻한 시선과 손길이 필요한 소녀에게 닥칠 수 있는 모든 불행을 한꺼번에 모아 놓은 듯하다. 소설은 시작부터 분위기가 음울하다. 현재 화자가 위치한 상황이나 장소가 겨울로 접어들어 가며 혹독한 추위가 예고된다. 기억은 햇살 아래 밝은 세상에 머물지만, 그곳을 멀고 멀다.

 

골목 안으로 가득 찬 새벽안개가 조금씩 밝아 오는 등불에 흐릿한 덩어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밝지 않은 새벽, 차갑게 푸른 하늘 위로 여전히 남아 있는 별빛이 보였다.

며칠 사이 기온이 빠르게 떨어졌다. 입김이 뿜어져 나오고 곳곳에 두꺼운 얼음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억 속에 멈춰 있는 곳은 멀고먼 햇살 아래 밝은 세상이었다.(p.10)

 


 

이혼한 뒤 본심을 숨긴 채 욕설을 일삼는 엄마에게 늘 얻어맞는 이야오의 얼굴은 하루도 성할 날이 없다. 학교에는 온갖 방법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탕샤오미가 있다. 그 무리에게 시달리는 건 이제 특별한 일도 아닐 정도다. 그런 이야오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치밍뿐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극명하게 달라진 집안 환경과 사소한 오해가 쌓여 둘을 조금씩 갈라놓기 시작한다. 이쯤에서 한 가지 의구심이 들 법하다. 왜 더 노력하지 않는 거지? 왜 당하고만 있는 걸까? 어떻게 해서든 끔찍한 현실을 벗어날 방법이 있을 텐데. 이 소설이 잔인한 점이 바로 여기 있다. 철저하게 완전히 성숙하지 않은 소년 소녀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 어두운 사회. 어른답지 못한 어른들의 무관심.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는 현실. 소설은 믿기 힘들 정도로 너무나 사실적이다. 그래도 의구심이 든다면 관련 뉴스와 자료를 살펴보기를 바란다. 『슬픔이 역류하여 강이 되다』는 현실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이야기의 축소판일 뿐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것이다. 독자가 사회 고발이라는 이유도 같은 것이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 속에,

이렇게 활기찬 생명력이라니.

아무리 열악한 환경이라도 어떤 생물은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아무리 커다란 고통을 당하고 황산에 부식되고 끓는 물에 삶아져도 살 수 있단 말인가?

왜 그런 고통을 견디는 걸까?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p.276)

 


 

이 작품은 제목을 보면 누구나 예상하듯이 슬픔으로 가득하다.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이 답답하고 눈물이 흐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눈물이 마를 즈음, 여전히 가슴은 아릴지라도 분명히 깨닫는 것이 있다. 소설 속으로 들어가 울고 있는 이야오와 괴로워하는 아이들을 도와주지 못해도 우리가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다. 슬픔에 잠긴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가까이 있는 단 한 명, 당신의 관심과 사랑이다. 당신이 내민 작은 손길은 슬픔에 잠겨 허우적거리는 그들을 건져 줄 따뜻한 햇살이 될 것이다. 이 소설이 '청춘소설' '청소년소설'로 분류된다고 결코 '성장소설'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더욱이 그 나이에 한참 빠져드는 이성에 대한 호기심과 그리움은 이 소설에 없다. 백마 탄 왕자 같은 남학생과 신데렐라형 여학생 사이의 조합은 다른 작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제재라 해도 결국은 이야기하는 사람의 능력을 빌려 힘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슬픔이 역류하여 강이 되다』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이미 수면 위로 떠오른 어둠이다.

