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성 수업 - 보통 사람들을 위한
신성권 지음 / 미래북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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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계 최고 수준의 지능과 풍부한 창의력를 가지고 있는 민족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객관적으로 타당성을 갖고 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 한국인들이 머리가 좋고, 근면하기 때문에 창의성 높은 제품을 만들어내는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별로 없다.

이는 최근의 문화적 결과와 경제적 성취를 이룬 바탕에 근거한다면 이견은 별로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 한국인들은 근대화 이후 100년 동안 왜 창조성을 발휘하지 못했을까라는 의문에는 쉽게 답하기 어려울 뿐이다. 독자는 나라를 빼앗기고 일제의 교육 제도 아래서 받은 집단주의적, 획일주의적 교육이 주범이라고 생각한다. 독자의 생각은 깊은 연구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어디에 내세울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반대의견을 과감하게 낼 사람도 별로 없으리라.

그런 교육은 ‘창조성’이라는 단어에, 타고나야만 하는 절대적인 능력을 부여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창조성은 평범한 사람들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그리고 이제 발휘해야만 하는 당위성의 능력이라고 이 책 『보통 사람들을 위한 창조성 수업』의 신성권 저자의 주장이다.






이에 따라 『보통 사람들을 위한 창조성 수업』은 평범함을 타고난 대다수의 사람들이 창조성을 발휘하는 데 실용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내용을 담았다.

특별한 재능으로서가 아닌, 자기실현으로서의 창조성을 강조하며 어떻게 그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지, 왜 발휘해야만 하는지를 전달한다.

창조성이 거창한 것이 아닌, 누구나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창조성 발현의 아주 작은 물꼬를 발견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미래가 간단치 않음을 기대하게 될 것이다.

IQ 156(PERCENTILE : 99%) 이상으로 INTERTEL과 MENSA의 회원이기도 한 저자는 인간의 지능과 창조성, 무의식에 대한 각종 저술 활동을 하고 있으며 철학, 경영학, 인공 지능 분야로 그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저자의 주장에 공감하는 것은 멘사 회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멘사 회원으로서의 경험과 미래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해온 사색의 결과를 바탕으로 우리 민족의 창의성을 보탠다면 우리나라 미래뿐 아니라 전 세계 인류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데 독자도 동의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대한민국이 선진국의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지배적 이념과 상식에 따라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인간보다는 탁월한 사상적 높이로 정신적인 독립을 이뤄내고 기존 질서와 부조화를 자초할 수 있는 인간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진단한다. 스스로를 자각하는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에서 특별한, 유일한 존재가 될 완벽한 특권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이들은 내면에 자신만의 세계를 건설하여 사회의 지배적 이념과 관습을 넘어서는 창의적인 생각을 한다. 알고 보면 오늘날 존재하는 인류의 모든 문명은 이들이 내면에 품었던 꿈의 결과물이다.

자신을 탐구해 보지 못한 인간은 언제나 ‘반응하는 자’, ‘변화를 수용하는 자’로 남을 뿐이다. 자신의 특수한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다수와 동일하다는 사실에서 기쁨과 안락함을 발견한다. 이들은 소통과 공감을 빌미로 사상의 경직을 초래한다. 저자의 주장과 언급은 독자의 기대에 한 치 어긋남이 없어 보인다. 독자가 저자를 대한민국, 전 세계 인류의 창의성을 모아 위대한 창조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는 '전도사'로 인정함을 주저하지 않은 이유다.



한 마디로 대한민국이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유형의 산업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각 개인에 내포된 고유한 기질이 더욱 선명하고 탁월하게 발현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허락해야 한다는 이 그의 지론이다. 교육의 목적은 인간을 권위에 순응하는 존재가 아닌 자립적, 독립적 존재로 만드는 데 있다.

무의식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능력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창조성을 타고나는 것으로, 일부의 혁신가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특별한 능력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창조성’이라는 개념을 우리 자신으로부터 멀리 두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창조성은 ‘누구’에게나 있다. 창조성의 발현은 이 전제를 믿고 ‘누구’ 안에 당신을 대입시키는 것에서 시작된다." 특별하고도 매우 명쾌한 전제다.




우리는 흔히 창조성을 타고나는 것으로, 일부의 혁신가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특별한 능력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창조성’이라는 개념을 우리 자신으로부터 멀리 두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창조성은 ‘누구’에게나 있다. 창조성의 발현은 이 전제를 믿고 ‘누구’ 안에 당신을 대입시키는 것에서 시작된다. 5년 뒤, 10년 뒤 당신의 모습을 떠올려 보라. 여전히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있을 것 같은가?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하는 당신이 설 곳은 없다. 이제 창조성의 발현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인공 지능 시대를 살게 될 미래에 반드시 갖춰야 할 생존 요소이다. 창조는 타고나는 것 못지않게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창조성은 DNA가 아니라 DIY다. 이 얼마나 설득력 있고 흥미로운 주장인가.



이어지는 언급에 귀를 기울여 본다. 어쩌면 미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창조성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그 발현의 시작을 찾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보통 사람들을 위한 창조성 수업』은 그런 사람들에게 더없이 좋은 책이다. 당신의 내성적인 성격, 당신이 가진 결핍감 등이 창조성을 발현하는 데 있어 어떤 강점이 될 수 있는지를 비롯하여 구체적인 창조의 기술과 창조적 인간이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세상과의 부조화에 맞서는 배짱을 키우며 어쩌면 당신은 권위에 도전하고 실패를 당연한 수순으로 받아들이는 모험을 하며 당신을 불편하게 바라보는 타인들의 눈초리에 희열을 느낄지도 모른다.

창조의 형식과 기술을 연마하는 것은 재능을 타고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책의 독자들이 스스로 정한 한계를 깨고 자신의 창조력을 회복하여 자신의 청사진을 좀 더 밝고 크게 그려나가길 바란다는 것이 이 책을 쓴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에 따르면 이 시대, 이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이른바 자기계발을 하며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정작 그것은 자기 없는 자기계발에 그치고 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자기계발은 사회경제적으로 쓸모 있는 인적 자원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소진시키는 형태로 행해지며 그 중심엔 자본의 논리가 있을 뿐 '진짜 나'는 없었다고 말한다. 이 책은 진정한 자기계발이란 자신의 잠재된 개성과 가능성을 발견하고 발휘하는 것이며, 내가 남들과 다른 차별성을 토대로 나만의 색깔을 가진 삶을 살아가는 조건이 계발하는 것이라 강조한다.

이 책은 또 창의성과 창조성에 대해서 두 단어 사이의 의미의 차이를 설명하며 우리에게 왜 창의성을 넘어 창조성이 필요한지 언급한다. 창의성은 한 개인의 독창적이고 독특한 생각과 의견을 지칭한다. 이 때문에 그것은 외부로 표현되거나 제작되지 않은 하나의 아이디어에 그치는 것이라 단언한다.

