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개의 달 시화집 가을 필사노트 열두 개의 달 시화집
윤동주 외 지음, 카미유 피사로 외 그림 / 저녁달고양이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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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최악의 여름으로 기억될 폭염의 계절은 지났다. 지난 여름이 너무 가혹했기에 가을을 손꼽아 기다렸고, 시간의 흐름은 어김없이 우리를 가을의 문턱으로 안내했다. 그야말로 가을은 '느닷없이' 다가왔다. 기쁨을 맛보기도 전에 때아닌 폭우와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그러나 여름에 비교하며 참을 만했다. 이젠 제법 가을의 맛과 느낌이 완연하다. 가을이 깊어가는 느낌도 잠시 엊그제는 설악산 첫눈 소식이 들렸다. 말 그대로 봄·가을이 없어지나 싶다. 뉴스에서는 올 단풍이 일주일 가량 늦어질 거라고 기상 예보를 전한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금수강산이라고 자랑했던 한반도도 이젠 기후 재앙의 한복판으로 들어갔나 보다. 여름·겨울 두 계절만 남기고 한반도에서는 봄과 가을이 영원히 없어지려나. 알 수 없는 불안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가면서 소름이 돋는다.

아침 저녁 기온으로 봐선 딱 가을이다. 지구 북반구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을운 최고의 계절임은 말할 것도 없다. 풍요로운 수확의 계절이고 날씨도 쾌적하다. 적어도 태양계 행성 중에서는 가장 풍요롭고 복 받은 땅이라는 걸 실감한다. 지난 여름 태풍과 폭우, 폭염을 견뎠던 것은 우리에게 가을이 있었기 때문이다. 폭염만 이겨낸다면 풍요롭고 눈물이 날 것 같은 아름다운 날씨와 자연이 우리를 기다린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았던 조상들처럼 우리도 하늘에 감사하며 일상을 산다. 그러나 기후 변화로 이상 기온이 우리의 일상을 흐트려 놓는다. 순응해야 할 더위가 아니라 극복해야 할 기후다.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불평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 기후 재앙이 자연의 순리가 아니라 인간의 욕심과 편리함을 추구한 댓가라는 사실에 가끔 인간의 욕심에 절망한다. 

이 책 『열두 개의 달 시화집 가을 필사노트』는 2018년 첫 출간 이후 현재까지 수많은 독자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열두 개의 달 시화집 시리즈〉의 하나다. 이번 출판본은 ‘필사노트’ 에디션(양장본)이다. 〈열두 개의 달 시화집 시리즈〉는 일년 열두 달의 아름다움을 시와 그림으로 담아낸 독특한 시화집이다.

이 시리즈의 책들은 모두 계절의 정취와 감성을 섬세하게 표현한 시와, 시의 분위기를 한층 더 돋우는 따뜻하고도 감각적인 명화로 구성되어 있다. 계절의 변화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생의 깊이를 담아낸 이 시화집 시리즈는 첫 출간 후 독자들에게 큰 위로와 감동을 주며, 필독서로 자리매김했다고 출판사 측은 밝힌다. 6년이 지난 올 가을에 양장본으로 다시 출간한 것은 독자들의 호응이 그동안 꾸준히 있어왔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특히 이번 출간된 신간 『열두 개의 달 시화집 가을 필사노트』에는 우리가 그렇게 기다렸던 가을이 와서 더욱 시의적절하다. 독자들의 눈길이 자주 머물 만한 시와 그림이 독자들에게 잘 어필되도록 우리 모두 한마음으로 기다렸던 가을을 담아냈다. 윤동주, 백석, 정지용, 김소월, 라이너 마리아 릴케 등 모두 27명 시인의 가을 시를 모으고, 가을의 감성을 섬세하게 그려낸 3명의 화가 카미유 피사로, 빈센트 반 고흐, 모리스 위트릴로의 명화를 실었다. 가을의 정취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시들을 손으로 직접 따라 쓰며, 시의 깊이를 느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글자 크기와 판형을 키우고 고해상도 그림으로 업그레이드한 것은 물론, 필사에 최적화된 제본 방식으로 제작하여 독자들이 더욱 편하게 감상하고 넉넉한 공간에서 시를 필사하며 그림 감상까지 즐길 수 있도록 퀄리티를 높였다고 출판사 측은 설명한다.

가을이다. 선선한 바람, 높고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은 돌아왔다. 까만 밤하늘에 총총 박힌 별들을 바라보는 일은 대도시에 사는 바람에 어릴 적부터 누리지 못한 은혜로움이지만 가끔 가는 여행길에서 아직도 일부 지역에선 볼 수 있다는 위안이 남아 있다. 대신 일찍 거리에 흩날리는 낙엽들을 보고 가을의 정취를 느끼는 법을 배웠다. 이윽고 찾아온 가을의 정취를 듬뿍 느낄 수 있는 시와 그림을 이 책에 모두 담겨 있다. 이 가을, 우리가 사랑한 시인들의 시를 따라 쓰고, 시와 어우러지는 명화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의 마음이 가을의 깊숙한 곳까지 와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한국인은 시를 읽지 않는다"는 낭설을 이 책은 지우는 역할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시와 그림을 곁들여 냈는데 독자들의 호응이 꾸준했다는 것이다. 이번 가을은 기다림이 유난히 컸던 계절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가을과 함께 이 책은 선물처럼 우리의 삶 속에 들어왔다. 시뿐만 아니라 그림도 우리가 어렸을 적 바라봤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하고, 온 산을 붉게 물들인 단풍과 거리의 노란 낙엽이 흩날리는 만추의 짙은 아름다움도 책 안에 있다. 또 눈이 올듯한 우중충한 날씨의 초겨을까지 가을의 고요한 순간들을 기록하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은 소중한 동반자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 책은 2018년 초판본은 필사노트 겸용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번 양장본을 필사노트로 꾸몄다는 것은 시와 한층 가깝게 해주려는 편집진의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국을 비롯, 세계의 명시 가운데 가을이 주제나 소재가 된 시들을 모았다. 언제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그곳엔 가을이 있다. 어느 페이지든 아스라한 어렸을 때의 가을 정취가 묻어날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인쇄술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 책이 그 증거가 될 것이다. 시를 필사하는 마음이 습관으로 변한다면 독자들은 독자가 시를 짓는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글을 잘 쓰려면? 이 질문은 어쩌면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작가를 꿈꿨던 사람은 자신이 가장 많이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해줄 수 있다. "글쓰기의 왕도는 없다. 다만 삼다가 있을 뿐이다." 이것은 누가 한 말인지 모르지만 오랫동안 해온 질문이고 답변이다. 이 책 『열두 개의 달 시화집 가을 필사노트』 편집진은 시를 쓰고 싶다는 마음과 시를 필사하는 마음이 반복되고 많이 읽는다면 누구에게나 가능성은 있다는 말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삼다(三多)란 독자들이 대부분 알고 있듯이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는' 것이다. 더 이상의 방법도 없고, 다른 방법으로는 글을 잘 쓸 수는 없다는 뜻이다. 작가가 되려는 사람들은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시화집에는 윤동주, 백석, 정지용, 김소월, 라이너 마리아 릴케 등 모두 27명의 세계적 시인들의 시와, 가을의 감성을 섬세하게 그려낸 3명의 화가 카미유 피사로, 빈센트 반 고흐, 모리스 위트릴로의 명화를 실었다. 독자 개인적으로는 고흐 이외의 두 분은 익숙지 않다. 그러나 책을 펼쳐 들면 잘 그린 그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가을에 대한 감성은 우리의 감성과 다를 것이 없다고 판단되는 순간이다. 그림의 배경이 대부분 19세기 유럽이어서 우리로서는 산업화 시대 앞뒤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출판사 측이가을의 정취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시와 시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그림을 선택해 꾸민 것으로 보인다. 이에 더하여 글자 크기와 판형을 키우고 고해상도 그림으로 업그레이드한 것은 물론, 필사에 최적화된 제본 방식으로 제작하여 독자들이 더욱 편하게 감상하고 넉넉한 공간에서 시를 필사하며 그림 감상까지 즐길 수 있도록 퀄리티를 높였다는 게 출판사 측의 주장이다.

이 책의 시들은 삶에 지치고 더위에 영혼마저 잃을 뻔했던 우리 마음을 어루만지고 삶의 격려를 하는 듯 보인다. 따라서 가을이 시작된 이 무렵 책을 펼쳐 읽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하다. 싯귀뿐만 아니라 그림도 가을의 시작부터 늦가울의 쓸쓸한 정취까지 모두 담아내고 있어 한층 더 감상적인 마음으로 이끈다. 이 책은 우리가 사랑한 시인들의 시를 따라 쓰고, 시와 어우러지는 명화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의 마음에 기쁨이 차오르게 해준다. 가을의 고요한 순간들을 기록하고 싶은 이들에게는 소중한 가을의 동반자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가을」을 목차에서 찾아 읽어본다. 


잎들이 떨어집니다. 먼 곳에서 잎들이 떨어집니다.

저 먼 하늘의 정원이 시들어버린 듯

부정하는 몸짓으로 잎들이 떨어집니다.(p.204) <하략(下略)>

오랜만에 백석의 시 「고향」도 찾아 읽는다. 새삼 감회가 남다른 것은 독자로서는 우리 시에 외국 화가의 그림이 붙어 있는 그림은 처음 보기 때문이다.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녯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씰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쓴다.(p.52) <하략>

독자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도 있다. 시를 오랜만에 읽어서인지 시인의 감성이 가슴속 깊숙이 스며들면서 한국전쟁 후 예술인들이 모여 대화를 나눴던 명동의 어느 커피숍을 그리며 버지니아 울프도 생각해본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p.166) <하략>

이 시화집은 모두 3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오늘도 가을바람은 그냥 붑니다-with 카미유 피사로〉, 2장 〈달은 내려와 꿈꾸고 있네-with 빈센트 반 고흐〉, 3장 〈오래간만에 내 마음은-with 모리스 위트릴로〉 등이다. 3명의 화가의 그림들이 각각의 장을 하나씩 이루고 국내외 가을의 시를 그림 사이사이에 배치했다. 그림을 천천히 보았더니 문득 가을이 페이지를 넘길수록 깊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도 있다. 


