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의 심플 라이프
직장사역연구소 / 한세 / 199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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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어려울 땐 일자리 역시 줄어든다. 특히 연공서열이 높은 사람들의 자리는 위태로워진다. 대기업이나 중소기업 모두 불황 땐 모두 구조조정을 통해 불황을 이겨내려 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 우리는 '사오정'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었다. 45세가 정년이라는 뜻이다. 이는 법적 정년인 58~63세의 기준이 무너지는 것이다. 이처럼 정년은 그만큼 경제가 어렵다는 바로미터가 되기도 한다. 이럴 때면 한없이 자영업이나 자유업이 부럽기도 하다. 정년 걱정은 없으니까. 45세가 정년이라면,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된다면 우리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된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만일'을 대비해 자기계발을 통해 새로운 직업에 도전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조기퇴직, 희망퇴직 직장인들은 그래서 얼마간의 퇴직금이나 위로금을 쥐고 너도 나도 자영업에 뛰어든 것이다.

그러나 한참 인기 있는 품목의 자영업도 쉬운 일이 아니다. 프랜차이즈일 경우 더욱 그렇다. 초기 비용이 많이 들고, 직장 생활과 달리 거의 24시간을 장사에 매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성공 가능성은 높지 않다. 인기 품목일 경우 너도 나도 몰려들어 너무 많은 공급망이 형성되면 수요가 일정한데 결국은 제살 깎아먹기인 셈이다. 물론 성공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생각보다 성공한 사람의 수는 많지 않다.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수익이 많지 않거나 너무 크게 시작해 올인하는 경우 실패 확률이 더 높다고 한다. 더욱이 동물 감염병과 코로나처럼 전 세계적 감염병 시대는 매상이 절반 이하로 떨어진다고 한다. 아무리 많은 시간을 투자해도 수요가 늘지 않는 한 다시 일으켜 세우기 어렵다.

 


 

이 때문에 코로나 팬데믹 이후 정부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자영업자들의 폐업은 늘어가고 있다. 다행히 코로나에도 별 변동 없는 수요가 있는 자영업은 근근이 유지하거나 일시적 휴업을 하며 버티지만 자영업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장사하기 가장 어려운 시대, 코로나 팬데믹 시대인 이때 장사를 하는 자식을 걱정하고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한국 제빵업계의 거인이자 40년의 장사 내공을 가진 숨은 고수 곽지원 교수가 어떤 시대에도 '망하지 않는 장사법'을 책을 통해 들려준다. 『장인의 장사』는 저자가 자영업인 빵집 운영을 시작해서 현재까지의 성공담일 수 있지만 그것보다는 장사하는 기술, '장인의 장사법'이라 해야 할 것 같다. 40여년 제빵 기술 습득과정에서 발전 과정, 빵집 운영의 기술 등 거의 모든 노하우를 이 책에 담았다.

책에 따르면 저자는 대기업에서 일하던 중 오일 파동 등 대규모 경제 불황을 맞이했다. 지금 코로나 충격과 유사한 경제 위기를 일찌기 경험하며 회사원 생활의 한계점을 느꼈다. 이러한 불안감을 극복하고자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장사'를 결심했다고 한다. 저자는 이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돌을 갓 지난 아들을 부모님께 맡겨 두고 부부가 일본으로 가서 장사를 하며 학비를 벌어 제빵기술을 배웠다. 아울러 파리 최고의 빵집과 한국 최고의 빵집에서 경험을 쌓고, “집밥처럼 질리지 않는 건강한 빵” 이라는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외진 양수리 두물머리에 정착했다. 양수리는 산양과 닭을 직접 키우고 우리밀로 천연효모종 빵을 만드는 데 최적의 환경을 제공했다. 그리고 현재, 그가 만드는 빵은 제주도에 거주하는 사람이 직접 방문해 구매할 정도로 고객의 사랑을 받고 있다. 말 그대로 '장인'으로 거듭난 것이다.

 


 

더 놀라운 점은, 그가 제빵 장인이기 전에 20대부터 40년 넘게 음식점, 카페, 과일장사 등 여러 개의 장사를 운영해 온 장사꾼이라는 것이다. IMF, 금용위기 등 위기도 시대를 미리 보고 지극히 현실적인 해법을 찾아낸 그를 꺾지 못했다. 최근 '장사하는 장인' 곽 교수는 사랑을 전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그가 전수하는 제빵기술과 장사법으로 60대에도 장사로 제 2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70을 바라보는 나이에 그는 여전히 새벽 4시에 일어나 빵을 구워 팔며 수많은 사람의 등대가 된다. 그의 따뜻한 품에서 가족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 심지어 그의 애완견 설이와 복이도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이 엄중한 코로나 시대 자영업자들은 그의 장사법이나 장사의 기술을 들어보면 한줄기 빛이라도 만난 기분이 들 것이다. 천천히 읽으며 그의 기술 노하우와 빵집 운영법 등에 하나씩 배운다면 불황이나 경제 위기 상황에도 망하지 않고 더욱 번창해가는 평생 직업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책의 구성도 단순하다. 사용 단어도 매우 일상적이어서 이해하기 쉽다.

1장 나의 길을 찾다

2장 장사의 길

3장 장인의 길

4장 장인의 장사

5장 절대 망하지 않는 장사의 20가지 비결

6장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장인의 정신

 


 

코로나 충격은 일시적인 일자리 감소나 양극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경제계와 미래학자들의 우울한 전망이다. 앞당겨진 비대면 사회로의 전환은 AI와 자동화, 온라인 시장의 확대로 아날로그 일자리 감소와 양극화는 가속화할 것이고, 계속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급격한 부의 이동과 생활의 재편이 이뤄질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어두운 전망 아래, 일에서 해답을 찾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일확천금을 노리며 주식과 부동산에 몰리지만 투자로 생계를 지속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보통 사람들에게 남은 생계수단이 택배, 대리운전 등 고도의 기술이 필요 없는 플랫폼 노동이나 자영업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듯 매년 수많은 사람들이 장사의 길로 뛰어 든다. 하지만 일년도 못 버티고 문 닫는 가게가 비일비재하다. 맞닥뜨린 상황으로 인해 어차피 자영업을 해야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망하지 않고 장사할 수 있을까? 제빵 장인 곽지원의 이 책은 우리의 생존이 달린 이 중요한 질문에 40년간 쌓아 온 장사 내공을 담아 묵직하고도 명쾌한 해법을 제시한다.

 


 

저자는 우리가 장사에 대해 새로운 관점으로 접근해야 할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한다. 우선 알맹이 없이 그럴 듯한 포장으로만 짧은 기간 안에 장사로 대박을 낼 수 있다는 기대를 내려놓으라고 조언한다. 대신 내 손으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고객을 만족시키고, 가족을 부양하며, 매일처럼 자기 자신과 겨루며 실력을 높여 가는 마라톤 같은 장사, 어떤 불황에도 절대 망하지 않고 은은하게 오래 하는 장사야말로 지금 시대에 행복한 삶을 사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그는 제안한다.

