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김태영 지음 / 담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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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전적 에세이는 인생을 잘 산다는 것에 대해 고민을 하게 해준다. 삶은 나를 믿고 사랑하며 잘 극복해 나가는 것이고 내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나’라는 사실을 되새기도록 해준다. 나답게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궁금한 사람들에게 명쾌한 답을 제시해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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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김태영 지음 / 담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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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나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는 중국 동포가 경상도 남자를 만나 20년 결혼 생활을 한 기록이자 한국 생활 적응기이기도 하다. 저자 김태영은 이른바 '조선족'으로, 스물네 살 꽃다운 나이에 한국 남자와 결혼함으로써 정치·경제·사회·문화가 다른 대한민국의 한 일원으로써, 주부로써, 아이의 엄마로써 적응은 물론 삶을 스스로 이끌어간 성공 사례로서 자신의 결혼 생활을 담담히 쓰고 있다. 힘겨운 10대 시절을 뒤로 하고 20대에서 40대에 이르기까지, 국적이 다른 사람으로 한국에서 살면서 겪은 고생과 불편함, 편견과 선입관에 맞서는 이야기부터, 소녀에서 바로 아줌마로 급진하게 되면서 겪는 가치관의 혼란과 자아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 관한 이야기까지 거침없이 펼쳐져 있다. 희망을 찾아 한국으로 온 저자는 동포로서 대한민국에 산다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선 편견이 가장 힘들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결혼이 확정되고 남편과 함께 지방 어느 작은 도시에서 시어머니를 처음 만나던 날의 에피소드가 쉽지 않은 결혼 생활을 예고하는 듯하다. 

“아빠가 일찍 돌아가시고 엄마 혼자서 삼 남매를 키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일찍 철이 든 우리는 공부를 이어가는 대신 각자의 생계를 책임지기로 했다. 일찍 시작한 사회생활로 인해 학업을 마치지 못한 것이 늘 아쉬웠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운이 좋았다. 식당에서 설거지하는 내가 안쓰러웠던 외할머니는 여기저기 부탁해 한국 기업에 취업시켜 주셨다. 당시 중국에는 제대로 된 노동법이 없어 미성년자가 일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나는 미성년 때 일을 시작해 성인이 되었다. 한국 기업에 다니면서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일상을 살았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은 날을 보내다가 문득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벗어나고 싶고 새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졌다.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고 싶었다. 그때 떠오른 곳이 한국이었다. 2003년 8월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나의 이민 생활이 시작되었다.”


도착했다는 남편의 말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활짝 웃으려고 표정도 다시 지어 보았다. 그러나 차에서 내리는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 하나 마중 나와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어머니를 불렀고, 한참 뒤 어느 귀퉁이에서 어머니가 천천히 걸어오셨다.

“왔나?”

단 한마디. 어머니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으셨고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대단히 반겨 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중국인 며느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p.23)



저자는 한국 사회에서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숨기며 살아가야 했다. 그러면서도 다양한 직업을 경험하고, 독서와 운동 등 여러 활동을 통해 자신을 찾는 여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결과 ‘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은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으로 바뀌었고,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저자가 자신을 사랑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낸 이 에세이 『나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는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라는 따뜻한 위로와 함께, 독자들에게 ‘나다움’을 찾아가는 여정을 제안한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나’라는 깨달음을 통해 긍정성을 향해 나가도록 격려한다. 사회적 편견과 도전 앞에서 주저하는 사람, 삶의 전환점을 맞이한 사람, 자기 삶의 가치를 발견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찾는 사람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독자는 기대한다.

저자는 “한국으로 시집간 아랫집 김 씨네 딸이 술주정뱅이를 만나서 맞고 산다더라, 건넛집 박 씨네 딸은 다리가 불편한 남편을 만나서 고생한다더라”는 이야기들이 조선족 사회에 퍼져 있었지만, 남편의 서글서글한 미소와 유쾌한 성격에 이끌려 한국으로 들어온다.

한국에서의 삶은 결코 쉽지 않았으리라는 짐작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같은 말을 쓰지만 현격히 억양이 다른 사투리, 더욱이 북한 사람들이 쓰는 사투리라서 자칫 오해받기도 십상이다. 

저자는 “태영아! 밖에서는 중국말 하지 마. 사람들이 무시해”라는 오빠들의 말처럼, 처음에는 편견과 선입견으로 인한 아픔을 겪어야 했다. 20대 초반 또래들이 전공 서적을 팔에 끼고 캠퍼스를 누빌 때, 저자는 아이를 업고 있었다. 자격지심이 생겼고, 비교에서 오는 불행의 후폭풍을 견뎌야 했다. 30대가 되어서는 불안한 마음을 떨쳐내기 위해 많은 것을 시도했다고 저자는 털어놓는다. 자동차 사이드미러 조립원, 섬유회사 원단 검사원, 공연단 행정업무 담당자 등 다양한 일을 하면서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렇게 40대에 들어섰고, 마흔세 살이 된 지금, 1,553세대 규모 아파트의 경리가 되었다. 작가는 우여곡절 많은 과정을 통해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과 두려움이 ‘하면 된다’, ‘할 수 있다’로 바뀌는 변화를 경험했다.



2024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실 국적은 큰 의미가 없다. 더욱이 세계화가 진전된 지 30년 이상이 흘렀는데 우리는 남북 분단 상태라 그런지, 한민족이란 단일민족 강조 때문인지 외국인에 대한 편견이 아직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어쩌면 잦은 외침에 의해 수많은 세월 피해를 받은 민족으로서의 피해의식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달라지고 진보했다. 90년대 이전에는 우리도 외국을 마음대로 여행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데다 법적으로도 해외여행이 그리 쉽지 않았다. 당연히 외국의 문물을 보고 느끼는 데 익숙하지 못했다. 거기에 국수적 느낌이 국민 전체에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는 IMF라는 초유의 금융 위기 상황으로 귀결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의 국수주의나 외국인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는 데 일조를 했다고 독자는 생각한다. 

이 책 『나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는 중국 동포로서 대한민국에 산다는 것이 상황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완전히 개방적이지는 않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결국은 저자가 대한민국에 살기 위해서는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생각되는 부분이다. 저자는 자신이 살기 위해 적응해야 했고, 적응하는 과정은 다른 외국인보다 훨씬 잇점이 있다는 것도 깨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꾸준하고 부단한 노력으로 이루어냈다. 지금은 자신을 비난하던 단계에서 이젠 스스로를를 사랑하게 됐다. 원하고 바라던 것을 이루어낸 자긍심과도 일맥상통한 심경이다. 저자는 그동안 ‘무너져도 다시, 쓰러져도 다시’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살다 보니 길이 생겼고, 그 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니 그 여정에 내가 있었다’라는 작가의 당찬 말이 아름답다. 또 앞으로 닥칠지도 모를 어떤 역경도 헤칠 수 있을 것이란 공감도 간다. 하고 싶은 일이나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돌진할 수 있는 용기와 열정이 저자를 지탱하고 있는 원동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이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인생을 잘 산다는 것은 나를 믿고 사랑하며 잘 극복해 나가는 것이다. 살면서 부딪히는 실패와 고난 때문에 우울하고 비참할 때, 주어진 것보다 주어지지 않은 것을 부러워하며 억울해하지 말아야 한다. 나의 인생 주인공은 바로 ‘나’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 온 외국인, 탈북민, 중국 동포 등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말이다. 저자는 단일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는 대한민국에서 며느리로 산다는 것,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직접 경험한 일들을 진솔하게 이 책에 담았다. 그리고 역경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엄청난 열정과 쉼 없는 노력이 스스로를 키우는 밑바탕이 되었고, 결국 '나다운 나' '자랑스러운 나'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이 책은 저자의 진솔한 기록을 바탕으로 주위의 한국인들도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를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에세이지만 성장 소설처럼 스토리가 읽히는 것이 흥미롭다. 진실의 짧은 조각들을 꿰맞추니 하나의 스토리가 완성된다는 것이 오히려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로 재미 있다. 남의 노력을 '재미있다'로 표현한 것은 무례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독자는 저자의 노력이 우리 국민들에게 외국인 차별을 없애는 데 영감을 주기 때문에 한 표현이다. 양해를 구한다. 이 책은 나답게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궁금한 사람들에게도 명쾌한 답을 전해줄 것이라고 독자는 믿는다. 저자가 무너지고 힘들어하는 자신에게 해줄 말을 몇 개 인용해 여기에 적는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비교하지 마. 너만의 속도로 가면 돼.”

