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내 여행자-되기 둘이서 3
백가경.황유지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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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에세이집 『관내 여행자-되기』는 출판사 〈열린책들〉의 '두 사람이 함께 쓰는 새로운 에세이 시리즈-「둘이서」'의 세 번째 책이다. 시인 백가경과 문학평론가 황유지가 함께했다. 이 책은 사회적, 역사적, 그리고 개인적 의미가 있는 공간을 찾아가 그곳에서 그들을/우리를 관통한 것에 대해 풀어내는 이야기다. 백가경과 황유지의 인연은 202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각각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것에서 출발한다. 당시 두 사람은 시인으로, 또 문학평론가로 첫발을 떼게 된 시기였고, 신춘문예는 서로에게 좋은 동료이자 속 깊은 친구로 나아가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두 공동저자는 「둘이서」 시리즈에 이토록 제격인 두 사람으로서 무엇보다 사회 역사적인 「기억」과 개인의 「기억」을 에세이로 풀어보기로 생각하고, 「관/관통」을 키워드로 정한 듯하다. 여기에서 「관」은 서로 연결되는 지점이자 공간/현장을 의미한다. 또한 「관통」은 사회와 개인이라는 공동의 기억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고 관계된 것을 말한다. 무엇보다 「통」은 「담아냄으로써(桶) 연결되는(通) 아픔(痛)들」이라는 중첩된 의미를 담는다. 

저자 황유지는 「통: 담아냄으로써[桶] 연결되는[通] 아픔[痛]들」이라는 제목의 〈서문〉에서 「둘이서」시리즈 제안에 곧장 떠오른 단어는 '관통'이었다. 나는 어딜 가든 그 아래 축적된 것에 관심이 있다. 내가 자란 곳에서는 발아래를 파면 얼마든지 무엇이 나왔는데, 까닭에 우리 동네에서는 무슨 공사를 하든 중단되기 십상이었다. 건물을 세우려고 땅을 파면 옥구슬이나 장신구가 쏟아지고, 비가 내려 땅이 헐거워지면 도자기 파편이나 화살촉이 나왔다."고 회고한다. 팽창하는 도시는 지속적으로 땅을 요구했지만 거기에는 아무것도 세울 수 없었다. 그 일대는 가야 왕족의 무덤이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저자 황유지는 이때 느꼈다. "쌓아 올리기 전에 확인하고 지켜내야 할 것들이 있다. 그전까지 말이 없던 가야의 역사는 제 무덤이 품은 유품을 스스로 토해 냄으로써 기록화되기 시작한 참이다. 그건 평평하고 좁은 역사를 좀 더 환히 들여다볼 기회로서의 발굴, 그 지평을 넓히고 연장하는 파헤침인 셈이다. 2천 년 전 흔적과의 조우는 층층이 쌓아 올린 레이어드 케이크의 단면처럼 내게 어디를 딛는 텅 빈 발아래는 없으리라는 심상함을 이미지와 함께 새기께끔 했다. 「도시-관통」을 두루 주제로 삼자는 데 쉽게 동의해준 가경과는 어떤 지점을 향한 공통의 관심이 이미 있었던 게다. 서로 그것을 미리 안 것도 아니건만 그는 도시의 건축물에 유달리 관심이 있었다. 그럴 때 그가 바라보는 건축물과 내가 바라보는 건축물의 땅 아래는 분리 불가의 연결성을 가진다."(p.9) 

이처럼 한뜻으로 통과된 공동의 관심사는 「관」이고, 우리는 많은 관으로 삶을 지탱한다. 그러한 관은 상자(棺)일 때도 있고 건물(館)일 때도 있으며 수로나 지하도(管)의 형태이기도 하다고 황유지는 사유한다. 관이 연결의 공간적 감각이라면 통(通)은 시간적 감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단층이 품은 오래전의 이야기들은 발아래 무수히 뻗어 나간 뿌리, 식물성을 닮은 리좀(rhizome)*의 육체적 감각이랄 수 있겠다. 