그림 :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덴마크계 프랑스인의 인상주의 화가다. 가장 훌륭한 근대 풍경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며, 감정은 섬세하고, 초기 농원의 연작 또한 아름다운 매력이 있다. 서인도제도의 세인트토머스 섬 출생. 1855년 화가를 지망하여 파리로 나왔으며, 같은 해 만국박람회의 미술전에서 코로의 작품에 감명받아 그로부터 풍경화에 전념하였고, 수수하고 담담한 전원의 모습을 주로 작품에 담았다. 피사로는 폴 세잔과 폴 고갱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 두 화가는 활동 말기에 피사로가 그들의 ‘스승’이었다고 고백했다. 한편, 피사로는 조르주 쇠라와 폴 시냐크의 점묘법 같은 다른 화가들의 아이디어에서 영감을 얻기도 했다. 1874년에 시작된 인상파그룹전(展)에 참가한 이래 매회 계속하여 출품함으로써 인상파의 최연장자가 되었다. 말년에 피사로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명성을 얻게 되는 것을 목격했고,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은 피사로를 존경했으며, 피사로는 인상주의 화가들 사이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붉은 지붕〉, 〈사과를 줍는 여인들〉, 〈몽마르트르의 거리〉, 〈테아트르 프랑세즈광장〉, 〈브뤼헤이 다리〉, 〈자화상〉 등이 있다.


그림 :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네덜란드 후기 인상주의 화가.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화풍의 스승을 두지 않고 독자적인 회화 세계를 그려냈다.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제작된 그의 작품들은 강렬한 색채, 거친 붓놀림, 뚜렷한 윤곽을 지닌 형태를 통하여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생의 고통을 인상 깊게 전달하고 있다. 네덜란드 뇌넌에서 서른일곱 해의 짧은 생을 살면서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며 고독했던 그는 주로 파리, 아를, 생레미 등지에서 노동자와 농민 등 하층민의 모습과 자연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네덜란드 뇌넌, 헤이그 시절에는 어두운 색채의 비참한 주제가 특징이었으나 1886~1888년 파리에서 인상파, 신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뒤로 꼼꼼한 필촉과 강렬한 색채로 특유의 화풍을 전개했다. 1888년 아를에서 병의 발작에 의해서 자신의 왼쪽 귀를 자르는 사건을 일으켜 정신병원에 입원했으며 이후로도 입퇴원 생활을 거듭하다가 1890년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종교적인 신념,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했던 고흐의 삶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채, 고독과 가난 속에서 온전히 예술을 위해 바쳐졌다.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인정받지 못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후에야 그의 작품들은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 그는 생전에 단 한점의 작품만이 판매되었지만, 현대의 미술계는 최고가를 자랑하는 비운의 화가가 되었다.


그림 : 모리스 위트릴로(Maurice Utrillo) 


프랑스의 화가. 평생을 몽마르트 풍경과 파리의 외곽 지역, 서민촌의 골목길을 그의 외로운 시정에 빗대어 화폭에 담았던 몽마르트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다작을 넘어 남작으로도 유명한데 유화만 3.000점이 넘는다. 인물화도 그리긴 했지만 5점 정도밖에 없고,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모델 출신으로 훗날 여류화가가 된 발라동의 사생아로 태어났지만 9살에 1891년에 스페인인의 화가 · 건축가 · 미술비평가인 미구엘 위트릴로(Miguel Utrillo)가 아들로 받아들여, 이후 모리스 위트릴로라 불리었다. 일찍이 이상할 정도로 음주벽을 보였고, 1900년에는 알코올 중독으로 입원하게 되었다. 그것을 고치기 위해, 어머니와 의사의 권유에 따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나 음주벽은 고쳐지지 않아 입원을 거듭했다. 그는 거의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고 화단에서도 고립되었고, 애수에 잠긴 파리의 거리 등 신변의 풍경화를 수없이 그렸다.

위트릴로의 작품은 크게 4개의 시기로 분류된다. 몽마니 등 파리 교외의 풍경을 그린 몽마니 시대(1903~1905), 인상파적인 작풍을 시도했던 인상파 시대(1906~1908), 위트릴로만의 충실한 조형세계를 구축해나간 백색 시대(1908~1914), 코르시카 여행의 영향으로 점차 색채가 선명해진 다색 시대(1915~) 등이다. 특히 백색시대 작품 중 수작이 많은데, 음주와 난행과 싸우면서 제작한 백색 시대 시절의 작품은, 오래된 파리의 거리묘사에 흰색을 많이 사용하여 미묘한 해조(諧調)를 통하여 우수에 찬 시정(詩情)을 발휘하였다. 그 후 1913년 브로화랑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어 호평을 받았으나, 코르시카 여행(1912) 후 점차 색채가 선명해졌으며 명성이 높아지면서 예전의 서정성이 희박해지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1935년 위트릴로의 작품 찬미자인 벨기에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신앙심 두터운 평화로운 가정을 꾸려, 만년에 유복한 생활을 하며 파리 풍경을 계속 그려나갔다. 대표작으로 [몽마르트르 풍경] [몽마르트르의 생 피에르 성당] 등이 있다.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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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꼭 묻어둔 이야기 - 나의 스승 일엽스님
월송 구술, 조민기 정리 / 민족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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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우리는 많은 지식인의 이름을 알고 있다. 그들은 나라 잃은 한민족의 암흑기에 등불과도 같은 존재였다. 일본 총독부는 1919년 기미독립 만세혁명을 기점으로 이른바 '문화 정치'를 실시한다. 이로부터 많은 일본 유학생들이 배출된다. 선진 유럽의 문물을 일본을 통해 배우는 셈이다. 그러나 나라 잃은 민족으로서 어쩌랴. 1910년 이후 많은 사람들은 만주나 간도로 이주를 가고, 독립 무장 투쟁에 참여한다. 하지만 이에 합류하지 못한 지주 집안이나 조금 넉넉한 집은 자녀를 유학을 보내는 데 뜻을 둔다. 자녀를 교육시켜야 한다는 부모로서의 교육관이 반영된 것이다. 이들 유학생은 대부분 어릴 때여서 자신의 의지보다는 부모의 뜻에 따른 경우가 많다. 물론 가난하지만 일본 유학을 간 지식인도 있다. 대체적인 시대 흐름이 그렇다는 뜻이다.

일본 유학생들 중에는 간혹 여성도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음악가 윤심덕과 미술가 나혜석도 이 무렵의 인물들이다. 윤심덕은 일본 도쿄예술대학 출신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책 『꼭꼭 묻어둔 이야기』의 주인공인 일엽 스님(이하 일엽)과 같은 마을에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나혜석은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작가다. 근대적 여권론을 펼친 운동가이기도 하다. 먼저 일본에 유학한 오빠의 주선으로 일본 도쿄에 있는 사립여자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했다. 일본 유학 시절 여자유학생 학우회 기관지인 〈여자계〉 발행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조혼을 강요하는 아버지에 맞서 여성도 인간임을 주장하는 단편소설 「경희」(1918)를 발표했다. 1918년 귀국하여 1919년 3.1운동에 여성들의 참여를 조직하는 활동을 하다가 5개월 정도 옥고를 치렀고 1921년에는 서울에서 개인전시회를 가졌다.

식민지 여성들의 삶은 남성들의 삶보다 훨씬 힘들고, 사회 활동도 어려웠을 것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여성들은 시위에 참여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 여성들은 남성 못지 않게 일본 유학을 감행한다. 많지 않은 숫자였기에 일제 강점기 때 그들의 활약은 더 두드러져 보였을 수도 있다. 특히 문화 예술계에 투신한 인물들이 많았지만,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면 당시로서는 '신여성'으로서의 역할이 주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일엽도 마찬가지다.

이 무렵은 여성 단체들이 결성되어 사회적,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던 시기다 1930년대의 한국 여성들은 또한 문학과 예술, 문화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었다고 많은 백과사전은 평가하고 있다. 여성 작가들은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글로 풀어내며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내고, 여성의 권리와 지위 향상을 위한 목소리를 높였다는 것. 이 시기에 활동한 여성 작가로는 최서해, 김명순 등이 있으며, 그들의 작품은 당시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고 여성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 여성들은 여전히 많은 제약과 억압 속에서 삶을 살아야 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가족 내에서의 역할은 여전히 전통적인 성 역할에 기반하고 있었고, 사회 전반에서는 여성을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사회적 변화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했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의 한국 여성들은 전통적인 역할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모색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는 것이 역사가들은 기록하고 있다. 교육과 경제 활동, 민족 운동, 문화 창작 등 여러 방면에서 그들의 역할은 점차 확대되었으며, 이는 이후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 향상에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는 게 대다수 사학자들의 평가다.

이 책 『꼭꼭 묻어둔 이야기』의 주인공 김일엽은 누구인가? 독자는 일제 강점기의 여성 인물로서 사실 일엽의 이야기는 이 책에서 처음 들었다. 불교 신자도 아니어서 많은 관심을 두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일엽은 1896년 평안남도 용강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김원주(金元周). 최초 신여성이자 문인, 최초 동아일보 여성 기자, 최초 여성잡지 〈신여자〉 창간, 그리고 자유연애를 주장했다. 이로 인해 당대 '스캔들 메이커' 김일엽은 1920년대 이슈 메이커이자 셀럽으로 주목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짧은 기간 사회 생활 후 1928년 불교계로 전향했다. 이 책에 그의 어머니 이마대에 대해 잠깐 언급된다. 당시 남편 김용경은 5대 독자로서 일찍 결혼했지만 사별했다. 스물두 살의 나이에 이마대와 재혼했다. 열입곱 살에 집안의 강요로 상처한 홀아비와 혼인한 이마대로서는 사랑 없은 결혼이었지만 오히려 금실이 좋았다고 알려져 있다.

일엽의 친모 이마대는 결혼 6년만에 얻은 외동딸 김원주를 ‘열 아들 안 부러운 대장부’로 키우겠다고 다짐했다. 이마대 여사는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도 딸을 학교에 보냈다. 이런 환경에서 성장한 김원주가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차별에 의구심을 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머니의 바람대로 김원주는 남다른 길을 걸었다. 빼어난 감수성과 문학 재능을 갖춘 그녀는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일본 유학길에 올랐고 귀국 후 〈신여성〉 창간, ‘신여성 1세대’라는 ‘걸출한 여걸’로 사회적 이슈를 주도하며 문인으로, 여성해방운동가로 활약했다. 선구자로서 찬사도 있었으나 김원주가 ‘열 남자 안 부러운 대장부’다운 모습을 과시한 분야는 연애였다. 젊은 날, 김원주는 가십과 루머,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명성을 떨치며 감탄과 비난을 몰고 다녔다고 두루 알려졌다. 특히 이혼과 〈신여자〉의 폐간 이후 자유연애주의를 몸소 실천하며 일과 연애 모두를 놓치지 않았다고도 전해진다.