 

"잔인한 묘사도 적지 않다. 인간의 어두운 일면을 엄혹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슬픔이 역류하여 강이 되다』는 시작하자마자 저제를 관통하는 색감을 드러낸다. 납과도 같은 회색, 어두운 파란색 그리고 검은색. 간혹 틈을 타고 나오는 흰색마저 봅시도 차갑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눈앞에 펼쳐진 상하이의 골목골목은 마치 그 사이를 걷고 있는 것처럼 생동감이 넘쳤고, 골목 양쪽에서 들려오는 서로 다른 소리들, 거친 욕설과 뭔가 깨지는 소리의 뒤를 잇는 절망에 찬 흐느낌은 다른 한쪽에서 들리는 따뜻한 위로를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헛소리로 만들어 버린다.(p.433)

 


 

그래도 이야오라는 인물 창조에는 작가의 작품의 질을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인물 창조력이 돋보인다는 평가다. 희망 없는 어둠에서 그녀를 구해낼 수 있을까. 치밍의 일거수일투족은 애초의 의도와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어찌되었든 '슬픔'이라는 두 글자로 시작하는 이야기 아닌가. 그의 친절함, 그의 도움은 단지 흑과 백의 대비를, 갈수록 멀어지는 거리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 뿐인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소년의 발걸음은 종착역에서 더 멀어질 뿐 아니라 이야오는 약간의 온기를 느낄 때마다 하릴없이 더욱더 차가운 곤경에 빠지는 것이다.(p.434, 뤄뤄(落落)

 

저자 : 궈징밍

1983년 6월 6일 쓰촨성 자공시 출생. 고등학생 때 ‘사차원’이라는 필명으로 인터넷 사이트에 글을 올리기 시작하여, 중국 최고의 대중문학 잡지 《멍야》가 주최하는 신개념문학상 대상을 2001년, 2002년 2회 연속 수상했다. 2003년 출간해 200만 부 이상 판매된 소설 《환성》 이후 《하지미지》 《소시대》 《작적》 등을 발표하면서 중국의 빠링허우(八零后, 1980년대 출생자) 작가를 대표하는 한 명으로 자리했다. 2004년 작가 사무실 ‘섬’을 설립해 무크지를 발간했고, 2013년 영화 《소시대》를 연출하면서 제16회 상하이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했다. 2018년에는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오른 소설 《슬픔이 역류하여 강이 되다》가 영화화되면서 시나리오 작가로 참여하기도 했다. 현재 작가, 편집자, 감독, 시나리오 작가, 프로듀서로 활동하며 상하이최세문화발전유한공사 회장과 총책임자를 맡고 있다.

 

역자 : 김남희

전북대 중문과,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한중과를 졸업하고 칭화대학에서 1980년대 중국 사상문예계의 번역 실천과 재생산의 양상을 연구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신대 한중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등 진융 소설 번역에 참여했고, 《진상제일교귀발》(공역), 《나의 할아버지가 탈옥한 이야기》 《산이 울다》를 번역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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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 - 목소리는 어떻게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가?
존 콜라핀토 지음, 고현석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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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에는 성문(聲紋)이라는 게 있어 목소리로 남녀 구별은 기본이고, 연령대, 직업군, 지역, 심지어는 성격까지도 구별할 수 있다고 들은 바 있다. 물론 TV 사건 관련 방송이나 범죄 영화에서 목소리 분석하는 분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사건이 일어났을 경우 전화 목소리나 기타의 방법으로 목소리가 녹취되었을 때 이를 분석해 범인 검거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인간의 목소리는 다른 생물체의 소리와도 다른 특성이 있는 것으로 과학이 밝혀내고 있다. '목소리' 과학은 이밖에도 목소리가 어떻게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지도 알아냈다고 한다.

이 책 『보이스』는 목소리에 관해 인간이 과학을 바탕으로 인문학, 인류학, 생물학, 사회학 등 각 분야의 학문이 더해져 지금까지 밝혀낸 모든 것을 알려준다. 이 책의 저자는 『타고난 성, 만들어진 성』으로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뉴욕의 저널리스트 존 콘라핀토다. 저자는 이번에는 인간의 ‘목소리’를 전방위적으로 낱낱이 파헤쳤다. 저널리스트의 저력을 증명하듯 자신의 성대 손상 경험에서 시작한 ‘목소리’에 대한 관심은 언어학, 뇌과학, 진화생물학, 인류학, 인문학, 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로 가지를 뻗어나가며, 책의 내용에 깊이를 더한다. 저자는 단 한 권의 책에서 아기가 어떻게 목소리를 인지하고 말을 배우며, 목소리는 어디에서 왔는지, 젠더와 목소리의 관계는 어떻게 형성되어 있으며, 사회적·정치적으로 목소리의 영향력은 어떠한지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노래가 가지는 힘은 무엇인지까지, 목소리의 ‘거의 모든 것’을 언급하고 있다.