여기서 독자의 머리에는 한 가지 의문점이 떠오른다. 얼마 전 TV를 통해 경제적 부가 국민행복지수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강의를 들은 바 있다. 행복지수에 반영되는 요인은 소득 등 여러가지가 있지만 사회 속에서의 '자신의 안전'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조사결과에 대한 분석이다. 이 때문에 북유렵 국가들이 국민행복지수가 10위 안에 대부분 분포됐다. 사회보장제도 등과 서로간의 신뢰감이 잘 형성돼 있어 안심하곳 살고 있는 현재에 만족하기 때문에 행복지수가 높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 행복지수 54위, 자살율 1위의 수치를 보이는 한국에서의 행복한 삶이란 무엇일까?

 


 

이 문제의식은 현대 한국인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그 누구도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누구나 동일한 것을 원하고 상대를 밟고 올라서야 생존하는 세상이 아니라, 각자 원하는 길을 가고 그 길에서 빛날 때 우리 사회가 행복한 공동체가 되는 것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것이 장사하는 데에도 똑같이 적용되지 않을까? 이제는 그런 시대가 열리고 있다. 실력 없고 특색 없는 동네 가게들은 문을 닫지만 자기만의 철학으로 승부를 거는 가게들 앞에는 전국에서 온 손님들이 줄을 선다. 부자 동네에 사는 사람도 외딴 곳의 허름한 냉면 맛집은 일부러 친구들을 데려 가 자랑하며 먹는다.

하지만 이런 시대에 맞는 장사를 잘 하는 방법을 명쾌하게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백종원 대표가 동네 가게를 돕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그만큼 장사를 잘 하는 방법을 알고 싶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다. 또 우리 주변에 있는 동네 가게를 마음으로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도 된다. 하지만 프로그램만으로 모든 사람의 갈증을 해소할 수 없다.

 


 

이렇게 시대적인 결핍을 느끼는 이들에게, 아재 개그의 원조 전유성과 개그 배틀을 벌이기도 하는 저자가 선물을 보낸다. 저자는 서문에서, 본인이 지난 40년 간 빵을 만들어 팔면서 ‘절대 망하지 않는 장사’, ‘장인의 장사’를 추구해 왔다고 밝혔다. 그리고 어떤 불황에도 절대 망하지 않는 장사를 하는 법은 분야를 막론하고 관통하는 기본과 원칙이 있다고 언급한다. 그는 이 책에 자신의 실제 장사 경험을 기반으로 한 절대 망하지 않는 장사 비결 20가지를 공개한다.

혹시 “어떤 불황에도 망하지 않는 장사 비결”이라는 말을 듣고 가슴이 뛴다면 이미 절반은 장사의 길로 뛰어든 셈이다. 이미 망하지 않는 장사의 길, 시간이 흘러 장인이 되는 길에 발을 들여 놓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에 비결이 있고 길 안내가 있다. '비결'이라니 보통 사람들은 쉽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기본 체력과 의지, 노력, 성실, 인내, 집중, 비전 등 우리가 아는 모든 내용도 포함되지만 추상적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저자 : 곽지원

 

최근 김영철의 동네 한바퀴에서 양평을 대표하는 가게로 소개된 "곽지원 빵공방" 의 주인장. 우리 밀과 천연효모종으로 만드는 그의 천연발효빵은 제주도에서 찾아와서 사 먹을 정도로 극성 팬덤을 갖고 있다. 롯데백화점 고위층의 부탁으로 여섯시오븐이라는 베이커리를 백화점에서 운영했다.

40년 가까이 빵을 만든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제빵사지만 일흔살을 바라보는 지금도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빵을 굽는다. 자신이 추구하는 "건강하고 집밥 같은 빵"을 만들기 위해 잠실에서 잘 나가던 빵집을 접고 양평 두물머리로 들어 갔다. 신선한 빵 재료를 얻기 위해 직접 산양과 닭을 기르고, 풍차로 밀가루를 만들고 화덕 오븐에 나무를 떼서 빵을 굽기도 한다. 그는 "공부는 엉덩이로 하고, 빵은 발로 만든다"고 얘기하는 빵의 장인일 뿐 아니라 카페, 해변가 디스코 클럽, 넝마주이, 트럭 과일장사 등 여러 업종에서 수십 년간 장사를 해 온 성공적인 장사꾼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처럼 오래오래 장사하며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라며 30여년의 장사 경험을 통해 구축한 절대 망하지 않는 "장인의 장사"라는 철학과 방법을 이 책에 담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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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길
레이너 윈 지음, 우진하 옮김 / 쌤앤파커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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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삶에는 무수한 역경이 있고 전환점도 있다. 그만큼 사회가 복잡하고 다양한 성격의 사람들이 함께 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역경에 굴복해 삶의 의지를 잃고 방황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놀라운 투지를 발휘해 역경을 이기고 기적 같은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이 책 『소금길』의 두 주인공 레이너와 모스는 결혼 32년을 맞이한 중년부부다. 열심히 살았고 행복한 삶이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집도 절도 없는 신세로 전락한다. 더욱이 남편 모스는 의사로부터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희귀병 진단을 받는다. 늦은 나이에 이런 신세가 될지 꿈에도 생각지 못한 부부는 그야말로 맨붕 상태였을 것이다. 실제 "이제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생각에 막연하고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다고 고백한다.

더는 내몰릴 곳 없는 벼랑 끝에 선 두 사람은 내일을 위해, 희망을 되찾기 위해 배낭 하나씩만 메고 영국 남서부 해안의 절경을 품고 이어지는 내셔널 트레일 코스인 ‘사우스 웨스트 코스트 패스’로 가기로 결심한다. 벼랑 끝에서 다시 시작하는 길로 간 것이다. 이 길 사우스웨스트코스트 패스(South West Coast Path)는 영국에서 가장 긴 보도(步道)이자 국립산행로이다. '쥐라기 해안(Jurassic Coast)'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동부 데번의 엑스머스(Exmouth) 근처 오컴브(Orcombe Point)로부터 도싯의 스워니지(Swanage) 근처 올드해리록스(Old Harry Rocks)에 이르는 약 153km 길이의 해안을 포함해, 1,000km에 이른다. 책에서는 '무작정'이었는지 모르지만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잃을 것도 없는 처지여서 무모한 도전이 가능했으리라고 독자는 생각한다. 평범한 주부였던 레이너 윈이 쉰이 넘어 1,000km 도보 장정을 한다는 것은 쉽게 용기를 낼 일이 아니다. 더욱이 동반자 남편 모스는 희귀병 환자로 체력이 따라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태다. 부부가 다시 삶을 위해 시작하는 대장정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시작했다.

