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이름에게
가랑비메이커 지음 / 문장과장면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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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지도 못한 사람,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분에게

오늘 편지 한 통을 받았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저 '그동안 소식을 전하지 못한 미안함을 담은 사적이고도

개인적 안부에 관한 편지였다. 반가웠다.

원래 편지란 모르는 사람에게 받으면

두려움이 앞서는데 이상하게도 이 편지는 반가운 느낌이다.

조금은 알지만

평소 교분이 있던 관계는 아니라 편지까지 써서 안부를 전할 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에

반가웠는지 모르겠다.

 

어렵게 쓴 글자들이 조금도 아깝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서랍을 닫으며

그만 단념하기로 했어요.

나는 오래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제대로

읽어줄 당신이 필요하거든요.(p.14) - 「늦은 편지」 중에서

 


 

이 편지의 제목은 『가깝고도 먼 이름에게』이다. 책으로 묶은 게 여러 개의 편지다.

서사가 있는 내용은 아니어서 시(詩)하고 해도 좋을 듯하다.

그가 소식을 전해온 지는 대략 3년 만이다. 잊혀질지 모를 시기에 안부를 전해온 게 신기하고 반갑다. 저자 가랑비메이커가 3년의 공백을 가로지르고 독자들에게 소식을 전해왔다. 마치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소식을 전하지 못한 것처럼 코로나 팬데믹 기간과 거의 겹친 시간이다.

 

글이란 참 신기하지. 분명 내가 남긴 이야기인데 그 시점을 지나고 나면 쓰는 나는 사라지고

새롭게 읽는 나만 남는다는 게. 그 시절의 내가 이해의 대상이 된다는 게.

새로운 숙제처럼. 휘발된 시간 속에서 조금은 오해를 하고

조금은 더 너그러워지기도 하면서 말이야.(p.31) - 「남겨진 숙제」 중에서

 


 

그의 3년의 공백은 침묵이었고, 그 침묵의 시간에 쓴 편지들이 한꺼번에 배달돼 온 듯하다.

매일 모니터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수많은 문장을 내놓아야 하는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깊은 사유를 하던 어느 계절, 우연히 발견한 부치지 못한 편지들에서 책 『가깝고도 먼 이름에게』가 시작되었다고 저자는 밝힌다. 책 속의 편지들은 가상의 이름에게 전하는

픽션이 아닌 작가 가랑비의 삶에 머물렀던 이름들을 향한 편지이다.

‘영원할 줄 알았던 여름의 이름에게’, ‘긴 몸살처럼 앓았던 이름에게’, ‘자주 나를 잊던 이름에게’ 쉬이 부를 수도, 잊을 수도 없는 이름들을 향한 편지를 읽는 경험은 은밀하고

사적인 감각을 일깨우며 깊고 진한 공감을 느끼게 한다.

 

나의 삶에 아직도를 묻는 당신께, 나는 아직도가 아니라 여전히 글을 쓰고 걷는 삶을 살고 있다고요.

버티기만 하면 이길 거라던 H에게, 나의 삶은 끝을 기다리며 버티는 것도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하는 싸움도 아니라고요.(p.42) - 「현재진행형」 중에서

 


 

독자는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나마 안 쓰던 글을 지난 3년간 업무상 글 말고는

한 줄도 쓰지 않은 점을 뒤늦게 알아차린다.

이 책을 받고서야 코로나로 인한 많은 사람과의 소통 단절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아는 사람들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어떤 사람은 쉽게 떠오르지만 어떤 사람은 휴대폰에 저장된 이름을 보고도 잘 기억나지 않아 당황스럽다. 이 사람들을 따로 모아 편지를 써 보낼까 생각해본다.

 

까만 먹구름뿐인 날도 좋으니 어디선가 햇살을 빌려오는 대신 함께 우산을 쓰자던 당신의 앞에서만큼은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을 잊었을 수 있었어요.

내가 조금 더 단단하고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건

그늘의 시절을 함께 거닐어 준 당신이 있었기 때문이에요.(p.16) - 「다행」 중에서

 


 

독자는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적잖은 성과를 거둔 사람 중의 한 명이라고 자부한다.