 


 

저자는 책을 통해 감히 강조한다. ‘목소리’는 다른 동물과는 구별되는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며, 우리 자신의 많은 것을 드러내는 ‘정체성’이라고 말한다. 그동안 말과 언어, 스피치, 노래에 관한 책은 많이 출간되었다. 하지만 인간의 ‘목소리’ 자체에 집중한 책은 처음이다. 이 책은 아기가 태어나 처음 세상에 던지는 ‘울음’부터 목소리가 나이 들어가는 과정까지, 인간의 탄생으로 시작해 노화로 마무리되는 완벽한 기승전결로 구성됐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고 듣고 있는 ‘목소리’로 이렇게나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독자들은 지적인 즐거움을 한껏 느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수렵채집으로 살아가는 초기 인류에게 만약 ‘목소리’가 없었다면? 몇 미터 앞에 있는 표범을 발견하고 따라오는 동료들에게 위험을 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뒤로 돌아선 다음 흩어져 있는 동료들에게 ‘표범’이라는 신호를 보내야 했을 것이다. 그러면 아마 도망치기도 전에 표범에게 잡아먹혔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문자언어로만 소통하는 사람이었다면 상황은 훨씬 나빠진다. 동료들이 이 사람이 서둘러 쓴 글을 못 알아본다면 어떨까? 어떤 문장인지 뜻을 추리하는 사이 모든 상황은 종료될 것이다. 즉, 목소리는 신호나 글 또는 다른 모든 종류의 의사소통 수단에는 없는 이점이 있다. 몸짓언어보다 약 5배 빠르게 단어를 전달하며, 소리가 들리는 거리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빠르게 소리를 전달할 수 있다. ‘목소리’는 인간 생존에 꼭 필요한 능력인 셈이다.

 


 

저자는 책의 「들어가는 말」에서 인간은 성대에서 나오는 소리와 세상에 존재하는 물체를 연관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말한다. 다른 어느 동물도 할 수 없는 '성대에서 나오는 소리들을 다듬어 분명한 말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의 뛰어난 작품인 《사피엔스》를 읽었다면 과학자들이 인간이 현재의 위치에 오르게 만든 동인으로 대부분 언어를 꼽는다는 것을 알 것이다. (중략) 새, 개, 침팬지, 돌고래 같은 동물도 목소리를 사용해 두려움, 분노, 짝짓기 욕구 등을 나타내지만 이 동물들이 나타내는 것은 당면한 현재의 생존과 번식에 관계된 것에 한정된다. 따라서 인간만이 가진 언어 능력은 다른 생명체와 인간을 결정적으로 가르는 ‘건널 수 없는 루비콘 강’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하라리는 과학자들의 이런 설명에 덧붙여, 이전 언어 능력이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말한다. 하라리에 따르면 언어는 비교적 뛰는 속도가 느리고 물리적으로 약하며, 포식자들에게 쉽게 당하는 동물이었던 초기 인간이 다른 인간들과 협력해 계획을 세우고 전략을 구사해 인간보다 크고 빠르며, 치명적인 포식자들을 제압하고, 다른 동물들보다 더 큰 크기의 집단(또는 부족)을 구성하고(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인 침팬지는 인간보다 한 단계 낮은 협력 형태를 보이며, 약 100마리가 한 집단을 구성할 수 있다), 결국 마을, 소도시, 도시 그리고 국가를 구성해 인류가 지구와 지구상 모든 존재를 지배할 수 있게 만들었다.(p.27~28)

 


 

저자는 인간은 운율 조절을 통해 특정한 말의 메시지를 강화하거나 그 말과는 정반대의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고 언급한다. "예를 들어, 친구의 카키색 바지를 보고 '잘 어울린다'고 하는 중년 남성의 말과, 친구의 아들이 친구에게 하는 '잘 어울린다'는 말은 발성 기관이 전혀 다르게 움직여 나온 말이다. 중년 남성이 하는 말은 진심으로 좋다는 뜻이 담긴 분명한 발성의 결과지만, 친구의 아들이 하는 말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별 감정 을 싣지 않는 교묘한 빈정거림의 표현이다.

