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도록 뮤지컬
이수진 지음 / 테오리아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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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는 뮤지컬과 친해진 지 10년도 채 안 된 풋내기이긴 하지만 공연 예술이란 점과 대중적이라는 이유로 관심을 갖게 됐다. 조금 알게 되면서부터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거의 가보질 못해 실제 뮤지컬 관람 횟수도 그리 많지 않다. 특히 독자는 호흡기 만성질환이 있어 의사로부터 사람 많은 곳은 가급적 피하라는 주의를 받아서 뮤지컬 공연을 직접 본 지가 3년을 훌쩍 넘긴 것 같다. 그래도 뮤지컬 공연 포스터나 광고를 접할 때는 가슴이 설레고 꼭 가보고 싶다는 욕망이 일 때가 많다. 콘서트는 CD나 음원을 구매해 들으면서 아쉬움을 달래기도 하지만 뮤지컬은 그마저도 어렵다. 연극처럼 무대 아래서 직접 봐야 하는 즐거움이 있는데 연극을 영화로 보는 것처럼 재미도 덜하다. 이 책 『밤새도록 뮤지컬』은 조그마한 책자로 여러 편의 뮤지컬 해설 모음집에 가깝다. 뮤지컬 평론가 이수진이 펴낸 '뮤지컬을 향한 사랑'을 수줍게 고백하는 에세이이기도 하다다.

저자 이수진은 스스로를 '뮤지컬 덕후'라고 말한다. 일주일에 9편의 공연을 보러 다닐 정도로 뮤지컬에 푹 빠져 살았다는 것. 미국에서는 공연에 중독된 사람들을 '씨어터고어(Theatergoer)'라고 한다면서 뮤지컬에 중독된 사람을 우리나라 말로 굳이 번역하자면 '뮤지컬 덕후'가 적절할 것 같다는 고백을 〈작가의 말〉을 통해 밝힌다. 저자는 특히 자신이 사랑한 열다섯 편의 작품을 이 책에서 다룬다. 이 작품들 속에는 여성, 성 소수자, 생의 끝에 선 노인 등 세상의 주류에서 벗어난 다양한 군상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원래 뮤지컬은 오페라에서 파생된 장르라고 한다. 당초 뮤지컬의 명칭은 '뮤지컬 코메디' 또는 '뮤지컬 플레이'의 약칭이다. 뮤지컬이 스토리가 있는 연극과 비슷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명칭이다. 19세기 영국에서 탄생하였는데, 그 근원은 유럽의 대중연극이다. 1728년 이와 형식이 비슷한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가 런던에서 상연되었는데, 조지 에드워드(George Edwardes)가 제작한 〈거리에서(In town)〉(1892년 초연)를 첫 뮤지컬로 보는 것이 정설이라고 한다. 특히 뮤지컬은 대중극이라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뮤지컬의 기원과 연관이 있으며, 뮤지컬이 상업적 공연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는 데에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 귀족 중심의 오페라와 구분되기도 한다.

 


 

미국은 최초의 뮤지컬 코메디를 탄생시켰다고 백과사전에 등재돼 있다. 19세기 미국에서 성행한 벌레스크(해학적인) 희극에다, 유럽에서 발달한 오페레타를 조화시킨 것이다. 작곡가 제롬 칸, 대본에 리처드 로저스, 작사자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 등이 등장했다. 이들은 미국인의 꿈과 향수를 제재로, 미국의 민요와 흑인음악의 멜로디, 그리고 리듬을 적극 수용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 일환으로 미시시피강을 내왕하는 쇼보트를 무대로 인생의 애환을 그렸는데, 바로 〈쇼보트〉(1927)다. 이것은 오늘의 뮤지컬의 기초를 다졌다고 두산백과 사전은 풀이하고 있다. 또 G.거슈윈은 G.S.카프만과 리스킨드의 대본으로 〈나는 너를 위해 노래한다〉(1931)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이 작품은 문학적 가치가 높은 뮤지컬을 시도하였다. 거슈윈은 만년에 흑인생활을 리얼하게 그린 〈포기와 베스〉(1935)를 만들었는데, 경쾌한 리듬과 나른한 멜로디를 특징으로 하는 노래를 썼다. 〈포기와 베스〉는 한국에서의 본격적인 서구식 뮤지컬의 첫 작품이다. 1966년 동랑레퍼토리극단에서 도입, 시도했다. 이 작품은 앞서 1950년대 말 드라마센터에서 공연하였으나, 컷이 많고 음악이 제대로 살지 못하여 본격적인 뮤지컬이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저자 이수진은 젓가락을 들 힘이 있을 때까지 극장에 가고 싶다는 ‘뮤덕’답게 이 책을 무대 삼아 주인공들과 함께 마음껏 노래 부르고 춤을 춘다. 독자들은 책을 읽으며 마치 극장의 한쪽에서 뮤지컬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작은 감동을 느낄 수도 있다. “뮤지컬 덕후에게는 작품을 추억하게 하고, '뮤린이'에게는 작품을 보는 눈을 알려주는 뮤지컬 입문서, 해설서”로서 적절하다. 저자의 뮤지컬에 대한 남다른 지식과 사랑이 듬뿍 담겨있는 책이다. 이 책에는 뮤지컬 덕후답게 ‘뮤지컬 넘버’에 대한 설명도 깔끔하다.