이에 반해 창조성은 그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현실의 결과물로 창작하여 현실에 없는 것을 만들거나 또는 새롭게 바꾸기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은 우리가 창의성을 가질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그것을 뛰어넘어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창조적인 활동이 가능하며 어떻게 시작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발전시키며 더 확장시킬 수 있는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내용들을 설명하고 있다. 창의성과 창조성이 빛나는 사람을 요구받지만 그것이 어떻게 발현되는지 배우지 못한, 이 시대를 어느 때보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이 책은 창의성과 창조성의 원리와 기술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기를 권유한다.

창의적인 생각을 하며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길 꿈꾸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텍스트로서 한몫을 담당하리라 기대된다.

바야흐로 인류는 4사산업 시대에 시작점에 서 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비대면 사회로의 전환이 급격히 이루어져 연착륙은 어려워졌지만 지금이라도 창의성 발휘, 창조적 정신을 가다듬어 4차산업 시대를 이끌어간다면 대한민국에게 4차산업 시대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대가 될지도 모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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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네가 감히 우리 집안을
장병주 지음 / 맥스밀리언북하우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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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가 옛날 가문 앞세워 위세 떠는 양반집안이 생각난다. 『네가 감히 우리 집안을』은 중견소설가 장병주의 산문집이다. 우선 소설을 써온 작가가 산문집을 낸 이유가 궁금하다. 소설 쓰기가 벅차서인가?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불과 3년 전 장편소설 『벨자를 쓴 여자』를 발표한 바 있다.

이에 앞서 『스칼렛 길리아』도 썼다. 특히 '스칼렛 ~'은 사랑의 부정이라는 소재를 전면에 내세워 가부장 세대의 도덕성을 비판하며 상처받은 여성의 생존가치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런 일련의 작품 활동을 통해 이번 산문집 출간은 제목처럼 작가가 결혼해 들어간 시집의 현상을 압축해 보여주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책은 자신의 일대기를 담은 자전적 에세이, 혹은 자서전이라 봐도 무방할 듯하다.



저자의 약력에 따르면 낙산(駱山) 아래 동숭동에서 태어난 서울토박이로 숙명여고와 연세대학교 기악과를 졸업한 그녀는 음악에 대한 열정 대신 문학·미술 등에 한눈을 팔며 오랜 기간 방황한 끝에 「잃어버린 말」이 문학사상 신인상(1994년)에 당선되어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그 여자의 축제」, 「아가야 걸어라」, 「카멜레온의 눈」 등 중·단편을 잇달아 발표하였으며 첫 창작집 『비로용담을 찾아가다』(2001)를 출간, 장편 「스칼렛 길리아」(2007)와 장편 「벨자를 쓴 여자」(2017)를 발표했다.



등단 이후 인간지성의 타락, 거짓 사회에 대한 이중적 태도 등에 대한 통렬한 질문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현실과 상상의 공간인 새장 속의 새 날리기를 반복하며 진실을 추적해가는 “잃어버린 말”, 뻐꾸기 탁란(托卵)을 소재로 입양의 가치를 묘사한 “그 여자의 축제”, 우리 사회 부조리한 교육현장을 희화화한 “아가야 걸어라”, 진실을 외면한 죄의식으로 절필 상태에 빠진 작가의 고뇌를 다룬 “카멜레온의 눈”과 같은 중. 단편을 잇달아 발표하며 첫 창작집 『비로용담을 찾아가다』를 출간했다. 특히 사랑의 부정이라는 소재를 전면에 내세워 가부장 세대의 도덕성을 비판하며 상처받은 여성의 생존가치를 제시한 장편 『스칼렛 길리아』를 발표해 호평을 받았다는 게 문단의 설명이다.

이 산문집에는 어릴 때의 집안 분위기, 결혼 후 시가(媤家)의 시부모님과의 생활, 네 자녀와 작가로서의 활동 등 현재까지의 삶에서 작가가 집안의 행복을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온 내용을 담은 14개의 '이야기'가 있다.



시어머니는 작가가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여전히 만족해하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나라 전통적 양반 집안의 생활과 관혼상제에 따른 고집이 연상된다.

어렵고 힘든 시집살이 가운데 무뚝뚝한 남편과 그리고 아이들 넷을 키우기까지 자신을 돌아볼 틈이 없었을 것이란 일반의 예상은 빗나간다. 더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정체성 확립을 위해 고민하고 사색한 것으로 보인다. 작가로 등단하고 지금은 중견 작가가 됐다.

세상도 변했고, 작가는 자녀에 대한 교육은 훨씬 탄력성 있게 했나보다. 심지어 제사를 마뜩찮아하는 자녀들에게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가족 여행이나 가족 행사를 대신할 정도로 시대 흐름에 따른 자녀 교육을 한 것 같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단란한 가정을 이루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자아를 찾기 위해 몸부림쳤고 꿈속에서 시어머니의 환영을 볼 정도로 억눌리며 살았지만, 그녀는 절대로 자신의 딸이나 며느리만은 그렇게 살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하나하나 해결했다고 한다. 3대 독자인 아들과 며느리에게 아들 낳는 부담은 절대 갖지 말라고 당당히 말해주고, 모든 제사와 명절 모임을 없애고 대신 자식들의 우애를 위해 아이들이 갖고 싶어하는 만남이나 여행을 준비한다. 딸들에게는 남자에게 의존하는 전통적인 모습보다는 먼저 자신의 꿈과 일을 찾으라고 교육시킨다. 쉽지 않은 일이다. 작가는 어떻게 말보다 쉽게 이런 일을 했을까. 그동안 작가가 발표한 작품 속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사회 지식인의 타라과 이중적 생활태도, 부조리한 교육 현장에 대한 비판적인 소설을 썼다. 비판에서 그치지 않고 개선하고 바꾸어야 사회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고 강조한 것이다. 자신의 경험과 사회 발전에 대한 이념이나 철학이 이미 확고했던 것 같다.



작가는 이 책을 아직도 시댁과의 불화 속에 있는 젊은이들과 어른들이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의 40여 년간 며느리로, 아내로 그리고 엄마로서 고군분투한 내용이 위트 있게 그린 『네가 감히 우리 집안을』에서 세대를 조금 더 앞서가고자 노력하는 작가가 이끌어내는 한 가정의 변화를 볼 수 있다. 작가는 ‘82년생 김지영’의 엄마 세대로 보면 될 것 같다. 작가가 겪은 희생과 진정한 자아 찾기를 통해 우리들의 엄마를 보다 깊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으며, 또한 사랑하는 자식들과 사위, 며느리를 곤경에 몰지 않고 곁에 오래도록 함께 있도록 만들 수 있는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작가는 이제야 말한다. 젊은 날의 삶을. 상처와 회복 노력으로 점철된 젊을 때의 삶을 통해 오늘날 자신이 여기 있다는 듯이.