1918년 봄 외할머니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유학, 도쿄의 일본 닛신여학교에 입학하고, 동시에 도쿄 대학 영어준비학원에도 수강하였다. 1918년 여름에 닛신여학교를 수료하고 귀국하였다. 1918년 여름 미국 유학파인 연희전문학교 화학 교사로 있는 40세의 이노익과 정동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미국 네브래스카 웨슬리언 대학 화학과를 졸업한 이노익은 1915년부터 연희전문에서 화학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 이노익은 다리가 하나가 없는 장애인이었다.

미국에서 자연과학을 공부하고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내정된 이노익이라는 40세 된 신사와 22세 때 결혼한 김일엽은 결혼생활 4년 동안 한쪽 다리가 불구인 남편으로 인해 심적 고통을 많이 겪었다. 이노익은 당시 이혼남이었는데,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늙으신 외할머니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그는 이노익과 결혼하여 빨리 가정을 꾸린다. 그러나 훗날 회고록에서도 임노월, 백성욱 등에 대한 언급과 애정은 곳곳에서 표현하는 한편, 이노익에 대한 언급은 거의 하지 않는다.

이 책은 일제 강점기의 신여성으로서의 개인 일엽을 기록하는 책은 아니다. 그가 불교에 귀의해 어떤 수행 생활을 했는지, 불교계에 남긴 흔적이 무엇인지 정확히 기록하고 추모하기 위해서 그의 제자 월송이 구술하고 작가 조민기가 정리햇다. 일엽이 일제 강점기에 걸출한 신여성으로서의 활약이 뛰어났기에, 더욱이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연애관인 자유연애론을 주장하고 실천했기에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 일이 불교 귀의 이후에도 있었다. 당시 제자 월송은 그의 옆에서 그가 대처하는 방식에 다소 불만스러워 했지만 단 한마디의 일엽이 변명도, 해명도 없이 열반에 들었기에 마침내 스승의 억울함을 풀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마지막 수행해야 할 책임을 느꼈다고 한다. 뒤늦게 그의 저작물 등을 참고하고, 사실 확인을 위한 여러 가지 노력 끝에 자신이 경험한 일엽에 대해 비교적 객관적으로 구술할 수 있다고 이 책을 출간하게 된 것이다. 앞서 언급한 일엽의 사생활 부분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목사의 딸이었던 김원주는 만공스님이라는 큰 스승을 만나 가르침을 받으며 익숙한 것 같으나 사실을 알지 못했던, 불교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그런 김원주를 불교로 이끌어준 스승이자 연인이 바로 백성욱 박사다. 백성욱 박사와의 이별 후, 김원주는 재혼과 이혼을 거쳐 마침내 출가하였고, 만공스님이 계신 수덕사로 입산한다. 만공스님은 일엽을 제자로 받아들였고, 인가와 전법게를 내리며 당부했다. “일엽이 백련처럼 성품이 바뀐 후에 세상에 나서라.” 오랜 세월, 글로 세상과 소통했던 일엽스님은 스승의 뜻에 따라 주저 없이 절필하였고 승가 안에서 아무런 지위도, 직책도 맡지 않았다. 일엽스님이 30년 동안 놓지 않았던 것은 오직 하나. 견성암의 ‘입승入繩(절에서 기강을 맡은 소임)’이었다. 

이 책에서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일엽의 입산 시점이다. 1923년 수덕사에서 만공스님의 법문을 듣고 크게 발심한 것이 시작이었고, 1928년 만공스님이 주석하고 계신 금강산 마하연으로 입산하여 삭발했다.(p.82)고 입산 시기를 밝히고 있다. 하지만 1933년 입산안 일엽은 1946년 만공스님이 입적하실 때까지 14년 동안 만공스님의 가르침을 받았고 글로 세상과 소통하는 것을 즉시 멈췄다.(p.110)고 5년의 차이가 난다. 일엽을 기록하는 일이라면 큰 차이가 아닐 수 없다.

책에 따르면 만공스님이 열반하신 지 15주년이 되던 1961년, 스님은 하늘 같고 바람 같은 스승을 마음껏 기리는 글을 썼다. 그로부터 다시 14년 후, 일엽은 손상좌 월송스님과 함께 보따리 속에 넣어두었던 원고들을 꺼내어 백성욱 박사가 환희대로 보내준 새 원고지에 정리하였다. 그것이 세간에서 삶을 뒤돌아본 〈어느 수도인의 회상〉(1960)이었다. 이어 〈청춘을 불사르고〉(1962), 〈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1964)를 발표하였다. 오랜 시간, 세속에서 모습을 감췄던 일엽의 글이 발표되자 세상은 다시 뜨거운 관심이 쏟아졌다. 동시에 잊힌 줄 알았던 온갖 스캔들이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아들을 사칭해 조잡한 책을 파는 이들이 등장했고, 쓰지도 않은 가짜 자서전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월송스님은 일엽을 보필하며 스승의 글이 세상에 반듯하게 나오기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거의 모든 역할을 했다. 스승을 곁에서 보아온 월송스님과 정진스님은 일엽의 이름을 팔며 스님을 모욕하는 이를 직접 목격하자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일엽에게 고한다.

“노스님 큰일 났어요! 웬 남자가 노스님을 빙자하고 이 책을 가지고 다니면서 자기가 스님의 사생아라고 하며 책을 팔고 다닙니다. 이 노릇을 어쩌면 좋아요.”

억울함을 견딜 수 없어 눈물을 흘리는 손상좌들을 본 일엽스님은 말했다.

“호들갑 떨 것 하나 없다.”

스님의 목소리는 담담했고,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그저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정진스님과 월송스님은 눈물 젖은 얼굴로 스님을 보았다. 이렇게 큰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호들갑 떨 것 없다니 무슨 말씀이실까.

“김일엽이라는 이름 석 자가 뭐라고? 그 이름이 대체 뭐길래? 그 이름 가치가 얼마나 된다더냐? 나를 빙자하여 한 사람이 이 힘든 생을 버티고 한 남자가 장사하고 돈을 벌어 그걸로 생활을 할 수 있으면 내가 한 사람을 구제한 것이 아니냐?”(p.159~160)

하지만 월송스님과 정진스님으로부터 사건을 전해 들은 일엽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담담할 뿐이었다고 월송은 회고한다. 일엽은 자신의 이름이 한 중생의 삶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깟 소문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시시비비를 다투지도 않았고, 진실과 거짓에 대해 해명하지도 않으셨다는 것. 일엽이 열반하고 나자 온갖 소문들이 마치 불이 붙은 것처럼 돌아다녔다. 소문의 대부분은 생전에 버젓이 서점을 차지한 채 불티나게 팔리던 가짜 자서전 류의 이야기들이었다. 스승이 입적한 후 묵묵히 진실을 지키고 있었던 월송스님과 환희대 문중은 소문이 아니라 꼭꼭 묻어두었던 스승의 진짜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이야기에 대한 해명이 아닌 ‘이렇게 묻혀서는 안 되는 이야기’를 통해 수행자 일엽을 최초로 재조명하는 것이다.

월송스님은 일엽의 문중 제자 중 최초의 대학생이자 동국대학교에 승복을 입고 다닌 최초의 스님이다. 월송스님은 동국대학교 장학생 입학을 권유하는 백성욱 박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중이 불교대학에 다니면서 승복을 입지 못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승복을 입고 대학에 다닐 수 있다면 스승님께 여쭤보겠습니다.”

월송스님의 이야기를 들은 일엽스님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다면(승복을 입고 대학에 다니는 것이라면) 의의가 있다. 가라, 대학에.”

일엽의 허락으로 최초의 승복 입은 대학생이 되었던 월송스님은 스승이 떠난 지 27년 후, 수행자 ‘일엽선사’의 면모를 담은 〈일엽선문〉을 펴냈다. 비구니 선사 일엽을 위해 월송스님은 스승에 대한 추억을 마음 깊이 꼭꼭 묻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27년 후, 스승과의 보석 같은 시간을 떠올리며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드디어 세상에 꺼내놓았다. 이 책 『꼭꼭 묻어둔 이야기 - 나의 스승 일엽스님』은 소문과 가십의 주인공이며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 당시 세간의 시선, 편견, 모멸을 어떻게 견뎌내었는지, 어떻게 극복해서 주변을 감화시킬 수 있는지 그 생생한 목격담이다. 김일엽의 변화를 이끈 것은 스승과 불교 그리고 제자들이었다. 일엽의 이름에는 승화된 백련도엽의 향기가 서린다.

백성욱 박사와의 만남을 통해 일엽 김원주는 생애 처음으로 완전한 사랑을 느낀다. 너와 나의 경계가 사라져 버린, 조건도, 삶과 죽음조차 초연해지는 숭고한 사랑이었다. 이제야 진정한 사랑을, 운명의 반쪽을 만났다고 생각하며 행복을 감추지 못했다. 백성욱 박사와 함께 부부가 되어 함께 깨달음을 성취하는 불자가 되겠다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장의 편지만 남기고 사라진 백성욱 박사로 인하여 모든 꿈은 부서지고 말았다. (중략) 남녀가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사랑이야말로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또 감화시킬 수 있는 최상의 포교 방법이라는 것을 이 시절의 일엽 김원주는 알았을까. 하지만 훗날 입산하고 30년이 지난 어느 날, 스님은 사랑으로 장엄한 글을 방편으로 삼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 세상에 가장 솔직하고 간절하게 전했다.(p.52~54) -「여자 김원주에서 인간 김일엽으로」 중에서


저자 : 월송


김일엽 기념 도량으로 환희대를 중창, 원통보전, 보광당, 난야 등을 건립하였으며 김일엽 문화재단을 창립하여 초대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속명은 이송량. 순천시장을 지냈던 이옥로와 아내 진순임의 5남 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1957년, 순천여고 졸업 후 일엽 노스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입산하였고, 경희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1960년, 백성욱 박사의 추천으로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최초의 승복 입은 대학생이 되었다. 견성암 불사 당시 6년 동안 화주를 맡아 포교 법극 〈이차돈의 사(死)〉를 성공시켰다. 같은 시기 일엽 스님의 저서 〈어느 수도인의 회상〉, 〈청춘을 불사르고〉, 〈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가 연달아 출간되었다. 견성암 불사 후 교토 불교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일엽스님 입적 3주기를 맞아 유고집 〈미래세가 다하고 남도록〉을 입적 30주기를 기념하여 〈일엽선문〉을 출간하였다.


