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계절의 클래식
이지혜 지음 / 파람북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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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는 요즘이야 클래식에 조금 빠진 상태라 KBS 클래식 방송을 듣지만 한 해 전만 하더라도 거의 듣지 않았다. 그만큼 클래식을 잘 모르는 상태이다. 그래서 이 책 『지금 이 계절의 클래식』의 저자도 처음에는 동명이인의 작가로 혼동했다. 작가가 클래식 음악을 전공한 분으로 착각했었다.

책을 받아 들고서야 작가 소개가 나오는 표지 안쪽을 읽고 저자를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더 집중해서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덕분에 클래식과 본격적으로 친하게 되었으니 저자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 셈이다. 이 책은 그렇게 슬며시 독자에게 왔다가 클래식 선물을 한아름 안겨주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클래식의 많은 17세기 작곡가부터 20세기 음악가까지 머릿속에 차근차근 단계적으로 지식이 쌓였다. 이젠 많이 듣고 클래식을 마음으로 듣는 일만 남았다. 클래식 마니아가 될 때까지.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저자는 이 책 한 권에 헨델과 바흐부터 20세기 피아졸라와 쇼스타코비치까지 담았다. 음악가들의 곡의 성격과 작곡 배경 또 초연 내용까지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도록 분류도 잘해 놓아 클래식 문외한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체계 있게 쓴 책이다. 계절로 나눠 33곡을 쉽고 흥미로운 인문학 해설과 함께 소개된 책은 다 읽고 난 후 사랑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독자 가슴속에 아름다운 클래식 선율을 선물하고, 클래식 감상하는 법을 터득하게 해주니 책이 사랑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에 실린 위대한 음악가들의 사적이고도 내밀한 부분까지 알게 되니 그들의 음악 열정과 영혼마저 느껴진다.





클래식 해설가 이지혜는 일상생활과 관련 있는 클래식 음악을 중심으로 이맘때 듣기 좋은 클래식을 추천하면서 누가, 왜 그런 음악을 만들었는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다. 선곡을 위해 4계절과 24절기의 의미를 탐구하면서 저자 역시 절기의 뜻을 새삼 이해하며 음악을 섬세하게 관찰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저자의 친절한 안내는 산뜻한 봄에는 자유와 기쁨을 노래하는 모차르트를 비롯해 초심을 기억하라고 읊조리는 바흐, 원시와 야성의 소리를 일깨우는 스트라빈스키에 귀 기울이게 한다. 여름에는 ‘한여름 밤의 꿈’을 이야기하는 멘델스존과 뜨거운 열정을 드러내는 드보르자크, 지독한 사랑을 음악으로 그렸던 에릭 사티를 곁에 두면 좋다는 듯 계절에 맞는 음악을 소개한다.

우리 독자들은 이 경우 대개 무작정 저자의 소개대로 음악을 이해하지만 그 곡들을 계절에 맞게 분류하는 저자는 굉장한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는 사실은 안다. 계절과 클래식 음악은 저자의 머릿속에서 독자의 감성 공간으로 이동해 더욱 아름답게 연주될 것이다.






지금은 만추의 계절이다. 코로나 팬데믹인데도 계절은 무심한 듯 갈 길을 재촉해 추운 겨울 시작된 코로나가 다시 추워질 이 무렵까지 종식되기는커녕 오히려 확산돼 가며 세상의 분위기를 공포와 불안 속으로 몰아넣지만 이지러진 우리 일상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클래식 음악은 예전과 다름없다.

사랑의 아픔을 위로하는 리스트, 그리고 혼잣말마저 아름다운 쇼팽의 선곡이 계절을 압도하고 위안과 용기를 갖게 한다.

곧 다가올 겨울에는 슈베르트의 차갑지만 다정한 선율과 드라마틱하고 환상적인 차이콥스키의 발레곡,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를 들어보라고 저자는 넌지시 권한다.

타레가는 평생 시력이 좋지 않아 고생했다. 어려서 유모 손에 맡겨졌을 때 수로에 빠지는 사고를 겪었는데, 오염된 물에 눈이 감염되어 완치되지 못한 탓이었다. 게다가 체력이나 건강도 썩 좋은 편은 아니어서 연주 생활을 일찍 접어야 했다. 특히 생애 후반에 들어 건강상의 문제로 오른손 손톱이 자라지 않게 되자, 어떻게든 기타 연주를 해보기 위해 손끝 살을 이용해서 연주하는 주법을 개발했다. 그게 바로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에 등장하는 ‘트레몰로 주법’이다. 손가락을 바꿔가며 연이어 줄을 퉁기면 음향이 더욱 풍성해지고 부드러운 사운드가 연출된다. 절실함은 곧 예술이 되었다.(p. 18)




시대와 지역, 계절을 넘나드는 클래식 명곡을 소개하면서 저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음악가의 숨은 에피소드들을 흥미진진하게 들려주기도 한다. 자신의 실수로 멀어졌던 상대방으로부터 신뢰를 되찾기 위헤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헨델, 격정적으로 사랑했던 연인과 헤어지고 27년 동안 누구도 자신의 집에 들이지 않은 채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 에릭 사티, 건강상의 문제로 오른손 손톱이 자라지 않자 기타 연주를 계속하기 위해 손끝 살을 이용해 연주하는 ‘트레몰로 주법’을 개발한 타레가, 거대한 변혁의 시대에 태어나 혁명과 냉전의 시대를 온몸으로 맞닥뜨린 채 저항과 수용 사이를 오가야 했던 쇼스타코비치 등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레전드 클래식 예술가들의 낯설고 놀라운 이면은 독서의 흥미로움을 더한다.


쇼스타코비치는 혁명과 냉전의 시대를 몸소 겪은 예술가다. 거대한 변혁의 시대에 태어나 저항과 수용 사이를 오가며 용케 살아남은 작곡가였다.

그가 음악으로 남긴 모든 기록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공포와 갈등, 소신과 고뇌의 흔적들이다. 살아남기 위한 사투이자 예술가로서의 자존감을 포기할 수 없어 사선의 경계를 오간 몸부림이기도 하다. 오선보에 적힌 거대한 팡파르가 울려 퍼질 때 오히려 그가 한없이 애처로워지는 이유다.(p. 44)



최고이자 유일한 전 유럽에 ‘악명’을 떨치던 이탈리아 출신의 어느 바이올리스트에 관한 이야기는 그의 생전에도 그리고 사후에도 온갖 괴담들로 가득하다. 바이올린이 귀재이자 명연주가 파가니니를 사람들은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불렀다. 천사도 아니고 하필이면 왜 악마일까. 단지 놀라운 연주 솜씨에 대한 극찬이라기에 괴기스럽기도 하다. 파가니니가 자신의 별명을 달가워했을까.

비쩍 마르고 병색이 짙은 모습으로 무대에 등장해 현란한 연주를 펼친 뒤 홀연히 사라지곤 했다는 파니니, 그는 과연 어떤 바이올린 소리를 들려주었던 것일까.

<24개의 카프리스>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바이올린 테크닉을 총망라한 작품’ 집이다. 1809-1817년 사이에 작곡한 것으로 추진되는 데 자신의 테크닉 공개를 지독하게 꺼리던 파가니니가 생전에 출판한 유일한 작품집이다.

파가니니가 바이올린으로 선보인 대부분의 기교가 들어 있는 만큼, 그 어떤 작품보다도 기교적 난이도가 높다.