“실수해도 괜찮아. 세상 무너질 일 아니야.”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어. 완벽해지려고 발버둥 치지 않아도 돼.”

“오늘도 고생했어.”(p.182~183)



이 책은 모두 4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 〈나는 조선족입니다〉, 2부 〈이방인으로 한국에서 살아간다는 것〉, 3부 〈무너져도 다시, 쓰러져도 다시〉, 4부 〈나를 사랑하기 위한 연습〉 등이다. 각 부는 7~8개의 장(章)으로 나뉘어져 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합쳐 200페이지에 조금 못 미치는 작은 책이다. 그러나 진솔하고도 노력의 결정체로 만든 언어는 한 문장 한 문장 힘과 무게감이 있어 천천히 읽을수록 저자의 진심이 전해져 오는 듯한 느낌으로 가슴속이 가득 채워짐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중국에서 온 조선족아다」란 제목의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과 두려움이 '하면 된다', '할 수 있다'로 바뀌었다. 삶은 혼자서 가는 여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썼다. 그는 「나는 이제 이방인이 아니다」란 제목의 〈에필로그〉를 통해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알아내고, 나다움을 찾아가면서 삶이 바뀐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한국인들이 외국인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기보다 저자 스스로 외국인이라는 울타리를 쳐 놓고 그 울타리를 넘지 못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힘들어 주저앉던 날, 상처받아 움츠려들던 날, 두려움에 도망쳤던 날, 날카롭게 스스로 비난하며 어두운 곳으로 숨어들던 날, 이런 날들을 극복하며 지금의 내가 되었다."(p.193)


저자 : 김태영


여전히 세상이 궁금하고, 또 하고 싶은 것이 많은 40대.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을 좋아하며 새로운 도전을 위해 필요한 용기를 독서와 경험을 통해 얻어가고 있다. 여러 직업을 경험하며 아파트 경리가 되었다. 가장 ‘나답게’ 살아가기 위해 새로운 도전에 주저함이 없다. 더 넓은 세상을 비상하기 위해 오늘도 고군분투 중이다. 공저 『언니들, 인생을 리셋하다』,『한 번은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

인스타 @taeyeong_0211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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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는 도시의 선택 - 자기다움으로 혁신에 성공한 세계의 도시
최현희 지음 / 헤이북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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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사랑받는 도시의 선택』은 도시 재생에 관한 연구이자, 도시 재생 방향과 방법 등을 두루 담았다. 저자 최현희는 우리나라 곳곳에 각자의 정체성을 살린 매력적인 도시가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연구했던 내용을 다듬어 이 책에 담았다. 서울 등 우리나라 도시는 근대 이후 발전은커녕 오히려 쇠락의 길을 걸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의 필요에 따라 도시의 변화가 심각하게 왜곡되었고, 그나마 남은 도시도 6.25 한국전쟁으로 폐허화돼 간신히 살아난 국민들은 도시 재생 능력도 갖지 못했다. 휴전 협정으로 전쟁이 멈췄을 때는 도시 건설은커녕 재생도 꿈꾸지 못할 정도로 온 국토가 황폐화되었다. 겨우 산업화를 시작했을 때에도 도시 노동자들이 먹고 가르치기 위해 서울로, 서울로 집중됐다. 그나마 건물이 있고 교통 인프라가 조금 갖춰진 서울은 주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책 오로지 경제 발전에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적절한 도시계획도, 도시 노동자 수용 능력이 없는 도시에는 무허가 건물들이 난립했다. 서울을 '살 만한 도시'로 탈바꿈시킨다는 것은 요원한 길인 것만 같았다.

이로 인해 수도와 지방의 균형 발전은 후순위로 밀려났고, 인구의 도시 집중으로 도시와 지방의 인구는 기형적 인구 분포를 보였다. 경제 발전을 우선 국책 사업으로 진행하던 정부 역시 경제 발전의 주요 역할을 할 곳들만 먼저 발전시키기에 급급했다. 다행히 경공업 중심의 경제가 중공업으로 옮겨가며 도시 건설 능력도 차츰 생기기 시작했다. 국민들의 교육열은 수많은 인재를 길러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전 국토를 균형 발전시키기에는 부족했다. 정부 정책에 따라 서울과 주요 도시 몇몇은 발전하기 시작했지만 오히려 농촌 지역 등은 인구가 줄기 시작했다. 농사 지어 먹고 살기 어려우니 도시 노동자로 나섰기 때문이다. 1970년대까지 이런 현상은 지속되었다. 80년대 들어 산업화가 다소 진전되고 임금 수준도 향상되었지만 이젠 빈부의 차가 극심해지는 자본주의 허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파트 개발 붐이 일어났다. 집값은 도시 월급 생활자나 저임금 노동자가 넘볼 수 없을 정도로 치솟았다. 부동산 투기는 이런 과정에서 벌어진 자본 왜곡 현상이다.



그러나 이런 험난한 과정을 딛고 일어난 대한민국은 대단한 나라임에는 틀림없다고 독자는 믿게 됐다. 군부 독재를 딛고 민주화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민주 인사들이 희생됐지만 짧은 시간에 민주화가 진전됐고, 산업화도 성공해 경제적으로 안정돼 갔다. 90년대는 OECD 가입 등 선진국 흉내를 내려다 IMF 금융위기를 겪었다. 이것도 국민들의 일치된 힘으로 극복해 냈다. 지금은 세계 경제력 10위 안의 '경제 대국'의 평가를 받고 있다.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는 자부심이 느껴질 정도로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나라를 다시 세워 건설하고 민주화 과정이 반 세기만에 이루어진 나라는 없다고 하니 '한강의 기적'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독일이 제1, 2차 세계대전의 패전을 딛고 다시 일어선 것을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말한 데서 인용된 것이지만 독일과 일본의 기적과는 또다른 의미가 있다. 