 


 

열여덟에 처음 만나 서른두 해를 함께한 중년 부부 레이너와 모스. 수십 년 동안 머리를 누이고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집과 농장은 3년 동안 지루하게 이어진 법정 공방 끝에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 모스가 겪고 있는 극심한 통증의 원인은 치료제도 없이 진통제로만 버텨야 한다는 희귀병, 피질기저퇴행이었다. 의사에 따르면 모스에게 남은 시간은 겨우 5년 정도이고, 치매 증상과 함께 몸은 점점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그대로 숨을 거두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레이너로서는 청천벽력도 이런 날벼락이 없을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걷기 시작한 부부는 사실 그저 걷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고 말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 같지만, 이대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멍하니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밤이 되면 자연 한가운데에서 텐트와 침낭을 펴 잠을 청하고, 위험한 상황을 여러 번 겪으면서도 절벽과 바다, 하늘을 벗 삼아 그 곁을 걷고 또 걸었다. 이제 남은 희망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두 사람이 1년여 동안 1,000km가 넘는 길을 묵묵히 걷는 동안 자연은 진심 어린 위로를 선물했고 그래도 희망이 있음을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중년의 부부는 배낭을 메고 마인헤드부터 시작하는 1,000km가 넘는 긴 여정을 두 사람의 발자국으로 채워가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부터 쉽지 않을 것이라 각오하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두 사람 앞에 놓인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어느 칠흑 같은 밤,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밀려드는 파도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깨 텐트를 그대로 들고 해변을 달리기도 하고, 가진 돈이 없어 야영장에 몰래 들어가 조용히 텐트를 친 뒤 짧은 잠을 청하고는 빠져나오기도 한다. 한번은 큰맘 먹고 산 파이를 제대로 맛보기도 전에 먹을 것을 찾던 약삭빠른 갈매기에게 빼앗기는 수모를 겪는 레이너의 모습에 안타까움이 느껴지면서도, 위로인 듯 약 올리는 듯한 모스의 말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들게 만들기도 한다. 부부여서 가능했을까.

“우리한테 일정이 있었던가?”

“그야 물론이지. 이렇게 걷고 쉬다가 다시 우리 미래를 찾을 수 있을 때까지 걷고 또 걷는 거야.”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야.”(p. 110)

 


 

SWCP에 들어선 이후부터 이 초록색 텐트는 우리의 집이 되어 주었다. 매일 저녁이 되면 우리는 마치 의식이라도 치르듯 텐트를 치고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다 들여놓았다. 우선 저절로 부풀어 오르는 깔개를 깔고 그 위에 작은 플리스 담요를 덮었다. 그런 다음 침낭을 편 후 우리 발이 닿는 곳에, 그러니까 텐트 문 앞에 배낭을 들여놓았다. 우리는 배낭을 열어 작은 주머니에 따로 들어 있는 조리도구를 꺼냈고 옷가지들을 꺼내 추위를 막기 위해 텐트 바닥 여기저기 빈 공간에 깔았다. 그리고 텐트 문 지퍼 위쪽 지붕 부분에 달린 고리에 손전등을 매달았다.

이렇게 준비가 다 끝나면 비로소 차를 끓이기 시작했고 모스는 짧게 편집된 《베오울프》를 읽었다. 우리가 가져온 단 한 권의 책이었다. 뭔가 의식 같은 걸 치르고 싶어 하는 건 인간의 본성이 아닐까? 편안히 잠에 빠져들기 전에 안전한 주변 환경을 만들어두려 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고? 우리는 그런 안전이 확보되지 않는 한 결코 진정으로 편하게 잠들 수는 없는 것일까? 바닷가 어딘가쯤에 세워놓은 이 텐트 안은 중추 신경 진통제를 먹지 못해 벌벌 떨고 있는 죽어가는 한 남자와 내가 기대고 매달릴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p.165~166, 「걷기」 중에서)

 


 

“어디로 가는 길이세요? 배낭여행을 하기에는 좀 시기가 늦지 않았나요?”

스무 살 남짓 되었을까, 무릎까지 오는 반바지와 모자 달린 티셔츠를 입은 남자가 우리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이렇게 물었다.

“랜즈엔드로 가요. 그다음은 아마 날씨에 달려 있겠지만, 어쨌든 계속 걸어갈 겁니다.”

“얼마나 더 갈 건데요?”

“그야 우리가 가고 싶은 만큼.”

“아니, 그럼 돌아갈 계획이 없다는 거예요? 그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하다니 정말로 대단들 하시네요. 일상을 박차고 나와서 원하는 일을 하다니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서요.”

“아니, 내 말이 맞잖아요. 돌아갈 계획이 전혀 없다면 자유롭게 인생을 즐길 수 있다는 거지요. 정말 대단합니다.”

남자는 다른 길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그러나 이렇게 외치는 걸 잊지 않았다.

“어르신들, 인생을 즐기세요.”

우리는 버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렇게 빨리 움직이고 있으려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걸어서라면 몇 시간은 걸릴 거리를 단 몇 분 만에 가고 있는 것이다. SWCP는 우리에게 걸어서 가는 길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실제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알게 되었고 출발 지점에서 다음 목적지까지 그리고 다음에 목을 축일 수 있는 곳까지의 공간이 얼마나 넓은지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중략) 우리는 그렇게 자유롭게, 인생을 즐기고 있었다.(p.298~299, 「살가죽」 중에서)

 


 

“우리가 과연 잘한 걸까?”

모스가 진통제 네 알을 삼키고는 바위 위에 앉았다. 나는 중국 약재상에서 구한 진통제 연고를 그의 어깨에 발라주었다. 삶은 양배추 냄새를 풍기는 이 약은 효과는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뭔가를 하고 있다는 기분은 들게 해주었다.

“우리가 잘못한 게 뭐가 있겠어. 방이 필요하면 우리가 번 돈으로 방을 얻으면 되고 당신은 다시 공부를 하고. 그리고 나는 또 뭐든 일을 찾을 수 있겠지. 아니면 나도 뭘 다시 배우던가. 그렇지만 이제는 다른 누군가에게 기대어 사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삶을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된 거야.”

“그래, 나도 알아. 그건 확실하지. 내 말은 이렇게 다시 걷고 있는 게 잘한 선택이냐는 거지.”

“우리가 살면서 한 일 중에 제일 잘한 일일 거야.”

“그렇다면 좋아. 사실은 그 말을 당신에게서 듣고 싶었지.”(p. 454~455, 「생명의 기운」 중에서)

 


 

우리는 바위 위에 드러누웠다. 몸이 갈색 가죽처럼 바짝 말라갔다. 14개월 전만 해도 힘없이 늘어져 있던 연약하고 창백했던 우리의 몸은 이제 군살 하나 없이 햇볕에 탄 몸이 되었으며 영원히 되찾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탄탄한 근육까지 붙어 있었다. 머리카락은 형편없이 상해 있었으며 손톱은 부러졌고 옷은 올이 다 드러나 보일 정도로 닳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저 삶과 죽음 사이에서 시간만 죽이며 지내는 것이 아니라 일분일초가 지나가는 것을 잘 알고 그렇게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바위는 점점 기울어가는 태양을 따라 그대로 열기를 전달해주었고 바닷물이 들락날락할 때마다 갈매기들은 각자 다른 소리로 울어댔다. 내 손은 시간이 갈수록 주름이 더해졌고 허벅지는 먼 길을 걸으며 새로운 모습으로 변했다. 그렇지만 모스가 나를 끌어안고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분명한 열정으로 서둘러 내게 입술을 가져다 댔을 때 갑자기 시간이 거꾸로 흘러갔다.