사정이 이러하니 후대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일깨운 작품집이면서 바이올린 연주자들에게는 좌절을 안기기로 악명이 높다.무반주로 작곡했지만 피아노나 오케스트라 반주를 붙여 연주하기도 한다.

관객들에게는 파가니니의 연주뿐 아니라 외모, 무대 뒤의 모습 등도 흥미로운 얘깃거리였다.




세르게아 라흐마니노프는 <교향곡 1번>을 초연한 뒤 극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심혈을 기울여 써낸 작품이 연주단과 지휘자의 연습 부족 등으로 형편없이 끝내 버린 것도 모자라 사정을 모르는 비평가들은 오로지 라흐마니노프를 향해 거친 비판들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악몽 같은 기억에 발목이 잡혀 극심한 우울증에 걸렸고, 더 이상 작곡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었던 라흐마니노프도 그런 시절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안타깝다.

2여 년 치료를 받으면서 간신히 우울증을 이겨낸 라흐마니노프는 1899년부터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쓰기 시작했다.

드디어 공식적인 초연으로 자신의 재기를 알렸다. 직접 피아노를 치면서 재기 무대를 마련한 그는 작품성과 연주력 모두 인정받으며 완전히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세르게아 라흐마니호프는 러시아 태생의 음악인이다. 모스크바에서는 작곡가와 지휘자로, 미국 망명 후에는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렸다. 대표적인 ‘러시아적 감성’하면 광활한 설원 위를 내달리는 장면이나 독주를 마시면서 추는 민속춤의 격한 몸짓들이 떠오른다. 러시아 문학에는 열정만큼의 광기와 서늘한 비극성이 혼재된 경우가 많은데.

라흐마니노프가 여기에 보탠 것은 신선한 낭만성 내지는 우울감이다. 그의 음악에서 흘러나오는 울적함이란 도리어 로맨틱한 감성을 더욱 자극 한다. 특유의 우울감은 서정성과 박력과 쌍벽을 이루며 청중의 마음을 파고든다.



슈만의 가곡들은 피아노 음향에 귀를 기울이면서 듣는 것이 좋다. 피아노는 단순히 반주가 아니라 노래와 나란히 가는 대등한 위치에 있다. 사실상 ‘듀엣’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때로는 피아노가 노래를 주도하여 마치 피아노 작품에 노래를 붙인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슈만의 가곡들은 가사를 살펴 가며 듣는 것도 좋지만, 전체적인 분위기와 뉘앙스를 파악하며 감상하는 편이 더 깊이 와 닿는다.(p. 198)


모차르트, 슈베르트, 멘델스존, 슈만과 브람스… 이 모든 예술가가 계절과 교감하고 영감을 받았듯, 이 책은 모든 독자가 오감을 활짝 열어 이 계절과 클래식 음악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느끼고 즐길 수 있도록 이끈다. 클래식 해설가 이지혜의 『지금 이 계절의 클래식』과 함께라면, 언제든 그 아름다움 속으로 입장할 수 있다. 계절이 음악을 만들었듯, 음악은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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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학과 양명학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시마다 겐지 지음, 김석근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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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이념과 정신을 유지하고 지배해온 학문은 유교다. 기원전 500년께 춘추전국시대 공자는 학문과 철학을 통해 중국을 지배해온 정신적 근간이다. 그의 학문과 철학은 인간의 삶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이념을 달리해도 그의 학문적 소산인 책을 통해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공자가 이때 씨앗을 심은 유학은 200년 후 맹자에 의해 뿌리를 내렸고 주자학과 양명학에 이르러 꽃을 피웠다고 말해도 비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중국은 물론 중국과 관계를 맺는 이웃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은 문명이 꽃피운 찬란한 문화와 함께 세계 최강국의 위치에 오르기도 했고, 정치적 이념이 다르거나 이민족의 지배를 받아도 그들 고유의 문화에 정복국이 오히려 흡수되는 결과로 나타나기도 했다. 몽골이나 만주족의 청나라가 바로 그 예다. 중국이 마오쩌퉁이 집권한 공산주의 정권에서 잠시 핍박 받기도 했으나 이젠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형국이다.

우리도 중국의 송나라를 통해 성리학을 받아들이면서 나라의 근간이 되는 정신은 불교국인 고려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유학이 근간이 되었다.



공자와 맹자, 그들의 학문에 대해서도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배웠기 때문에 겉모습은 대체적으로 안다. 그러나 실제로 유학이 꽃피운 송나라(남송) 주자학과 명의 양명학에 대해서는 그 모습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사회로 나온다. 왜 주자학과 양명학에 대해서는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독자도 알 수 없다. 그러나 TV 드라마나 역사 해설 같은 강의를 통해 많이 듣기는 했지만 여전히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지낸다. 특히 필요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서양의 사상에 너무 물들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만 할 뿐이다.

그들의 사상이 너무 오래된 것이라서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 질서가 서양의 나라에 의해 재편되었기 때문으로 독자는 짐작만 할 뿐이다.



이런 가운데 주자학과 양명학은 '시대의 요청'과 '새로운 질서'에 여전히 힘을 갖지 못하는 것 같다. 책을 통해서라도 알기에는 사실 어려운 학문이겠지만 한자보다 영어에 더 익숙한 현대 사회에서 주자학과 양명학이 갈 곳을 찾지 못하는 건 아닐까. 안타까운 마음으로 일본의 동양사학자 시마다 겐지가 설명하는 책이 눈에 들었고 읽게 되었다. 읽어본 소감을 미리 밝히자면 '어렵다'이다. 아마 영어로 옮겨도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일 터다.

'같으면서도 달랐던 두 가지 시선'이라는 시마다 겐지 저자의 해석을 경청하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이 책을 감수한 분의 우리와 일본 주자학과의 차이점 등을 함께 배울 수 있어 무척 귀중한 책이었다.

책의 내용은 '중국의 신유학은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려 했는가?'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사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자학과 양명학의 입장과 역사적 역할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라는 출판사 측의 주장에도 공감한다.



일본에서는 이미 주자학과 양명학의 본질에 다가서는 최고의 입문서로 저자의 이 책 『주자학과 양명학』이 꼽히는 것 같다.

책에 따르면 불교의 범신론적 사상을 받아들여 송대에 확립한 주자학, 심즉리·치양지·지행합일을 설하는 시대에 태어난 양명학, 두 학설 모두 중국 근세를 지배했던 유교철학이자 유심론적 실천철학이었다. 중국사상사의 흐름 속에서 주자학과 양명학의 성립 과정과 역사적 역할을 알기 위해 저자를 따라가본다.

저자는 양명학을 육상산(陸象山) 학문의 계승 정도로 생각하여 주자학과는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형이상학으로 보는 입장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왕양명은 주자학에서 출발했으며, 그 한계에 부딪쳐 죽음을 무릅쓴 사색 끝에 난관을 뚫고 나가서 마침내 ‘심즉리(心卽理)’라는 원리를 끄집어냈다고 주장한다. 즉 주자학이 전개되는 연장선 위에서 양명학의 등장이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주자학에서 양명학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철저히 분석하여 알기 쉽도록 명쾌하게 해설한다. 과연 중국의 신유학은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려 했는지, 같으면서도 달랐던 두 가지 사상의 본질을 밝혀 설명한다.

