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비스마르크 - 전환의 시대 리더의 발견
에버하르트 콜브 지음, 김희상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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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의 비스마르크에 대한 기억은 학창 때 세계사 교과서 한 구석에 자리잡은 '철혈재상'이란 닉네임으로 인해 공포정치를 한 사람으로 생각했을 때부터다. 닉네임으로 기억해서인지 그의 정치 철학이나 국민에 대한 봉사 이념 같은 건 별로 아는 게 없었다. 세계사 수업 시간에 잠깐 이름만 알고 넘어갔으니 더 깊게 알기 어려웠을 터다. 직장에 들어가 정치에 대해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가끔씩 그의 이미지를 되살리곤 했지만 우리 정치인도 아닌데 열심히 그에 대해 공부할 일은 없어서 더 이상 알지 못했다.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며 그때 좀 열심히 공부했더라면 정치에 대한 독자의 인식도 조금은 바뀌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단순히 비스마르크 전기를 쓴 책이 아니라 제목처럼 "왜 비스마르크를 '지금' 소환하는가"라는 생각 때문에 이 책을 읽게 된 것이다. 그것은 우리나라 정치나 각료 중에 그처럼 정책을 펴거나 확실한 정치 철학을 가진 사람이 없어서일까. 제목이 독자의 마음을 끌었다. 마음이 갔던 이유는 2021년 대한민국에도 비스마르크 같은 재상이나 정치인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서 책을 출간한 출판사의 취지와 맞는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독자는 정치에 문외한이다. 다만 대한민국의 다음 5년을 이끌 내년 대선에 비스마르크처럼 훌륭한 지도자가 탄생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배우기 위해 이 책을 읽는다.

 


 

출판사는 이 책 발간 취지를 책 소개글에 내비치고 있다. 정치 리더의 역할은 무엇인가. 오늘날 한국 사회는 포스트코로나라는 시대적 불확실성에 놓여있다.

또한 올해 선거는 지나갔지만 내년엔 대통령 선거라는 굵직한 선거를 눈앞에 두고 있다. 바야흐로 대전환의 시대다. 이러한 시점에 역사적으로 회자되는 성공한 해외의 정치 리더를 살펴보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지금, 비스마르크』는 19세기 독일 통일을 이룩하고 복지국가의 기틀을 다진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일대기를 다룬다. 이 책에서 저자는 비스마르크라는 인물을 재해석한다. 그는 통념과 달리 전쟁이 아닌 평화를 추구했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상황에 따른 유연한 해법을 제시한 실용주의자였다. 무엇보다 비스마르크는 정통 보수주의자였지만 이데올로기에 천착하지 않았다. 당면한 현실에 발맞춰 그때그때 적절한 해법을 제시한 리더였다는 점에서 현실주의자였다. 당시의 독일과 현재의 한국이 처한 국내외적 상황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이 책은 한국 사회의 정치 리더는 물론 ‘의사결정자’들을 위한 지침서를 제공해줄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에버하르트 콜브다. 그는 독일 역사학자이고 쾰른 대학교 교수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19세기 유럽은 역동적인 변화의 시절이었다. 정치를 비롯한 경제와 기술 발달이 숨가쁜 시기였다. 당시 독일은 두 개의 강대국(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제후국으로 분열돼 있었다. 이러한 변화와 혼란의 시기 한가운데,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귀족 가문의 넷째로 1815년 4월 1일 태어났다. 방황하는 젊은 시기를 거친 비스마르크는, 36세의 나이로 외교관이 되자 마침내 그 정치적 재능을 꽃피운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리 등 유럽의 주요 도시를 거치며 국제정세를 읽는 안목을 길렀다.

프랑크푸르트와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리에서 프로이센의 사절로 보낸 11년은 비스마르크가 외교관으로서 인맥을 넓히고 정치 분야 전반에 걸쳐 많은 경험을 쌓은 수련 시절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때 그는 무엇보다 강대국과 중소 국가의 이해관계를 정확히 읽어내는 안목을 키웠고, 독일과 국제정치 무대에서 중요한 정치가들을 만나며 그들의 성품과 정치적 목표, 야망을 두루 꿰뚫었다. 그래서 비스마르크가 1862년 9월 프로이센 정부의 수반으로 부름을 받았을 때, 그는 독일과 유럽을 가장 잘 아는 정치가였다.