"내가 밟고 지나온 길이 아득히 멀어보였다. 계속 빠르게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처럼. 어리석고 건방졌지만 그 징그럽도록 자신 없었던 젊은 날의 삶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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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수업 - 슬픔을 이기는 여섯 번째 단계
데이비드 케슬러 지음, 박여진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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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경중을 따진다는 것은 조금은 비정한 듯 보이지만 결과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수년 전 신문에 난 기사가 생각난다.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를 주는 것은 무엇인가를 조사한 앙케이트 결과였다. 가장 많은 응답자가 '배우자의 죽음'을 꼽았다.

부모의 죽음과 자식의 죽음, 그리고 형제의 죽음 등이 뒤를 이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고 가장 설득력 있는 조사 결과다. 가장 가깝게 생각하는 사람의 순서 그대로다. 이 조사는 현대인의 스트레스를 조사하는 과정의 일부로 진행됐다고 밝혔다. 현대인들이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이 자신의 직장 상실이나 자신의 질병 등이 아니라 역시 배우자의 죽음이라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이 조사는 결과에 대해 다음과 같은 분석 내용을 밝혔다. 현대인에게 가장 스트레스를 주는 것은 '슬픔'이며 가장 슬픈 일은 '배우자의 죽음'이다. 그러나 이혼이나 별거는 그리 큰 스트레스를 주지 않은 듯하다. 순위가 훨씬 뒤로 밀려 있다는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자신이 가장 원하지 않은 것이 배우자의 죽음이나보다.

이 조사 결과를 보고 독자는 배우자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고, 배우자에 대한 새로운 결심도 갖게 됐다.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사랑하겠다고. 그리고 건강 문제는 스스로 챙기기 전에 배우자인 독자가 직접 챙겨주겠다고.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 번은 가까운 사람,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겪는다. 물론 자신의 죽음을 뺀 삶을 얘기하는 것이다.

삶에 있어서 죽음은 운명이자 숙명이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게 될 것이며 스스로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죽음 이후 겪게 되는 모든 슬픔도 함께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요즘은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예전보다 훨씬 늘었다. 산업사회로 옮겨진 후 인간이 할 일이 기계가 대신하고 인간과 인간의 만남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감정이나 정서에는 바람직하지 않은 일들이다. 더욱이 현대는 정보화 사회이고 디지털 사화이다. 컴퓨터로 대변되는 인터넷 사회는 대면의 관계에서 비대면의 관계로 급속도로 이전시켰다. 삶에 중요한 경제문제를 얼글도 보지 않은 채 해결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쌓이는 우울감의 극대화를 초래하는 환경으로 이전한 것이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은 비대면, 비접촉으로까지 확대돼 인간 관계를 단절시킬 우려까지 생긴다.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고 극단적으로 표출될 환경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비대면 사회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로 코로나로 인해 급격하게 빠르게 진행될 것이라고 미래학자는 물론 의료계에서도 우려하고 있다.



『의미 수업』의 저자 데이비드 케슬러는 말한다.

"누군가의 죽음 뒤에는 분명 곁에 남겨진 사람들의 삶도 있다. 그렇기에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곧 삶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이제 죽은 자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넘어 남겨진 자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가 되었다."

저자는 세상의 모든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그 마지막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의미 수업』은 그런 의미에서 『인생 수업』과 『상실 수업』을 잇는 완결판이자 진정한 치유서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세계적인 정신과 의사이자 죽음 연구의 권위자이며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와 함께 베스트셀러 『인생 수업』과 『상실 수업』을 집필한 슬픔과 애도 분야 최고 전문가인 데이비드 케슬러가 새롭고 놀라운 통찰력으로, 기존에 널리 알려져 왔던 죽음과 슬픔 고유의 다섯 단계 너머에 있는 여섯 번째 단계를 찾아내 집대성한 책이다. 그가 발견한 여섯 번째 단계이자 기존의 과정을 완성할 수 있는 마지막 단계는 바로 ‘의미 찾기’다. 저자는 수십 년간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만나고 연구하면서 깨달은 지혜와 지식뿐 아니라 자신이 힘들게 얻은 귀중한 경험을 토대로, 슬픔을 이기는 대단히 중요하고도 강력한 ‘의미’를 발견하고 힘겨운 현실을 희망으로 바꾸는 치유의 방법을 제시한다.






예상치 못한 급작스러운 재난 상황 속에서 하루하루를 사는 코로나 팬데믹 상황인 요즘, 그 어느 때보다도 죽음은 사람들과 가까이 와 있다. 심지어는 전쟁보다 더 가깝다는 학자들도 많다. 보이지도 않고, 언제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는 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의사들은 '적과 함께 사는 삶'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늘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상황이란 누구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이다. 죽음은 언제든 맞이해야 하는데 왜 슬픔에 관한 책에서 죽음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이유는 앞서 설문조사 결과를 말한 대로 죽음은 슬픔의 가장 강력한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총기 난사 사건을 목격하고, 비슷한 시기에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슬픔이 삶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체험한 저자 데이비드 케슬러는 이후 스승이자 멘토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와 함께 ‘슬픔 치유자’로서 여러 강연과 교육, 상담 활동을 해왔다. 그러던 그가 몇 년 전 스물한 살이던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을 겪으면서 큰 충격을 받고, 또 한 번 인생의 고통의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슬픔 분야의 최고 권위자이자 전문가는 어느 날 갑자기 자신에게 닥친 끔찍한 상실을 과연 어떻게 대처할까?




이 책의 근간은 대략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1969년 자신의 저서 《죽음과 죽어감》에서 죽음에 관한 다섯 단계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을 최초로 정의한다. 정신의학자였던 그녀는 죽어가는 환자들이 공통적으로 비슷한 단계를 경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 연구는 세계적인 주목을 끌었으며, 이후 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생각과 담론을 뒤바꿔놓았다는 평을 받었다. 그 뒤 그녀와 함께 『인생 수업』과 『상실 수업』을 집필하면서 데이비드 케슬러는 이 다섯 단계가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게도 보편적으로 적용된다는 사실을 널리 알려왔다. 그런데 자신 역시 직접 아들의 죽음이라는 큰 슬픔을 겪은 후, 이것만으로는 상실의 고통이 극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저자는 상실의 고통 속에서 ‘의미’의 길을 찾는 것만이 아들의 존엄을 지켜주는 방법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자신과 같은 슬픔을 겪는 이들을 위한 강력한 위로와 방법들을 담아내기로 한다. 그는 삶의 연장선상에서 인간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으며, 사랑과 슬픔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랑하면 언젠가는 슬프다. 상실의 슬픔은 결코 피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슬픔을 직시하는 용기, 슬픔 이후를 견뎌낼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의미 찾기’의 출발점이다.