사실 독일과 일본은 전쟁 전에 이미 선진국들이어서 인프라와 국민들의 의식이 선진화되어 있어 회복하기가 더 쉬워졌다. 더욱이 일본은 전후 복구 보상에 대한 책임도 면제됐다는 게 알려진 이야기니 그들은 기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 한국전쟁의 호기를 맞아 미국이 군수품을 일본에서 만들어 보급한 데 따른 이익을 얻어 챙긴 일본은 우리보다 훨씬 좋은 조건을 갖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순전히 '운이 좋아서'라고 폄훼할 이유는 없다. 독일, 일본의 도시 재생을 보면 역시 선진국의 자격을 갖춘 것이라고 할 만하다. 

저자 최현희는 요즘 이 책에서 인구 소멸과 도시 소멸이 급속히 진행되는 시대라고 전제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 북적이던 도시가 쇠락의 길을 걷는 일을 어렵지 않게 불 수 있다는 것이다. 크고 작은 도시들이 도시 재생, 도시 혁신을 목표로 새로운 프로젝트를 야심차게 발표하고 추진하지만 성공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이에 저자는 도시 재생이나 도시 혁신을 위해서는 어떤 문제들을 선결해야 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를 사례 중심과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집필했다. 특히 국내 〈1913송정역시장〉, 〈위례스토리박스〉 등의 프로젝트 기획에 참여하고 성공으로 이끌었던 저자가 가파른 내리막길에서 변화를 만들어 낸 세계의 도시들을 연구했다. 혁신을 위한 조직을 구성하고, 원활한 진행을 위한 법률과 제도를 개선하며, 고유한 자원과 재원을 바탕으로, 도시 안팎의 사람들에게 문화예술 활동을 통한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며 사랑받는 도시로 자리매김하기까지 어떤 선택을 했는지 하나하나 분석하고 짚어준다.



저자는 또 이 책을 통해 각자의 도시에 적용할 수 있도록 고안한 〈도시 혁신 다이아몬드 프레임워크〉를 제시한다. 이는 도시 혁신을 통합적인 시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도구로서 저자가 직접 고안했다. 저자에 따르면 도시 혁신을 추진할 때 문화예술 활동과 자산, 커뮤니티, 행벙적 요소를 통합하는 총체적인 접근 방식 채택은 필수다. 한발 나아가 성공적인 해외 사례에서 배우고 지역 상황에 맞게 전략을 조정해야 우리의 도시가 활력을 얻어 지속 가능하고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도시로 살아남을 수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사람으로 가득했던 거리에 빈 상가가 늘고 있다는 소식이 전국 곳곳에서 계속해서 들려온다. 인구 소멸과 도시 소멸의 시대, 살고 싶고 방문하고 싶은 매력적인 도시를 만들기 위한 사람들의 관심과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글로벌 성공 사례에서 영감을 얻어 우리만의 고유한 상황에 맞춰 독특함을 펼칠 수 있기를 저자는 기대하고 있다. 이 책이 문화예술로 재미있는 도전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전하고, 다양한 도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집필된 것임을 「당신은 어떤 도시에 살고 싶나요?」란 제목의 〈프롤로그〉에서 분명히 하고 있다.

도시, 특히 우리 도시는 지금 급격한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그 어느 때보다 도시 혁신에 대한 방향성이 중요해졌다고 말한다. 도시는 단순히 건물과 인프라의 집합체가 아니라 우리의 문화적 가치, 경제적 성장, 사회적 결속을 반영하는 살아 숨 쉬는 실체로 변화,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시의 활력은 단순히 미적 매력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거하는 도시민의 삶의 질을 풍요롭게 하고자 하는 노력에서 시작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우리나라의 도시 혁신은 정부 주도의 사업 추진, 민간 부문의 토지 개발, 지역·지방과 각종 위원회의 참여가 결합되어 추진된다. 문화도시 선정을 통해 문화예술 활동을 도시 혁신의 요소로 끌어들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정치 논리로 프로젝트가 중단되고 단절되는 일은 여전히 빈번하게 일어난다고 꼬집는다. 특히 인구 감소로 도시 소멸 위기에 처한 지방 도시에게는 도시의 경쟁력이 절실할 수밖에 없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 책은 모두 6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도시의 시대」, 2장 「도시, 변화가 필요한 순간」, 3장 「도시, 문화예술로 새로 태어나다」, 4장 「도시 혁신에 성공한 네 개 도시」, 5장 「도시 혁신 사례, 다이아몬드 프레임워크 분석」, 6장 「살고 싶은 도시 만들기」 등이다. 각 장마다 2~4개의 하부 항목을 두고 각 장의 주제로 수렴된다. 1장에서는 〈도시를 도시답게 만드는 문화예술 활동〉, 〈모든 도시는 문화예술로 통한다〉, 〈창조도시에 필요한 창조계급〉, 〈도시, 문화예술 영역을 스토리텔링하다〉 등 4개의 항목을 두고 설명한다. 파리의 '모나리자'에 이어 '명실상부한 현대 문화예술의 중심지 뉴욕'의 거듭남을 말한다. 책에 따르면 뉴욕은 금융, 패션, 미술, 출판, 방송, 연극, 영화, 광고의 중심지로서 세계 경제와 문화 수도로 불릴 정도의 명성을 지녔다. 도시 곳곳에 수많은 미숡롼과 박물관, 연극 극단이 자리잡고 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1970년대 뉴욕은 오일쇼크로 재정이 파탄 난 폐허 같은 도시였다. 영화 〈배트맨〉의 매춘과 마약이 넘쳐나는 악명 높은 범죄도시 고담 시티가 바로 황폐했던 옛 뉴욕의 모습과 비슷하다. 그 즈음 뉴욕에서는 한 해 동안 2300건 정도의 범죄가 일어났다. 범죄를 피해 80만 명에 가까운 인구가 뉴욕을 떠나 도심 공동화 현상까지 발생했다. 뉴욕시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여러 방면으로 노력했다. 그중 하나가 공연 산업을 부흥시키는 일이었고, 브로드웨이 쇼가 그 결과다.

뉴욕은 '텍사스에 석유가 있다면, 뉴욕에는 예술가가 있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수많은 문화예술 단체와 500개 이상의 크고 작은 아트 갤러리가 자리 잡고 있다. 뉴욕시의 문화예술 관련 지출이 미국 정부의 예술 기금 예산보다 많다는 마이 있을 정도로 뉴욕시는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정부의 투자에서 시작, 문화예술 기업이 모이고, 창조적 에술가와 관람객이 모이며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가 뉴욕을 배경으로 형성되었다. 그리고 뉴욕은 세계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도시의 독보적 경쟁력도 생겼다. 이를 바탕으로 뉴욕은 뮤지컬을 도시 브랜드의 자산으로 삼았다. 매력적인 도시 브랜드가 확립되면 관광객이 모이고 경제 발전의 발판이 되며 나아가 도시 전체를 이끌어 갈 수 있는 동력이 된다. 

이 장을 통해 저자는 "21세기에는 문화예술이 사람을 유인하는 가장 강력한 자산이다. 창조적 인재가 도시의 고유한 역사와 환경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예술 콘텐츠를 생산해 낼 때 도시에는 활력이 생긴다. 이는 도시의 가치를 높이고, 도시에 고유성과 정체성을 부여한다. 도시 혁신은 여기에서 일어난다."고 밝힌다.