 


 

책에 따르면 비스마르크는 흔히 외교의 거장이라 불린다. 47세의 나이로 프로이센의 수상이 된 시기, 프로이센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강대국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이러한 강대국의 틈바구니속에서 프로이센(당시 독일 국가명)의 외교관으로서 끊임없이 국익을 추구했고 현상의 변화를 끌어냈다.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목표는 ‘하나된 독일’이었다. 그러나 주변의 강대국들은 독일의 통일을 바라지 않았다. 이러한 녹록지 않은 상황 속에서, 그는 ‘통일독일’이라는 전략적 목표를 설정하고 방법의 유연성을 추구하며 혼란에 빠진 국내외 정치 현실을 극복해냈다. 무엇보다 방법의 유연성에 주목할 만하다.

그는 오스트리아까지 포함한 대(大)독일 통일을 추구하지 않았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이는 실현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대신 그는 북부 독일만이라도 하나로 통합하는 최소한의 목표, 즉 소(小)독일 통일을 지향했다. ‘철혈재상’이라는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비스마르크는 전쟁이라는 수단을 최선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무엇보다 대결 노선을 지양했다. 그가 추구한 독일 정책에서 오스트리아와의 무력 대결을 통해 소독일 민족국가를 세우는 일은 어디까지나 차선책에 불과했다. 오히려 비스마르크는 평화로운 방법으로 독일 내 권력을 오스트리아와 나누어 가지고, 상호 균형을 추구하는 것을 최선으로 여겼다.

 


 

여러 제후국으로 분열돼 있던 독일을 하나로 통합한 비스마르크는 이후 평화주의자로서 면모를 보여준다. 그는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전쟁보다는 외교적 방법을 선호했고, 세력 균형을 추구하며 전쟁을 억제하는 ‘평화의 중재자’로서 면모도 보여준다.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 후에도 최소 20년 동안 유럽의 평화를 지켰다. 이러한 유럽의 외교 구도를 ‘비스마르크 체제’라고까지 부른다는 점에서 그가 유럽의 평화에 기여한 바는 적지 않다. 무엇보다 그는 ‘예방전쟁’이라는 수단을 마지막까지 지양하는 원칙을 준수했다.

1871년 이후 평화 수호는 비스마르크 외교정책의 최고 목표였다. 그래서 그는 ‘예방전쟁’, 곧 적의 공격이 예상된다고 해서 가하는 선제공격을 1870년 이전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거부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런 견해를 피력했으며, 특히 1887년 1월 11일의 제국의회 연설에서 힘주어 강조했다.

“나중에 불가피해지지 않을까 해서 치르는 전쟁, 나중에 불리한 상황에서 싸워야 하는 것은 아닐까 염려해서 치르는 전쟁은 나와는 거리가 먼 생각이다. 그런 생각을 언제나 철저히 거부해왔다. (중략) ‘전쟁을 치러야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전쟁을 하자는 충고는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비스마르크가 독일제국에 남긴 유산은 외교 분야에만 그치지 않는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그는 통일된 제국을 안정화하는 데에도 힘썼다. 구체적 계획을 통해 독일제국의 근대화를 추구했으며, 연방 정부 차원의 행정국가를 수립했다. 이 중 오늘날까지도 회자되는 비스마르크의 주요 업적은 무엇보다 독일이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데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저자는 비스마르크가 설계하고 도입한 사회복지 법안이 국내 정치에서 이룩한 가장 중요한 성과였다고 평가한다.

비스마르크는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사회복지 정치를 추진했다. 그는 산업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폐해의 심각성을 간파하고, 노동자의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위치를 정부 대책으로 개선해줄 필요성을 인식했다. 보편적 국익에 부합하는 한에서 노동자 계층에 희망을 주고자 한 것이다.

비스마르크 정부가 1880년대에 국내 정치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았던 것은 입법 과정이다. 특히 사회복지 법안은 오래 걸렸으며, 숱한 난제를 극복해야만 했다. 질병, 사고, 상해, 노년 등에 따른 생활고를 덜어주고자 전국 차원에서 도입하기로 한 첫 번째 사회보장제도는 독일제국을 “전 세계에서 사회보장의 최신 체계를 발전시킨 선구 국가”로 만들어주었다고 게르하르트 리터Gerhard Ritter(1929~2015)는 평가한다.