슬프지 않은 죽음은 없다. 슬픔은 상실에 수반되는 경험이자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저자는 슬픔을 숨기거나 외면하거나 조급하게 마무리 지으려는 행위는 죽음의 슬픔을 극복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사랑하던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또는 결혼 생활이 끝났을 때, 갑작스럽게 일자리를 잃었을 때, 자연재해로 살던 집이 폐허가 되었을 때 등 살면서 절망과 좌절의 경험을 하는 순간, 우리는 가혹한 상실 너머에 있는 그 무언가를 원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의미를 찾는 일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는 어떻게 보면 단순해 보이는 과정 같지만 실제로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저자는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상실과 상처, 거기에 수반되는 슬픔과 고통을 세분화해 들여다보고 각각의 상태에 필요한 처방들을 상세하게 풀어낸다. 대비하지 못한 채 맞이하는 갑작스러운 사고사부터 암이나 병으로 인한 질병사 뿐 아니라 정신적 문제와 약물 중독으로 인한 죽음, 큰 죄라는 오명 때문에 드러낼 수 없는 자살, 침묵으로 덮어버리려 하는 유산까지 우리가 언급하기 꺼려했던 여러 죽음에 대한 사회적 편견들을 환기시키고,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방식을 신중하고 사려 깊게 조언한다. 슬픔을 목격하고 공감하며 함께할 수 있도록 돕는다. 특히 자살이나 마음의 병으로 가까운 사람을 잃은 경우, 그들에 대한 비난의 눈초리와 그것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슬퍼할 권리조차 빼앗기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짚어내며 이러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열린 시각을 환기한다.





저자에 따르면 대부분 지독한 상실을 겪은 사람들은 치유될 방법은 없다고 생각하고 절망하기 쉽다. 하지만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면 슬픔의 농도가 엷어지기는 해도 결코 완전히 끝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또 슬픔보다 충만하고 풍요로운 무언가로 바뀔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슬픔이라고 하는 감정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며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다. 저자는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보다는 사랑으로 기억될 때, 그들이 살지 못한 날들을 빛내기 위해 남아 있는 우리들의 삶에서 의미를 만들기 시작할 때 치유는 시작된다고. 의미는 찾으려고만 한다면 어느 곳에나 있다.

현대 죽음 연구가이자 슬픔 전문가로서 슬픔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는 일을 해온 저자는 병원이나 호스피스 시설에서 죽음이 임박한 이들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수없이 많이 만나왔다. 책에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의 수많은 사례가 등장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생전에 좋아하셨던 인물의 우표를 모아 편지를 붙일 때마다 떠올리는 아들, 갑작스런 사고로 아이를 잃은 뒤 글쓰기를 통해 딸과의 유대감을 찾은 아빠, 자식이 죽고 난 뒤 장기 기증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찾은 부모, 사이가 좋지 않았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 손을 잡아드린 것만으로 충만해진 딸, 아내의 유산 이후 일찍 아이를 잃은 부모들을 위로하는 장례 지도사가 된 남자 등 사연은 각기 다양하지만 분명한 건 모두 절망 속에서 크고 작은 의미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미는 어떻게 찾을 수 있는 걸까?





저자는 ‘의미’는 개개인마다 다르지만, 결국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나’ 자신에게 있다고 이야기한다. 약물 중독으로 아들을 잃고 한때 삶의 의욕을 상실했지만 그가 아들과의 소중하고도 짧은 만남에서, 아들이 남기고간 추억의 흔적에서 사랑을 발견하고 이 책을 쓰는 것을 삶을 회복하는 과정으로 삼았듯이,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자의 삶이 또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다. 죽음이 생명 있는 존재가 필연적으로 맞이해야 할 인생의 한 부분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그리고 그 상실의 슬픔을 직시하고 의미를 찾고자 선택할 때, 우리는 마침내 무엇을 희망할 수 있을지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삶에 대한 희망이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슬픔도 엷어질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슬픔은 그대로다. 대신 우리가 커져야 한다. 상실 이후의 삶을 우리가 다시 지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왜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우리는 남아 있는지, 그 이유를 영원히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을 떠난 그 사람의 삶이 값지고 소중했듯, 살아야 할 날들이 있는 우리의 삶 역시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 책이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책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에게 이정표가 되는 책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 책은 저자가 오롯이 목도한 수많은 삶과 죽음에 대한 목격담이자 절망을 온몸으로 견뎌낸 처절한 경험담이며 전문가로서의 내공과 통찰이 담긴 감동적인 치유서다. 언젠가는 가까운 사람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순간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찾고 싶은 많은 이들에게 꼭 필요한 위로와 따뜻한 희망을 선물할 것이라 확신한다.



살다 보면 ‘왜’라는 질문을 셀 수 없이 많이 맞닥뜨린다. 왜 우리에게 이런 비극이 찾아왔지? 왜 그 사람이지? 왜 하필 그들이지?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인생이 이토록 잔인하고 무작위일 수는 없으니까. 수많은 사람이 몇 년 동안 이렇게 ‘왜’라는 질문에 답을 찾지만 답을 구하지는 못한다. 왜 이혼을 했는지, 왜 죽었는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았던 이유에서 의미는 찾을 수 있다.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얻었는가? 나는 사랑하는 그 사람을 알게 되어 무엇을 얻었는가?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좋은 것이 남았는가? 그럼 그 사람의 죽음에서는 좋은 그 무엇이 남았는가?(p. 172~173)


자살한 이들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이 있다 해도 여전히 ‘자살’이라는 말에는 오명이 남아 있다. 평범한 대화에서 또는 이야기의 주요한 주제로 자살이 직접 언급되기는 어렵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자살로 세상을 떠났을 때,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이 곁에 있었다면 그 사람이 떠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자살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드문 일이고 부끄러운 일이라 여겨 쉬쉬하며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일단 그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하면 같은 일을 겪은 다른 이들을 만나게 된다. 자살은 가장 흔한 사망 원인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p. 199)



대부분 고통의 무리를 두려워한다. 스스로를 온전한 감정을 다 경험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감정에 감정을 품는다. 슬픔을 느끼기 시작한 다음에는 슬프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낀다. 슬픔을 오롯이 다 느끼기도 전에 감정을 재빨리 바꿔버리는 것이다. 화가 날 때도 마찬가지다.