20~30년 멀리 했던 책과 다시 가까워진 것이다. 아무래도 출퇴근이 줄어들어 시간이 많이 났고,

집안에서 혼자 무료하게 보내느니 책이나 한 번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부터는 무섭게 예전 독서 의욕이 되살아났다. 어느 정도 거듭해 시간이 쌓이면서 책 읽는 속도도 빨라졌다.

소설이나 짧은 에세이는 하루에 두 권도 읽을 만하다.

 

언제부터인가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나는 나이지만 나만의 것은 아닌 내가 되어버렸어요.

하고 싶은 말보다 듣고 싶어 하는 말을 건네고 돌아오는 낮과 밤이 쌓이며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어요. 영원할 것만 같던 찬란한 시절은 희미해졌고 언제라도 곁에 머물러 줄 것이라 믿었던 얼굴들은 허무하게 사라지기도 했어요.(p.149) - 「추신 : 보내는 계절」 중에서

 


 

이 밤 저자의 편지를 다 읽은 후 누군가에게 편지를 한 번 써보고 싶다.

편지도 직접 써본 지가 너무 오래돼 제대로 쓸 수 있을까 걱정되기는 한다. 그러나 거듭해 써보면

어느 정도 소통 가능할 정도는 쓰지 않을까 스스로를 달래본다.

저자가 보낸 편지가 독자들의 손에 들어가 연쇄적으로 '편지 쓰기' 열풍도 상상하며 읽으니

행복한 미소가 얼굴에 가득 퍼지는 느낌이다.

저자의 선한 영향력이 제대로 성과를 거두려면 역시 독자의 손에 달렸다.

 

사람에게 이름이란 무엇일까요. 어릴 적에는 원한 적 없던 이름이 부끄러웠어요.

그 탓에 참 많은 이름들을 갈아입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내 이름이 무척이나 사무쳐요.

애나, 아니 애라. 나를 애라야, 하고 부르던 그들은 지금 어디로 갔는지.

나를 부르던 그들에게 나는 어떤 계절의 표정을 지었는지.

늦은 그리움이 빠르게 번져가는 중이에요.(p.62) - 「애나」 중에서

 

 

 

책 속의 편지들은 가상의 이름에게 전하는 픽션이 아닌 작가 가랑비의 삶에 머물렀던

이름들을 향한 편지이다.

‘영원할 줄 알았던 여름의 이름에게’, ‘긴 몸살처럼 앓았던 이름에게’, ‘자주 나를 잊던 이름에게’

쉬이 부를 수도, 잊을 수도 없는 이름들을 향한 편지를 읽는 경험은

은밀하고 사적인 감각을 일깨우며 깊고 진한 공감을 느끼게 한다.

 

저자 : 가랑비메이커

 

프리라이터(2015-)이자 출판사 문장과장면들 디렉터(2019-). 그럴듯한 이야기보다 삶으로

읽히기를 바란다. 모두가 사랑할 만한 것들을 사랑한다면, 나 하나쯤은 그렇지 않은 것들을 사랑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낮고 고요한 공간과 평범한 사람들에 이끌린다.

작은 연못에서도 커다란 파도에 부딪히는 사람, 그리하여 세밀하고도 격정적인

내면과 시대적 흐름을 쓰고야 마는 사람이다.

단상집 시리즈 『지금, 여기를 놓친 채 그때, 거기를 말한들』(2015.독립출판), 『숱한 사람들 속을 헤집고 나왔어도』(2018.독립출판), 장면집 『언젠가 머물렀고 어느 틈에 놓쳐버린』(2019 개정), 고백집 『고요한 세계에 독백을 남길 때』(2019.독립출판)를 기획, 집필했다. 가족 에세이 『거울 같은 당신께 겨울 같던 우리가』(2020)를 기획, 공동집필 했다. 책장과 극장사이를 머물기를 좋아하며 이따금 사진을 찍는다.

다양한 사람들과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프라이빗한 모임을 진행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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