나는 19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모스의 집으로 향하는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 그의 집에 부모님이 안 계신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순식간에 자라버린 갓난쟁이들의 엄마였다. 우리는 우리였고, 우리가 살아간 일분일초도 우리였고, 온갖 경험을 넣어 푹 끓인 인생이 바로 우리였다. 우리는 우리가 되기 원했던 모든 것이었으며 동시에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모든 것이기도 했다.(p. 532~533 「소금길」 중에서)

 


 

이 책은 저자 레이너의 첫 번째 책이다. 『소금길』은 1년여 동안 1,000km가 넘는 길을 묵묵히 걷는 동안 경험한 가지각색의 사람들, 쉽지 않은 여정 그리고 자연이 두 사람에게 선물한 진심 어린 위로와 희망을 담았다. 무려 550페이지에 이른다. 영국에서는 출간 직후부터 수많은 독자에게 감동을 선물하며 여러 매체의 뜨거운 관심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관찰 예능을 보는 듯한 현실감 넘치는 부부의 살아 숨 쉬는 이야기와 함께 영국의 아름다운 자연을 유려하게 묘사한 문장으로 가득차 있다고 평가를 받았다. 이 책은 유례없는 세계적 팬데믹 속에서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이들에게 위로와 함께 다시 한 걸음 내디딜 용기를 준다.

당장 가보고 싶지만 지금은 팬데믹 상황으로 오가기가 몹시 어렵고 불편하다. 더욱이 여느 때와 달리 반길 리도 없을 터, 이들 부부가 간 길을 따라 독자의 삶에 희망과 용기를 담아오고 싶다.

 

저자 : 레이너 윈

 

자연의 치유력과 캠핑에 대한 글을 쓰는 작가이자 장거리 워커(walker). 3년여 동안 지루하게 이어진 법정 공방은 손수 일군 집과 농장 등 모든 것을 앗아가고 말았다. 벼랑 끝에 내몰리게 되었다고 느꼈던 그때, 남편 모스와 함께 영국 남서부 해안에 위치한 약 1,000킬로미터에 달하는 내셔널 트레일인 ‘사우스 웨스트 코스트 패스’를 무작정 걷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걸음을 옮기면서 경험한 자연이 준 위로와 희망을 첫 책 《소금길》에 담았다. 출간 직후부터 수많은 독자의 공감을 끌어내며 위로를 선물한 이 책은 영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코스타 북 어워드’와 생태와 환경 분야 도서에 수여하는 ‘웨인라이트 프라이즈’의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지은 책으로는 《소금길》 이후 새로운 터전에서의 정착 과정을 담은 《와일드 사일런스》가 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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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흔들리게 창문을 열어주세요 - 식물의 마음으로 읽어내는 관계의 소리
김지연 지음 / 북스고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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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바람에 흔들리게 창문을 열어주세요』의 제목이 이채롭다. 누가 한 말인가? 저자가 한 말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창문을 열어주라고 부탁을 하는 건가. 마치 말을 거는 듯한 대화체의 제목이 인상적인 이 책은 꽃, 나무 등 식물과 대화를 하는 저자의 일상을 기록한 책이다. 단순한 일상 기록이 아니라 식물과 나눈 대화를 일기처럼 기록해둔 내용을 정리해 책으로 펴냈다. 저자 김지연이 좋아하는 꽃과 나무 등 식물과 자연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한 에세이다.

저자는 평소 식물 기르기가 취미라고 할 만큼 식물과 함께 하는 일상을 보낸다고 한다. 남편, 아이, 친구 등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식물의 생태와 특징에 빗대어 기록하였다. 처음에 등장하는 라벤더를 들이고 ‘잘’ 키우고 싶어 풍부한 물과 적당한 햇빛과 넘치지 않는 관심을 주었지만 라벤더는 결국 말라 죽었다. 그 이유가 물도 햇빛도 아닌 ‘새로운 공기’에 대한 필요를 채워주지 못해서였다고 한다. 그래서 라벤더가 저자에게 한 말로 이 책의 제목을 삼았다. 우리 삶에도 이렇게 새로운 바람, 환기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꽃과 나무를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모두 식물을 키우지는 않는다. 그러나 관심이 있고 좋아하는 사람은 비좁은 집안 어디에선가 화분을 들이고서라도 꽃이나 나무를 기르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이 직접 기르면 애정도 더 갈 것이고 꽃에 대해 더 잘 알게 될 것이니 분명 좋은 일이다. 그러나 식물은 물만 준다고 잘 자라는 것은 아니다. 특히 어떤 식물은 물을 너무 많이 주면 오히려 죽는 경우도 있다. 또 어떤 식물은 아무 이유 없이 자라지 않고 결국 죽는 바람에 식물을 키우는 사람의 마음도 아프게 하기도 한다. 속상할 일이어서 적잖은 스트레스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식물의 좋은 점은 하찮은 불편함과 다소의 스트레스를 주어도 키우는 보람을 찾을 수 있다. 꽃을 피우기도 하고 향기도 내주며, 꽃을 피우지 않은 식물은 나름대로 아름다움과 푸른색으로 집안 분위기를 한껏 생동감 있게 바꿔주기도 한다. 또 미세먼지가 사회문제로 등장한 이후부터는 푸른잎 식물이 정화작용을 잘 한다고 인기를 한몸에 받기도 한다. 특히 요즘처럼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도 면역력을 높이는 식물도 있다고 해 세간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직접 면역력을 높이는 효과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현대인들의 가슴이 삭막해지고 환경도 오염됐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간혹 식물 키우기가 귀찮아 인테리어 용품으로 판매되는 조화를 사다 걸거나 화분에 받쳐 기르는 것처럼 위장(?)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식물은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심신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조화는 금세 싫증이 나고 기르는 재미도 못 느끼기에 수명이 오히려 생화보다 짧은 것 같다. 독자는 먼지라도 끼면 아낌없이 버리는 경우를 자주 보았다. 또 저자처럼 식물에서 영감을 받거나 대화를 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도 없는 조화다. 쓰임새가 한정돼 있기 때문에 한 번 쓰면 버리는 일회용품쯤으로 간주된다.

저자는 꽃과 식물 이야기를 하며 우리의 삶의 교훈도 많이 얻는 것 같다. 일상이 스트레스인 현대인들이 ‘잘살아 간다'는 것은 지친 삶 속에서 자신만의 힐링의 요인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힐링의 요인이 저자에게는 꽃과 나무, 식물이요, 자연이다. 이 책은 저자가 겪은, 그리고 앞으로 겪어 갈 모든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식물마다 다른 삶의 방식을 택하듯 주어진 조건과 환경에 불평하지 않고 나름의 길을 묵묵히 견뎌내고 있는 식물의 자세에서 인생의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하나의 정답이 아닌 자신의 답을 만들어 가는 식물을 보며 저자가 공감한 깊은 울림을 독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공감하며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지금 관계로 힘든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건네는 저자의 마음을 읽는다.

 


 

이 책에는 3장 26개의 소제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 개의 소제목에 하나의 꽃(식물)이 나오니까 모두 26개의 식물과의 대화인 셈이다. 대화가 아니면 저자의 독백일 수 있고 사유일 수 있으니, 대화든 독백이든 상관없이 식물에게서 많은 삶의 모습을 끌어내 우리들의 삶에 대입하고 사유하고 지혜를 터득해가는 저자의 삶의 방식을 엿볼 수 있다.