* 리좀은 ‘근경(根莖)’, 뿌리줄기 등으로 번역되는데, 줄기가 마치 뿌리처럼 땅 속으로 파고들어 난맥을 이룬 것으로, 뿌리와 줄기의 구별이 사실상 모호해진 상태를 의미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수목(arbre)형(arborescence)과 대비시켜 리좀 개념을 제기한다. 수목이 계통화하고 위계화하는 방식임에 비하여, 리좀을 제기하는 것은 욕망의 흐름이 지닌 통일되거나 위계화되지 않은 복수성과 이질발생, 그리고 새로운 접속과 창조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려고 한다.(철학사전, 2009) 



저자 백가경은 「같이 관 걷기」란 제목의 이어쓴 〈서문〉에서 "「관」을 가지고 두 편의 시를 쓴 적 있다. 한 편은 시체를 담는 관에 대한 내용이며, 다른 한 편은 박물관, 미술관 등 공공을 위한 시설물, 하부 구조 따위를 배경으로 쓴 것이었다."고 말문을 연다. 며칠 전 '유령을 보았다'는 저자는 을지로 3가의 허름한 건축물 안에서 희고 얇은, 하늘하늘한 천을 뒤집어쓴 세 명의 연극인이 〈유령-씨앗〉(창작집단 파라란)이라는 연극를 무대에 올렸다. 연극이 아니라 제(祭)인 이유는 그들의 표현대로라면 우리 주위에서 유령이 된 사람, 동물, 지역을 기리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좁은 무대 가운데를 걷고 말하고 다시 걷고 말하는 식으로 극을 이어 갔다. 그들의 이름은 마리, 명, 구다. 살처분당한 동물 몇 마리, 참사 현장에서 숨을 거둔 희생자 몇 명, 바다에서 되돌아온 시체 몇 구에서 따온 이름이다. (중략) 그곳에서 유령에 대한 인상적인 표현이 나온다. '그들은 살아생전 큰 고통을 당해서 죽은 뒤에 그들의 고통은 운동 에너지로 바뀌고 미립자가 되어 그공간을 떠도는" 존재라고 표현된다. 유령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미립자의 영향을 받아 우울감을 겪는데, 이를 막기 위해 낭만이라는 벽을 쌓아 올린다는 내용의 연극을 백가경은 인용한다.

"미립자가 즐비한 이곳은 결국 내가 사는 곳이기도 하다. 누군가 아무리 단단하고 두꺼운 벽으로 고통의 미립자를 막는다고 해도 벽은 언젠가 허물어질 테고, 그 뒤로 켜켜이 얽힌 이야기의 수관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자라났을 테다. 우리는 외면하지 않고 마리, 명, 구의 얼굴을 마주하며 길게 이어진 관을 걸을 것이다.인간이 인간을 위해 세운 관 건축, 지하 아래로 흐르는 지하철도 관, 수도관, 가스관, 마지막으로는 이미 세상을 떠난 이를 위한 관들이있는 곳까지 걸으며 공기 속에 흩어진 고통의 미립자를 들이마시고 내쉬며 살아간다."(p.17)

이렇게 도시의 건축물에 유달리 관심이 있는 시인과 발아래 축적된 것에 골똘한 문학평론가는 〈도시-관통〉을 주제로 삼고, 서로가 관심을 가진 것들이 연결되어 있기에 이 모든 것을 〈관〉으로 여기고 〈관내〉를 여행하기로 한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표제어 가운데 「-되기」라는 단어를 붙인 것은 철학자 들뢰즈의 사유*를 빌려온 것으로, 너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닌 오롯이 그 자리에 놓이는 이해의 지향을 뜻한다. 누군가를 향한 온전한 이해란 불가능에 가깝기에 「-되기」는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이면서도 조심스러운 태도를 포함한다. 두 사람이 공간을 걷고, 사유하고, 글을 쓴 것은 그들이 겪은 경험을 토대로 진정한 관내 여행자-되기를 보여 주는 것이다. 유유자적한 낭만적인 여행이 아니다. 

황유지는 인천 성냥 박물관에서 일했던 어린 여공들의 삶에서 친척 언니의 삶을 겹쳐 보며, 우리 이전의 소녀들이 자신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짐을 졌던 시간을 떠올린다. 함께 인천을 찾았던 백가경은 동일방직 공장의 터로 이동하여 최소한의 노동 인권을 위해 항쟁하던 여성 노동자들의 역경을 되새긴다. 의정부에서는 미군 부대 앞 성매매 여성들이 살았던, 아니 그곳밖에 살 수 없었던 〈뺏벌〉이라는 곳을 찾아가 역사와 슬픔의 거주지인 언니들의 방을 목격한다.

*들뢰즈의 사유: 헤겔은 동물을 비웃는다. 동물은 존재하는 직접적인 상태를 자기 힘으로 벗어날 수 없고 다른 동물에 의해서만 벗어난다. 그렇게 벗어나는 일이란 만신창이가 되어 죽음을 맞이하는 일이다. 개가 더 큰 개에게 물려 죽는 방식으로만 자기 자신을 벗어나듯. 반면 인간은 ‘내적 부정’을 통해 직접적인 자기 상태를 지속적으로 벗어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할 장애로 여기고, 이 장애를 부정함으로써 발전한다. 난 이보다 더 잘 할 수 있어! 다음 목표는 수학에서 50점 받는 거다! 이렇게 나날이 장애물 같은 자기 자신을 지양하고 자신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다.