주자학과 양명학에 대한 근본적 이해는 조선시대 사상사의 이해에도 큰 참고가 되어주리라. 고려 후기에 들어온 성리학이 바로 주자학과 양명학이니 그렇다.



우리가 아는 사실은 공자와 맹자의 사상에서 주자가 주자학을 완성시키기까지 무려 1,800년의 시간이 흘렀다.

중국은 한나라 때 인도에서 전해진 불교의 영향으로 유학에서 갖추지 못했던 개념을 도교와 불교에서 찾아서 차츰 그 토대를 확장한다. 불교에서는 ‘체용의 논리’를 가져온다. ‘체용일치’ 또는 ‘체는 곧 용, 용은 곧 체’라는 개념은 불교의 반야와 방편에 나타나는 내용이다.

청나라 말기의 ‘중학(중국의 학문)’을 체로 하고 자연과학이나 기술학으로서의 ‘서학’을 용으로 한다는 슬로건, 이른바 '중체서용론'이 주창되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 점에서 불교와 같이 체용의 논리가 범신론의 논리임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본다. 이처럼 송학(주자학)은 불교의 영향을 상당수 받았던 점이 드러난다.

다음은 도교의 영향이다. 중국에서 민중들의 생활에는 도교가 가장 밀착되어 있고, 제사, 주술, 부적 등이 성행했다.

더불어 도교의 핵심 이론의 근본인 우주와 공감하고 우주의 정수를 포착하는 것, ‘천지조화의 기운’을 붙잡아두는 것을 강조했다. 송학의 주체는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사대부들’이다. 송학은 사대부의 학문이며 사대부의 사상이다. 사대부란 누구인가? 당나라 시대 과거제도의 확립과 더불어 일어나 송나라 시대에 이르러 확고부동한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된 지배계급이다.(p. 27)



저자에 따르면 이들 지배계급은 유교 경전의 교양을 지닌 사람들이었고, 과거시험을 통과하여 위정자가 되려던 사람이었다.

한나라는 호족 중심의 사회였다. 이는 출생의 원리로 하는 폐쇄적인 신분사회였고, 시대는 능력을 중심으로 개방적인 사회로의 열망을 담고 있었다. 그 능력은 유교 경전의 교양 능력이었다. 이러한 시대 흐름을 가장 타고난 계층이 사대부였다.

송나라 시대에 등장하는 신흥 사대부를 가장 잘 드러내는 사람은 송학의 원류라 할 수 있는 한유(768~824)이다.

그의 유명한 산문 <원도(도란 무엇인가)>는 인, 의, 도, 덕이라는 네 글자를 해석하고 원리를 밝히는 저서이다. 송학의 최초의 선구자는 한유보다 200년 뒤에 출현하는 주렴계(주돈이 1017~1073)이다. 그는 사는 동안 신통한 관직이나 사상적 명성을 이루지는 못하지만, 문하에 유명한 정명도, 정이천 형제가 후일 주희에 의해 자신의 이론을 집대성하는 가운데 성인의 학문을 이룬 사람으로 소개되어 세상에 드러난 사람이다. 주렴계는 <태극도>를 강조하고, 성인이 될 방법을 소개한다. 그는 욕망을 부정하고, 정을 강조한다.

그의 사상은 정명도(1032~1085)에 이어져 ‘생’을 강조하는 사상을 확립한다. 또한 정명도는 천지만물의 일체로서 ‘인’을 강조한다. 정명도의 동생인 정이천은 유교의 핵심적인 교의는 인이며, 가장 일반적인 의미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을 소개한다. 정이천의 사상을 이어받은 주자가 이천의 말에서 가장 널리 찬양한 부분은 ‘성즉리’이다. 정이천의 ‘성즉리’와 장횡거의 ‘마음은 성과 정을 통괄한다’는 두 가지의 말은 주자에게 가장 중요한 진리였다.



저자는 이 책에서 주자학과 양명학의 차이점을 확실하게 짚어낸다. 주자(1130~1200)의 윤리설을 한마디로 말하면 ‘성즉리’이고, 그 후 300년이 지나는 동안 육상산(1139~1192), 왕양명(1472~1528)의 ‘심즉리’의 싸움이야말로 중국 사상사에서 가장 큰 논쟁이 된다.

송나라(960건국) 이후 중국은 사대부의 천하가 되었으며 철학, 사상, 이데올로기가 넓은 의미의 송학이었다. 송학은 현대 중국철학사가의 분류에 의하면 크게 세 유파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는 장재(장횡거 1020~1077)가 세운 유물론, 즉 ‘기’의 철학이다.

둘째는 정이(정이천)가 시작해서 주희(주자)가 완성한 객관유심론, 즉 ‘성즉리’의 철학이다. 이른바 주자학으로 불리는 이 유파는 곧 국교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지만, 이론 자체의 정제성, 완결성 때문에 주목할 만한 독창적인 후학을 배출하지 못했다.

셋째로 육구연(육상산)이 주장한 주관유심론, 즉 ‘심즉리’의 철학으로, 그 선구는 정호(정명도)를 드는 것이 타당할 것이며, 그 계승자로는 명나라의 왕수인(왕양명)을 드는 것이 정설이다.(p. 274)

'싸움'으로 표현됐지만 '주자학'과 '양명학'은 서로 대립되는 학문과 사상이 아니라 서로 보완적인 관계로 이해된다.

중국에서는 유물론에의 접근도를 기준으로 삼아 주자학이 사상으로서의 가치가 높다는 것이 중국 학계의 정론인 듯하다. 이에 우리 조선의 사대부 역시 주자학을 ‘성즉리’ 성리학을 근본으로 여겨 우리의 인식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다. 신유학이라 불리는 주자학과 양명학의 관계를 찾아보는 이 책은 우리 조상과 우리가 하는 사고방식의 기원을 찾아간다는 점에서 이 책의 의미를 더한다.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와 닿았던 구절 몇 개만 여기에 적시한다.

"옛날에 밝은 덕을 천하에 밝히려는 자는 먼저 그 나라를 다스린다. 그 나라를 다스리기를 원하는 자는 먼저 그 집을 다스린다. 그 집을 다스리기르 원하는 자는 먼저 자기를 수양한다. 자기를 수양하기를 원하는 자는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한다. 그 마음을 바르게 하기를 원하는 자는 먼저 그 뜻을 진실되게 한다."

"일에 선악이 있는 것은 모두 하늘의 이치이며 천하의 선악이 모두 하늘의 이치이다. 악이란 결코 본래적으로 선에 대항하는 것은 아니며 혹은 넘치거나 혹은 미치지 못하는 것에 이름 붙여진 것일 따름이다."

악은 선에 반대의 뜻이라고 생각했는데 악도 하늘의 이치라는 말도 설득력을 갖는다.



특히 이 책은 주자학에서는 물론이며 양명에서도 생각지 못했던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기에 이르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욕망이 있다는 것은 "인간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마음을 리라고 혼일적으로 긍정한 이상, 결국에는 욕망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도리'라는 말이 부정적인 가치를 용어로 쓰였다는 점이 놀랍기도 하고 혼란스럽다.

저자는 주자학에서 양명학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철저히 분석하여 알기 쉽도록 명쾌하게 해설하고 있다. 중국의 신유학은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려 했는지, 같으면서도 달랐던 두 가지 사상의 본질을 알려주는 책이다.