화가 나면 자신의 화를 판단해 자기 비난으로 감정을 바꾼다. 이런 예들은 셀 수 없이 많다. 나는 사람들에게 가장 처음 느끼는 감정에 충분히 오래 머물라고 말한다. 충분히 느끼지 않은 고통은 처음 상태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누군가를 사랑으로 기억하는 비결은 고통을 무시하거나 부인하려 애쓰지 말고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p. 312)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이 내게 죽음 이후의 삶을 믿느냐고 물으면 나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이렇게 되묻는다. “살아 있는 우리에게도 그 사람이 죽은 이후의 삶이 있을까요?” 모두가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단 하루라도 더 살기를 온 마음으로 간절히 바란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짧은 시간 동안 이 땅을 거쳐 가는 우리는 같은 삶을 두 번 다시 살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도 그 단 하루가 얼마나 큰 의미인지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p. 366~367)



의미를 찾기란 쉽지 않다. 매 순간 선택을 해야 한다. 치유를 향해 나아갈 것인지, 고통 속에 머물 것인지. 슬픔의 다른 단계들과 마찬가지로 여섯 번째 단계에서도 능동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과거를 떠나지 않고서는 미래를 향해 갈 수 없다. 살아왔던 날들에 작별 인사를 하고 다가올 날들에 긍정의 대답을 해야 한다. 이렇게 자문해보라. “이러한 상실과 더불어 변하고 성장한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질문이다. “이러한 상실과 더불어 성장하지 못한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p. 397)


저자 : 데이비드 케슬러(DAVID A. KESSLER)


세계 최고의 슬픔과 애도 분야 전문가다. 그는 삶과 죽음의 맨 가장자리로 몰린 수천 명의 사람과 함께해오면서 행복의 비밀을 배웠으며 비통한 상실을 겪은 뒤에도 그 지혜를 잃지 않았다. 저서로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와 공동으로 집필한 《인생 수업》과 《상실 수업》이 있으며, 단독으로 쓴 책으로는 《환영, 여행, 붐비는 방VISIONS, TRIPS, CROWDED ROOMS》, 《생이 끝나갈 때 준비해야 할 것들》 등이 있다.

특히 《생이 끝나갈 때 준비해야 할 것들》은 테레사 수녀의 극찬을 받았다. 루이스 L. 헤이와 함께 《스스로 마음을 치유할 수 있다YOU CAN HEAL YOUR HEART》를 공동 집필하기도 했다. 그는 삶의 대부분을 슬픔과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과 직접 소통하며 의사, 간호사, 상담사, 경찰, 응급 구조대원 등을 대상으로 한 강연과 교육을 하며 보내고 있다. 9ㆍ11 테러 이후 미국 적십자에서 자원봉사도 하고 있다. 또한 로스앤젤레스 경찰국의 특별 예비 장교이기도 하다. 그가 만든 웹 사이트 GRIEF.COM은 슬픔에 빠진 수많은 이들에게 헤아릴 수 없이 귀중한 도움을 제공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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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으로 읽는 로마사 - 1,000년을 하루 만에 독파하는 최소한의 로마 지식
윤덕노 지음 / 더난출판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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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건국을 바라보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견해는 로마의 건국 세력이 다른 국가의 추방세력으로부터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대부분이 독신 남성으로 이루어졌던 로마의 건국 세력은 여인들을 충원하기 위해 인근의 사비니족 여인들을 납치하게 된다. 이의 굴욕을 갚기 위해 사비니족과 로마인이 전쟁을 벌였지만, 이미 사비니족의 딸이자 로마인의 아내가 되어버린 여인들이 전쟁을 중재하여 두 민족이 합쳐지게 되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여기서 '로마는 어떻게 지중해의 패권자가 되었는가?'에 대한 답의 시작을 엿볼 수 있다.

로마인은 사실 그렇게 특출난 민족은 아니다. 게르만이나 노르만족에 비해서 신체적/전투적 우월함이 돋보이지도 않고, 에트루리아인이나 그리스인에 비해서 문화적으로 발달한 국가도 아니었다. 다만 로마인은 '겸손한 민족'이었다. 자신들의 부족한 점은 크개 개의치 않는다. 민족적 열등감이나 우월감에 사로잡혀 복속시킨 민족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복속시켰으면 단지 '로마인'으로 편입시킨다. 이를 통해 자기 국가의 부족한 점을 기꺼이 메꾸게 된다. 이것의 시초가 사비니족과 라틴족의 융합이다. 사비니족 여인의 중재로 인해 융합하게된 로마인과 사비니족은, 그 어느쪽에게도 사회적 지위의 차별을 두지 않았다. 사실상 로마인에게 사비니족이 편입된 것이지만, 사비니족 장로들도 배정받는 시민권이나 원로원 의석에 만족할 수 있었고, 로물루스와 사비니족 왕의 공동 왕 체제를 통해 동등한 위치임을 보장받았다. 이를 통해 다민족 국가의 기틀을 두게 된 로마는, 그 이후로도 수많은 민족을 '로마인'으로 편입시키며 성장하게 된다.

무려 1,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존속했던 로마 제국의 흥망성쇠는 정치인, 사회학자, 역사학자 등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TV 드라마나 영화, 소설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로마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도 '로마' 하면 콜로세움에서 벌어지던 검투사들의 경기, 도시를 불태웠던 네로 황제의 기행,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말을 남기고 죽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대한 일화를 어렴풋이 떠올릴 정도로 로마 역사는 우리에게 친숙한 소재다. 조금 더 들어가보면 예수도 그때의 사람이다.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이 서구 사회에 깊이 뿌리박혀 있지만 로마 제국 건국 무렵 예수는 별 영향력 없는 유대인의 한 사람이었다. 로마 제국의 복속국이던 예루살렘의 한 시민일 뿐이다. 당시 로마는 이민족의 종교를 탄압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종교가 유일신의 종교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뒤늦게 미국에 의해 전격적으로 서구 문화를 받아들인 우리로서는 로마 제국에 대한 관심이 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조그만 도시국가가 세계를 지배한 제국을 건설했나부터 로마인들이 남긴 법 체계, 건축물, 군대 운용 방식에 이르기까지 관심을 가질 만한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니다. 더욱이 그때 로마 제국에 의해 정복 당한 주변의 독일, 프랑스, 스페인은 물론 영국 등 주변 나라와 민족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오랫동안 로마 제국이 정복자의 위치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로마인의 포용과 균형은 정신적으로 이어진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은 세계의 중심이라 하는 그들 서구 사회도 로마 제국의 자부심을 견제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로마 제국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의 각종 제도와 법을 그대로 지속거나 변형해 쓴다. 그러다 보니 로마에 관한 일련의 정형화된 이미지들이 로마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는 데 오히려 장벽이 되기도 한다. 또한 정복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이나, 황제와 원로원의 대립 구도 등 정치사적 관점을 통해 로마사를 이해하자니 방대한 역사 앞에 막막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음식으로 읽는 로마사』는 이처럼 로마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만으로 더 깊이 파헤쳐볼 엄두가 나지 않는 이들이나, 이미 로마사를 나름의 경로로 이해하고 있는 이들에게 로마 역사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로마인이 먹었던 ‘음식’을 통해 로마 시대를 조명하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역사란 결국 사람이 살아간 흔적에 대한 기록인데, 로마인들이 살았던 시대의 의식주, 그중에서도 ‘식’에 초점을 맞춘 접근은 지금껏 로마사를 조명했던 여타의 관점들과 차별화를 이룬다. 이 책의 저자 윤덕노는 여기에 착안해 글을 썼다.