2장 「도시, 변화가 필요한 순간」에서 저자는 도시에도 인간처럼 생애 주기가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생처럼 탄생의 순간이 있고, 성장의 순간, 그리고 발전의 순간이나 쇠퇴와 지속 가능의 기로에 선 순간이 도시에도 있다는 것. 때로는 도시의 발전이 멈춰 정체기를 맞거나, 상황이 나빠지면 쇠퇴해 소멸로 갈 수도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도시가 쇠퇴 또는 소멸하지 않고 성장과 발전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도시 스스로 변화하거나 혁신해야 할 시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에 따라 도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해 관계자들의 니즈를 먼저 잘 파악해야 한다. 도시에서 도시민과 도시 사회가 처한 절박한 문제를 먼저 인식하고, 그 문제를 풀기 위한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일이 필요하고 한다. 

저자는 유럽문화 수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개발이냐, 보존이냐의 갈림길에 섰던 이탈리아 볼로냐를 사례로 들고 있다. 옛날에는 화려한 번영의 시대가 있었지만 지금은 과거가 거추장스러울 만큼 가난한 도시의 모습이다. 차가 다닐 수 없는 좁은 뒷골목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고, 낡은 건물이 빼곡하게 들어서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쇠퇴하는 도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낡고 어두운 이미지의 볼로냐에도 남은 것이 있었고 그것이 희망이 되었다고 한다. 오렌지색 벽돌로 만들어진 13세기 중세 건축물과 그 건축물에 남아 있는 긴 주랑 포르티코였다. 볼로냐가 간직하고 있는 문화유산 포르티코는 중세시대 건축물의 특징 중 하나다. 비를 피할 수 있는 천장이 있고 바깥쪽으로는 아치형으로 뚫린 회랑이 건물 외벽을 둘러싸고 있다. 포르티코가 중세시대 건축물의 특징이기는 하지만 볼로냐처럼 건물 대부분에 적용된 것은 없다고 한다. 볼로냐의 건물로 연결된 그물망 같은 포르티코를 모두 이으면 약 38킬로미터 정도가 된다니 조선시대 수도 한양(한성)을 방불케한다. 더욱이 볼로냐에는 중세시대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4킬로미터의 성곽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중세의 흔적을 유지하며 리모델링하는 방법을 선택하면 모두 허물고 새로 지을 때보다 두 배 이상의 비용이 필요하다는 진단이 나왔다. 다각도의 논의 끝에 도시 당국과 시민들은 비용이 더 들더라도 전통적인 중세 도시 건축물과 포르티코의 외관을 유지하고 쓰임에 문제 없도록 내부는 리모델링을 하는 방향을 선택했다.



책에는 도시 재생으로 활기를 찾은 도시 영국의 '리버풀'에 대한 소개도 있다. "리버풀이 비틀즈의 스토리를 중심으로 문화예술 도시로, 음악 도시로 혁신에 성공하였지만, 귿 ㅟ에는 단계적이고 계획적인 도시 재생 과정이 있었다. 리버풀은 시티센터를 중심으로 낙후 지역을 개발했고 문화 인프라를 단계적으로 늘려 가면서 지속적인 발전을 꾀하는데 그중 오래된 부두를 문화단지로 재탄생시킨 앨버트 독 보존 지역이 있다. 앨버트 독은 부두와 물류창고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곳으로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인 알버트 공의 지휘 아래 1846년 오픈했다. 돌을 이용하여 화재에 강한 물류창고 시스템을 세계 최초로 건축한 사례이기도 하다. 이곳은 20세기 중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입항 선박 크기의 변화로 물류창고로서의 경쟁력이 떨어지며 쇠퇴하기 시작했고 1972년, 126년 만에 파산하여 폐쇄되었다. 

1981년 리버풀 재생 사업을 착수하여 1984년부터 차례로 앨버트 독 오피스 건물과 창고 건물을 재생하고, 1986년 해양박물관 이전 개관, 1988년 테이트 리버풀 미술관 개장까지 진행하며 리버풀 경제의 부활을 알리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1990ㄴ녀 비틀즈 스토리, 2007년 국제 노예 박물관 등 박물관과 미술관, 레스토랄ㅇ, 카페 등이 들어서면서 연간 6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p.225~227)


저자 : 최현희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 그리고 문화예술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현대카드에서 일하며 ‘1913송정역시장’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성공으로 이끌어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다. 이후 성남문화재단으로 옮겨 ‘위례스토리박스’ 공간 구성과 운영 프로그램 기획을 총괄하고, 유네스코 창의도시 가입 추진 등 도시의 활기와 성장에 기여하는 비전과 전략 수립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기업 브랜딩, 마케팅을 연구하며 서강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문화예술을 통한 도시 혁신 성공 사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자기다움을 바탕으로 구성원 모두가 핵심에 집중할 때 혁신에 성공하고, 생명력 넘치는 브랜드로 누군가의 마음 속에 자리 잡게 된다고 믿는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곳곳에 각자의 정체성을 살린 매력적인 도시가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연구했던 내용을 다듬어 책으로 담았다. 대한민국 국무총리 자문위원, 유네스코 국제기록유산센터 심사위원, 성남시 공유무역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고, 현재는 예술과 도시 연구소 소장, (주)에이빅파트너스 대표컨설턴트를 맡아 기업컨설팅, 멘토링, 혁신 등의 강의를 한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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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위험한 이름, 비너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하빌리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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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Venu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랑과 미와 풍요의 여신을 일컫는 명칭이다. 원래 로마 여신의 이름이었으나 이후 아프로디테 등과 동일시되면서 모성과 아름다운 여성성을 상징하는 말로 폭넓게 사용되었다고 한다. 일본 최고의 추리소설 작가로 평가되고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비너스'를 표제어로 쓴 것은 심상찮다. 특히 비너스가 원래 품고 있는 의미와 같지 않을 것 같다는 강한 인상을 표제어로부터 받은 독자들의 머릿속은 시작부터 혼란스럽다. 소설의 시작은 천재 IT 사업가인 동생 아키토가 실종되고, 어느 날 낯선 여자가 주인공 데시마 하쿠로를 찾아오면서부터다.

“동생이…… 행방불명이에요.”

이 소설 작품 『아름답고 위험한 이름, 비너스』는 어느 날 낯선 여자에게서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부터 시작된다. 여자는 주인공 데시마 하쿠로가 10년 넘게 얼굴 한번 보지 않고 지내 온 이부동생과 갓 결혼한 사이라며 자신을 야가미 가에데라고 소개한다. 그러고는 한술 더 떠 그 동생이 실종되었다면서 동생의 행방을 함께 찾아 줄 것을 부탁한다.