저자 : 시마다 겐지


1917년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 전공은 중국사상이며, 동양사학자, 교토대학 인문과학연구소와 사학과 교수, 교토대학 명예교수를 지냈다. 일본 학사원 회원이기도 했다. 1940년대 중국 근세 ㆍ 근대사상사 연구를 시작한 이후 일본의 중국 근세 ㆍ 근대사상사 분야를 이끌어왔다. 2000년에 별세하였다. 저서로는 『중국에서의 근대 사유의 좌절』, 『중국 혁명의 선구자들』 등의 저작이 있다.


역자 : 김석근


연세대 정외과를 거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도쿄대학 대학원에서 연구했다. 연세대 정외과 연구교수, 아산서원 교수 및 부원장 등을 지냈다. 『제자백가』, 『주자의 자연학』, 『불교와 양명학』 , 『일본사상사』, 그리고 마루야마 마사오의 주요 저작들을 우리말로 옮겼다.




<출판사로부터 무상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개인적 의견으로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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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없는 세상 - 개정판
앨런 와이즈먼 지음, 이한중 옮김, 최재천 감수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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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과연 영구 생존할 수 있을까. 만일 그럴 수 없다면 어떤 상황에서 멸종될까. 인류가 멸종된다면 지구는 어떤 모습이고, 우주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미래학자도 인류의 생존을 전제로 인류의 미래를 예견하는 일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오면 인류는 멸종할 수도 있다'는 경고음을 내는 과학자는 있다. 인류의 멸망은 곧 지구의 멸망을 의미하기 때문에 가장 가까이는 지구의 기후 변화가 예측된다. 또 바이러스나 외계인의 출현에 의할 수도 있다. 상상은 해볼 수 있지만 멸망의 시기나 어떤 힘에 의해 멸망할지는 그 이상에 위치한, 상상을 뛰어넘는 일이어서 예측키 어렵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하나의 영화를 떠올릴 수 있다. 바로 <혹성탈출>이다. 과학자 ‘윌 로드만(제임스 프랭코 분)’은 알츠하이머 병에 걸린 아버지(존 리스고 분)를 치료하고자 인간의 손상된 뇌기능을 회복시켜주는 ‘큐어’를 개발한다. 이 약의 임상실험으로 유인원들이 이용되고, 한 유인원에게서 어린 ‘시저(앤디 서키스 분)’가 태어나 ‘윌’은 자신 집에서 ‘시저’를 키우게 된다. 가족같이 살고 있던 윌과 시저, 시간이 지날수록 ‘시저’의 지능은 인간을 능가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시저’는 이웃집 남자와 시비가 붙은 ‘윌’의 아버지를 본능적으로 보호하려는 과정에서 인간을 공격하게 되고, 결국 유인원들을 보호하는 시설로 보내지게 된다. 그곳에서 자신이 인간과 다른 존재라는 것을 서서히 자각하게 되고 인간이 유인원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게 된 ‘시저’는 다른 유인원들과 함께 생존을 걸고 인간들과의 대전쟁을 결심하며 시작된다.

영화 <혹성탈출>의 한 장면.




이 책 『인간 없는 세상』은 역발상에 초점을 맞춘 논픽션이다. 상상이 아닌 현재 인류가 안고 있는 영구 생존의 위험 요소를 하나씩 뜯어보며 인류의 미래를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 의식이 담긴 책이다.

이 책의 시작은 매우 도발적이다. “어느 날 갑자기 인간이 모두 사라진다면, 지구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 질문의 답을 찾는 여정을 그린 문제작이다. 이번 출판된 책은 개정판이다. 2007년 출간되자마자 전 세계 유수의 논픽션 상을 휩쓴 이 책은 출간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많은 독자들의 지지를 얻으며 살아 있는 고전으로 회자되고 있다. 이는 2020년 현재 전 세계를 마비시킨 코로나19를 비롯한 각종 바이러스의 창궐,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미세 플라스틱 문제, 빗물 흡수를 막는 아스팔트 탓에 매년 겪게 되는 물난리 등 일찍이 이 책에서 예견했던 내용들이 현실에서 속속 그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 책을 다시 한 번 읽는다는 것은 이러한 현실적 필요성에 의해서다. 그만큼 쉽지 않은 큰 문제에 부닥쳐 있는 인류다.



저자 앨런 와이즈먼은 인류와 함께 사라질 것들은 무엇이고 인류가 지구상에 남길 유산은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 머나먼 ‘지적 탐험’에 나선다.

그는 우리나라의 비무장지대, 폴란드-벨라루스 국경의 원시림, 터키와 북키프로스에 있는 유적지들, 체르노빌, 미크로네시아, 아프리카, 아마존, 북극, 과테말라, 멕시코 등에 이르는 기나긴 여행을 통해 직접 마주친 놀라운 풍경들을 섬세한 언어로 풀어낸다. 여기에, 고생물학자ㆍ해양생태학자ㆍ박물관 큐레이터ㆍ지질학자ㆍ다이아몬드 광산업자ㆍ우리나라 비무장지대의 환경운동가 등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에게서 얻은 지식과 정보를 씨실과 날실 삼아 자기만의 통찰력으로 엮어낸다.




인간인 우리가 ‘인간 없는 세상’의 모습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최근, 이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광경이 지구 곳곳에 출몰하기 시작했다.

몇 년간 ‘하늘색’이 무슨 색인지조차 기억나지 않을 만큼 뿌연 미세먼지로 가득했던 아시아 지역의 하늘이 다시금 청명해졌다. 도시의 진동과 소음도 눈에 띄게 감소했다. 호주에서는 캥거루가 차도를 질주하고, 칠레에서는 퓨마가 도심 한복판을 대낮부터 어슬렁거리고, 웨일스에서는 산양 떼가 시내 상점을 기웃거린다.

어떻게 된 일일까. 바로 인류를 위협하는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사람들이 급격히 바깥활동을 줄이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더욱 놀라운 건 이것이, 팬데믹 상황이 전 세계를 강타한 지 불과 1년도 되지 않은 2020년 현재의 일이라는 점이다. 인류가 그저 활동을 줄이는 것만으로 지구가 무서운 속도로 자기치유를 해나간다는 사실이 분명히 입증된 셈이다.

이번 『인간 없는 세상』 개정판에서 감수를 맡은 최재천 교수도 이러한 풍경들을 나열하면서, “지구는 끄떡없다. (…) 우리가 사라지면 공기와 물이 다시 맑아지며 지구는 훨씬 살기 좋은 곳으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런 점에서 앨런 와이즈먼이 2007년 집필한 『인간 없는 세상』은 인류에게 일종의 계시록과도 같은 책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사라진 후 자연은 바로 다음 날부터 원래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 집 청소에 들어간다. 그렇게 불과 이틀 만에 뉴욕 지하철역이 침수하는 것을 시작으로, 도시가 숲으로 변하고 건물이 붕괴되고 농작물이 야생 상태로 돌아가는 등 웬만한 인간의 흔적이 사라지는 데 채 1세기도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플라스틱이나 청동 조각품 등은 더 긴 세월을 버티겠지만, 결국 영원히 남는 것은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 전파 정도라는 것이다.