운율은 빈정거림이나 비꼬기 위해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감정, 분노, 열정 등을 나타내는 데도 사용한다. 또한 이성을 유혹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거나, 협박하거나, 꼬드기거나, 달래기 위해 자신의 미묘한 감정 상태를 표현할 때도 사용한다. 운율은 영화 〈2001 :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슈퍼컴퓨터 '할'이나 영화 〈스타 트랙〉에 나오는 '스팍'의 감정이 실리지 않은 말투, 모건 프리먼이나 메릴 스트립 같은 배우의 표현력이 풍부한 말투를 구분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전화를 받았을 때 '여보세요'라고 노래하듯이 말함으로써 상대방이 우리를 기계로 생각하지 않게 만드는 것도 바로 운율이다. 이 운율은 고대 그리스의 '앞으로'를 뜻하는 'pro'와 '노래'를 뜻하는 'sody'가 합쳐져 만들어진 말이다. 이 어원에 비춰 보면 우리는 말할 때 '앞으로 나아가는 노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이텔스(저자의 성대 손상 치료 의사)는 저자가 이제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는 노래를 부를 수 없는 상태라고 지적했다고 밝힌다.

 


 

이 책은 모두 8개 파트(부)로 이루어져 있다. 즉 목소리와 관련된 것들에 대해 거의 모든 것을 추적하고 취재하고 경험한 것들을 모아 분류했다. 1부 「베이비 토크」, 2부 「기원」, 3부 「감정」, 4부 「언어」, 5부 「섹스와 젠더」, 6부 「사회에서의 목소리」, 7부 「리더십과 설득의 목소리」, 8부 「백조의 노래」로 구성됐다. 이들 각 부에서는 주제에 맞는 각종 가설, 취재 자료, 전문가 견해, 자신의 경험 등을 군데군데 적절하게 배치해 설득력을 높이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또 저자가 스스로 질문을 생산해 질문에 답하는 과정을 거쳐 책의 의견에 타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먼저 7개의 질문을 살펴본다.

① 발음이 정확하지 않던 아이가 자라면서 또렷하게 발음할 수 있는 이유는? ② 인간처럼 말하는 기관을 모두 가지고 있음에도 유인원이 말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③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가 실제와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④ 암컷과 수컷의 목소리가 같은 동물과 달리 남녀의 목소리는 차이가 나는 이유는? ⑤ 사진을 찍을 때 ‘추즈’라고 하지 않고 ‘치즈’라고 하는 이유는? ⑥ 히틀러의 연설이 폭력 사태로 이어졌던 이유는? ⑦ 오바마가 추도 예배에서 노래를 부른 이유는? 등이다. “우리는 말을 함으로써 인간이 됐다.”는 주장을 전작 『타고난 성, 만들어진 성』에서 밝힌 저자는 이 책에서 "바로 이 이유로 나는 언어가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게 만든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현재 과학계의 정설에 도전한다."(p.31)고 강조한다. 그는 "목소리는 언어의 필요조건이 절대 아니다."로 나아간다. 하지만 우리가 몸짓언어나 글쓰기에만 의존해 의사소통을 했다면 결코 현재처럼 먹이사슬의 최정상 위치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2부 「기원」에서 대부분의 포유류는 말을 하는 데 필요한 모든 발성 기관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 실제로 침팬지의 입술, 혀, 연구개, 폐, 후두는 구조와 기능 면에서 인간의 그것들과 구분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침팬지는 얼굴 정면에 눈이 있고, 엄지가 나머지 네 손가락과 마주 볼 수 있으며, 두 젖꼭지가 대칭적이며, 주둥이가 짧다는 해부학적 특징도 인간과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18세기 스웨덴의 박물학자 칼 린네는 인간과 유인원을 같은 목, 즉 ‘영장목’으로 분류했다. 다윈보다 한 세기 먼저 활동한 린네는 유인원과 인간이 진화 측면에서 연결돼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린네는 해부학적 유사성에만 집중했다. 교회가 표명했던 우려 때문에 린네는 결국 인간이 동물계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도록 호모 속 사피엔스 종이라는 독립된 영장류 범주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린네는 생물학자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 ‘인간과 유인원을 구별할 수 있는 특징은 겨우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네’라고 썼다. 린네에 따르면 그 하나의 특징은 해부학적 특징이 아니라 행동적 특징이다. 바로,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p.99~100)