 


 

다만 비스마르크가 국내 정치에 남긴 유산은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그가 시도한 모든 것이 성과를 낸 것은 아니며, 비판적으로 검토해볼 때 그의 선택이 독일에 남긴 부정적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자신의 정치적 적대자인 사회민주주의자와 가톨릭 세력을 때로는 단호하고 무자비하게 탄압했다고 덧붙인다.

비스마르크의 국내 정치가 남긴 유산을 어떻게 볼 것인지 하는 문제는 더 어렵다. 제국의 수상은 민주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민주주의자라고 주장한 적도 없다. 독일 민주주의는 비스마르크를 그 조상이나 후원자로 섬길 수 없다. 그가 보여준 국내 정치 행보는 문화투쟁, 보호관세 관철, 사회민주주의의 무자비한 탄압 등 거칠기만 한 저주로 점철됐다. 비록 그때마다 의회의 지지를 끌어냈다 할지라도 이런 일을 주도한 결정적 책임은 분명 그의 몫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철혈재상’이라 불린 비스마르크의 인간적인 면모에도 주목한다. 그는 수상으로 재임하면서 잦은 질병과 고독에 시달렸고, 권력에 지나치게 집착해 20년 가까이 몸담은 수상직에서 깔끔하게 물러나지도 못했다. 그는 인생의 말년에 새로운 카이저인 빌헬름 2세와의 관계 설정에 실패했고, 국내 정치의 세력 구도를 판단하는 능력까지 상실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카이저와의 불화로 퇴임한 후에도 언론을 통해 지속해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고, 심지어 의원직에까지 출마해 후배 정치인들을 당황케하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앞서 살펴본 대로 『지금, 비스마르크』는 전환의 시대를 살며 유럽의 체제는 물론 독일 사회 전반의 깊숙한 뿌리까지 영향을 미친 인물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재조명한다.

무엇보다 이 책을 오늘날 소환한 이유는 당시의 유럽 정세가 오늘날 한국의 정세와 유사한 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은 중·러·일이라는 강대국으로 둘러싸인 지정학적 위치는 물론, 분단국가라는 특성 탓에 국제적으로 쉽게 풀기 어려운 고차방정식과 마주하는 일이 잦다. 따라서 한국의 지도자는 시시각각 변하는 냉엄한 국제 질서 속 국가이익을 추구할 탁월한 외교 역량과, 이를 힘있게 추동할 통합된 국가 여론을 끌어낼 리더십이 요구된다.

비스마르크는 두 개의 축(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으로 분열돼 있던 독일을 하나로 통합해 근대국가의 초석을 마련한 국가지도자다. 그 과정에서 주변 정세를 냉철하게 판단하고, 탁월한 외교 리더십을 발휘해 끊임없이 국익을 추구했다. 냉엄한 국제 질서 속 실력을 키우는 나라만이 국익을 얻는다는 비스마르크의 철칙은, 무엇보다 평화를 절실하게 추구해야 할 한국의 정치 리더에게 필수불가결한 지침을 제공해줄 것이다.

 

저자 : 에버하르트 콜브

 

1933년생의 독일 역사학자다. 쾰른 대학교 교수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명예교수이다. 1960년 괴팅겐 대학교에서 독일 국내 정치의 노동자 문제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콜브 교수는 특히 바이마르공화국 전문가로 명성을 쌓았다. 콜브 교수는 1870년에서 1871년까지 벌어졌던 독일과 프랑스의 전쟁과

관련한 기록들을 철저히 분석,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프랑스로 하여금 선전포고를 하도록 도발했다는 역사의 통설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주장을 해 학계에 충격을 안겼다. 콜브 교수는 1998년부터 ‘오토 폰 비스마르 재단’의 상임 이사로 재직하며 비스마르크의 자료를 편집·출간하는 일을 주도해오고 있다. 모두 아홉 권의 저서를 썼으며, 다수의 책을 편집·출간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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