책에 따르면 로마인의 식탁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 특히 우리네 밥상과 로마의 식탁을 비교해봤을 때 둘의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한국인의 식탁은 주로 우리 땅에서 재배한 곡식과 채소, 나물이 올랐다. 가축과 생선 역시 우리 산과 강, 바다에서 키운 것들이었다. 하지만 2,000년 전 로마인의 식탁은 달랐다. 이집트, 아프리카, 스페인, 포르투갈 등 인접한 지역에서 수입해온 밀, 보리, 와인, 올리브 등의 이국의 식재료들로 채워졌다. 마치 현대를 사는 우리가 노르웨이산 고등어를 먹고 칠레산 와인, 중국산 김치로 식사를 하듯, 로마는 2,000년도 훨씬 이전에 식탁에서 이미 세계화(globalization)를 실현한 것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흔히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로마인의 식탁도 하루아침에 다 채워지지 않았다. 철저하게 로마 제국의 영광과 발전의 궤도를 같이 밟았다. 늑대 젖을 먹고 자랐다는 로마 건국신화의 주인공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후손들은 처음에 로마의 일곱 언덕에서 양을 치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당시 이들이 먹었던 음식은 기껏해야 양젖과 치즈에 보리죽이었다.

로마인의 음식만큼이나 인상적인 것은 바로 로마인들의 식문화다. 이 책에는 제국의 로마인들이 왜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를 했는지, 먹고 난 뒤에 음식물 쓰레기를 그대로 바닥에 던져버렸던 이유는 무엇인지, 저녁 식사인 케나(cena) 자리에서 어떻게 중대한 정치적 결정이 내려졌는지 등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로마인의 식생활을 해부한다. 또한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화려했던 황제의 연회를 묘사하면서 청나라의 ‘만한전석’을 압도하는 ‘미네르바의 방패’나 ‘조디악’ 등 전설의 요리를 소개하고 있다.



로마인의 소울푸드는 뭐니 뭐니 해도 빵, 와인, 올리브다. 로마인들은 하루 평균 한 병가량의 와인을 마셨다고 한다. 거의 알코올 중독 수준이다. 하지만 로마인에게 와인은 술이 아니라 식수였으며, 대부분의 경우 와인에 물을 타서 희석시킨 채로 마셨다. 이에 대해서는 식습관이나 인구의 증가를 이유로 꼽기도 하지만 상하수 시설이 미비한 관계로 물을 그냥 마실 수가 없어서 와인을 섞어서 마셨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와인과 마찬가지로 올리브 역시 로마인의 생활과 더없이 밀접한 식재료였다. 빈민층은 올리브 열매로 부족한 칼로리를 보충했고, 샐러드나 소스의 재료로서 우리의 김치와 버금가는 용도로 활용했다. 식사뿐만 아니라 목욕을 할 때도 올리브 오일을 뒤집어쓰고 스트리길(strigil)이라는 도구로 땀과 때로 범벅이 된 몸을 벗겨냈다. 또한 등잔불을 밝히거나 찌꺼기를 건축 마감재로 사용하기도 했으니 올리브를 제외한 채 로마인의 생활을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다.

이처럼 음식은 로마인의 일상과 로마 사회의 단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매개체가 된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아닐까. 무엇을 먹었는가 하는 주제는 로마 사회의 단면을 살피는 데는 적합하지만 굵직한 역사 공부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단지 로마인이 즐겨 먹던 음식들을 살펴보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속단하기에는 이르다.



『음식으로 읽는 로마사』에는 의식주의 한 부분으로서의 음식이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에서 로마의 흥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식재료가 하나 소개된다. 그것은 바로 ‘빵’이다. 도대체 빵이라는 게 로마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기에 저자는 로마를 들어 ‘빵으로 흥하고 빵으로 망한 제국’이라고까지 표현했을까?

우리가 밥심으로 사는 것처럼 로마인들은 빵심으로 살았다.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밀가루로 빵을 만들어 주식으로 먹었는데, 그 무렵 동양은 밀가루가 귀해서 중국의 황제도 간신히 만두를 먹었던 시기에 로마의 평민들은 매일 같이 빵을 먹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로마 시민들은 시장의 제빵소, 오늘날로 따지면 제과점에서 빵을 사다가 먹었다. 노예 또는 해방 노예 출신의 제빵업자들은 시민들로부터 곡식을 받고 빵을 만들어주었다.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로마의 무상 식량배급 제도인 ‘큐라 아노나(cura annona)’ 때문이었다.

큐라 아노나는 로마 공화정 초기에도 존재했는데, 흉년으로 인해 식량 사정이 어려워지고 물가가 치솟을 때 시민들에게 곡식을 싼값에 나누어주던 제도였다. 처음에는 원로원에서 담당했던 아노나는 전체 인구의 10퍼센트 수준에서 점차 수혜 대상자를 확대해, 기원전 75년부터 기원전 58년 사이에 이루어진 법 개정을 통해 로마 시민의 절반가량인 32만 명이 공짜로 식량을 배급받게 되었다. 빈민 구제 수단이었던 아노나가 포퓰리즘에 의한 선심성 정치제도로 변질된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아노나 제도를 손보기 위해 무료 식량 배급의 대상자를 15만 명으로 절반 가까이 줄였으나, 초대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다시 20만 명으로 늘어난다. 로마 시내를 관통하는 티베르강의 홍수로 상당수의 식량 저장 창고가 강물에 떠내려갔기 때문이다. 그래도 로마 제국이 전성기를 구가할 무렵, 아노나는 별다른 부작용 없이 유지되었다. 하지만 정통성이 부족한 인물이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아노나는 또다시 선심성 포퓰리즘의 수단이 된다. 193년에 황제가 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곡식뿐만 아니라 와인과 돼지고기, 올리브 오일과 소금까지 더해서 나누어주었으니, 로마 시민의 식생활 일체를 정부에서 책임진 셈이었다. 더불어 로마 후기로 갈수록 아노나 집행의 권리를 황제가 장악하게 되면서 아노나는 점점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어간다. 결국 국고를 털어 환심을 사려 했던 황제와 귀족, 그리고 공짜를 좋아하고 폐해에 둔감했던 로마 시민의 도덕 불감증이 얽히고설켜 로마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됐다.