이 책에 많은 이들이 경탄하는 까닭은, ‘인류가 한꺼번에 사라진다면’이라고 하는 참신한 가정에 기반한 주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미국 최고의 과학저술상’을 수상한 저널리스트다운 작가의 치밀한 글쓰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앨런 와이즈먼은 인류와 함께 사라질 것들은 무엇이고 인류가 지구상에 남길 유산은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 머나먼 ‘지적 탐험’에 나선다.

그는 우리나라의 비무장지대, 폴란드-벨라루스 국경의 원시림, 터키와 북키프로스에 있는 유적지들, 체르노빌, 미크로네시아, 아프리카, 아마존, 북극, 과테말라, 멕시코 등에 이르는 기나긴 여행을 통해 직접 마주친 놀라운 풍경들을 섬세한 언어로 풀어낸다.

여기에, 고생물학자ㆍ해양생태학자ㆍ박물관 큐레이터ㆍ지질학자ㆍ다이아몬드 광산업자ㆍ우리나라 비무장지대의 환경운동가 등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에게서 얻은 지식과 정보를 씨실과 날실 삼아 자기만의 통찰력으로 엮어낸다. 이로 인해 여러 매체로부터 자칫 딱딱하고 어려워지기 쉬운 과학 논픽션의 새로운 전범이 되었다는 극찬을 받았다.



이 책이 우리에게 더욱 특별한 이유가 있다. 바로 우리나라의 비무장지대만을 따로 다룬 13장 때문이다. 비무장지대는 인간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완전히 황폐화된 자연이, 어떻게 인간 없는 환경에서 순식간에 복원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기적의 공간이다. 이념이나 호오(好惡), 빈부도 없이, 반달가슴곰, 스라소니, 사향노루, 고라니, 산양이 돌아다니는 에덴과도 같은 땅이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을 통해 비무장지대 방문 경험이 “사람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자연이 화해하게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해주었다면서, “그런 아름다운 꿈을 꾸게 해준 한국에 진심으로 감사”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자. 집과 도시, 주위의 지대, 그 아래의 포장된 땅, 그 땅 속에 숨겨진 흙 등을 다 그대로 두고 인간만 몽땅 추려내는 것이다. 우리를 다 쓸어버리고 나면 무엇이 남는지 보자. 우리가 다른 생물들에게 가하는 무지막지한 압력의 부담에서 갑자기 해방되면 자연은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우리가 가동하고 있는 뜨거운 엔진이 전부 꺼지고 나면 기후는 얼마나 빨리 이전 상태로 회복될 수 있을까? 가능하긴 할까?

잃어버린 땅을 되찾아 아담 또는 호모하빌리스 이전 시절의 푸른 빛깔과 향기를 되살리려면 얼마나 오래 걸릴까? 우리가 남긴 흔적을 자연이 전부 지워버릴 수나 있을까? 우리의 어처구니없는 도시와 토목공사의 결과물들을 다 어찌할 것인가? 무수한 플라스틱이며 비닐이며 독성 합성물질을 본래의 순한 원소로 되돌릴 수 있을까? 자연에서 너무 벗어난 것들은 영영 분해되지 않고 그대로 남지 않을까?

우리가 창조한 가장 훌륭한 것들, 예컨대 건축, 미술, 정신의 발현 등은 어떻게 될까? 태양이 팽창하여 지구를 잿더미가 되도록 태워버릴 때까지 남아 있을 만한 무궁한 것이 과연 있을까?

지구가 다 타버린 뒤에라도 우주에 우리의 자취가 희미하게나마 남기는 할까? 계속 퍼져나가는 빛이나 메아리가 남아 있을까? 우리가 한때 여기 있었다는 신화 등이 별들 사이에 남을까?(p. 24)


한때 맨해튼은 물을 술술 잘 빨아들이는 면적 70제곱킬로미터의 땅이었다. 이 땅에 얽혀서 사는 나무뿌리와 풀뿌리는 연평균 120센티미터의 빗물을 흡수하여 필요한 만큼 실컷 마시고 나머지는 수분으로 발산하여 공기 중에 내놓았다. 뿌리가 빨아들이지 못한 물은 지하수면으로 흘러들어 곳에 따라 호수나 습지를 이루기도 했고, 여기서 나온 물은 40개의 물줄기를 따라 바다로 흘러갔다. 그러던 물줄기가 지금은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아래에 갇혀버린 것이다.(p. 53)



여러 연구에 따르면, 길고양이 한 마리가 1년에 28마리의 새를 죽인다고 한다. 농가에 사는 고양이는 그보다 훨씬 많이 죽인다는 사실을 템플과 콜먼은 확인했다. 구할 수 있는 모든 데이터와 자신들이 알아낸 바를 비교해 본 결과, 두 사람은 위스콘신 시골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약 200만 마리의 고양이들이 최소한 780만 마리, 많게는 2억 1,900만 마리까지 새를 죽이는 것으로 추산했다. 위스콘신주 시골에서만 그렇다는 것이다.

전국적으로 따지면 그 수가 수십억 마리에 이를 것이다. 실제 총계가 어떻든, 인간이 고양이를 데려다 놓은 온갖 대륙과 섬에서는 지금도 비슷한 크기의 어느 포식자보다 고양이가 수도 많고 경쟁력도 앞선다. 고양이가 없던 그곳에 고양이를 데려간 인간들이 없는 세상에서 고양이는 아주 잘 적응할 것이다. 우리가 사라져 버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명금류들은 우리를 길들여 먹이와 살 곳을 제공하도록 만들고, 아울러 부를 때 와주기를 바라는 부질없는 호소를 무시하면서도 다시 먹이를 주게 만들 정도의 관심만 보이는 기회주의자들의 후손을 상대해야 할 것이다.(pp. 335-336)




와이즈먼은 특별한 과장 없이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 인간이 지구에 끼치는 해악이 얼마나 심각한지, 그로 인해 나와 후손들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수시로 상기하게 된다. 특히 고압전선으로 인해 새들이 1년에 5억 마리씩 희생되고 있다든가, 미세플라스틱을 비롯한 수많은 쓰레기들이 바다로 흘러들어가 거의 모든 해양생물에 영향을 미치고 이것이 결국 우리 입속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든가, 수많은 동식물을 죽음으로 이끄는 납이 완전히 씻겨나가는 데 3만 5,000년의 시간이 걸린다든가 하는 내용은 죄책감과 불안감을 가중시키기 충분하다.

이 책이 진짜 계시록이 되지 않도록 하려면, 우리는 이 책을 참회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고도로 지능이 발달한 생명체인 우리 인간이 영원히 남길 수 있는 흔적이라곤 고작 방송전파 정도라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우리보다 큰 존재인 지구 앞에서 보다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인간 없는 세상』은 어쩌면 ‘인간 있는 세상’을 위한 마지막 호소일지 모른다.