정리 : 조민기


한양대학교에서 문화인류학을 전공하였다. 영화사를 거쳐 광고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근무하던 중 회사 홍보기사로 작성한 ‘광고쟁이의 상상력으로 고전 읽기’ 시리즈가 호응을 얻으며 칼럼니스트로 활동을 시작했고, 〈세계일보〉에 칼럼 ‘꽃미남 중독’을 인기리에 연재하였다.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절대자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을 기울이던 중 권력이 잉태되어 탄생하는 과정의 놀라운 기록들을 발견하였다. 절대자와 권력자의 자취를 따라가 실록의 행간에서 찾아낸 흥미진진한 성공과 실패의 기록에 매료되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조선 임금 잔혹사』와 『조선의 2인자들(2016)』을 발간하였다. 그 외 저서로는 『외조 : 성공한 여성을 만든 남자의 비결』과 영화소설 『봄』이 있으며, 다양한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역사가 가진 무궁무진한 가치와 의미를 재미있게 전달하기 위해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인문역사 강연을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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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명의 목숨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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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아홉 명의 목숨』은 공포소설이란 표현이 알맞다. 전작 『죽여 마땅한 사람들』로 현대 스릴러 작가를 대표하는 피터 스완슨의 최신간이다. 그의 소설의 특장점은 '속도감 넘치는 전개와 예측을 뒤집는 반전'이다. 추리 소설의 기본적 요소다. 전작 『죽여 마땅한~』으로 독자들의 인기를 끌었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이번 출간한 『아홉 명의 목숨』은 전작의 흥미 요소에 더해 한층 치밀해진 구성과 다채로운 캐릭터들로 무장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영국 서점가에서 “추리소설의 발상을 새로운 차원으로 또 한번 끌어올렸다”는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독자들에게 스릴러가 줄 수 있는 강렬한 몰입과 희열을 선사하는 것은 기본이다.

저자 피터 스완슨은 이 작품 출간 후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다. '추리소설의 여왕'으로 불리운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 『그리고 아무도~』는 ‘서로 모르는 낯선 사람들이 사건에 얽히면서 차례로 살해당한다’는 고전적 구성으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크리스티의 전 작품 중에서 스릴과 서스펜스가 가장 뛰어나다고 인정받는 걸작 『그리고 아무도~』는 영국에서 『열 개의 인디언 인형』(The Ten Little Indians)이란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추리 소설 애독자라면 거의 읽어봤을 작품이다. 인디언 섬이라는 무인도에 여덟 명의 남녀가 정체 불명의 사람에게 초대받는다. 여덟 명의 손님이 섬에 와 보니 초대한 사람은 없고, 하인 부부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뒤이어 섬에 모인 열 사람이 차례로 죽어간다. 한 사람이 죽자, 식탁 위에 있던 열 개의 인디언 인형 중에서 한 개가 없어진다. 인디언 동요의 가사에 맞춰 무인도에 갇힌 열 사람은 모두 죽고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한다. 인디언 섬에는 이들 열 명 외엔 아무도 없다. 섬에 갇힌 사람이 모두 살해되었으니 범인은 도대체 누구일까?에 교묘한 트릭과 반전을 더해 추리의 완성도를 한껏 끌어올렸다. 기가 막힌 구성과 반전으로 세계적 찬사를 받은 작품이다.

피터 스완슨이 크리스티의 구성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듯이 이 작품 『아홉 명의 목숨』에서도 비슷한 전개를 보인다. 스완슨은 크리스티의 플롯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여기에 교묘한 트릭과 반전을 더해 추리 소설로서의 완성도를 한껏 끌어올렸다.

소설의 발단은 백지에 '아홉 명의 명단'이 적힌 쪽지가 봉투 안에 밀봉돼 이 명단에 들어 있는 '앨리슨 혼'에 우편으로 전달된다. 밀회 상대자인 조너선 그랜트는 도어맨에게 건네받은 우편물과 자신이 선물할 스카프 등과 함께 문을 열어주는 혼을 다짜고자 끌어당긴 후 침대로 들어간다. 조너선은 70대 초반의 남자다. 밀회 상대인 혼을 만나기 위해 미리 발기부전 약을 먹고 온다. 매주 수요일이 밀회 날이기 때문이다. 조너선은 아내가 매주 수요일 여자들끼리 만남을 가졌기에 주 1회 앨리슨에게 와 밀회를 즐긴다. 70대임을 감안하면 사전 준비는 필수다. 앨리슨은 이제 막 그랜트와의 밀회를 끝내고 샤워를 마친 후 와인 한 잔을 마시면서 우편물을 뜯어본다. 발송지가 적히지 않은 봉투 속 종이 한 장, 거기에서 의문스러운 아홉 명의 명단이 발견된다. 그런데 봉투를 뜯어보던 앨리슨은 미간을 찌푸린다. 자신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발견하고 앨리슨은 혹시 이 명단이 잠들어 있는 조너선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 애쓴다.

그러나 아무 설명 없이 이름만 적힌 명단을 받았으니 뭔가 막연하게 위협적인 기분이 들지만 잠든 조너선이 일어날 때까지 외출복으로 갈아 입는다. 잠을 깬 조너선이 침실에서 나오자 앨리슨이 종이를 내밀며 묻는다. 

"이 명단에 대해서 아는 거 있어요?" 

조너선은 고개를 저었다. "이게 뭔데?"

"아까 당신이 건네준 우편물에 들어 있었어요?"

"이게 다야?"

"네, 이상하죠?"

"이상하네." 

조너선은 명단을 다시 앨리슨에게 건넸다.(p.15) 조너선이 함께 저녁 먹으러 나갈 것을 제안하지만 조너선은 헤지펀드 매니저들과의 약속이 있다며 미안한 듯 거절한다. 그들의 관계가 막 시작됐을 때는 조너선이 이런 식으로 가버리면 앨리슨은 난리를 쳤지만, 이젠 그런 식의 애정 확인이 필요치 않음을 깨달았다. 이 관계에서 조너선이 원하는 건 섹스와 말동무였고, 그녀가 원하는 건 돈이었다.

아홉 명의 명단 중 앨리슨은 여섯 번째 이름이다. 두 번째 인물은 아서 크루즈란 간호사이다. 아서에게 명단이 전달된 것은 앨리슨이 명단을 뜯어본 다음날인 목요일이다. 자신이 일하던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마치고 집에 막 돌아온 터였다. 아침 아서에게 배달된 우편물 중에서 가장 그의 관심을 끌었다. 아서는 별다른 기대 없이 봉투를 뜯었다가 자신의 이름이 포함된 짧은 명단을 보고 깜짝 놀란다. 명단에 적힌 이름은 다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아서는 1년 전, 교통사고로 남편 리처드와 코커스패니얼 반려견 미스티가 죽고 아서의 왼쪽 다리가 기능을 대부분 상실한 후로 중세 시대의 삶과 그 끝없는 고통, 신에 대한 탐구만이 마음을 달래주는 유일한 약이 되었다. 아서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네 목사인 조앤은 그가 어느 정도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고, 일상으로 복귀하고, 행복을 느끼려면 적어도 2년은 걸릴 거라고 했다. 그러나 아서는 의문이었다. 길게만 느껴진 지난 1년이 영원히 반복될 듯했기 때문이다. 그가 택한 것은 중세시대 관련된 책을 읽는 것이다. 중세시대 책들은 아서에게 꽤 위안을 주긴 했다.

같은 날 이선 다트는 아파트 문틈으로 우편물이 툭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최근 유례없이 왕성하게 작곡을 한 터라 에이전트에게서 온 답장이기를 바라며 얼른 뜯어보았다. 봉투(뉴욕시라는 소인이 찍혀 있다)를 보니 안에는 달랑 종이 한 장만 들어 있다. 그를 포함에 모두 아홉 명의 명단이다. 아서는 노트북을 켜서 명단 맨 위에 있는 이름인 매슈 보몬트를 입력한 뒤 검색 결과를 좁히려고 '작곡가'를 함께 입력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아서는 다음 이름들로 검색하다가 중간에 흥미를 잃었다. 기대했던 작곡가나 뮤지션의 명단이 아닌 건 확실했다. 

이 명단에서 영감을 얻어 아서는 '라스트 온 유어 리스트' 같은 후렴구가 들어가는 노래가 떠올랐다. 연필을 집어들고 명단이 적힌 종이를 뒤집은 뒤 컨트리송 가사를 적기 시작했다. 명단(list)은 운율을 맞추기 좋으면서도 은근히 까다로운 단어였다. 고를 수 있는 단어가 많지만 전부 다 식상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립다(missed), 키스하다(kissed), 우기다(insist),처럼. 그래도 가사를 세 줄이나 썼고 심지어 머릿속에서 멜로디까지 들렸다. 이선은 잔에 커피를 더 따르고 기타를 가져왔다. 뮤지션이 되기를 꿈꾸는 가난한 아서는 어떻게 명단에 올랐을까.

이 소설 작품은 이처럼 명단에 있는 아홉 명이 간단하게 등장인물 소개로 전개된다. 명단 인물들은 명단 순으로 이뤄지지 않으며, 죽음 역시 명단 순과 다르다. 이는 독자들에게 어떤 일관성에서 오는 단조로움으로 몰입을 떨어뜨릴 이유가 될 수 있다는 저자 스완슨의 장치인 것 같다. 아홉 명의 숫자 만큼 장(章)도 아홉 개로 구분되어 있다. 마지막에 '영(0)'이란 장이 덧붙여지는데 이미 앞의 아홉 개 장을 통해 명단은 완전히 지워졌다. 마지막 '영(0)'은 뒤쫒던 형사가 사경을 헤매다 깨어나고, 다시 '하나'란 장으로 이어진다.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는 캐럴라인 게디스의 경우 그녀에게도 9월 15일 목요일에 명단이 우편물을 통해 전달된다. 목요일은 캐럴라인의 근무날이다.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로 12년째 근무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찾아오는 학생이 별로 없다. 이날 목요일엔 학생이 한 명밖에 없었다. 일레인 청이라는 여학생이 미리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왔다. 반면 사전에 약속한 두 명은 오지 않았다. 일레인은 쪽지 시험을 망쳤기 때문에 어떻게든 캐럴라인에게 점수를 받아내기 위해 약속도 없이 찾아와 하소연한다. 그러나 하소연으로 점수를 불쑥 내줄 수는 없는 일이라 새로운 시험을 제시한다. 