바로 이런 사상의 정반대 편에 스피노자의 제자로서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가 있다. 들뢰즈는 동물을 이렇게 찬양한다. “동물들은, 비록 필연적으로 서로 죽이기는 하지만, 죽음을 자신 속에 품고 있지는 않다.” 동물은 직접적으로 주어진 자신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존재를 즐길 줄만 안다. 오로지 버려야만 하는 인간의 어떤 악습만이 내면에서 자신을 부정하고, 니체가 말하듯 자기 존재를 ‘가책’의 대상으로 여긴다. 이 가책은 후에 프로이트에 와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죄의식’이 된다. 삶은 내면에서 죽음을 선고하는 일,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며 주어진 존재에 대한 긍정과 기쁨으로 차 있다. 이런 삶에 대한 찬가가 들뢰즈의 철학이다.(생활 속의 철학, 서동욱)



두 저자는 또 안산과 이태원, 광주와 서대문으로 상처를 마주하러 걸어간다. 두 사람은 사회적, 역사적 공간만 찾아간 것은 아니다. 그들을 지금까지 만들어 온 고향과 일터, 그리고 둘을 이어 주게 된 「등단」의 길도 다시 한번 찾아가 결국 그 관을 모두 통과하여 밖으로 나온다. 함께 그곳으로 걸어 들어가 기어이 통을 하나하나 두드려 가며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안부를 묻고, 역사학자도 연구자도 아니지만 백치의 상태로 둘이서 손을 잡고 길고 긴 관을 걸어서 결국 나온 것이다.

이처럼 이 책은 사회적 참사나 재난의 현장, 우리가 잊고 살던 아픔의 공간을 찾아가 우리가 모두 느낄 수밖에 없는 공동체적 슬픔뿐 아니라 개인적 경험을 함께 들려준다. 우리 역시 지금도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2014년 4월 16일 TV 화면으로 목격한 참사를, 그리고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골목에서 일어난 참사를. 그뿐인가 해마다 5월이면 가슴속에 울려 퍼지는 진혼곡과 '광주의 눈물'을. 그렇기에 두 사람은 잊지 않고 그곳들을 다녀와 그 아픔을 되새기듯 꾹꾹 눌러쓴 글로 공간을 기록하고 사람을 위로한다. 

이 책은 〈서문〉과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모두 10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1관 「인천」, 2관 「의정부」, 3관 「삶터」, 4관 「안산」, 5관 「이태원」, 6관 「일터」, 7관 「광주」, 8관 「서대문」, 9관 「고향」, 10관 「등단길」 등이다. 각 관에서는 주로 사회적, 역사적 참사가 일어난 장소 위주로 다루고 있다. 주제가 다소 무겁긴 하지만 참사의 현장이나 역사적 사건은 결코 가볍게 처리할 일은 아니라는 점에서 이 책을 더욱 읽고자 하는 독자들에게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할 수도 있겠다는 것이 독자의 판단이다. 역사적인, 사회적 참사는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한 결코 지워질 수 없으면 시대를 관통해 기억과 기억이 연결되며 이어진다. 그것이 역사 기록의 의미이기도 하고, 더 나은 사회를 이루기 위한 시대적 사명을 가진 시민들의 몫이다. 


나의 작은 투쟁은 이런 것이다. 하나의 진실에 다가가는 공부를 일상적으로 꾸준히 하기. 진실을 가려내는 눈을 기르기. 특정 집단이 시간을 끌며 대중의 망각을 유도한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음을 끝끝내 증명하기. 계속 말하기. 계속 쓰기. 작든 크든 계속 투쟁할 수 있는 위로와 에너지를 얻으러 여기저기 다니기.(p.153)


계엄과 백골단이, 무장한 경찰이 죽지도 않고 돌아온 것을 이번 겨울 12·3 비상계엄 사태를 지나며 우리는 똑똑히 보았다. 우리는 어떻게 어른이 되어 가고 있는 걸까. 우리 사회는 얼마나 성숙했는가. 민주화도 성인도 되지 않은 채 이 사회가 얼렁뚱땅 나이만 먹어 가고 있지는 않나.(p.196)


저자 : 백가경

시인. 202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5년 시집 『하이퍼큐비클』을 펴냈다.


저자 : 황유지(황혜경)

문학평론가. 202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대산창작기금을 수혜했다. 대학에서 문학과 글쓰기를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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