우리 때문에 지는 부담을 덜어버린 세상, 사방에 야생 동식물이 멋지게 자라는 세상을 생각하면 우선 마음이 솔깃해진다. 하지만 인간의 탐욕이 초래한 온갖 경이로움의 상실을 생각하면 금세 아픔이 되살아난다. 인간이 만들어 낸 것 중에 가장 놀라운 존재인 ‘아이’가 다시는 푸른 대지에서 뛰어놀 수 없게 된다면 과연 무엇이 우리 뒤에 남을 것인가? 우리 영혼 가운데 진정으로 불멸한 것은 무엇인가?(p. 413)


저자 : 앨런 와이즈먼


미국의 유명 저널리스트이자 애리조나 대학 국제저널리즘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디스커버」 2005년 2월호에 소개, 책 『인간 없는 세상』(원제:The World without Us)의 뿌리가 된 짧은 에세이 「인간 없는 지구」는 ‘미국 최고의 과학 저술’로 선정되었다. 「하퍼」「뉴욕타임스」「애틀랜틱먼슬리」등의 매체와 미국의 국영 라디오 방송인 NPR에 진보적 관점의 통찰력 넘치는 글을 기고해온 그는 「로스앤젤레스타임스」의 객원편집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홈랜즈 프로덕션의 선임 라디오 프로듀서이며 다수의 수상 경력을 가진 베테랑 작가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가비오따쓰: 세상을 다시 창조하는 마을』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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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의자 SN 컬렉션 1
이다루 지음 / Storehouse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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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기울어진 의자』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에서부터 관계가 뒤틀리거나 끊어지는 반복된 일상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반복된 일상의 이야기라면 대체적으로 에세이에 많이 등장한다. 소설의 경우 일상의 이야기가 소재로 쓰이긴 하지만 허구이다. 쉽게 표현하면 작가가 소설의 쓰는 의도(주제)에 맞는 허구의 일들을 상상을 동원해 사실인 것처럼 지어낸다. 이때 일상은 반복되는 일들이 아닌 경우가 많다. 반복되는 일상은 독자의 눈을 끌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일상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지어내 쓸까. 대답은 간단하다.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분야에 따라 일어난 사실이 기초가 되기도 한다. 역사소설처럼... 일반적으로 소설은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엮어 글로 만들어낸 이야기다.
그렇다면 『기울어진 의자』는 왜 일상의 반복된 일을 소설로 썼을까. 특히 반복된 일상은 독자의 눈을 끌지 않는데도 왜 그런 일을 소재로 사용한 것일까.
작가의 이야기를 조금 더 찬찬히 들여다보면 반복된 일상을 다룬 것이 아니라 그 일상 속 우리의 관계, 즉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게가 모두 다르게 나타나는 데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


작가의 말을 들어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가 끊어지면 더 이상 우리가 아는 이야기는 없을 것이다.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둘 사이에 일어났던 일들은 변형되거나 찢기기 마련이다. 함께했던 두 사람이 헤어지면 공유했던 추억과 기억도 이편과 저편으로 나뉘고 조작된다. 인생의 징검다리를 건널 때마다 관계는 조금씩 변해간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가 끊어지면 더 이상 우리가 아는 이야기는 없게 된다.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둘 사이에 일어났던 일들은 변형되거나 찢기기 마련이며 함께 공유했던 추억과 기억도 이편과 저편으로 나뉘고 조작된다. 한날한시에 함께 있었더라도 그 둘의 기억이 같다고 확신할 수 없다."

우리가 관계를 선택할 때 처음부터 기준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게 되는 관계의 양상을, 삶을 녹여내서 보여주는 책은 눈에 띄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것이 작가가 '관계의 사건'들을 글로써 다양하게 펼쳐보인 이유다.





나는 이 시간의 바깥바람이 좋았다. 열심히 달리지 않아도 되고, 누구와 어울리지 않아도 되고, 그저 혼자서 게으른 시간을 즐기기에 딱 좋았다.

어둡고 휑한 공간이 나의 내면과 비슷해서 동질감을 느꼈는지도 몰랐다. 언제부터 이 어둠은 나를 쫓아왔을까? 언제부터 나는 어둠과 같아졌을까? 아무것도 되지 못한 어른으로 자란 게 내 잘못일까? 엄마 탓일까? 아님 세상 탓일까? 달리라고 해서 달렸고 멈추라고 해서 멈췄는데, 나는 왜 뭣도 아닌 어른이 된 거지?

그때였다. 걸인이 몇 걸음 되지 않은 곳에서 내게 걸어오고 있었다. 검은 비닐봉지를 한 손에 들고 거적때기를 몇 개나 겹쳐 입은 모습이었다.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나는 손으로 코를 막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를 지나던 걸인이 순간 걸음을 멈췄다.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침이 혀 안쪽에 고여 목구멍 안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나는 등을 돌리면서 걸인을 무시하고 애써 먼 곳을 바라보았다.

순간, 쩌렁한 목소리가 어둠을 깼다.

“어이, 김 씨! 오늘 봐둔 데 있어. 딴 데 가지 말고 나 따라와.” 놀란 나는 뒷걸음질 치다가 앞을 보고 내달렸다. 푸른 달빛이 길을 안내하는 듯했고, 두 발은 저절로 움직이는 듯했다.

어떻게 얼마나 달렸는지 몰랐다. 발바닥이 쓰라렸다.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계속 달렸다. 푸른 달빛 속으로 몸을 던지고 싶었다. 발등 위로 흙 자국과 핏자국만 선연했다.

「알바, 돌아가지 않을...」 중에서




그렇다면 일상을 왜 에세이로 쓰지 않았을까. 작가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우리네 삶의 반경이 넓어지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서로가 가까이서 얽히고 어우러지면서 관계 역시 촘촘하게 맺어질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삶이 더욱 고귀하게 빛날 것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작가의 이 책의 주제를 표현하기에는 소설, 그것도 짧은 소설로 쓰는 것이 가장 명징하게 표현하는 일이라고 믿는 것 같다. 이 소설은 굳이 소설의 분야로 분류하자면 콩트(장편소설, 掌篇小說)에 해당한다. 짧은 소설이어서 '손바닥 소설'로 분류될 것 같다. 소설에 이미 '작을 소(小)'자가 들어가 있는데 가장 짧은 소설인 단편소설보다 더 짧아서 '손바닥만하다'는 의미로 이렇게 번역된 것 같다.

이 꽁트는 간혹 매우 짧은 글로 독자의 공감을 사기도 한다. 감동도 이끌어낼 수 있다. 그것은 예전에 비해 요즘 글쓰기와 더 잘 맞는 것 같다.

긴 문장보다는 짧은 문장, 온전한 단어보다는 축약어가 더 잘 읽히는 요즘 세대이다. 꽁트는 태생이 짧은 소설이니 다시 읽히기에 더 없이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사전의 힘을 빌어 콩트의 의미를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본다.

콩트는 장편소설, 혹은 엽편소설로도 불리운다. 엽편소설은 나뭇잎 넓이 정도에 완결된 이야기를 담아내는, 단편소설보다도 짧은 소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보통 A4용지 1매 분량으로, 흔히 손바닥 크기 분량의 소설을 뜻하는 '장편소설(掌篇小說)' 또는 '미니픽션(minifiction)'이라고도 한다. 주로 꽁트(conte)라고 불려지는 엽편소설은 가볍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소재로 하며, 예상을 뒤엎는 경이로운 결말을 갖는 것이 공통된 특징이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엽편소설은 나뭇잎처럼 작은 지면에 인생의 번쩍하는 한순간을 포착해 재기와 상상력으로 독자의 허를 찌르는 문학 양식이다.