이렇게 일레인에게 노트에서 찢은 종이 한 장이 내밀며 새로운 문제 세 개를 적었다. 오늘 아침 수업에서 다룬 시는 아니지만 예전에 숙제로 내준 있었던 시다. "새로운 쪽지 시험이야." 일레인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는데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살짝 자국까지 남았다. 일레인의 묘한 항의성 투덜거림이 이어진다. "연도까지 외워야 하는지 몰랐어요. 불공평하다고 생각해요" 캐럴라인이 잘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소리다. "다음주 수업에서 보자." 캐럴라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일레인은 벌써 휴대전화를 꺼내든 채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 누군가에게 영문과 교수(캐럴라인)가 너무 못됐다는 문자를 보내나보다라고 캐럴라인은 생각한다. 근무시간이 끝나자 캐럴라인은 캠퍼스를 가로질러 주차해둔 프리우스를 타고 앤아버의 워터힐에 있는 방 두 개까지 작은 집으로 향했다. 고양이 두 마리가 반갑게 맞이하고 캐럴라인은 으레 하던 일처럼 우편물을 뒤적거리다가 흰 봉투 하나를 끄집어낸다. 봉투에 붙은 라벨에 쿠리어 글꼴로 그녀의 집 주소가 인쇄되어 있었다. 오른쪽 모서리에는 성조기가 그려진 영원 우표가 붙어 있었다. 발신인 주소는 없다. 역시 봉투 안의 종이 한 장. 거기에는 명단이 적혔다. 자신의 이름을 빼고는 다 모르는 이름이다. "문득 캐럴라인은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이건 살해될 사람 명단이야. 누군가가 우리를 죽음의 표적으로 삼은 거야 저절로 떠오른 생각이었다."(p.34)

명단 중 마지막에 소개된 이는 프랭크 홉킨스다. 9얼 초 날씨는 아직 여름이고, 평소에는 차가운 대서양이 가장 따뜻하며, 관광객-적어도 시끄러운 애새끼들을 데리고 온 관광객-은 영원히 사라졌다. 해가 뜬 지 삼십 분쯤 지나 프랭크 홉킨스가 아침 산책에 나섰을 때 윈드워드 리조트에서 돌을 쌓아 만든 방파제까지 쭉 이어지는 모래사장에는 사실상 아무도 없었다(조수 웅덩이 옆에 웅크린 사람이 한 명 있기는 했다). 하늘은 피시 차우더처럼 허여멀건 색이었고 모래사장 위로 안개가 피어올랐다. 프랭크는 반바지에 캐주얼한 구두를 신었지만 위에는 폴로셔츠에 낡은 면 스웨터를 껴입었다. 그의 착각이 아니라면 요즘은 아침에 약간 추웠다. 프랭크는 리조트 바텐터로 십년째 일하는 셸리란 여성을 좋아한다. 그러나 셸리는 유부녀인데다 최근 남편이 플로리다로 이사하고 싶어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왔다가 떠나는 것은 일상이다. 누구든 그렇다. 아내도 그렇다. 또 세월도 그렇다. 그래도 프랭크는 셸리가 떠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매일 셸리와 함께 보내는 저녁 시간이-비록 바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있기는 해도-하루 중에서 제일 행복했다. 이날 셸리는 산책 겸 바닷가를 걷다가 바위 위에 흰 봉투가 놓여 있었다. 봉투에 붙은 라벨을 읽었다. 그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었다. 이상하게 비현실적인 느낌이 그를 덮쳤다. 왜 그의 앞으로 온 편지가 방파제에 있을까? 다른 사람들이 그랬듯 똑 같은 절차를 통해 프랭크는 명단에서 자기 이름을 발견하지만 나머지 여덟 명의 이름은 전혀 짐작조차 되지 않는 이름들이었다. 바위에 봉투를 놓아둔 사람이 근처에 있는지 확인하려고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누군가가 그의 양 발목을 꽉 움켜잡더니 거칠게 끌어당겼다. "그가 반환점으로 삼는 바위에 머리 한쪽을 부딪힌 바라에 눈물이 핑 돌았고, 관자놀이에서 날카롭고 축축한 통증이 느껴졌다."(p.50)

첫 번째 희생자가 나왔다. 샘 해밀턴 형사는 시신에서 2.5미터쯤 떨어져서 범죄 현장을 머릿속에 새기고 모든 걸 다 살피려 노력했다. 이처럼 아홉 명의 사람들 앞으로 의문의 명단이 배달됐다. 당사자들은 자신의 이름만 빼고 다 모르는 사람의 이름이다. 자신과는 아무런 연관 없는 명단에 다소 안심을 한다. 그러나 그중 한 명이 바닷가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프랭크 홉킨스. 그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리조트 주인이기도 하다. 뒤이어 또다른 이가 총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명단이 곧 살해 대상 목록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에 FBI가 서둘러 수사에 나서지만 수많은 동명이인 가운데 명단을 받은 사람을 찾아내는 동시에 범인을 뒤쫓는 일은 쉽지 않다.

FBI 요원이자 아홉 명의 명단에 이름이 오른 제시카는 공통점을 찾으려 노력한다. 사는 지역도, 나이도, 성별도 모두 다르지만 분명 연결고리가 있을 거라 확신한 제시카는 자신들의 부모부터 조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경찰의 추적 아래서도 살인은 계속되고, 범인의 손길은 점점 제시카에게도 뻗쳐온다. 과연 연쇄살인의 범인은 누구일까? 그는 무엇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는 것일까? 그리고 왜 하필 이들 아홉 명일까?

“아홉 명이 무작위로 뽑힌 게 아니라 그들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다고 확신해요. 또 범인이 누군지 몰라도 우리가 전부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도요.”(p.164)


저자 : 피터 스완슨(Peter Swanson)


국내에 출간되어 10만 독자들에게 사랑받은 《죽여 마땅한 사람들》로 “메스처럼 예리한 문체로 냉정한 악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가(<퍼블리셔스 위클리>)”, “무시무시한 미치광이에게 푹 빠져들게 하는 법을 아는 작가(<가디언>)”라는 찬사를 받았고, 뉴잉글랜드소사이어티북어워드The New England Society Book Award, 영국범죄작가협회에서 매년 최고의 스릴러 부문에 수상하는 CWA 이안플레밍스틸대거Ian Fleming Steel Dagger 등을 수상한 바 있다.

그는 데뷔작 《아낌없이 뺏는 사랑》부터 “대담하고 극적인 반전을 갖춘 채 가차 없이 펼쳐지는 이야기(<보스턴 글로브>)”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후 《312호에서는 303호 여자가 보인다》로 NPR 올해의 책을 수상했으며, 《그녀는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로 “정점에 오른 스타일리시한 스릴러(<가디언>)”라는 평가를 받으며 ‘결코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살인 재능》은 저자의 데뷔 10주년을 맞아 출간한 작품으로 피터 스완슨 특유의 속도감 넘치는 전개와 스릴이 극에 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역자 : 노진선


숙명여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으며, 뉴욕대학교에서 소설 창작 과정을 공부했다. 잡지사 기자 생활을 거쳐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언어의 경계를 허무는 유려한 번역으로 독자들의 신뢰를 받고 있다. 조디 피코의 『작지만 위대한 일들』, 존 그린의 『거북이는 언제나 거기에 있어』, 피터 스완슨의 『죽여 마땅한 사람들』, 요 네스뵈의 『스노우맨』, 『레오파드』, 『네메시스』, 『아들』,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결혼해도 괜찮아』, 캐서린 아이작의 『유 미 에브리싱』 외 『토스카나 달콤한 내 인생』, 『아빠가 결혼했다』,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 『만 가지 슬픔』, 『새장 안에서도 새들은 노래한다』, 『금요일 밤의 뜨개질 클럽』, 『자기 보살핌』, 『동거의 기술』, 『창조적 습관』, 『고든 램지의 불놀이』, 『달빛 아래의 만찬』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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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주인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배지은 옮김 / 현대문학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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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인형의 주인』의 저자 조이스 캐롤 오츠는 현대 미국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고딕 소설의 대가로 손꼽힌다. 오츠는 1964년 데뷔한 이후 50편이 넘는 장편과 1,000여 편에 달하는 단편소설을 쉼 없이 써내며 〈전미도서상〉, 〈오헨리상〉, 〈페미나상〉, 〈브램스토커상〉 등 주요 문학상을 석권했다고 한다. 얼핏 셈해도 100권이 훌쩍 넘는 책을 썼다는 이야기다. 이 책도 단편소설집이다. 특히 인간 내면에 깃든 어둠과 광기, 근원적 불안과 공포를 깊이 탐구하고, 이를 섬뜩하면서도 환상적인 이야기로 형상화하여 ‘공포소설의 완성자’인 에드거 앨런 포에 비견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책에는 표제작 「인형의 주인」을 포함, 6편이 실려 있다. 원제가 'The Doll-Master and Other Tales of Terror'인 것으로 공포소설인 듯하다. 

이 책에는 사이코패스 소년의 내면을 1인칭으로 서늘하게 묘사한 「인형의 주인」을 비롯하여, 미국 백인-기독교인 사회의 뿌리 깊은 우월주의를 다룬 「군인」, 유년시절 성폭력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여성의 기억을 다룬 「총기 사고」, 가장 사랑했던 이에게서 자신을 향한 살의를 느끼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여성을 그린 「적도」, 국제스릴러작가상 최우수 단편상 수상작인 「빅마마」, 그리고 아름답지만 수상한 고서점을 무대로 펼쳐지는 「미스터리 주식회사」 등 섬뜩하면서도 환상적인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공포 소설'이 '환상적인 이야기'라는 소설의 장르 수식어로는 부적절한 조합이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읽다보면 금세 왜 '환상적인 공포소설'이라고 소개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의 이야기들이 자아내는 공포는 호러와는 결이 다르다. 특별히 자극적인 장면이나 설명하기 어려운 초자연적 존재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들이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극한의) 두려움을 끄집어 낸다. 평소 웬만해선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이 책의 역자 배지은도 〈옮긴이의 말〉을 통해 정말 두려움을 느꼈다고 털어놓는다. "어찌 보면 영미권 독자들의 지적대로 참신한 반전도 없고 결말도 예측이 가능한 이야기들이지만, 특별한 반전 없이 예상된 결말로 마무리되더라도 찜찜한 느낌은 그대로다. 결국 예상할 수 있는 스토리 안에서 최고 수준의 서스펜스를 끌어내는 것은 작가의 내공이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심연에 닿는 공포라는 측면에서 이 소설들은 탁월한 '공포 소설'로 꼽힐 만하다."(p.417)