도입부부터 예사롭지 않은 이 작품은 전체 31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500페이지가 넘는 장편소설임에도 예측할 수 없는 반전이 거듭되어 독자로 하여금 그야말로 책에서 손을 뗄 수 없게 한다. 처음에는 사라진 IT 사업가(아키토)를 찾기 위해 그의 아내(라고 소개한 여자) 가에데와 형(하쿠로)이 합심해서 진상을 파헤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내막에는 일본 의학계 명문가의 유산 상속 갈등이라는 복잡한 속사정이 얽혀 있다는 사실이 서서히 드러난다. 이 과정에서 하쿠로가 과거에 묻어 둔 인물들-치매로 투병 중인 재력가 새아버지, 뇌종양을 앓다 세상을 떠난 무명 화가 출신의 친아버지, 16년 전 의외의 장소에서 갑작스러운 사고사를 당한 친어머니-이 현재로 소환된다. 그리고 철저한 주변인이자 조력자로서 ‘동생 실종 사건’에 뛰어들었던 하쿠로는 어느새 사건의 당사자 위치에 서게 된다.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한 잠깐의 틈을 두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행방불명이에요, 아키토 씨가. 벌써 며칠째 돌아오지 않고 있어요.”(p.11)



이 소설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수수께끼는 네 가지로 요약된다. ① 성공한 IT 사업가의 실종과 그를 찾기 위해 분투하는 아내(?) ② 의학계 명문가의 유산 상속을 둘러싼 친족 간의 복잡한 속사정 ③ 사망한 부친의 불가사의한 병과 관련한 뇌 의학의 허와 실 ④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진상 등이다. 하나하나의 스토리가 상당한 무게감을 가진 문젯거리로 마지막 페이지까지 긴밀하게 얽히면서 독자들의 미스터리 추리 능력을 한껏 발휘하게 한다. 아니 어쩌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노련한 소설 구성 능력에 휘둘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가진 채 출발해야 한다. 

소설의 주인공인 하쿠로는 38세의 독신 남성으로 동물병원 수의사이다. 소설이 처음 시작하는 부분에서 그는 '두 마리째의 환자'인 갈색 얼룩무늬 수컷 고양이의 찢어진 항문낭을 치료하려던 차다. 한 통의 전화에 고양이 수술이 뒤로 미뤄진다. 전화를 걸어 온 사람은 남동생 아키토와 비밀 결혼을 했다는 가에데라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아키토가 실종되었다는 급박한 소식과 함께 하쿠로에게 도움을 청한다. 하쿠로를 찾아 온 여성의 옷차림은 하쿠로로 하여금 꽤 이지적이고 도덕적인 성품의 여성으로 보였다. 미모도 특출할 정도로 미인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녀의 미모를 직접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지만 하쿠로의 마음이 흔들리면서 점점 윤리적 갈등이 깊어진다고 우회 표현하고 있다. 그녀의 옷차림은 공들여 세팅한 웨이브 머리, 어딘지 모르게 작위적인 그녀의 태도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하쿠로는 적어도 겉으로는 '마음이 올곧고 옳지 않은 일은 정말 싫어하는' 도덕적 성품을 가진 인물이지만 그의 내면에는 매우 세속적인 욕망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그런 하쿠로에게 평일 낮 시간 호텔 라운지에서 당당히 만남을 갖는 비정상적 커플, '나인틴 바'에서 자정이 넘은 시각에 목격되는 호스티스와 고객의 뒷모습 등 마치 불륜이 당연한 일상이 된 듯한 세상 흐름이 자꾸 하쿠로의 의식에 걸려든다.



그러나 히가시노 게이고는 여간 노련한 작가가 아니다. 만일 하쿠로의 속마음과 가에데의 겉모습이 한마음으로 뭉친다면 소설의 향방은 뻔한 삼류 소설로 흐를 위험이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하쿠로가 자칫 위험에 빠지려 할 때마다 '멀리서 울리는 클랙슨 소리'로 퍼뜩 제정신을 차리도록 하는 장치를 아끼지 않는다. 아슬아슬하고 긴장감 넘치게 이끌기 위해서다. 장(章)을 달리하며 하쿠로의 집안 내력이 소개된다. 앞서 언급한 대로 하쿠로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가 다섯 살 때 떠났기에 기억에도 별로 없다. 하쿠로의 아버지는 데시마 가즈키요라는 화가였다. 어머니 데이코의 말에 따르면 무명화가였고 작품도 거의 팔리지 않았다. 

데시마가의 생계를 책임 진 것은 간호사로 일하던 데이코였다. 당시에는 간호사가 아니라 '간호부'라고 했다. 그림 붓을 드는 것 말고는 아무 재주도 없는 가즈키요는 당연히 집안일도 일절 못 했을 것이고, 데이코는 병원 일에 집안일까지 두 가지를 병행하느라 상당히 힘들었을 게 틀림없다. 두 사람이 알게 된 곳은 데이코가 근무하던 병원이었다. 맹장염으로 입원한 가즈키요가 침대에서 쓱쓱 그려낸 그림을 보고 데이코가 저도 모르게 말을 건넸던 게 계기였다.

"처음 네 아버지 그림을 봤을 때 이 사람은 틀림없이 화가로 성공해서 세상에 이름을 떨칠 거라고 생각했어. 보는 눈이 없다는 거 보통 무서운 게 아니라니까."(p.13)

결혼한 지 3년 만에 아이가 태어났다. 하쿠로라는 이름을 지은 것은 어머니 데이코라고 했다. 아버지 가즈키요와는 결국 인연이 없었던 '화백(畵伯)'이라는 호칭의 '백(伯)'이라는 한자에 거장 피카소의 이름 '파블로'를 조합했단다. 반쯤은 오기로 붙인 거야, 라고 데이코는 태연한 얼굴로 하쿠로에게 설명했다.

아버지가 그리는 그림은 하쿠로의 기억에 크게 남아 있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다섯 살 이전의 기억을 상세히 되새길 수는 없을 테니. 그러나 정확하지는 않지만 무슨 도형 같기도 하고 단순한 무늬 같기도 하고, 한참 들여다보면 현기증이 날 것 같은 그림이었단 사실이 떠오를 뿐이다.



게다가 아버지는 아팠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보다 자리에 누워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고 어슴푸레 기억하고 있을 정도니 꽤 오랫동안 앓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하쿠로가 아버지의 병명을 알게 된 것은 하쿠로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였다. 뇌종양이라고 어머니 데이코가 알려 주었다. 데이코가 병원에 일하러 간 동안 하쿠로는 근처에 사는 준코 이모가 맡아 주었다. 준코는 언니와는 달리 전업주부였다. 이모부 겐조는 '대학교 선생'이었다. 무엇을 가르치는 선생인지는 꽤 오랜 동안 알지 못했다. 수학과 교수님이라고 알게 된 것은 중학생이 되고 난 다음이었다. 이후 아버지를 잃은 슬픔도 별로 없었고, 어쩌면 처음부터 없었다고 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하쿠로가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모집과 가까운 곳에 서로 의지하고 살던 어느 날 어머니는 재혼을 한다. 남자는 '야가미 씨'라고 성씨만 들었을 뿐 이름까지는 듣지 못했다. 무척 부자인지 첫 만남에서 하쿠로와 어머니에게 고급 식당의 프랑스 요리를 사준다. 

야가미는 대단한 부자였고, 차도 메르세데스 벤츠 대형차다. 집은 대저택이라고 할 만한 크기다. 그렇게 셋은 맨션에 따로 나와 살았다. 동생 아키토가 태어났을 때 하쿠로는 아홉 살이었다. 어린 하쿠로 입장에서는 갓 태어난 모습이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어쨌든 동생이 태어나 기쁜 일이란 것을 실감했다. 준코 이모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좋겠다' '축하한다'라고 말하고 하쿠로도 순순히 인정했다. 실제로 그 새로운 존재는 매우 신선한 공기를 실어 왔기 때문이다. 야가미가의 분위기가 환해지고 데이코와 야스하루는 항상 명랑함이 넘치는 표정이었다. 함께 살아야 할 하쿠로도 딱히 싫어할 이유는 없었다. 남동생에게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어떻게 지은 이름인지는 알지 못한다. 하쿠로 때처럼 데이코가 '반쯤은 오기로' 붙인 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했다. 