삭막해져만 가는 도시, 그 중에서도 아파트 생활이 거의 대부분인 도시인들은 식물에게 영감을 받을 일도 별로 없고, 식물이 주는 위안도 느낄 수 없이 살아간다. 이 때문에 정서적으로 메마르고 점점 팍팍해지며 스트레스는 쌓여만 간다. 따뜻하게 위로하고 내 펴이 돼서 위안을 주는 가족끼리 관계가 좋은 가족은 다소 힐링도 되고 스트레스도 해소될 수 있겠지만 도시는 점점 가족과도 함께 살기를 허락하지 않는 방향으로 변해간다. 직장 때문이기도 하고, 가족과의 관계가 멀어서 그럴 수 있고, 사회 분위기가 개인 생활의 엄격한 보호 분위기여서 더욱 그렇다. 그래서 기를 써서 좁은 집안에 화분이라도 들여 식물 기르기를 할 터이다. 자주 돌보지 못해 말라 죽어가는 것을 보면 더 스트레스를 받을 텐데도 식물과 떨어질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관계’ 없이 살 수는 없다. 하지만 그 관계라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 때가 있다. 생각처럼 인연으로 이어지지 않거나 갈등이 생기고, 오해를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그 관계를 통해서 우리는 성장하고 삶의 해답을 얻기도 한다. 『바람에 흔들리게 창문을 열어주세요』는 꽃과 나무, 식물과 인간관계를 기록한 이야기다. 저자 김지연은 식물을 보며 자신의 내적 갈등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고 한다. 식물마다 원하는 환경이 다르다 보니 식물의 마음을 읽으려 애쓰면서 식물의 모습과 닮은 나와 사람들의 관계를 떠올렸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길에 핀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마다 서려 있는 이야기를 지나칠 수 없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이 책에 담았다고 밝힌다.

“강렬하게 피어난 포인세티아에 자신의 약점을 극복한 수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강인하게 피어난 솜다리 꽃에 열악한 환경을 받아들인 인내가 고여 있었습니다.가냘프게 피어난 맥문동에 부족한 조건을 메워준 지혜가 녹아 있었습니다.”

- 프롤로그 중에서

 

저자 : 김지연

 

다시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어서, 미리 가 보고 싶은 시간이 있어서 글을 쓴다. 글은 나를 과거로 또는 미래로 데려다준다. 그리고 한 번 더 살 수 있게 해 준다. 글로 삶을 미리 그린 뒤 그 선을 따라가기도 한다. 무엇보다 지금이 순간을 담을 수 있게 해 준다. 오늘도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삶을 글로 겹쳐 살아간다. 글이 곧 나이고 내가 곧 글이란 생각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독어독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연세대학교 어학당에서 한국말을 가르쳤다. 〈월간문학〉 수필 부문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한국문인협회 회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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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도시 바로 알기 1 : 서부유럽.중부유럽 세계도시 바로 알기 1
권용우 지음 / 박영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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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펼치자 고등학교 시절의 세계지리와 세계사를 가르치시던 은사님들이 생각난다. 당시 세계사 교과서 분량으로 볼 때 미국에 비해 유럽의 역사가 압도적이었다. 거의 대부분이 유럽의 역사를 기술했고, 미국은 중국 등과 같이 요점만 약간 다뤘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대학 시험에도 세계사 부분은 대부분 유럽의 역사에 대해 출제됐다. 미국의 역사는 짧고 유럽의 역사는 긴 데다 화려하고 치열했으며 웅장하고 아름다움 등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미국에 비해 이야깃거리가 많으니까.

이 때문에 세계사 선생님들은 인기가 있었다. 왕과 왕비, 유명 예술인과 연인 등의 야사를 곁들여 설명해주면 머리 쓰지 않고 재미 있게 배울 수 있어서다. 그만큼 유럽의 역사는 다양하고 재밌었다. 이에 비해 우리와 관련이 깊은 중국의 역사는 오래됐지만 적성국가(한중 수교 전이어서)라는 이유로 한, 당, 송, 명, 청 등 통일 제국의 변천 정도만 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유럽의 역사는 아테네 시대부터 로마제국을 거쳐 영국의 대제국 건설 과정까지 정말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었다. 어떤 선생님들은 칠판에 세계지도(약도, 대륙 모양만 그린)를 그려 놓고 열심히 설명하시는 모습도 인상적이어서 지금까지 엊그제 일처럼 기억된다.

 


 

이 책 『세계도시 바로 알기. 1: 서부유럽ㆍ중부유럽』은 정확하게 그때의 독자의 기억을 소환한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로마 제국에 큰 관심이 있었지만 오래 전 일이라 제국 건설과 카이사르의 활약 등만 부각돼 있었던 것도 기억난다. 지금의 유럽 문화는 대부분 로마 제국의 유산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다. 건축뿐만 아니라 유럽인들과 유럽의 각 국가들은 이념이나 사상적으로도 로마 제국에 뿌리를 둔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대체적으로 유럽 역사에서 중심 역할을 했던 나라는 약 5~6개 나라다. 물론 독자가 배운 교과서에 바탕을 두고 있는 점 때문이다. 로마의 후손 이탈리아와 영국, 프랑스, 독일이다.

유럽 수많은 나라가 명멸했지만 이들 4개 나라는 유럽의 중심국이 되려는 치열한 경쟁을 계속해왔다. 심하면 전쟁도 불사할 정도로 치열한 것으로 배웠다. 그 경쟁 속에서도 로마의 영향을 이어받았다는 것은 모두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부분도 이채롭다. 로마의 영화를 그리워해서일까? 위 4개국 이외에도 스페인(에스파니아),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이 자주 거론되지만 이들 나라는 유럽 패권을 쥐어본 적은 없는 듯하다. 그러나 모두 독자적인 장점을 잘 살려 유럽 문명에 기여했고 합류했다.

 


 

독자는 수차례 유럽 여행을 한 적이 있다. 한 번에 전부 갈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여러 번에 걸쳐 갔다왔다. 프랑스와 독일, 영국, 이탈리아와 스페인, 그리고 오스트리아, 스위스다. 아주 작은 공국 수준의 나라를 빼고. 첫 번째 여행에서 받은 느낌은 왜 영토 싸움을 했을까를 나름대로 생각해본 결과다. 관광차 가서 관광지 중심으로 돌아다녀서인지 빼어난 경치를 가진 곳이 많았다. 그때 경치가 좋은 곳을 차로 돌면서 "이런 땅을 빼앗으로려 서로 싸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이없는 생각일지 모르지만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은 빼어난 경관만큼 건축들도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옛날 로마 제국의 귀족들이 해변의 별장을 지어 살았다고 하는데 이런 곳이 아니었나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다음에 갔을 때는 프랑스 파리 등 내륙 중심의 도시를 들렀다. 가는 도시마다 느낌이 다르고 색깔이 달랐다. 어떤 곳은 그들 나라가 강성했던 시절을 회상하듯 더욱 드러나게 꾸미고 가꾸었다는 느낌이 들고, 어떤 곳은 쇠락한 느낌을 지울려고 했는지 옛 유적을 그대로 방치한 곳도 있었다. 역사적 유물이라 있는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서인지 몰라도. 한 가지 공통점은 옛 로마 제국의 정신을 자신들이 물려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적당히 일하고 즐기는 여유 많은 사람들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줬다. 그때 그들은 관광지를 제외하고는 어김 없이 오후 7시에 문을 닫고(호프집은 손님이 원할 경우 8시까지) 점심 시간에도 2시간씩 문을 닫았다. 24시간을 일하는 우리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고 사실 충격이었다.