이 책의 단편 소설들은 서로 독립적인 이야기를 갖고 있지만 작품 전체를 놓고 본다면 하나의 주제가 떠오른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를 은유하는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이다. 특히 미국 사회는 거의 모든 것이 '돈'과 연결돼 있다. 혈연이나 지연 등보다는 세상의 가치 척도로 내세운 '돈'을 갖기 위해 사회는 거대한 경기장이라는 것이다. 아마 이민자로 이루어진 특성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하지만, 관련 전문 학자가 아닌 이상 단정할 수는 없다. 특히 사회를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승자독식'의 냉정한 승부 사회로 생각하는 것 같다. 동물의 야생에서 보여지는 모습이며, 선거, 스포츠, 전쟁 등의 게임 방식이다. 이런 사회에서 패자가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기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우다 진 후에 승자에게 뭘 기대하겠는가. 죽거나 살아남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승자의 노예로 사는 것이다. 이 단편 소설들은 그만큼 처절한 경쟁 사회를 꼬집는 데 주저함이 없다. “인생에는 포식자가 있고 먹잇감이 있다. 포식자는 미끼를 던지고, 먹잇감은 이 미끼를 자양분으로 착각한다.”(p.367) 

이 책에 실린 각 작품은 ‘포식자’와 ‘희생자’의 대립 구도를 통해 인간 내면에 숨겨진 잔혹성을 드러내 보이고, 강자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약자들의 무력감과 절망감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이 작품집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약자이거나 한때 약자였던 이들이다. 가족과 사회에 융화되지 못하고 점차 자기 안의 어둠에 잠식되어가는 소년, 부모의 무관심과 방치 속에서 외로워하고, 어른들의 인정과 관심을 갈구하다가 끝내 비극적 결말로 치닫고 마는 소녀들, 집단적 광기에 휘둘려 의도치 않게 영웅이 된 남자······. 인종차별과 성차별, 계층 갈등, 종교적 맹신, 소통의 단절을 조장하고 방치하는 부조리한 사회는 인간 내면의 불안과 분노, 광기를 자극한다. 오늘날 미국 사회의 부조리를 보여주는 느낌을 받게 한다. 이런 부조리한 사회는 계속해서 새로운 ‘포식자’를 만들어내는 악순환을 낳는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누구나 인생의 어느 시점에는 ‘포식자’ 앞에 내던져진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작중 인물들이 경험하는 공포는 초자연적 존재나 재해가 불러일으키는 공포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으스스하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장면이나 충격적인 반전 하나 없이도 우리 안에 내재된 불안을 파고들어 최고의 서스펜스를 자아내는 조이스 캐럴 오츠는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이름이 오르내린다고 한다. 올해도 이름이 올랐지만,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올 노벨문학상은 대한민국의 작가 한강에게 갔다. 노벨문학상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 준다는 원칙이 있다. 이 작품 『인형의 주인』의 저자 오츠는 내년에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를 것이다. 내년에는 꼭 노벨상을 받았으면 독자로서 바란다. 그의 작품이 호러 공포 소설에 대한 독자의 인식을 많이 바꿔주었다. 저자에게 감사하기에 그의 수상을 바라는 것이다. 1938년 출생이니까 올해 84세라는 셈이 나온다. 아직은 건강하고 더 많은 작품을 쓸 수 있기를 기대할 만하다. 좋은 작품을 써준 데 대해 독자로서 응원한다. 이제 문단 데뷔 60년이 흐른 지금 이 거장의 내공은 소설집 『인형의 주인』에서 끝날 것 같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번역자 배지은도 탁월한 ‘공포 소설’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인간은 자연에서 산 기간이 훨씬 길지만, 이른바 암기와 추산, 연산과 추리, 응용 능력 등 이른바 지능을 갖췄기에 다른 어떤 동물보다 먼저 문명을 이룰 수 있었다. 불과 1만~2만 년 전의 일이다. 현생 인류 호모 사피엔스가 처음 등장한 시기가 15만~25만 년 전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4만~5만 년 전부터 지구상에 널리 분포되어 후기 구석기시대 문화를 발달시켰다고 인류학자와 인류사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문명을 이루며 자연을 떠나 살았다. 인류가 문명을 이룬 것은 단순히 집단 생활을 했거나 간단한 의사 소통을 했다는 사실로는 보기 어려울 것이다. 이로 인해 문자 발명 이후로부터 인류 문명의 시작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에 따른다면 대략 7,000~8,000년 전쯤으로 봐야 할 것이다. 야생에서 생활할 때에 비해 사실 비교할 수 없이 짧은 기간이다. 때문에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도 인간의 본성 안에 깊이 새겨진 잔인함은 은밀히 감춰져 있을 뿐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 책에서 숨겨진 인간의 적나라한 본성을 목격한다면 독자들은 「적도」에서 생태계의 잔인함에 반감을 느끼는 오드리처럼 불편한 마음이 들게 된다. 내 옆에 있던 사람, 내가 사랑하고 믿었던 사람이 나의 적이자 포식자로 돌변할 때 인간이 얼마나 나약해지는지, 기댈 곳 없는 허허벌판에 먹잇감으로 던져진 인간이 어디까지 비참해질 수 있는지를 목격하면서 섬뜩함을 느끼게 된다.

“얘들은 길이 든 게 아니에요. 인간을 포식자로 인식하는 유전적 기억이 없을 뿐이에요.”(p.224) 남편과 함께 떠난 로맨틱한 적도 여행. 크루즈를 타고 갈라파고스섬의 생물들을 관찰하던 오드리는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생태계의 냉혹함에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자신과는 달리 너무나 태연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는 남편 헨리, 강인하고 자신감 넘치는 그에게서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낀다.

"잠깐 사이에 창백한 초승달이 사라졌다. 두꺼운 구름이 달을 완전히 가려버린 모양이었다. 배의 이편에서 보는 바다는 칠흑같이 어두웠고, 하늘도 어둡고, 파도 소리는 요란했지만 보이지 않았고, 파도가 배를 이리저리 떠미는 힘이 느껴졌다. 아내는 반항했다. 갑판을 따라 걷고 싶지 않다고, 아무것도 보이지도 않고 위험하기만 하다고, 여기엔 아무도 없지 않느냐고······. 남편은 경멸조로 웃으며 말했다. “도대체 뭐가 무서운 건데? 파도에 휩쓸려 배 밖으로 빠질 일도 없잖아.” 그녀는 생각했다. 아뇨, 당신이 날 배 밖으로 밀어버릴 수 있죠.

아무도 못 볼 것이다. 아무도 못 들을 것이다. 아래층 갑판에서 사람들이 흥청대는 소리가 너무 컸다. 사람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 이곳 3층 갑판에는 짙은 어둠과 기름 냄새뿐이었다. 헨리는 웃으며 오드리의 허리에 팔을 감고 세게 잡아당겨 난간 앞에 세웠다. 그러나 그녀는 겁먹은 아이처럼 움츠러들었다."(p.241~242) 「적도」 중에서


그러나 이처럼 뚜렷이 구분되는 강자와 약자의 관계 안에서 강자마저도 절대적인 강자가 아닌 그저 '인간'일 뿐이다. 「인형의 주인」의 로비도, 「총기 사고」의 트래비스도 강자에게 짓밟힌 약자의 트라우마를 간직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군인」의 브랜던 슈랭크는 삼촌의 총을 손에 들고 자신이 주님의 군인이라고 믿으며 힘없는 흑인 소년 위에 잠시 군림하지만, 사건 후 감당할 수 없는 힘에 떠밀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휘말리고 만다. 작가가 일종의 우화라고 말하는 「빅마마」에서, 먹잇감이 된 바이올렛이 빅마마를 마주하며 빅마마 역시 유리 감옥 안에 갇힌 포로라는 사실을 깨닫는 장면이 어쩌면 이 모든 관계들을 암시하는 한 장면일지도 모르겠다. 이는 가해자의 '서사'에 공감하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그렇게 나약한 존재임을 극명하게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오츠는 서로 물고 물리는 약육강식의 세계를 펼쳐 보이며 현실에 기반을 둔 공포를 선보인다. 그리고 그 현실이 우리에게서 멀지 않은 것이기에, 그녀가 제시하는 공포는 미지의 초자연적 존재나 현상으로부터 느끼는 공포보다 훨씬 더 으스스하게 다가온다. 오츠의 시건으로 보는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게나 잔인하고 무서운 곳이다. 이 소설집에 있는 다섯 편(앞서 언급한 「적도」 제외)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요약한 제공한 출판사 측의 소개로 여기에 열거해 본다. 순서는 소설 게재 순이다. 

① 「인형의 주인」 “얘들은 여기에 있으면 행복해. 여기에 있으면 평화로워.” 언젠가부터 로비는 길에서 인형을 주워 남몰래 창고에 보관해왔다. 그리고 로비가 인형을 주울 때마다 동네에서는 아이들이 하나씩 사라진다. 스스로를 ‘인형의 주인’이라 칭하는 소년. 사이코패스의 뒤틀린 내면을 섬뜩하게 그려낸 작품으로서 표제작이다.

② 「군인」 “인종 전쟁은 이 나라에서 결코 끝나지 않을 전쟁이야.” 흑인 소년을 살해하고 ‘하느님의 군인’으로 칭송받게 된 남자. 미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조지 지머먼’과 ‘버나드 고츠’의 실화를 모티프로, ‘백인-기독교인 사회의 뿌리 깊은 우월주의와 종교적 맹신의 위험성을 폭로하는 작품이다.

③ 「총기 사고」 “그 일은, 일어났어야만 했던 거야. 어쩔 수 없었어.” 두 아이를 키우는 해나는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오랜만에 고향 마을을 찾는다. 그리고 한때 자신의 우상이었던 매클러랜드 선생님의 거대한 저택을 스쳐 지나며, 과거 그곳에서 일어난 비극적 총기 사고의 기억을 떠올린다. 순진하고 내성적이었던 소녀의 운명을 바꿔놓은 25년 전, 가려져 있던 그날의 진실이 서서히 드러난다.

「빅마마」 “미워 미워 미워 진짜 미워. 엄마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엄마를 따라 낯선 동네로 이사 온 바이올렛은 새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던 중 리타 메이 클로비스라는 소녀가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고, 늘 외로움에 시달리던 바이올렛은 친절하고 따뜻한 리타와 그 가족에게 마음을 연다. 어느 날, 리타네 집에 놀러 간 바이올렛은 클로비스 가족의 위험하고 비밀스러운 애완동물 빅마마를 보게 된다.