저자는 '말'과 '소리'의 구분을 기원에서부터 확실히 경게를 짓고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운율, 음색, 고저, 억양 등 말에 포함된 다양한 내용들이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구분짓고, 인간을 영장류 최고의 종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사피엔스 종'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다. 이로써 말과 소리의 경계는 분명해졌다고 강조한다. 이 책은 앞의 8개 부분에서 각 주제에 맞게 논리를 전개하며 독자들의 신뢰감을 얻어낼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각 부를 하나씩 따로 떼어놓고 보아도 훌륭한 결론에 이를 수 있지만 마지막에 저자가 덧붙인 「결론」은 의외로 간단하다. "말과 노래는 모두 허공에 대항해 우리의 존재를 주장하는 방법이며, 찰나에 불과하다고 해도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로 공기에 활기를 주기 위한 수단이다. 말과 노래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신감을 담겨 있어야 한다."(p.355)

 


 

인간의 목소리는 동물의 목소리 중에서도 특이하기 때문이다. 목소리가 말을 하는 데 특화돼 있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목소리에 성적 이형성이 나타난다는 점, 즉 남성과 여성의 목소리가 차이가 많이 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포유동물은 암컷과 수컷의 목소리를 구분할 수 없다. 암컷이든 수컷이든 같은 종이면 똑같이 으르렁거리고, 짖고, ‘야옹’ 소리를 낸다.(p189~190)

- 「Part 5 섹스와 젠더」 중에서

 

저자 : 존 콜라핀토

〈뉴요커〉와 〈롤링 스톤〉의 기자이며, 〈배니티 페어〉, 〈에스콰이어〉, 〈마드모아젤〉, 〈US〉 등에서도 활약했다. 어릴 때 성전환 사고를 겪은 소년의 실화를 바탕으로 쓴 〈롤링 스톤〉의 기사로, 1998년 전미잡지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이 기사를 바탕으로 쓴 《타고난 성, 만들어진 성(AS NATURE MADE HIM: THE BOY WHO WAS RAISED AS A GIRL)》은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뉴욕의 저널리스트로 이름을 알렸다.

 

역자 : 고현석

〈경향신문〉, 〈서울신문〉 등에서 국제부·사회부·과학부 기자로 활동했다. 인문·사회과학·우주과학을 넘나들며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우리말로 옮기고 있다. 연세대학교 생화학과를 졸업했으며 번역한 책으로는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느낌의 진화》, 크리스토퍼 완제크의 《스페이스 러시》, 알렉스 코밤의 《불공정한 숫자들》, 나이절 캐머런의 《로봇과 일자리: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조너선 마크스의 《인종주의에 물든 과학》, 데이비드 포그 외 《세상의 모든 과학》, 닉 레인의 《외계생명체에 관해 과학이 알아낸 것들》, 부르한 쇤메즈의 《이스탄불, 이스탄불》, 레이먼드 피에로티 외 《최초의 가축, 그러나 개는 늑대다》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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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고도 먼 이름에게
가랑비메이커 지음 / 문장과장면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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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의 편지들은 가상의 이름에게 전하는 픽션이 아닌 작가 가랑비의 삶에 머물렀던 이름들을 향한 편지이다. 쉬이 부를 수도, 잊을 수도 없는 이름들을 향한 편지를 읽는 경험은 은밀하고 사적인 감각을 일깨우며 깊고 진한 공감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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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고도 먼 이름에게
가랑비메이커 지음 / 문장과장면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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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지도 못한 사람,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분에게

오늘 편지 한 통을 받았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저 '그동안 소식을 전하지 못한 미안함을 담은 사적이고도

개인적 안부에 관한 편지였다. 반가웠다.