특히 작가의 세계관과 문학작품으로서의 예술성을 응축시켜 놓는 데 가장 적절한 문학적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수정이가 딸과의 전화를 끊고 남편에게 전화했다. 예정된 일정이었던 학부모 모임 참석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수정이는 남편에게 집안 상황을 물은 다음에,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는 일까지 점검했다. 이어서 사야 할 식자재를 하나씩 읊었다. 그 모습은 직장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일일업무를 지시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수정이는 남편의 게으름을 나무랐고 어설픔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전화기 저 편에서 한숨이 들리는 듯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수정이의 휴대폰이 격렬하게 진동했다. 상사의 전화였다. 수정이는 몸을 돌려 전화를 받으면서 고개를 숙이고 업무 지시를 받았다. 앞으로 더욱 신경 쓰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전화를 끝냈다.

수정이는 한숨을 크게 쉬고는 내게 미안하다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그녀를 안심시켰다. 나는 회사로 급하게 뛰어가는 수정이를 바라봤다.

마음이 급했던 수정이는 출입구 앞에서 한쪽 구두가 벗겨졌다. 깡충 걸음을 하고 신발을 찾아 신은 수정이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수정이가 앉았던 의자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의자를 지탱하는 네 개의 다리 중에서 두 군데나 빠져 있었다. 나는 기울어진 쪽을 손으로 들어 올려서 수평을 맞췄다. 내가 손을 떼자마자 의자는 다시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기울어진 의자」 중에서



"일상에서 만나는 당연하거나 혹은 익숙해서 말하지 않은 모든 것들을 글로 표현했다."

꽁트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도 책을 다 읽고나면 작가의 이 말을 이해하게 된다. 이 책에 실린 34편의 짧은 소설의 주제, 소재들은 내용이 모두 평범하다. 언젠가 한 번 겪어을, 앞으로 겪게 될지 모를 우리들의 이야기다. 다만 글로 옮겼을 뿐이지 한 번도 겪지 않았던 사람도 TV의 가족 드라마에서 보았음직한 내용이다. 작가의 글솜씨를 한층 돋보이게 하는 글들이다.


저자 : 이다루


전 아나운서, 승무원, 기자, 쇼호스트, 리포터, 홈쇼핑 게스트, MC, 강사 등 17가지 직업인. 말과 글의 힘을 나누는 언어코치이며, 생각을 던지는 글을 쓰는 작가다. 경희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전략커뮤니케이션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하였다. 익숙한 낯섦을 이야기 하며 사는 게 곧 글이라 여긴다. 일상에서 만나는 당연하거나 혹은 익숙해서 말하지 않은 모든 것들을 글로 표현한다. 2020년 첫 에세이로 「내 나이는 39도」가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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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집
래티샤 콜롱바니 지음, 임미경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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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ID-19 팬데믹으로 우리의 삶은 정지된 듯 보인다. 하루하루가 음습하고 어둑하다. 엄동설한에 밖으로 내몰린 집 없는 아이들처럼 우리들에겐 삶의 본능만 반짝거린다. 지금까지도 일상에 너무 많은 변화를 가져왔지만, 금세 나아질거란 희망을 버리면서 어떻게든 살아 남아야 한다는 생존본능만 부여잡고 있는 형국이다. 감염병 세계적 대유행은 이처럼 우리 생활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이미 죽어간 수십만~수백만의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더 많은 수의 확진자가 전 세계적으로 발생되고 있어 방역 모범국으로 칭찬받던 우리나라도 거리두기 등 방역 단계를 높이고 있다.

백신과 치료제가 나오기 전에는 생존 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이 우리 나라 전반에 퍼지기 시작할 경우 지금까지의 방역 노력은 물거품이 될 것은 불보듯 뻔하다. "지나친 방역은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정부의 잘못된 권력"이라며 국경 폐쇄 조치나 커피숍 등에 내린 집합금지 명령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는 시위가 유럽 각국에서 연일 계속됐다. 때를 맞춰 수그러들던 확진자가 각국에서 하루에 수만~수십만 명으로 늘어난 데서 각국 정부는 다시 더 강력한 방역 대책을 앞다퉈 발표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방역 당국과 의료진의 치열한 예방과 치료에도 수그러들기는커녕 오히려 확산되는 느낌이다.

최소 일주일 전부터 확진자가 세 자리 숫자를 기록하며 좀처럼 줄지 않는다. 소설 서평을 쓰면서 왠 팬데믹 얘기를 끄집어 내나 의아스럽겠지만 이 소설 『여자들의 집』이 사회적 약자들의 얘기이기 때문이다. 전쟁이나 팬데믹 상황에서 여성. 노약자 등 사회적 약자의 희생이 더 크다. 이는 역사나 각종 여성 관련 통계수치가 증명한다.

한국경제연구원의 2020년 일시휴직자의 추이 분석에 따르면 3~5월 일시휴직자 가운데 여성의 비중이 62.5%로 남성(37.5%)보다 25퍼센트포인트 높다. 또, 미국 노동부의 4월 실업률 통계를 보면 여성 실업률이 15.5%로 남성 13.0%에 비해 확연히 높다. 노동 시장에서 가장 먼저 무너져 내린 것이 여성 노동자라는 뜻이다.

특히나 미국은 근 10년간 여성 노동자의 일자리를 늘리는 정책적 노력의 결과로 최근 전체 급여 노동자의 50%를 여성이 차지하는 성과를 이뤘다. 하지만 싱크탱크 경제정책연구소에 따르면 3월 급여 노동자 일자리 감소분의 59%가 여성에게 발생했다.




이 같은 결과에 대해 여성 일자리가 특정 업종에 치우쳐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경제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3~5월 평균 일시휴직자 137.1만 명 가운데 보건업 및 사회복지 서비스업에서 26.5만 명(전체 대비 19.3%)로 가장 많았고, 그다음으로 교육 서비스업에서 24.1만 명(17.6%), 도소매와 숙박 및 음식점업의 경우 총 20.7만명(15.1%)을 각각 기록했다. 또한 전미여성법률센터(NWLC)는 통계 분석을 통해 팬데믹 이전에 교육과 헬스케어 분야 일자리의 77%를 여성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팬데믹을 거치면서 사라진 일자리 중 83%가 여성의 일자리였다고 보고하고 있다.

꼭 업종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분석도 있다. 미국 소매업 일자리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절반에 못 미치는데 이번에 실직한 사람들의 91%는 여성이었다.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 과하게 타격을 입은 것이다. 또한 임금이 낮은 40개 직업군에 종사하는 2220만 명 중 여성 비율이 거의 3분의 2에 달한다고 한다. 여성의 일자리 질이 남성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고, 위기가 생길 경우 가장 먼저 밀려나는 불안정한 고용 형태라는 반증이다. 또 다른 요인은 육아, 돌봄의 주된 책임이 여전히 여성에게 있다는 점이다.

팬데믹이 장기화되고 아이들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자 여성과 남성 양육자 중 여성이 집에 남아 아이들을 돌보는 사례가 많아졌다.



세계 일류국가이면서 예술의 도시 프랑스 파리에도 학대받은 여자들의 피난소 '여성 궁전'이란 곳이 있다. 우리나라처럼 '여성 쉼터' 같은 곳이다.

이곳은 노숙자, 매 맞는 아내, 야만적인 할례로부터 딸을 지키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온 아주머니들 '타타' 등 도움이 필요한 여성들에게 최소한의 인간적인 존엄을 유지시켜주는 사회복지 공간이다.