「미스터리 주식회사」 “왜 꼭 어떤 이유가 있어야만 사람을 죽인단 말입니까?” 여러 개의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나’는 뉴햄프셔의 아름다운 고서점 ‘미스터리 주식회사’를 찾아간다. 지금껏 전 주인들을 은밀하게 독살하고 그들의 서점을 차지해 사업을 확장해온 나는 이번에도 가방에 독이 든 초콜릿을 준비해두었다.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미스터리 주식회사’의 주인 에런 노이하우스는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고 친절하게 카푸치노까지 대접한다.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서점에 얽힌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을 털어놓는다.

“왜 꼭 어떤 이유가 있어야만 사람을 죽인단 말입니까?” 노이하우스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슬레이터의 할아버지인 바나바스가 인생으로부터 ‘미스터리’의 핵심을 잘 추출한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독개구리로부터 독을 추출했던 것처럼 말이죠. 죽이는 행위는 그 자체로서 완성된 행위이며, 아무 이유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여느 예술 작품이나 마찬가지죠. 그럼에도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자기 자신을, 자신의 영역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 조상들은 적들을 두려워하고 낯선 사람들을 쉽게 믿지 않았습니다. 만일 낯선 사람이 내 영역에 들어온다면, 그리고 사악한 의도를 가지고 행동한다면, 아니 사악한 의도가 없다고 해도, 그를 이해해보려다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는 것보다는 그를 없애버리는 쪽이 더 나을 겁니다.(p.410~411) 「미스터리 주식회사」 중에서


저자 : 조이스 캐롤 오츠(Joyce Carol Oates)


매년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조이스 캐럴 오츠는 현대 미국 문단의 대표 작가이자 고딕 호러의 대가이다. 1938년 미국 뉴욕주 록포트에서 태어났다. 여덟 살 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처음 문학을 접했고, 이후 브론테 자매, 포크너, 헤밍웨이, 소로 등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했다. 열네 살 때 할머니에게 타자기를 선물 받으면서 작가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시러큐스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열아홉 살에 「구세계에서」로 대학생 단편소설공모전에 당선되면서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64년 첫 장편소설 『아찔한 추락』을 시발점으로 이후 지금껏 50편이 넘는 장편과 1,000편이 넘는 단편을 비롯해 시, 산문, 비평, 희곡 등 거의 모든 문학 분야에 걸친 왕성한 작품 활동으로 부조리와 폭력으로 가득 찬 20세기 후반의 삶을 예리하게 포착해왔다. 1967년 「얼음의 나라에서」, 1973년 「사자The Dead」로 오헨리상을 받았고, 1969년 『그들』로 전미도서상, 1995년 『좀비』, 2011년 『악몽』, 2012년 『검은 달리아와 하얀 장미』로 브램스토커상, 2005년 『폭포』로 페미나상 외국문학상을 받았으며,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도 무려 다섯 차례나 올랐다. 1978년부터 미국학술원 회원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2003년 문학 부문의 업적으로 커먼웰스상과 케니언리뷰상을 수상했다. 2006년 시카고트리뷴문학상, 2019년 예루살렘상을 받았다. 현재 프린스턴대학교 로저 S. 벌린드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며 미국문학예술아카데미 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 밖의 작품으로 『멀베이니 가족』 『블론드』 『사토장이의 딸』 『소녀 수집하는 노인』 『카시지』 등이 있다.


역자 : 배지은


서강대학교 물리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휴대전화를 만드는 엔지니어로 일했다. 이후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에서 번역학을 전공하고 소설과 과학책을 번역하고 있다. 『엿보는 자들의 밤』, 『밤의 새가 말하다』, 『열흘간의 불가사의』, 『최후의 일격』, 『꼬리 많은 고양이』, 『퀸 수사국』, 『무니의 희귀본과 중고책 서점』, 『맹인탐정 맥스 캐러도스』, 『아파트먼트』, 『물질의 탐구』, 『입자 동물원』, 『일상적이지만 절대적인 양자역학지식 50』, 『전자부품 백과사전』(전 3권)을 우리말로 옮겼다.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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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예보: 호명사회
송길영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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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시대예보: 호명사회』의 표제어 '호명사회'에 눈길이 먼저 간다. 일반적으로 잘 쓰지 않던 용어이기 때문이다. 한자 직역 뜻으로는 '이름을 부르는 사회'쯤으로 이해된다. 책의 제목으로 쓸 단어는 저자의 의도뿐만 아니라 편집진도 여러 가지 의미를 고려했을 것이다. '이름을 부르는 시대'라면 무척 좋은 의미로 독자 개인적으로는 들린다. 저자 송길영의 전작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에서 이미 새로운 개념의 단어 '핵개인'을 사용했다. '호명사회'도 역시 저자의 신조어인가 싶다. 출판사 측에 따르면 핵개인들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호명사회는 조직의 이름 뒤에 숨을 수도, 숨을 필요도 없는 사회다. 자신이 한 일을 책임지고 온전히 자신이 한 일에 보상을 받는 새로운 공정한 시대라는 뜻을 내포한 단어라는 설명이다. 이 책은 호명사회는 어디까지 왔으며, 이 시대에 생존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하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를 제시하는 책이다. 

전작을 읽지 못했기에 어리둥절했지만 저자 송길영에 대해 독자는 어떤 정보도 없었다. 다만 저자가 TV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시대를 읽고, 시대에 맞게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가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논리정연해 관심을 갖고 프로그램이 끝날 때가지 지켜본 기억이 있다. 그 프로그램은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의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프로그램이이었다. 그는 시사평론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는 작가라는 말을 들은 바는 있다. 시사평론이라면 '정치적'인 평론이나 싶었는데 '경제'라고 했다. 경제의 흐름을 잘 아는 분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기억됐다. 

저자 송길영은 지금의 시대를 왜 '호명 사회'라고 일컬었을까? 저자는 책의 앞 부분에 「예보: 호명사회」란 글에서 언급한다. "첫 번째 예보인 '핵개인의 시대'에 지능화와 고령화가 나선처럼 꼬여지며 스스로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고자 하는 이들, 핵개인의 탄생을 예고했다면, 이번 두 번째 예보에서는 개인의 삶과 자각의 관점에서 핵개인의 탄생과 그 이후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밝히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주기적인 경제 위기를 겪으며 직업에서 안정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어느새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좋은 직업’을 얻기 위한 경쟁은 치열해졌다.

학벌, 학점, 토익에 불과했던 직장 등 사회가 요구하는 스펙은 어학연수, 공모전, 제2외국어, 봉사활동에 이르기까지 확장됐다. 최근에는 유치원에서부터 의대를 준비하는 시대가 왔다고도 한다. 이렇듯 '경쟁의 인플레이션'이 극심해진다는 것은 우리가 경쟁을 위해 들여야 하는 노력의 비용이 계속해서 증가한다는 뜻이라고 저자 송길영은 진단한다. 한마디로 성공의 값이 비싸지는 것이다. 경제의 기본원칙이지만 이 경우 우리가 들이는 시간과 열정의 가치는 폭락한다. 우리가 그동안 굳게 믿고 있던 직업이 주는 안정감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생애주기는 길어지는데 직업의 생멸주기는 짧아지는 극단적 불일치 현상이라고 저자는 풀이한다. 당연히 취업준비생이든 직장인이든 평생 한 직장에만 머무를 수 없다는 불안이 퍼져나가고 있다. 이를 ‘유동화’라 한다. 

뿐만 아니라 기술의 발전 속도가 빨라지고 연결성이 조밀해지면서 여러 사람이 나눠서 하던 일의 규모가 작아지고 있다. 예컨대 기존의 광고대행업은 고객상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카피라이터, 행정, 스태프 인력 등 모든 단계에 인원이 필요했지만 이제는 생성형 AI와 다양한 자동화 서비스를 통해 1인 창작자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이를 ‘극소화’라 한다.

이처럼 수명은 점점 길어지는데 현실 정년은 바뀌지 않고, 기술의 발전으로 직업의 수명은 오히려 짧아지는 시대가 왔다는 저자의 주장이다. 여기에 유동화와 극소화로 조직은 점점 작아지고 개인은 점점 커지도록 사회를 이끌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렵게 들어간 회사의 간판과 직책이 더 이상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중이라고 저자는 판단한다. 나보다 직업이 먼저 사라질 시대에 앞서 살아간 선배들의 조언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급변한 사회 시스템과 시대정신이 가져올 가장 큰 변화는 나의 이름을 찾고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는 ‘호명사회’의 도래다. 산업혁명 이후 팽창한 조직에서 우리는 자신의 이름을 조금씩 잃었다. 이제 조직의 확장이 저물고 수축기로 접어든 시대에 우리는 조직에 가려져 있던 ‘나의 이름’을 되찾아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앞서 언급한 「예보: 호명사회」에서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과 시대의 요구에 적응하기 위해 어떤 자세를 갖추어야 할까?에 대한 단초를 제공한다. 저자는 서구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은 불과 200년 정도의 기간에 대량생산을 하기 위한 설비 투자, 재료 수급과 운영 관리, 판매 촉진과 사후의 응대 등 경제 주체로서의 규모를 빠르게 확장했다. 이 기간에 경제의 주체가 되는 기업이나 '조직'의 팽창은 반대급부로 '개인'의 이름을 조금씩 잊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자신의 인장을 넣은 장인의 표식은 기업의 브랜드로 대체되었고, 이름을 걸고 만들어내던 품질의 보증은 각종 인증마크로 바뀌었다. 전체를 관할하지 못하고 일부를 맡게 된 참여자는 장인이 아닌 노동자로 불리며, 정규화된 프로세스로 인해 항상 대체될지 모른다는 공포를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다"(p.12~14) 

이젠 시대의 핵개인이 예전의 장인과 동일하게 '자신의 이름을 되찾기 시작하고 산업혁명 이전의 잃어버린 이름을 되찾을 것으로 저자는 전망한다. 이를 호명사회라고 칭하고 있다. 저자는 앞서 규정한 유동화와 극소화는 작은 단위 조직 사이의 협업을 독려하고 전문화로 무장한 핵개인들은 조직이라는 형식이 아니어도 다른 핵개인들과 유기적으로 협력하며 더 섬세한 협업을 만들어 갈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그리고 그 단위가 개인으로까지 작아질 때, 그를 부르는 호칭은 그의 이름 자체가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모두 5장(章)으로 구성돼 있다. 1장 「시뮬레이션 과잉」, 2장 「상호 경쟁의 인플레이션」, 3장 「호오에서 자립을 찾다」, 4장 「선택의 연대」, 5장 「호명사회의 도래」 등이다. 대한민국은 '선진국의 문턱'이라는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를 연 지 6년이 지나가고 있다. 경제개발을 시작한 1963년 이후 60년이 지난 시점이다. 당시 100달러 수준이던 경제 수준은 '한강의 기적'이라고 할 만큼 대단한 성장세를 보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 중 전무후무한 일이라고도 한다. 이에 대한민국은 세계 속의 위상이 달라졌다. 인구도 만만치 않기에 '경제대국'이란 호칭도 붙었다. 4만 달러를 쉽게 도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또다른 동기 부여만 있다면 어쩌면 생각보다 쉽게 달성하고 넘어서리는 추측도 조심스럽게 내보는 시점이다. 4만 달러는 쉽게 가시화되지 않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과거 국민소득 1,000달러 미만일 때는 산업화 추진이나 개인의 취업에 이르기까지 선뜻 손대지 못할 것이 없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잃을 게 없어서 선택은 오히려 쉬웠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지금은 선택에 두려움이 생겼다. 잃을 게 없던 시절과는 다르게 자칫 선택에 실패하면 지금까지 쌓아올린 부(富)를 한꺼번에 잃을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이 새롭게 생긴 것이다. 저자는 이를 '3만 달러'를 놓고 게임을 벌이는 것과 같다는 선택 심리로 표현한다.