원래 편지란 모르는 사람에게 받으면

두려움이 앞서는데 이상하게도 이 편지는 반가운 느낌이다.

조금은 알지만

평소 교분이 있던 관계는 아니라 편지까지 써서 안부를 전할 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에

반가웠는지 모르겠다.

 

어렵게 쓴 글자들이 조금도 아깝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서랍을 닫으며

그만 단념하기로 했어요.

나는 오래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제대로

읽어줄 당신이 필요하거든요.(p.14) - 「늦은 편지」 중에서

 


 

이 편지의 제목은 『가깝고도 먼 이름에게』이다. 책으로 묶은 게 여러 개의 편지다.

서사가 있는 내용은 아니어서 시(詩)하고 해도 좋을 듯하다.

그가 소식을 전해온 지는 대략 3년 만이다. 잊혀질지 모를 시기에 안부를 전해온 게 신기하고 반갑다. 저자 가랑비메이커가 3년의 공백을 가로지르고 독자들에게 소식을 전해왔다. 마치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소식을 전하지 못한 것처럼 코로나 팬데믹 기간과 거의 겹친 시간이다.

 

글이란 참 신기하지. 분명 내가 남긴 이야기인데 그 시점을 지나고 나면 쓰는 나는 사라지고

새롭게 읽는 나만 남는다는 게. 그 시절의 내가 이해의 대상이 된다는 게.

새로운 숙제처럼. 휘발된 시간 속에서 조금은 오해를 하고

조금은 더 너그러워지기도 하면서 말이야.(p.31) - 「남겨진 숙제」 중에서

 


 

그의 3년의 공백은 침묵이었고, 그 침묵의 시간에 쓴 편지들이 한꺼번에 배달돼 온 듯하다.

매일 모니터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수많은 문장을 내놓아야 하는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깊은 사유를 하던 어느 계절, 우연히 발견한 부치지 못한 편지들에서 책 『가깝고도 먼 이름에게』가 시작되었다고 저자는 밝힌다. 책 속의 편지들은 가상의 이름에게 전하는

픽션이 아닌 작가 가랑비의 삶에 머물렀던 이름들을 향한 편지이다.

‘영원할 줄 알았던 여름의 이름에게’, ‘긴 몸살처럼 앓았던 이름에게’, ‘자주 나를 잊던 이름에게’ 쉬이 부를 수도, 잊을 수도 없는 이름들을 향한 편지를 읽는 경험은 은밀하고

사적인 감각을 일깨우며 깊고 진한 공감을 느끼게 한다.

 

나의 삶에 아직도를 묻는 당신께, 나는 아직도가 아니라 여전히 글을 쓰고 걷는 삶을 살고 있다고요.

버티기만 하면 이길 거라던 H에게, 나의 삶은 끝을 기다리며 버티는 것도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하는 싸움도 아니라고요.(p.42) - 「현재진행형」 중에서

 


 

독자는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나마 안 쓰던 글을 지난 3년간 업무상 글 말고는

한 줄도 쓰지 않은 점을 뒤늦게 알아차린다.

이 책을 받고서야 코로나로 인한 많은 사람과의 소통 단절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아는 사람들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어떤 사람은 쉽게 떠오르지만 어떤 사람은 휴대폰에 저장된 이름을 보고도 잘 기억나지 않아 당황스럽다. 이 사람들을 따로 모아 편지를 써 보낼까 생각해본다.

 

까만 먹구름뿐인 날도 좋으니 어디선가 햇살을 빌려오는 대신 함께 우산을 쓰자던 당신의 앞에서만큼은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을 잊었을 수 있었어요.

내가 조금 더 단단하고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건

그늘의 시절을 함께 거닐어 준 당신이 있었기 때문이에요.(p.16) - 「다행」 중에서

 


 

독자는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적잖은 성과를 거둔 사람 중의 한 명이라고 자부한다.