이곳에 주인공 솔렌이 가면서 이 소설이 시작된다. 솔렌은 '잘나가는' 변호사이다. 어느 날 패소한 의뢰인이 눈앞에서 자살한 충격적인 사건으로 '번-아웃' 증상이 와 삶의 쉼표가 필요하다는 의서의 권유에 따라 자원봉사를 하러 온 것이다. 처음엔 살아온 환경이 너무 다른 자원봉사자 솔렌에게 마음의 한구석조차 내어주지 않지만 이곳 쉼터 여성들은 점차 서로를 보듬는 관계가 되고, 이 과정에서 솔렌도 자신만의 상처를 치유하고 삶의 방향을 재설정하게 된다.




『여자들의 집』은 막 마흔살 생일을 맞은 솔렌의 시선을 따라 이야기가 전개된다. 대필 작가’ 자원봉사를 하러 간다. 그가 찾아간 곳은 집 없는 여성 400명이 모여 산다는 쉼터로 '여성 궁전'이라 불리운다. 그곳에서 솔렌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삶의 전쟁'을 겪어온 여성들을 만난다. 그리고 교과서 또는 뉴스에나 나오는 단어라고 느끼던, 자신과는 관계없다고 생각한 ‘소외 계층’의 민낯을 목격한다.

솔렌에게 ‘소외 계층’이란 동네 빵집 앞에 앉아 구걸하는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굳이 자신이 손 내밀어 돕거나 말을 걸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내가 적선을 조금 한들 근본적으로 바뀔 게 뭐가 있겠냐는 생각이 드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도시의 풍경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다 ‘여성 궁전’의 여성들을 만나고, 그들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람들임을 깨닫는다. 소외 계층 따위의 보통 명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처럼 숨 쉬고 웃고 울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된다. 남의 도움이 꼭 필요한 사람들이 왜 그렇게나 타인에게 까칠하게 굴고, 상식 밖의 소리를 대해며, 자기한테 필요한 것만 요구하고, 간단한 감사의 말도 제대로 하지 않는지 황당하다 못해 화가 나던 솔렌이다.

그 모든 것이 가난 때문임을 뒤늦게 깨닫는다. 폭력적인 사회적 차별과 빈곤이 여성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뜨개바늘을 분주히 놀리던 여자가 잠시 눈을 들어 소리 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무심한 얼굴이었다. 반면에 구석에 배낭들로 바리케이드를 쌓고 잠들었던 여자는 소스라쳐 잠을 깬 얼굴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조용히 해.” 잠을 깬 여자가 짜증을 냈다. 젊은 여자는 즉각 맞받아쳤다.

“왜 여기서 잠을 자느라고 난리야? 여긴 공동 구역이라고. 방도 침대도 있는데 왜 여기 내려와서 자냐고. 벤치 위에서 자고 싶으면 다시 길바닥으로 나가면 될 거 아냐. 그러면 정말 잠잘 데가 필요한 사람한테 방을 내줄 수 있잖아!” 배낭을 끌어안은 여자가 발끈했다.

“네가 길바닥 생활에 대해 뭘 안다고 그래? 길에서 뒹굴어 본 적도 없으면서!” 여자가 악을 쓰듯 소리를 질렀다. “길바닥 구경도 못한 네 엉덩짝이나 잘 간수해. 온갖 군데 뭉개고 다닌 내 엉덩짝에 너 따위가 맞장 뜨려고? 어디 한번 대 봐? 너는 강간을 몇 번 당해봤어?”

거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차를 마시던 여자들도 덩달아 역성을 들고 나섰다. 모두 목소리가 높아졌다. 누군가가 젊은 여자의 머리채를 잡아 채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난투극이 벌어졌다.

솔렌은 손을 노트북 자판 위에 올려놓은 채 눈앞에서 벌어지는 장면에 얼이 나갔다. 맞은 편에 앉아 있던 크베타나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런 장면에 익숙한 것 같았다. “처음에 화를 내면서 들어온 저 여자는 생티아인데, 온종일 화를 내는 게 일이라우.” 안내 데스크 직원이 달려와 싸움을 말렸다. 직원은 생티아에게 계속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면 더 큰 징계를 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미 한 달간 방문객 금지라는 징계를 받은 상태가 아니냐고 하면서. 생티아는 주위에 둘러선 ‘깜씨 아줌마들’에게 욕을 한마디 더 퍼붓고 배낭 바리케이드 뒤편의 여자를 향해서도 마지막 욕설을 날린 뒤 몸을 돌려 멀어져 갔다.(p. 115~117)



그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지만 너무 거대해 보이는 빈곤 앞에서 솔렌은 무력함을 느낀다. 하지만 타고난 것 없는 이들, 가졌던 모든 것을 빼앗긴 이들은 불행 앞에 무릎 꿇지 않았다. 모순적이게도 ‘여성 궁전’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사회에 발길질하며 어떤 식으로든 격렬하게 움직이는 모습에서 솔렌은 희망을 발견한다. 여자들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았는지, 무너져 내린 무릎을 펴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그들의 삶에서 배운다. 그리고 각성한다. 아무리 작은 움직임이라도 결국에는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음을, 혼자라고 느끼는 사람에게 단 한 번이라도 손 내밀어 주는 것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

자신의 작은 날갯짓을 멈추지 않겠다고, 절대 이전의 무심한 삶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의 이러한 다짐은 『여자들의 집』 저자 래티샤 콜롱바니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리라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저자는 이 소설작품을 빌어 외친다.

당신과 나는 이미 싸울 준비가 되어 있고, 이길 준비도 되어 있다고. 우리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솔렌은 자신의 우울증을 해결하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 더 큰 불행과 빛나는 희망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제부터 자신의 작은 날갯짓을 멈추지 않겠다고, 절대 이전의 무심한 삶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의 이러한 다짐은 『여자들의 집』 저자 래티샤 콜롱바니가 우리에게 필사적으로 전하고 싶은 말이다. 저자는 당신과 나는 이미 싸울 준비가 되어 있고, 이길 준비도 되어 있다고. 우리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솔렌을 통해.

이 책은 두 가지 이야기가 교차로 진행된다. 솔렌의 이야기와 여성 궁전의 실질적 창립자 블랑슈 페롱의 이야기다. 블랑슈는 실제 인물인데 프랑스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 책의 저자 래티샤 콜롱바니가 자료를 모으는 중에 알게 되어 이 책을 통해 대중에게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이 출판사 측의 설명이다.


저자 : 래티샤 콜롱바니(LAETITIA COLOMBANI)


작가, 영화감독, 배우. 1998년 〈마지막 메시지(LE DERNIER BIP)〉를 시작으로 몇 편의 단편영화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연출했다. 2002년에는 한국에서도 개봉한 오드리 토투 주연의 영화 〈히 러브스 미(A LAFOLIE… PAS DU TOUT)〉의 감독을 맡아 호평받았고, 2008년에는 카트린 드뇌브 주연의 영화 〈스타와 나(MES STARS ET MOI)〉의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감독했다. 2017년 첫 장편소설 《세 갈래 길》을 발표하며 프랑스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국적도 원하는 것도 다른 세 여성이 각자의 삶을 극복하는 이야기를 엮어 낸 《세 갈래 길》은 평단과 독자들의 찬사를 모두 획득했으며, 한국을 포함해 39개국에서 출간되어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신작 《여자들의 집》은 프랑스 파리에 실재하는 쉼터 ‘여성 궁전’을 배경으로 엘리트 변호사인 솔렌이 자신과는 전혀 다른 전쟁을 겪어온 여성들과 만나며 겪는 변화를 보여 준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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