하쿠로를 찾아온 가에데는 전직 일본 항공 승무원이었다. 아키토와 만나 집안에 알리지도 않은 채 두 사람은 비밀리에 결혼을 했고, 자신의 집안이나 이부 형인 하쿠로에게도 연락을 잘 하지 않은 채 오로지 사업에만 몰두했을까. 그래서 그가 실종되자 각종 의문이 끊이지 않지만 속시원히 말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듯하다.



하쿠로 어머니의 '변사'는 소설 전체를 뒤흔든다. 어머니는 하쿠로가 대학 다니느라 독립 생활을 하면서 조금 멀어지긴 했지만 언제나 마음의 고향이지 않은가. 그런데 어느 날 이부 야스하루에게서 전화가 왔다. "하쿠로, 있잖아, 힘들 일이 생겼어. 정말 힘든 일이······." 신음하는 듯한 야스하루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가슴속에 검은 안개가 뭉클뭉클 퍼져 갔다. 무슨 일입니까, 라는 질문이 쉰목소리로 튀어나왔다.

"데이코가, 자네 어머니가······ 죽었어."

머릿속이 하얘지고 눈앞이 일순 캄캄해졌다. 청각도 마비된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처음 귀에 들어온 것은 자신의 목소리였다. 사고가 거의 정지된 상태에서 "왜요? 어떻게요?"라고 묻고 있었다. 

"사고야, 욕실에서 머리를 부딪혔는데 그대로 정신을 잃고 욕조에······, 그래서 익사라고 얘기하고 있어."

"욕실? 어째서요? 왜 그걸 못 막았어요!" 휴대 전화를 움켜쥐고 야스하루를 비난하듯이 소리쳤다. 

"그게 우리 집 욕실이 아니야."

"우리 집 욕실이 아니라니, 그럼 대체 어딘데요?"

"고이즈미 집이야."

헉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고이즈미라면 데이코의 본가, 즉 외할머니가 사는 동네였다.(p78~79)



어머니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는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요한 기둥이다. 16년 전의 뜻하지 않은 사람의 진상을 밝히는 것은 오랜 세월 이들 형제에게 남겨진 마음의 응어리였다. 고전적인 추리 소설의 재미는 아마도 이 부분에서 맛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악인처럼 보였던 누군가는 오히려 도움을 죽는 인물이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뜻밖의 범인이 드러난다. 누가 한편이고 누가 편집증적인 집착을 가진 자인가. "관계가 없다는 근거라도 있나요? 단순히 착한 사람들이라서?"라는 가에데의 말은 독자들의 허를 찌르는 명대사였다고 책의 역자 양윤옥은 「관서의 망」이란 제목의 〈옮긴이의 말〉에서 적고 있다. 역자는 이 작품에서 조연으로 등장한 인물들도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를 더해 주고 있다고 말한다. 매사에 원리 원칙을 따지는 동물병원 보조 간호사 '가게야마 모토미'의 딱 부러진 캐릭터는 특히 매력적이라고 역자는 서술하고 있다. 


저자 : 히가시노 게이고(ひがしの けいご, 東野 圭吾)


일본 추리소설계를 대표하는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추리소설 분야에서 특히 인정받고 있는 그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소재를 자유자재로 변주하는 능력을 가진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그의 작품은 치밀한 구성과 대담한 상상력, 속도감 있는 스토리 전개로 처음부터 끝까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해 독자를 잠시도 방심할 수 없게 만든다. 일본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히가시노 게이고는 첫 작품 발표 이후 20년이 조금 넘는 작가 생활 동안 35편이라는 많은 작품들을 써냈음에도 불구하고 늘 새로운 소재, 치밀한 구성과 날카로운 문장으로 매 작품마다 높은 평가를 얻고 있다.

『비밀』로 1999년 제52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했으며, 2006년 초에는 『용의자 X의 헌신』으로 제134회 나오키상과 제6회 본격미스터리대상 소설부문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2012년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으로 제7회 중앙공론문예상, 2013년 『몽환화』로 제26회 시바타렌자부로상, 2014년 『기도의 막이 내릴 때』로 제48회 요시카와에이지문학상을 수상했다. 이제까지 나오키 상에 『비밀』, 『백야행』, 『짝사랑』(片想い), 『편지』(手紙), 『환야』(幻夜)등 다섯 작품이 후보로 추천받은 바 있으나 전부 낙선하여, 나오키 상과는 인연이 없는 남자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여섯 번째 추천작 『용의자 X의 헌신』으로 결국 상을 거머쥐게 되었다. 2012년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으로 중앙공론 문예상을, 2013년 『몽환화』로 시바타 렌자부로상을 수상했으며, 2014년에는 『기도의 막이 내릴 때』 로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방황하는 칼날』, 『흑소소설』, 『독소소설』, 『괴소소설』, 『레몬』, 『환야』, 『11문자 살인사건』, 『게임의 이름은 유괴』, 『호숫가 살인사건』, 『브루투스의 심장』, 『한여름의 방정식』, 『몽환화』, 『그 무렵 누군가』, 『가면 산장 살인 사건』, 『인어가 잠든 집』, 『살인의 문』, 『백야행』, 『기린의 날개』, 『한여름의 방정식』, 『신참자』, 『탐정 갈릴레오』, 『예지몽』, 『다잉 아이』, 『뻐꾸기 알은 누구의 것인가』, 『학생가의 살인』, 『오사카 소년 탐정단』, 『천공의 벌』, 『붉은 손가락』 등이 있다. 『방과 후』, 『쿄코의 꿈』, 『거울의 안』, 『기묘한 이야기』, 『숙명』, 『백야행』, 『갈릴레오』등 지금까지 20편이 넘는 작품들이 드라마로 제작되었으며 『비밀』, 『변신』, 『편지』,『용의자 X의 헌신』, 『더 시크릿』등 10여편이 영화로 제작되는 등,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역자 : 양윤옥


일본 문학 전문 번역가. 2005년 히라노 게이치로의 『일식』으로 일본 고단샤에서 수여하는 노마문예번역상을 수상했다.

사쿠라기 시노의 『호텔 로열』, 『별이 총총』,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 스미노 요루의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또다시 같은 꿈을 꾸었어』 『밤의 괴물』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눈보라 체이스』, 『그대 눈동자에 건배』, 『위험한 비너스』, 『라플라스의 마녀』, 『악의』, 『유성의 인연』, 『매스커레이드 호텔』, 『매스커레이드 나이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지옥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아사다 지로의 『철도원』 『칼에 지다』, 마스다 미리의 『5년 전에 잊어버린 것』 오카자키 다쿠마의 [커피점 탈레랑의 사건 수첩] 시리즈, [가가 형사 시리즈], [라플라스 시리즈], [매스커레이드 시리즈], 사쿠라기 시노의 『굽이치는 달』 등 다수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겼다.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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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세상과 사랑에 빠지기 열다
헤르만 헤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림원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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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아픔에도 나는 여전히 이 미친 세상과 사랑에 빠져 있다.” 이 책 『미친 세상과 사랑에 빠지기』를 편집해 출간한 폴커 미헬스는 〈서문〉의 첫 문장을 헤르만 헤세가 쓴 유명한 시 「가지치기를 한 떡갈나무」의 마지막 행을 인용했다. 이 시는 온몸 곳곳이 짧게 잘려 나갔음에도 계속 새로운 잎을 틔우는 나무의 예를 들어 자연을 대하는 우리의 이면을 지적하고, 그럼에도 우리에게 자연처럼 용기를 잃지 말라고 격려한 시라는 해석을 덧붙였다. 편집자 미헬스는 이 시를 통해 헤세가 추구한 모든 문학 작품의 단면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헤세는 나무의 가지치기가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음에도, 평생 살아 있는 모든 것과 사랑에 빠졌다고 헤세를 평하고 있다. "그러다 남들이 비통해하거나, 체념하거나, 냉소적으로 변할 때면 오히려 위기를 성장의 기회로 보면서 새로운 저항력을 키우라고 하며, 독자들에게 아무리 힘들어도 버티라고, 그런 상황을 더 나은 성장을 위한 발판으로 삶으라고 북돋았다."고 말한다. 