20~30년 멀리 했던 책과 다시 가까워진 것이다. 아무래도 출퇴근이 줄어들어 시간이 많이 났고,

집안에서 혼자 무료하게 보내느니 책이나 한 번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부터는 무섭게 예전 독서 의욕이 되살아났다. 어느 정도 거듭해 시간이 쌓이면서 책 읽는 속도도 빨라졌다.

소설이나 짧은 에세이는 하루에 두 권도 읽을 만하다.

 

언제부터인가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나는 나이지만 나만의 것은 아닌 내가 되어버렸어요.

하고 싶은 말보다 듣고 싶어 하는 말을 건네고 돌아오는 낮과 밤이 쌓이며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어요. 영원할 것만 같던 찬란한 시절은 희미해졌고 언제라도 곁에 머물러 줄 것이라 믿었던 얼굴들은 허무하게 사라지기도 했어요.(p.149) - 「추신 : 보내는 계절」 중에서

 


 

이 밤 저자의 편지를 다 읽은 후 누군가에게 편지를 한 번 써보고 싶다.

편지도 직접 써본 지가 너무 오래돼 제대로 쓸 수 있을까 걱정되기는 한다. 그러나 거듭해 써보면

어느 정도 소통 가능할 정도는 쓰지 않을까 스스로를 달래본다.

저자가 보낸 편지가 독자들의 손에 들어가 연쇄적으로 '편지 쓰기' 열풍도 상상하며 읽으니

행복한 미소가 얼굴에 가득 퍼지는 느낌이다.

저자의 선한 영향력이 제대로 성과를 거두려면 역시 독자의 손에 달렸다.

 

사람에게 이름이란 무엇일까요. 어릴 적에는 원한 적 없던 이름이 부끄러웠어요.

그 탓에 참 많은 이름들을 갈아입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내 이름이 무척이나 사무쳐요.

애나, 아니 애라. 나를 애라야, 하고 부르던 그들은 지금 어디로 갔는지.

나를 부르던 그들에게 나는 어떤 계절의 표정을 지었는지.

늦은 그리움이 빠르게 번져가는 중이에요.(p.62) - 「애나」 중에서

 

 

 

책 속의 편지들은 가상의 이름에게 전하는 픽션이 아닌 작가 가랑비의 삶에 머물렀던

이름들을 향한 편지이다.

‘영원할 줄 알았던 여름의 이름에게’, ‘긴 몸살처럼 앓았던 이름에게’, ‘자주 나를 잊던 이름에게’

쉬이 부를 수도, 잊을 수도 없는 이름들을 향한 편지를 읽는 경험은

은밀하고 사적인 감각을 일깨우며 깊고 진한 공감을 느끼게 한다.

 

저자 : 가랑비메이커

 

프리라이터(2015-)이자 출판사 문장과장면들 디렉터(2019-). 그럴듯한 이야기보다 삶으로

읽히기를 바란다. 모두가 사랑할 만한 것들을 사랑한다면, 나 하나쯤은 그렇지 않은 것들을 사랑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낮고 고요한 공간과 평범한 사람들에 이끌린다.

작은 연못에서도 커다란 파도에 부딪히는 사람, 그리하여 세밀하고도 격정적인

내면과 시대적 흐름을 쓰고야 마는 사람이다.

단상집 시리즈 『지금, 여기를 놓친 채 그때, 거기를 말한들』(2015.독립출판), 『숱한 사람들 속을 헤집고 나왔어도』(2018.독립출판), 장면집 『언젠가 머물렀고 어느 틈에 놓쳐버린』(2019 개정), 고백집 『고요한 세계에 독백을 남길 때』(2019.독립출판)를 기획, 집필했다. 가족 에세이 『거울 같은 당신께 겨울 같던 우리가』(2020)를 기획, 공동집필 했다. 책장과 극장사이를 머물기를 좋아하며 이따금 사진을 찍는다.

다양한 사람들과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프라이빗한 모임을 진행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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