이런 문화를모르고 나중에 슈퍼마켓에 가서 물건을 사려고 했지만 허탕만 쳤다. 몇 번의 유럽여행에서 독자가 얻은 결론은 "유럽인들은 조상덕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이 책은 유럽 도시에 대해 잘못 알려진 부분을 바로잡고, 도시들의 특성을 그곳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연계해 쓴 책이다. 저자 권용우는 지리학(도시지리학) 교수로서 오랫동안 연구하고 직접 방문 확인한 일을 계속 해왔다. 하계와 관직에서도 오랫동안 관련 일을 했다. 수많은 저서 이외에도 현재는 「세계도시 바로 알기」 YOUTUBE 강의교수를 하고 있다. 저자는 도시지리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또 외교학을 부전공하여 석사과정까지 공부했다. 대학에 들어오면서부터 우리나라 곳곳을 답사했다고 한다. 대학교수가 된 이후 1987년부터 해외답사를 시작했으며, 2020년까지 34년간 60여 개국 수백개 도시를 답사했다고 한다. 답사가기 전 답사지역을 예습해 체크리스트를 만들었고 현지에서 체크리스트를 확인하면서 학습했다. 답사를 다녀온 후 복습하여 답사내용을 정리했다. 지역 연구자들이 행하는 방법이다. 첫 번째 결과물이 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프롤로그를 통해 답사의 핵심은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라고 강조한다. 저자에 따르면 근대지리학 이후 수많은 방법론이 나와 있다. 세 가지 설득력 있는 방법론이 있다.

첫째는 독일학자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의 총체론(Totalitat)이다. 총체적이고 종합적인 관점으로 현지답사를 통해 지역을 이해해야 그 실체가 오롯이 드러난다고 했다.

둘째는 프랑스학자 블라슈(Vidal de la Blache)의 생활양식론(genre de vie)이다. 땅과 연관된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들여다봐야 지역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셋째는 독일학자 헤트너(Alfred Hettner)의 지역론(Landerkunde)이다. 자연과 인문 현상이 어우러져 나타나는 현상을 알아내야 지역의 본모습이 나타난다고 했다. 세 분은 박물학적 식견을 갖추고 현장답사를 실천한 지리학자들이다. 세 가지 방법론을 종합하면 총체적 생활양식론으로 정리될 수 있다.

총체적 생활양식론으로 세계도시를 바로 알기 위한 구체적 논리는 무엇인가? 먼저 각 도시의 지리, 역사, 종교,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내용을 총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각각의 내용이 서로 상호작용하여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양식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알아내야 한다. 알아낸 내용이 정확한지를 검증하기 위해서는 관련 문헌과 자료를 검토하며 현지답사를 통해 경험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오랜 시간과 검증이 요구되는 일이다.

 


 

저자는 이어 세계 도시는 세 가지 패러다임으로 총체적인 특성을 바르게 알 수 있다고 제시한다.

첫째는 말(language)이다. 한 나라와 도시가 생겨나고 유지되는 과정에서 독자적인 말을 가지고 있을 때 소멸하지 않고 존속한다. 자국어가 세계 언어인 나라는 그 자체로 세계 국가가 된다. 식민지 상태로 있다 해도 자국어를 붙들고 있으면 독립국가로 일어선다.

둘째는 먹거리(industry)다. 근대 이후 오늘날까지 세계 유수 도시로 자리매김하는 핵심 배경은 산업이다. 자기들에 맞는 산업을 일으켜서 끊임없는 혁신으로 유연하고 다양하게 시대의 흐름에 적응한다. 핵심적 산업은 자동차, 조선, 전자, 건설, 석유, 기계, 의료, 방위산업, 교육, 관광 등이다. 최근에는 인공지능, 빅 데이터, 자율주행차, 드론, 로봇, 사물 인터넷, 생명산업, 3D 프린터 등의 신산업이다. 세계도시를 답사하는 과정에서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들은 이들 핵심 산업의 상당 부분을 세계 상위권에 자리매김해 놓고 있음이 확인된다. 부유하지 못한 나라들은 이들 핵심 산업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상위권에 들어 있지 않음이 관찰된다.

셋째는 종교(religion)다. 한 나라와 도시가 흔들림없이 유지되는 배경에서 종교적 영향력은 대단하다. 종교로 인한 전쟁과 분쟁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여하한 상황에서도 국민들의 상당수가 종교적 신앙으로 뭉쳐있는 경우에는 사람들의 생활양식이 견고하다.

 


 

『세계도시 바로 알기』 1권은 서부유럽과 중부유럽 6개국을 다루고 있다.

영국은 섬나라에서 해양강국으로 올라섰다. 영어를 세계공용어로 만들었고, 자본주의 체제를 구축했으며, 기독교로 정신적 안정을 추구했다. 영국은 의회민주주의를 처음 세운 국가로 전 세계 의회민주주의 모델이 되고있다. 런던은 2,000년의 역사를 지닌 도시로 영국의 총체적 생활양식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영국인의 심장이다. 전원도시 레치워스와 웰윈, 신도시 밀턴 케인즈는 삶의 질을 추구하는 친환경도시다. 영국 도시는 지속가능하고, 친환경적이며, 시민중심의 도시 거버넌스를 도모한다.

프랑스는 비옥한 땅과 3면의 바다를 가진 나라로 유럽의 교차로 역할을 해왔다. 불어를 세계 5위 언어로 만들었다. GDP 규모는 세계 7위다. 가톨릭의 장녀(長女)라 불리는 가톨릭 국가다. 프랑스는 대혁명을 통해 세운 자유·평등·박애의 시민정신을 전 세계에 널리 보급했다. 파리는 세계의 문화수도다. 칼레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공민정신의 표본도시다. 보르도는 세계적 와인산지다. 남부의 아를, 마르세유, 소피아앙티폴리스, 칸, 니스는 지중해 연안의 명품도시다.

 


 

네덜란드는 바다를 메꾸고 방조제를 쌓아 땅을 만들어 국토를 넓혔다. 무른 땅을 농목업 농지로 바꿨다자국어 외에 영어, 독일어, 불어 등을 익혀 국제적 경쟁력을 키웠다. 식품·금융·제조업 등에서 부를 창출해 1인당 국민소득 51,290달러를 올렸다. 국민적 단결과 기독교 신앙으로 스페인과 싸워 독립을 쟁취한 나라다. 암스테르담은 수도로 교통기능과 3차 산업이 활성화되어 있다. 헤이그는 정치행정 중심지이며, 로테르담은 유럽의 관문도시다.

독일은 통일과 분단, 재통일의 과정을 겪었다. 탄탄한 산업과 푸른 환경, 내실 있는 문화적 콘텐츠, 종교가 있어 이겨냈다. 독일어는 유럽에서 영향력 있는 언어다. 독일은 마르틴 루터가 촉발한 종교개혁이 일어난 국가다. 베를린은 1701년 이후 독일의 수도다. 베를린과 본은 내용상 2극형 수도다. 라인 강 연안의 도시에서는 독일인의 다양함이 꽃핀다. 함부르크는 한자도시(Hansa city)다. 라이프치히는 바흐가 활동했던 도시이며, 뮌헨은 1백만명 마을도시다. 프라이부르크, 슈투트가르트는 환경도시다.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 가문과 함께 했다. 오스트리아는 독일어를 사용한다. 제조업 강국으로 1인당 GDP가 48,634달러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흐름이 이어지는 가톨릭 국가다. 빈은 오스트리아 역사의 중심지로 음악도시다. 그라츠에는 전통적 도시경관과 현대적 이미지가 공존한다.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와 카라얀의 고향이다.