"그랬던 로마인들이 어느 날 갑자기 재배하던 작물을 보리에서 밀로 바꾼 뒤 빵을 구워 먹고, 이탈리아의 포도밭에서 포도를 따다 와인을 만들고, 마을 입구의 나무에서 올리브 열매를 따서 피클을 담고 기름을 짜서 요리를 했던 것이 아니다. 로마인의 식탁은 자급자족을 통해 채워진 것이 아니라, 400년이 넘는 기나긴 세월 동안 이루어진 전쟁과 탐험, 개척을 통해 얻은 결과물로 채워졌다. 즉 외국에서 가져온 전리품과 열매들이 하나둘 식탁 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빵과 와인, 올리브와 젓갈 등…. 지금의 기준으로는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음식들이지만 로마인들은 이 음식을 얻기 위해 개인의 목숨과 국가의 운명을 걸고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 물론 전쟁을 통해 얻은 영토 및 자원과 음식들이 승리와 함께 부수적으로 따라온 전리품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반대의 관점에서도 생각해볼 수 있다. 로마가 치렀던 각종 전쟁은 자원 확보를 위해 싸운 경제 전쟁이기도 했다.

결정적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 제국이 세력을 넓혀갈 때마다 로마인들의 식탁에 오르는 음식의 가짓수가 늘어났고, 식생활이 풍요로워졌으며 로마 경제도 그만큼 윤택해졌다."

p. 18, 제1장 「모든 음식은 로마로 통한다_식탁에서 찾은 로마 제국 번영의 열쇠」 중에서



"로마인들은 빵에 대해 무척 민감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항구에서 빵의 재료인 밀을 비롯한 갖가지 곡식을 실은 배가 로마의 관문인 오스티아 항구에 들어오곤 했는데, 그 시기가 좀 늦어지기라도 하면 로마 시내에는 곧 뒤숭숭한 소문이 나돌았다. ‘폭풍우를 만나 수송 선단이 몽땅 바다에 가라앉았다더라’, ‘아니다, 그냥 운항에 차질이 생겨서 예정보다 늦어지는 것일 뿐이다’ 등 이른바 ‘카더라 통신’이 난무했다.

이집트 곡식뿐만이 아니었다. 로마 제국의 또 다른 빵 창고인 시칠리아에 흉년이 들었다는 소식이 돌면 시민들은 공황에 빠졌다. 그로 인해 빵 공급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으면 우선 빈민들이 거리에 나앉아 굶주렸고 평민들은 동요했으며 폭동이 일어날 조짐마저 보였다. 그러니 시칠리아의 흉년 소식에, 이집트의 수송 선단 사고 뉴스에, 시민들은 곡물 사재기를 시작했고 빵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로마 시민들이 이처럼 이집트를 비롯해 시칠리아, 북아프리카의 곡물 작황과 곡물 운송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웠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로마는 시민들이 먹을 식량을 전적으로 해외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했는데, 외부로부터의 식량 공급이 끊기는 일이 종종 발생했기 때문이다.

전쟁이나 흉작이 원인이 되거나, 수송 선단이 폭풍우로 침몰하거나 해적들한테 곡물을 털리게 되는 일이 생기면 로마 시민들이 빵 부족으로 인해 힘들어하는 경우가 발생했다. 그러면 빵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빈민들, 평민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사회가 불안해졌다.

이를 막기 위해 빵값이 오르면 당장 굶주린 채 거리에 나앉아야 할 사람들을 대상으로 처음에는 싼값에, 나중에는 무료로 곡식을 나누어주는 제도가 생겼다. 훗날 로마 제국이 무너지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고 지적받는 무료 배급제도다."

p. 209~210, 제4장 「로마, 빵으로 흥하고 빵으로 망하다_로마 시민 절반이 공짜 식량을 먹다」 중에서



"로마인들은 평균 하루에 0.5리터, 그러니까 하루에 와인 한 병쯤을 마신 것으로 추정한다. 물론 이런 추정치에는 성인 남성들이 마신 분량만 해당되는지 여성과 아이도 포함되는지 등 여러 측면에서 논란이 있다. 어쨌든 하루 한 병의 와인이라면 주량에 따라 다르겠지만 은근히 취할 수 있는 정도의 양이다. 게다가 매일 한 병씩 거르지 않고 와인을 마셨다면 거의 알코올 중독 수준이다. 그렇다면 로마 제국이 강대해짐에 따라 로마 시민들이 매일 흥청망청 와인을 마시며 사치와 향락에 빠져 살았다는 소리인가 싶지만 그런 것은 또 아니다.

이 무렵 로마인에게 와인은 쾌락을 위해 마시는 기호품인 술이 아니라 물과 함께 일상적으로 마시는 음료수였다. 그렇기에 현대인처럼 와인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물을 타서 희석해서 마셨다. 와인을 왜 물에 타서 음료수처럼 마셨는지, 그리고 기원전 1세기 이후에 와인 소비량이 왜 그렇게 급속도로 늘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다. 우선 물을 대신해 와인을 마신 배경으로는 오염된 식수를 꼽는다. 지금도 유럽 상당수의 나라는 물에 석회질이 섞여 있어 자연 상태의 물을 그대로 마시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한다. 유럽에서 생수나 탄산수가 발달한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도 그런데 로마 시대에는하수 시설의 미비 등으로 마시는 물이 상당 부분 오염된 상태였다."

p.238~239, 제5장 「와인이 만든 로마의 전성시대_물 탄 와인을 물 대신 마셨던 로마인」 중에서




"1세기 때 활동한 로마의 미식가 아피키우스의 요리법에는 약 500 종류의 요리 레시피가 실려 있는데 찬찬히 살펴보면 대부분의 음식에 올리브 오일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올리브 오일은 모든 로마인이 평등하게 먹는 필수 식품이었다. 품질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구분 없이 식사 때마다 올리브 오일을 쓰지 않는 날이 없었을 정도였다. 식품학자들은 올리브 오일이 특히 저소득층의 영양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본다.