저자는 이처럼 신중한 선택의 결론은 미래가 아닌 현재를 향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사회에서 단기적으로 금전적 보상이 높은 직업, 사람들이 지금 하고 싶어 하는 일에 모든 이들이 매달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 '쟁투'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유행을 따르며 뜨고 지는 주기가 빨라지자 그 눈을 과거로 돌리게 되면서 벌어지는 현상임을 강조한다. 잠시 사람들이 좋아해 무수히 경쟁하다가 결국은 경쟁에서 탈락하는 사례들이 매년 나오자 그 보상의 유효성이 더 오래 검증된 직업을 찾게 되고, 그러다 보면 '의사'로 귀결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더욱이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가 단일해지고 있기에 벌어진 일이라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삶의 안정성을 얻기 위한 노력이 금전이라는 수단으로 쏠렸고, 경쟁에 지친 이들이 모두 안전해 보이는 일을 탐하며 동일한 트랙의 선착순 경기로 내몰리는 현상을 말하고 있다.

실제적 증거로 자라나는 아이들이 롤 모델로 삼아 택하고 싶은 직업을 살펴보면 알게 된다고 한다. 스포츠 스타와 예능인을 거쳐 유튜버와 인플루언서를 지나, 이제 의사로 결집하고 있다. 학원가로 유명한 동네에서 무거운 가방을 멜 수도 없어 바퀴를 달아 끌고 다니는 초등학생들의 꿈이 하나같이 '의사'가 됐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심지어 무리의 경쟁이 치솟는 사회는 이제 '유치원 의대 준비반'으로 현실이 되었다고 꼬집고 있다. 모두 목표가 단일한 사회에서는 같은 길을 내딛는 자로 가득찬 사회, 그리고 경쟁이 가장 공평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회 구성원의 욕망이 합의된 경쟁 인플레이션 사회가 된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그리고 그 인플레이션을 감당하기 어려운 이들은 경주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며 저출생의 구조가 고착화되고 퇴보하는 최악의 상황을 예고한다. 독자가 '유치원 의대 준비반'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고 그 부분을 찾아 먼저 읽으려 목차를 찾아봤다. 1장 「시뮬레이션 과잉」에 작은 항목의 제목으로 나와 있다. '유치원까지 내려간 의대 준비반'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초등학교 아이들이 의대 간다고 학원을 드나들던 게 이젠 유치원부터 부모가 아이들에게 의대를 갈 수 있도록 독려하는 실정이라는 것이다. 단순히 학습을 독려하는 것인지 실제 프로그램을 갖고 실천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현상은 '역기능적 불안으로부터 비롯된 회피적 시뮬레이션 부작용'이라고 저자는 지칭한다. 최선의 시나리오만을 생각한 최적화 알고리즘으로 삶의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다면 그 끝에는 최종적 위험 회피가 자리 잡는다고 한다. 가령 부모의 시뮬레이션으로 위험 회피에 성공할지라도 이는 아이의 성장 부재로 이어지고 점차 나약해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저자는 경계하고 있다.

4장 「선택의 연대」도 주목할 만하다. 저자는 한 편의 영화 이야기로 말머리를 잡는다. '경주 최씨 충렬공파 30대손'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인물 최익현은 윤종빈 감독의 영화 〈범죄와의 전쟁〉의 주인공이다. 경주에 자리 잡은 최씨, 명문가 충렬공파의 일원이라고 주장하는 그는 비리를 저질러 면직된 공무원임에도 자랑스러운 뿌리를 연줄로 조직폭력배에 가담하고자 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검사와의 인연 또한 '할부지의 9촌 동생의 손자'라는 정체 모를 촌수로 연결하여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혈연이나 지연으로 사회관계를 맺었던 90년대 이전까지의 우리 사회를 꼬집는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 사회는 배움의 현장에서도, 함께 일하는 회사에서도, 뜻을 모든 공동체에서도 '가족' 같은 관계가 기본이었다. 이 시대는 그래도 '낭만'의 시대라서 보상도 확실했다고 한다. 운명 공동체의 조직이라면 개인이 감내한 만큼의 암묵적 보상을 약속한 셈이다. 과거 세무조사를 받던 기업 임원이 장부를 들고 잠적한 뒤 감옥에 다녀와서 오히려 더 높은 자리로 영전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던 시절이니까. 한국 사회의 '조직'과 '구성원'의 관계는 끈끈했음을 반증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남이가?'하는 구호가 사라진 지도 30년이 훨씬 넘었다.

저자는 사회가 수직에서 수평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기에 '평등함'을 기반으로 한 '연대'가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연대는 연좌의 끈을 끊어내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주장이다. 개인의 잘못이 공동의 잘못과 같다는 공동체적 결속은 모두를 침묵하게 하는 그늘과 같은 것이었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역사적으로 우리 사회는 다양한 형태의 연좌를 경험해 왔다. 조선 시대 삼정(나라의정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세 가지로 토지세와 군역의 부과, 양곡 대여와 환수)의 문란으로 가족이나 이웃의 군포를 대신 납부해야 했던 족징이나 인징부터, 근래에는 학교에서 한 학생의 잘못된 행동으로 전체 학급이 받았던 단체 기합 등이 그예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얼마 전까지도 가까운 이들의 사이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금융기관의 빚보증 명칭은 '연대 보증'이었다. '연대'가 부정적 이미지를 얻게 된 사례이기도 하다. 앞으로의 사회는 새로운 형태의 관계와 시스템을 창출한다. 첫 번째 도제 시스템의 몰락과 함께 나타나는 지식 전수 방식의 변화다. 두 번째는 취향을 중심으로 한 새롱누 정체성 공동체의 형성이다. 세 번째는 다정함의 중요성이다. 예전에 끈끈했던 가족 같은 관계는 그 막역함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예속과 연좌가 따라왔다. 이젠 대등함을 바탕으로 서로 감정적으로 연대하고 지지할 수 있는 새로운 관계가 모색되고 있다. 호명 사회의 앞날이 기대되는 부분이다.

이 책은 호명사회에 생존하기 위한 우리 개인의 대처법, 혹은 선택이라고 할 만한 것을 제시하고 있다. 임의의 번호를 붙여 독자가 나열해 본다. ① 호오에서 길 찾기. 나의 좋음과 싫음을 뜻하는 호오(好惡)를 찾아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각자의 조예와 취향을 쌓으면 그것이 자신의 새로운 본진의 기회가 된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나의 조예와 취향이 벼려질 수 있는 분야에서 일하며 경험을 축적하는 시간은 그 자체로 자산으로 쌓이기 때문이다. ② 자립을 위한 도구 만들기. 장수의 혜택과 AI와 지능화의 도움은 복수의 직업, 이른바 N잡러의 증가를 가져온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우리는 자기 일을 스스로 해내고 이름을 되찾는 자립을 해야 한다. 이때 가장 필요한 자질은 지능화를 빠르게 수용하는 개방성과 스스로 모든 것을 해내는 주체성이다. ③ 느슨한 연대. 이제 세상은 학연, 지연, 혈연과 같은 연좌에서 개인의 선택이 강화된 대등한 연대로 변화한다. 지나치게 가까운 관계는 과열되어 버리고, 너무 먼 관계는 차가워진다. 다정함과 적절한 거리감 사이에서 황금률을 찾는 느슨하지만 적절한 연대는 호명사회를 위한 전제라 할 수 있다.

④ 생존을 위한 증거주의. 지금은 각자의 업무가 단계별로 생산되고 유통되며 누구도 자신의 업무를 숨길 수 없게 되어가고 있다. 이렇듯 모든 것들이 공유되는 ‘실시간 업무 스트리밍 시대’에는 자신을 증명할 근거를 모으려 노력해야 한다. 퇴사하였어도 자신의 이름으로 당당해질 수 있는 이들의 근거가 그 증거의 집합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에 더 일찍 적응하고 자신에 대한 기록을 모으고 있던 이들은 모든 수식어를 다 버리고도 설명 가능한 ‘이름’으로 불리기에 유리한 고지를 점유해 나갈 수 있다. ⑤ 장인 정신, 호모 아르티장. 자신의 업을 고집스레 이어가는 고유함에서 자립이 탄생하고 감춰져 있던 이름을 되찾을 수 있다. 이제 도구의 인간인 호보 파베르(homo faber)가 AI와 3D 프린터로 강화되며 장인의 인간인 호모 아르티장(homo artisan)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 경지에 이르면 돈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필요한 돈을 버는 것으로 상승한다. 이때 자신의 일은 작업이 되고, 자신이 만든 것은 작품이 된다. 조직에서 함께한 일은 소모되지만 혼자 한 작업은 작품을 남긴다. 그 작품은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나의 이름과 함께 남는다.


저자 : 송길영


송길영은 시대의 마음을 캐는 마인드 마이너(Mind Miner)이다. 사람들의 일상적 기록을 관찰하며 현상의 연유를 탐색하고 그들이 찾고자 하는 의미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20여 년간 해왔다. 개인들의 행동은 무리와의 상호작용과 환경의 적응으로부터 도출됨을 이해하고, 그 합의와 변천에 대해 알리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깊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영감을 받는 것에서 가장 큰 기쁨을 느낀다.

저서로 《여기에 당신의 욕망이 보인다》, 《상상하지 말라》, 《그냥 하지 말라》가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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