스위스는 독어, 불어, 이탈리아어, 로망슈어 등 4개 국어를 쓴다. 기술집약적인 고부가가치 산업에 집중해 1인당 GDP가 81,867달러로 세계 2위다. 장 칼뱅과 츠빙글리가 활동했던 기독교 국가다. 앙리 뒤낭은 적십자운동을 펴 스위스를 박애실천 선도국가로 올려 놓았다. 스위스 최대도시 취리히, 국제회의가 많이 열리는 제네바, 사실상의 수도인 베른, 교역과 문화중심지 바젤 등은 세계적 도시로 발돋움했다.

 

저자 : 권용우

 

서울 중 · 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문리대 지리학과 동 대학원(박사, 도시지리학), 미국 MINNESOTA대학교 / WISCONSIN대학교 객원교수, 성신여자대학교 사회대 지리학과 교수 / 명예교수(현재), 성신여자대학교 총장권한대행 /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한지리학회 / 국토지리학회 / 한국도시지리학회 회장, 국토해양부 · 환경부 국토환경관리정책조정위원장, 국토교통부 중앙도시계획위원회 위원 / 부위원장, 국토교통부 갈등관리심의위원회 위원장, 신행정수도 후보지 평가위원회 위원장,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도시개혁센터 대표 / 고문, 「세계도시 바로 알기」 YOUTUBE 강의교수(현재), 『교외지역』(2001), 『수도권공간연구』(2002), 『그린벨트』(2013), 『도시의 이해』(2016) 등 저서(공저 포함) 72권 / 학술논문 152편 /, 연구보고서 55권 / 기고문 800여 편.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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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비스마르크 - 전환의 시대 리더의 발견
에버하르트 콜브 지음, 김희상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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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의 비스마르크에 대한 기억은 학창 때 세계사 교과서 한 구석에 자리잡은 '철혈재상'이란 닉네임으로 인해 공포정치를 한 사람으로 생각했을 때부터다. 닉네임으로 기억해서인지 그의 정치 철학이나 국민에 대한 봉사 이념 같은 건 별로 아는 게 없었다. 세계사 수업 시간에 잠깐 이름만 알고 넘어갔으니 더 깊게 알기 어려웠을 터다. 직장에 들어가 정치에 대해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가끔씩 그의 이미지를 되살리곤 했지만 우리 정치인도 아닌데 열심히 그에 대해 공부할 일은 없어서 더 이상 알지 못했다.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며 그때 좀 열심히 공부했더라면 정치에 대한 독자의 인식도 조금은 바뀌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단순히 비스마르크 전기를 쓴 책이 아니라 제목처럼 "왜 비스마르크를 '지금' 소환하는가"라는 생각 때문에 이 책을 읽게 된 것이다. 그것은 우리나라 정치나 각료 중에 그처럼 정책을 펴거나 확실한 정치 철학을 가진 사람이 없어서일까. 제목이 독자의 마음을 끌었다. 마음이 갔던 이유는 2021년 대한민국에도 비스마르크 같은 재상이나 정치인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서 책을 출간한 출판사의 취지와 맞는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독자는 정치에 문외한이다. 다만 대한민국의 다음 5년을 이끌 내년 대선에 비스마르크처럼 훌륭한 지도자가 탄생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배우기 위해 이 책을 읽는다.

 


 

출판사는 이 책 발간 취지를 책 소개글에 내비치고 있다. 정치 리더의 역할은 무엇인가. 오늘날 한국 사회는 포스트코로나라는 시대적 불확실성에 놓여있다.

또한 올해 선거는 지나갔지만 내년엔 대통령 선거라는 굵직한 선거를 눈앞에 두고 있다. 바야흐로 대전환의 시대다. 이러한 시점에 역사적으로 회자되는 성공한 해외의 정치 리더를 살펴보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지금, 비스마르크』는 19세기 독일 통일을 이룩하고 복지국가의 기틀을 다진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일대기를 다룬다. 이 책에서 저자는 비스마르크라는 인물을 재해석한다. 그는 통념과 달리 전쟁이 아닌 평화를 추구했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상황에 따른 유연한 해법을 제시한 실용주의자였다. 무엇보다 비스마르크는 정통 보수주의자였지만 이데올로기에 천착하지 않았다. 당면한 현실에 발맞춰 그때그때 적절한 해법을 제시한 리더였다는 점에서 현실주의자였다. 당시의 독일과 현재의 한국이 처한 국내외적 상황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이 책은 한국 사회의 정치 리더는 물론 ‘의사결정자’들을 위한 지침서를 제공해줄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에버하르트 콜브다. 그는 독일 역사학자이고 쾰른 대학교 교수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19세기 유럽은 역동적인 변화의 시절이었다. 정치를 비롯한 경제와 기술 발달이 숨가쁜 시기였다. 당시 독일은 두 개의 강대국(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제후국으로 분열돼 있었다. 이러한 변화와 혼란의 시기 한가운데,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귀족 가문의 넷째로 1815년 4월 1일 태어났다. 방황하는 젊은 시기를 거친 비스마르크는, 36세의 나이로 외교관이 되자 마침내 그 정치적 재능을 꽃피운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리 등 유럽의 주요 도시를 거치며 국제정세를 읽는 안목을 길렀다.

프랑크푸르트와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리에서 프로이센의 사절로 보낸 11년은 비스마르크가 외교관으로서 인맥을 넓히고 정치 분야 전반에 걸쳐 많은 경험을 쌓은 수련 시절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때 그는 무엇보다 강대국과 중소 국가의 이해관계를 정확히 읽어내는 안목을 키웠고, 독일과 국제정치 무대에서 중요한 정치가들을 만나며 그들의 성품과 정치적 목표, 야망을 두루 꿰뚫었다. 그래서 비스마르크가 1862년 9월 프로이센 정부의 수반으로 부름을 받았을 때, 그는 독일과 유럽을 가장 잘 아는 정치가였다.

 


 

책에 따르면 비스마르크는 흔히 외교의 거장이라 불린다. 47세의 나이로 프로이센의 수상이 된 시기, 프로이센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강대국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이러한 강대국의 틈바구니속에서 프로이센(당시 독일 국가명)의 외교관으로서 끊임없이 국익을 추구했고 현상의 변화를 끌어냈다.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목표는 ‘하나된 독일’이었다. 그러나 주변의 강대국들은 독일의 통일을 바라지 않았다. 이러한 녹록지 않은 상황 속에서, 그는 ‘통일독일’이라는 전략적 목표를 설정하고 방법의 유연성을 추구하며 혼란에 빠진 국내외 정치 현실을 극복해냈다. 무엇보다 방법의 유연성에 주목할 만하다.