미헬스의 주장은 「가지치기를 한 떡갈나무」가 쓰인 시점을 생각해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1919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항복으로 끝나고, 패전국 독일의 청춘들은 나라와 자신들의 앞날이 너무도 고통스러우리라고 매우 우울한 분위기였을 것이다. 헤세는 독일뿐만 아니라 전후 모든 나라의 젊은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날마다 야만의 고통을 견뎌 내며 또다시 저 빛 속으로 얼굴을 내민다. 세상은 죽도록 조롱했지만, 내 본질은 파괴될 수 없는 것. 나는 만족하고 화해하며 참을성 있게 새로운 잎을 틔워 내"듯이 나무에 비유적으로 오늘의 고통을 참고 견디고, 용기를 내라고 주문한다. 

이런 재생력은 헤세의 문학에서 여러 방식으로 형상화되어 있다고 미헬스는 강조한다. 심지어 그런 힘은 그의 정치적, 문화비평적인 글들과 독자 편지에 대한 무수한 답장들에서도 주된 모티브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에 미헬스는 이 책 『미친 세상과 사랑에 빠지기』에서는 헤세의 성찰과 편지 중에서 특히 그런 세계관이 잘 표현되어 있는 것들을 뽑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이 책을 새롭게 엮어 선보인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미헬스에 따르면 국경과 세대를 초월해 헤세를 현재의 개인적 생활 방식의 선두 주자로 만들어 준 것도 바로 그런 글들이다. 왜냐하면 헤세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진지하고 중요하고 진기한 존재로 받아들이고, "세상의 현상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반복되지 않고 오직 단 한 번만 그렇게 교차되는 점"(『데미안』)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사이 헤세의 전 세계적인 부흥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이 세상의 유일무이한 개인이 자기 속의 잠재력을 충분히 펼칠 수만 있다면 인간의 삶과 문화는 더욱 풍요롭고 다양해지리라는 생각이 큰 몫을 차지한다.

헤세가 죽고(1962) 몇 년 뒤 미국에서는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던 젊은 세대들이 헤세를 발견해 냈는데, 1970년대 이후 그것이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굳어진 것이다. 독일 문학사에서는 유례가 없던 일이었다. 지금까지 헤세의 책은 60여 개 언어로 번역되넝ㅆ고, 세계적으로 1억 부 이상이 팔렸다. 그런데 헤세 생전에 발표된 작품은 전체의 절반이 채 되지 않는다고 미헬스는 지적한다. 방대한 유고는 1965년부터 단계적으로 발굴되었다. 색감이 다채롭고 표현력이 강한 3,000여 점의 수채화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다 오래지 않아, 총 20권에 1만4,000여 페이지 분량의 첫 번째 전집이 출간되었는데, 거기엔 그의 중요한 문화 비평 및 정치적 고찰, 자전적 저작, 칼럼, 일기까지 총망라되었다고 미헬스는 설명한다. 독일 문학을 새로운 차원에서 풍성하게 하는 사건이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미헬스는 헤세가 생전에 이미 나이를 떠나 기성세대의 경직된 생활 방식에 저항하는 젊은 작가였다고 평가한다. 그 자신도 부모 집으로 대변되는 세상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했듯이, 그의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들도 자신의 내적 성향에 반하는 온갖 형태의 외적 강요에 저항한다는 것. "중요한 한 것은 개인적인 것이다!" 삶을 긍정하는 이 모토는 적극적이고 지혜롭고 책임감 있는 사회봉사를 위한 전제 조건이라고 미헬스는 언급한다.



이 책은 헤세의 이러한 힘과 세계관이 잘 표현되어 있는 글들을 모아 엮었다. 삶의 현장에서 길어 올린 헤세의 사유의 정수가 담긴 명문장들을 엄선했다. 미헬스는 최초의 헤세 전집을 발간하고 평생 헤세의 수많은 저작들을 연구 및 편집한 이 분야의 권위자이다. 국경과 세대를 초월해 헤세를 오늘날의 상징적 위치에 있게 만든 것은 바로 이러한 글들이라고 〈서문〉에서 밝힌다. 번역은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등 헤세의 대표작을 비롯해 카프카, 무질, 프로이트, 뷔히너와 같은 수많은 독일 고전들을 유려하게 번역해 온 박종대가 맡았다.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싯다르타』 등 세 작품은 방황하는 청춘을 위한 헤르만 헤세의 내면 탐구 3부작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데미안』은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헤르만 헤세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져 있다. 『유리알 유희』 등 세계문학의 기념비적 걸작을 남기며 독일 문학의 거장으로 우뚝 선 헤르만 헤세는 그의 사후 60년이 지나도 여전히 독일은 물론 세계 모든 지역에서 청소년들의 필독서로 지정받고 있을 정도다. 고통 속에서도 삶을 사랑하고, 위기를 성장의 기회로 보았던 헤세의 재생력은 그의 문학과 삶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는 개인의 개성을 말살하고 획일화하려는 사회의 모든 시도에 대해 격렬히 저항했고, 외부의 평준화 압력에 맞서 자기만의 개인적이고 고유한 영역을 지키라고 끊임없이 말했다. 이 일은 헤세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패전국이 된 어수선한 독일의 분위기에서 싹트는 전체주의에 맞서 스위스로 망명한 일도 그의 세계관과 맞물린 것이 아닌가 쉽게 짐작케 한다.

자신의 길을 확신하지 못하는 한 청년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한창 성장 중인 청년이 고유한 개인이 되려는 강한 열망을 갖고 있고, 그래서 평균적이고 일상적인 삶에서 강하게 이탈할수록 남의 눈에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며, “내면에 깃든 이상과 꿈이 시들지 않도록 세계에 맞서 자신을 지키라”(p.22~23)고 조언한다.