로마에서 가난한 계층은 부자나 평민과는 달리 고기를 별로 먹지 못했는데 옛날에도 고기값이 저렴하지는 않았을 뿐만 아니라 냉장 시설이 없었던 만큼 보존하기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상으로 곡식과 빵을 배급받지 못했던 진짜 빈민의 경우는 빵도 먹지 못하고 대부분 죽으로 끼니를 때웠는데 대신에 올리브 오일로 부족한 칼로리를 보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일부 학자들의 경우는 로마에서 저소득층은 하루 섭취 칼로리의 3분의 1을 올리브 오일로 먹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p. 276, 제6장 「올리브 기름 독에 빠진 로마 시민들_로마인의 의식주를 책임지던 올리브」 중에서




저자 : 윤덕노


신문기자를 거쳐 현재는 음식문화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매일경제신문 중국 베이징 특파원과 미국 클리블랜드 주립대 객원 연구원을 지냈으며 매일경제신문 사회부장, 국제부장, 과학기술부장, 중소기업부장과 부국장을 역임했다.

25년의 신문기자 생활과 장기간의 방대한 자료조사를 토대로 음식의 기원과 유래 그리고 관련 스토리를 발굴해 음식 유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음식잡학사전》 발간을 계기로 음식의 역사와 문화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되면서 조선시대의 각종 문헌과 중국 고전에서 원문을 확인하고 그리스 로마 고전에서 근거를 찾아 음식의 유래와 속설을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음식으로 읽는 중국사》 《음식이 상식이다》 《전쟁사에서 건진 별미들》 《음식으로 읽는 한국생활사》 《장모님은 왜 씨암탉을 잡아주실까?》 《붕어빵에도 족보가 있다》 《신의 선물밥》 《음식잡학사전》 《중국권력대해부》 《중국벗기기》 《차이나쇼크》 《베이징 특파원 중국경제를 말하다》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는《월가의 황제, 불룸버그 스토리》 《유럽의 세계 지배》 《장자의 내려놓음》 《나쁜 세계사》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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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이야기 - 마음에 들려주는 어른 동화
손길 지음 / 바른북스 / 2020년 10월
평점 :
절판



요즘 출판 서점계에 '어른 동화'가 심심찮게 올라온다. 시대 탓인지, 또 다른 어떤 이유가 있는지 독자는 모른다. 어렸을 때로의 회귀본능? 아니면 세상살이에 너무 물든 얼룩진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어떤 이유로든 동화 읽기는 좋다. 어린날의 행복한 기억이 떠오르고, 순수한 세상으로의 상상력 여행 때문이다. 세상에 물들어가며 적당히 더렵혀진 마음을 안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더 더럽혀질 것을 알면서도 하는 세상살이는 인간의 숙명일까. 여러 생각에 진정의 마음으로 삶과 나를 성찰할 기회가 되어서 동화가 좋다. 다만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보다 왜 기억에 오래 남지 않은지, 그때의 감동은 왜 지금은 크기가 작아졌을까 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 등이 교차한다.



이 책 『모든 것의 이야기』에는 '머리말'이나 '나가는 말'이 없다. 동화 8편만 오롯이 그림과 함께 실려 있다. 그나마 머리말을 대신하는 편지글이 맨 앞에 실려 책 출판 과정이나 저자와 교유가 있던 사람이 돌아가신 뒤에 고인이 되신 분을 뜻을 감안해 출판을 결심한 듯하다.

미처 출판되지 않은 저자의 원고를 모아 출판한 것은 고인의 죽음과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출판사 측은 출판을 결정한 배경과 책 소개글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스즈키 도시치카의 〈편지〉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모두 편지입니다. 당신이 읽으려고만 한다면.” 이 책은 그런 상상에서 출발했습니다. 해와 달은 왜 빛을 내고 있을까? 색깔은 왜 생겼을까? 물방울은 왜 밑으로 흘러갈까? 그들의 소소함에 귀를 기울인다면 아름다운 보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왜?”라는 질문을 멈추지 않아서 당혹스러웠던 적이 있으신가요? 그 늪에 빠지게 된 어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대답을 회피하거나 짜증을 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두 어린아이였던 우리는 언제 “왜?”라는 질문을 멈춘 것일까요. 이 책을 읽는 동안엔 잠시 접어두었던 상상의 날개를 다시금 펼쳐봤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8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제목과 비교하면서 살펴보면 8개의 명사인 단어가 '모든 것'에 해당되는 것이다. '빛'이 첫번째 소재이고 '인간'이 마지막 소재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얘기해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이야기가 있다는 점을 표현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저자의 의도가 거기에 있었다면 설득력을 얻는다.

'손길 우화집'이라는 작은 부제목이 있다. 손길은 당연히 저자의 이름이고 우화집은 우리가 어릴 때 읽었던 '이솝 우화'가 떠오르고 전래 동화도 떠오른다. 저자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어슴푸레 머릿속을 스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가 있는 것은 '살아 있다'의 다른 표현이리라. 살아 있는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이 동화를 읽을 준비가 돼 있을 것이다. 독자는 깊숙한 곳에 있는 영혼을 끌어내 저자의 글을 쓴 이유에 가 닿으려 읽고 싶다.


빛 이야기

색깔 이야기

장미 이야기

고라니 이야기

물방울 이야기

벚나무 이야기

지렁이 이야기

인간 이야기



해와 달과 별은 신의 섭리대로 움직이지만 정작 인간은 신의 뜻과 무관심하고 살아간다. 그냥... 어떤 사람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처럼 치열하게 살고, 어떤 이는 '살아 남기' 위해 사는 것처럼도 보인다. 각자 삶의 이유가 다르겠지만 삶의 모습은 비슷하다.

이어 보여지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색깔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색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신의 뜻을 담은 것,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도 있고 과거 같은 느낌의 흑백의 삶에서 다양한 색깔이 생기고 다른 색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다름을 인정하고 사는 것 어쩌면 가장 쉽지만 어려운 과정을 이 책에서 말하고 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도 인용된다. 고라니의 이야기도 감명 깊다. 나이 들어 갈수록 우리는 감정이 메말라 가고 순수함도 사라진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최소한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지렁이 이야기는 여운이 많이 남는다. 우주나 장미, 인간에 비해 하찮은 존재이고 때에 따라서는 기피하는 존재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한번 더 깊게 생각해보게 한다.

누군가에게는 아무 생각 없는 장난이나 기억도 못할 사소함이겠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 자연, 존재에게 끼칠 영향력에 대해 깨닫게 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개구리 이야기'도 생각난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자신의 말과 행동을 되돌아보게 하는 것.

어른을 위한 동화로서의 알맞은 소재나 이야기를 창작하는 저자의 순수한 마음, 극적이지 않고 차분하고 수수한 느낌의 이야기가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다.


저자 : 손길


1994년 청양군에서 태어났다. 발자국을 남기는 삶이 가치 있다고 답을 내려서 글을 쓰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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