그는 오스트리아까지 포함한 대(大)독일 통일을 추구하지 않았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이는 실현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대신 그는 북부 독일만이라도 하나로 통합하는 최소한의 목표, 즉 소(小)독일 통일을 지향했다. ‘철혈재상’이라는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비스마르크는 전쟁이라는 수단을 최선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무엇보다 대결 노선을 지양했다. 그가 추구한 독일 정책에서 오스트리아와의 무력 대결을 통해 소독일 민족국가를 세우는 일은 어디까지나 차선책에 불과했다. 오히려 비스마르크는 평화로운 방법으로 독일 내 권력을 오스트리아와 나누어 가지고, 상호 균형을 추구하는 것을 최선으로 여겼다.

 


 

여러 제후국으로 분열돼 있던 독일을 하나로 통합한 비스마르크는 이후 평화주의자로서 면모를 보여준다. 그는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전쟁보다는 외교적 방법을 선호했고, 세력 균형을 추구하며 전쟁을 억제하는 ‘평화의 중재자’로서 면모도 보여준다.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 후에도 최소 20년 동안 유럽의 평화를 지켰다. 이러한 유럽의 외교 구도를 ‘비스마르크 체제’라고까지 부른다는 점에서 그가 유럽의 평화에 기여한 바는 적지 않다. 무엇보다 그는 ‘예방전쟁’이라는 수단을 마지막까지 지양하는 원칙을 준수했다.

1871년 이후 평화 수호는 비스마르크 외교정책의 최고 목표였다. 그래서 그는 ‘예방전쟁’, 곧 적의 공격이 예상된다고 해서 가하는 선제공격을 1870년 이전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거부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런 견해를 피력했으며, 특히 1887년 1월 11일의 제국의회 연설에서 힘주어 강조했다.

“나중에 불가피해지지 않을까 해서 치르는 전쟁, 나중에 불리한 상황에서 싸워야 하는 것은 아닐까 염려해서 치르는 전쟁은 나와는 거리가 먼 생각이다. 그런 생각을 언제나 철저히 거부해왔다. (중략) ‘전쟁을 치러야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전쟁을 하자는 충고는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비스마르크가 독일제국에 남긴 유산은 외교 분야에만 그치지 않는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그는 통일된 제국을 안정화하는 데에도 힘썼다. 구체적 계획을 통해 독일제국의 근대화를 추구했으며, 연방 정부 차원의 행정국가를 수립했다. 이 중 오늘날까지도 회자되는 비스마르크의 주요 업적은 무엇보다 독일이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데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저자는 비스마르크가 설계하고 도입한 사회복지 법안이 국내 정치에서 이룩한 가장 중요한 성과였다고 평가한다.

비스마르크는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사회복지 정치를 추진했다. 그는 산업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폐해의 심각성을 간파하고, 노동자의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위치를 정부 대책으로 개선해줄 필요성을 인식했다. 보편적 국익에 부합하는 한에서 노동자 계층에 희망을 주고자 한 것이다.

비스마르크 정부가 1880년대에 국내 정치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았던 것은 입법 과정이다. 특히 사회복지 법안은 오래 걸렸으며, 숱한 난제를 극복해야만 했다. 질병, 사고, 상해, 노년 등에 따른 생활고를 덜어주고자 전국 차원에서 도입하기로 한 첫 번째 사회보장제도는 독일제국을 “전 세계에서 사회보장의 최신 체계를 발전시킨 선구 국가”로 만들어주었다고 게르하르트 리터Gerhard Ritter(1929~2015)는 평가한다.

 


 

다만 비스마르크가 국내 정치에 남긴 유산은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그가 시도한 모든 것이 성과를 낸 것은 아니며, 비판적으로 검토해볼 때 그의 선택이 독일에 남긴 부정적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자신의 정치적 적대자인 사회민주주의자와 가톨릭 세력을 때로는 단호하고 무자비하게 탄압했다고 덧붙인다.

비스마르크의 국내 정치가 남긴 유산을 어떻게 볼 것인지 하는 문제는 더 어렵다. 제국의 수상은 민주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민주주의자라고 주장한 적도 없다. 독일 민주주의는 비스마르크를 그 조상이나 후원자로 섬길 수 없다. 그가 보여준 국내 정치 행보는 문화투쟁, 보호관세 관철, 사회민주주의의 무자비한 탄압 등 거칠기만 한 저주로 점철됐다. 비록 그때마다 의회의 지지를 끌어냈다 할지라도 이런 일을 주도한 결정적 책임은 분명 그의 몫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철혈재상’이라 불린 비스마르크의 인간적인 면모에도 주목한다. 그는 수상으로 재임하면서 잦은 질병과 고독에 시달렸고, 권력에 지나치게 집착해 20년 가까이 몸담은 수상직에서 깔끔하게 물러나지도 못했다. 그는 인생의 말년에 새로운 카이저인 빌헬름 2세와의 관계 설정에 실패했고, 국내 정치의 세력 구도를 판단하는 능력까지 상실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카이저와의 불화로 퇴임한 후에도 언론을 통해 지속해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고, 심지어 의원직에까지 출마해 후배 정치인들을 당황케하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앞서 살펴본 대로 『지금, 비스마르크』는 전환의 시대를 살며 유럽의 체제는 물론 독일 사회 전반의 깊숙한 뿌리까지 영향을 미친 인물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재조명한다.

무엇보다 이 책을 오늘날 소환한 이유는 당시의 유럽 정세가 오늘날 한국의 정세와 유사한 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은 중·러·일이라는 강대국으로 둘러싸인 지정학적 위치는 물론, 분단국가라는 특성 탓에 국제적으로 쉽게 풀기 어려운 고차방정식과 마주하는 일이 잦다. 따라서 한국의 지도자는 시시각각 변하는 냉엄한 국제 질서 속 국가이익을 추구할 탁월한 외교 역량과, 이를 힘있게 추동할 통합된 국가 여론을 끌어낼 리더십이 요구된다.

비스마르크는 두 개의 축(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으로 분열돼 있던 독일을 하나로 통합해 근대국가의 초석을 마련한 국가지도자다. 그 과정에서 주변 정세를 냉철하게 판단하고, 탁월한 외교 리더십을 발휘해 끊임없이 국익을 추구했다. 냉엄한 국제 질서 속 실력을 키우는 나라만이 국익을 얻는다는 비스마르크의 철칙은, 무엇보다 평화를 절실하게 추구해야 할 한국의 정치 리더에게 필수불가결한 지침을 제공해줄 것이다.

 

저자 : 에버하르트 콜브

 

1933년생의 독일 역사학자다. 쾰른 대학교 교수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명예교수이다. 1960년 괴팅겐 대학교에서 독일 국내 정치의 노동자 문제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콜브 교수는 특히 바이마르공화국 전문가로 명성을 쌓았다. 콜브 교수는 1870년에서 1871년까지 벌어졌던 독일과 프랑스의 전쟁과

관련한 기록들을 철저히 분석,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프랑스로 하여금 선전포고를 하도록 도발했다는 역사의 통설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주장을 해 학계에 충격을 안겼다. 콜브 교수는 1998년부터 ‘오토 폰 비스마르 재단’의 상임 이사로 재직하며 비스마르크의 자료를 편집·출간하는 일을 주도해오고 있다. 모두 아홉 권의 저서를 썼으며, 다수의 책을 편집·출간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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