또 다른 글에서는 “올바른 길로 나아가는 방법”은, “자기 자신을 깨닫되 스스로에 대해 판단하거나 스스로를 바꾸려 하지 말고, 우리 속에 예감의 형태로 미리 그려져 있는 삶의 모습으로 최대한 가깝게 다가가는 것”(p.34)이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삶의 표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삶은 우리 각자에게 고유한 임무를 맡길 뿐”이기 때문이다. 그 임무를 따라가는 과정은 비록 쉽지 않지만, 그렇기에 “자신의 삶”이란 “언제나 고되면서도 아름다운 것”이라고 헤세는 말한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헤세 자신이 그렇게 살기 위해서 노력했다. 헤세의 작품들이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은, 그의 글 속에 그의 삶 자체가 신실하게 녹아 있기 때문이다. 미헬스는 작가로서 보기 드문 헤세의 미덕으로 무엇보다 그의 “인간적인 고결함”을 꼽으며 “그는 작가로서 말한 대로 살았다. 세상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삶의 마지막까지 상처받으며 살았다”고 말한다. “그의 삶과 작품은 마지막 순간까지 나머지 없이 딱 떨어지는 방정식과 비슷해 보인다.” 헤세는 삶과 글이 분리되지 않은 작가였다. 그의 삶이 고통스러웠던 것은 그가 세상 속에서 부단히 자신의 신념대로 살고자, 작가로서 자신의 고유성을 지키며 살아가고자 노력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러한 삶을 사랑하며 나아가고자 투쟁했던 헤세의 생생한 육성이 이 책에 담겨 있다. 그 기록들이 안겨 주는 격려와 위로가 독자들에게도 생생히 가닿기를 바란다고 미헬스는 기대한다.

헤세의 견해에 따르면, 오늘날 "정치권력이 있는 곳"에서는 "정치적 이성"이 거의 작동하지 않기에 "재앙을 막거나 완화하려면 비공식적인 집단의 지성이 유입"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정신적 자극은 헤세의 전 작품에 스며들어 있다고 미헬스는 역설한다.



문명 비판적인 『페터 카멘친트』에서부터 학업에 치인 한 학생의 비극적 삶을 다룬 『수레바퀴 아래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토마스 만이 그 감동적 전율을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 슬픔』에 비교한 『데미안』, 부르주아지의 해체를 다룬 『황야의 이리』, 그리고 모든 학제의 통합적 유토피아를 꿈꾼 『유리알 유희』에 이르기까지 조목조목 작품과 해석을 곁들이며 증명하듯 작품의 성격을 정리해준다. 『유리알 유희』에서 주인공은 대안적 교육 이상향 역시 관료주의와 비사회적 자기 목적에 매몰되기 시작하자 그곳을 떠난다. 

미헬스는 지금껏 거의 다섯 세대 전부터 헤세를 읽는 독자층은 주로 14~35세 사이의 젊은이들이다. 아직 이상을 꿈꾸고, 사회에서 되도록 자신에게 의미 있는 일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 말이다. 이들은 헤세의 작품에서 격려와 응원을 느낀다. 그의 작품들은 외부의 평준화 압력에 맞서 자기만의 개인적이고 고유한 영역을지키라고 끊임없이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시기를 지나 양보와 굴복 없이는 버틸 수 없눈 생업 전선에 뛰어들면 많은 사람이 헤세를 불편하게 여긴다. 그의 책을 읽으면 자신이 예전의 이상을 배신하고 있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러다 가식적 삶을 살았던 생업 전선에서 은퇴하면 헤세와 청춘의 선한 의지로 다시 돌아가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것이 헤세의 독자 통계에서 청년층과 노년층이 최상위를 차지하고, 반면에 소의 사회에서 기득권을 형성하는 연령대는 거의 보이지 않는 이유이다. 헤세 저술의 테마는 정치, 문학, 음악, 회화, 종교, 정신분석, 교육, 행복, 유머, 사랑, 청춘, 노년, 죽음에 이르기까지 굉장히 다채롭다. 게다가 그의 인상적인 자연 및 풍경 묘사와 여행기는 무척 간명하고 사실적이어서 따로 해석에 의지하지 않고도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그의 책 속에 꾸며 낸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건 헤세가 우선적으로 대중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글을 쓰기 때문이라고 미헬스는 분석한다. 헤세는 이런 식으로 삶과 시대가 개인에게 부여한 여러 문제들, 그러니까 재능 있고 양심적인 사람이라면 더더욱 어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는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한다. 그는 모든 걸 직접 체험했고, 엄청난 고통 속에서 글을 쓸 때가 많았기에, 복잡한 이슈도 지극히 단순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고 풀이한다.



한창 성장 중인 청년이 고유한 개인이 되려는 강한 열망을 갖고 있고, 그래서 평균적이고 일상적인 삶에서 강하게 이탈할수록 남의 눈에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나는 당신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당신이 그 필요성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게 당신의 ‘광기’를 세계에 강요하거나 세계를 혁명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건 당신의 내면에 깃든 이상과 꿈이 시들지 않도록 세계에 맞서 자신을 지키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꿈의 아성인 우리의 어두운 내면세계는 끊임없이 위협받고, 동료들에게 조롱받고, 교육자들에게 기피되고 있습니다. 그건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만들어져 가는 과정입니다.(p.22~23)


저자 :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년 독일 남부 뷔르템베르크의 칼프에서 태어나 목사인 아버지와 신학계 집안의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1890년 신학교 시험 준비를 위해 괴핑엔의 라틴어 학교에 다니며 뷔르템베르크 국가시험에 합격했다. 1892년 마울브론 수도원 학교에 입학했으나 기숙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시인이 되기 위해 도망쳐 나왔다. 1899년 낭만주의 문학에 심취하여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와 산문집 《자정 이후의 한 시간》을 출간했다.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인정을 받았고 문단에서도 헤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후 1904년 장편 소설 《페터 카멘친트》를 통해 유명세를 떨치면서 문학적 지위도 확고해졌다. 같은 해 아홉 살 연상의 피아니스트 마리아 베르누이와 결혼했으나 1923년 이혼하고 스위스 국적을 취득했다. 1906년 자전적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를 출간했고, 1919년에는 자기 인식 과정을 고찰한 《데미안》과 《동화》, 《차라투스트라의 귀환》을 출간했다. 인도 여행을 통한 체험은 1922년 출간된 《싯다르타》에 투영되었으며, 1946년 《유리알 유희》로 노벨문학상과 괴테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1962년 8월 9일 뇌출혈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기실현을 위해 한시도 쉬지 않고 꾸준히 노력했다.


엮은이 : 폴커 미헬스


1943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마인츠 대학에서 의학과 심리하긍ㄹ 공부한 후 독일의 주어캄프 출판사와 인젤 출판사에서 독일 문학 전문 편집자로 일했다. 특히 헤르만 헤세의 유고집을 출판하는 일에 헌신했으며, 20권으로 된 최초의 헤세 전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1990년에는 헤세의 고향 칼프에 헤세 박물관을 건립하는 일을 담당했ㅎ으며, 출판사를 퇴직한 후에도 계속 헤세의 작품을 연구하고 편집하는 일에 몰두했다. 


역자 : 박종대


성균관대학교 독어독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쾰른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사람이건 사건이건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이면에 관심이 많고, 환경을 위해 어디까지 현실적인 욕망을 포기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자신을 위하는 길인지 고민하는 제대로 된 이기주의자가 꿈이다.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의 『세상을 알라』, 『너 자신을 알라』, 『사냥꾼, 목동, 비평가』 , 『의무란 무엇인가』, 『인공 지능의 시대, 인생의 의미』를 포함하여 『1일無식』, 『콘트라바스』, 『승부』, 『어느 독일인의 삶』 ,『9990개의 치즈』,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등 1백 권이 넘는 책을 번역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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