 


 

미국은 최초의 뮤지컬 코메디를 탄생시켰다고 백과사전에 등재돼 있다. 19세기 미국에서 성행한 벌레스크(해학적인) 희극에다, 유럽에서 발달한 오페레타를 조화시킨 것이다. 작곡가 제롬 칸, 대본에 리처드 로저스, 작사자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 등이 등장했다. 이들은 미국인의 꿈과 향수를 제재로, 미국의 민요와 흑인음악의 멜로디, 그리고 리듬을 적극 수용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 일환으로 미시시피강을 내왕하는 쇼보트를 무대로 인생의 애환을 그렸는데, 바로 〈쇼보트〉(1927)다. 이것은 오늘의 뮤지컬의 기초를 다졌다고 두산백과 사전은 풀이하고 있다. 또 G.거슈윈은 G.S.카프만과 리스킨드의 대본으로 〈나는 너를 위해 노래한다〉(1931)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이 작품은 문학적 가치가 높은 뮤지컬을 시도하였다. 거슈윈은 만년에 흑인생활을 리얼하게 그린 〈포기와 베스〉(1935)를 만들었는데, 경쾌한 리듬과 나른한 멜로디를 특징으로 하는 노래를 썼다. 〈포기와 베스〉는 한국에서의 본격적인 서구식 뮤지컬의 첫 작품이다. 1966년 동랑레퍼토리극단에서 도입, 시도했다. 이 작품은 앞서 1950년대 말 드라마센터에서 공연하였으나, 컷이 많고 음악이 제대로 살지 못하여 본격적인 뮤지컬이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저자 이수진은 젓가락을 들 힘이 있을 때까지 극장에 가고 싶다는 ‘뮤덕’답게 이 책을 무대 삼아 주인공들과 함께 마음껏 노래 부르고 춤을 춘다. 독자들은 책을 읽으며 마치 극장의 한쪽에서 뮤지컬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작은 감동을 느낄 수도 있다. “뮤지컬 덕후에게는 작품을 추억하게 하고, '뮤린이'에게는 작품을 보는 눈을 알려주는 뮤지컬 입문서, 해설서”로서 적절하다. 저자의 뮤지컬에 대한 남다른 지식과 사랑이 듬뿍 담겨있는 책이다. 이 책에는 뮤지컬 덕후답게 ‘뮤지컬 넘버’에 대한 설명도 깔끔하다.

 


 

‘뮤지컬 넘버’는 뮤지컬 속 노래를 말한다. 뮤지컬을 몇 번 보기 전에는 독자도 뮤지컬 속에 나오는 음악에 번호를 붙여 표현하는 것으로 알았다. 알고 보니 거꾸로 알았다. 뮤지컬을 제작할 때 극의 이야기를 정하고 특정 장면의 노래를 숫자로 정한 뒤 이후에 제목을 붙여 만든다고 한다는 것. 뮤지컬의 노래를 ‘넘버(number)’라고 말하는 것이다. 뮤지컬 넘버는 뮤지컬을 시작하는 ‘오프닝 넘버’나 뮤지컬의 하이라이트 부분인 ‘프로덕션 넘버’등이 있다. 각 뮤지컬을 대표하는 뮤지컬 넘버는 극 중 이야기와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은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소설이 원작이지만 워낙 명성 높은 작품이라 영화와 뮤지컬 등으로 타 장르에서도 제작돼 큰 인기를 끌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3년 초연됐다고 알려지고 있다. 지금도 뮤지컬 〈레 미제라블〉은 서울과 지방에서 공연이 진행 중이다. 원작은 독자들도 읽어보았을 빅토르 위고의 '불후의 명작'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지배계층에 의해 힘든 삶을 살아가야 했던 일반 시민들이 1832년에 지배계층을 상대로 일으킨 ‘민중 봉기’에 대한 이야기가 뮤지컬로 만들어졌다. 뮤지컬 〈레 미제라블〉에서 불리는 '민중의 소리가 들리는가'라는 합창이 있다. 이 합창은 실패할 것을 알지만 옳은 길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구슬프면서도 힘찬 느낌을 주어 굳센 의지를 표현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 노래를 '뮤지컬 넘버'라고 한다. 대한민국의 뮤지컬은 한국전쟁 후 연극과 함께 시도됐지만 제대로 된 공연이 시작된 것은 1980년대 이후라고 한다. 창작곡도 이 무렵 많은 명작을 남긴다. 〈아리랑, 아리랑〉(1988), 〈아리송하네요〉(1989), 〈그날이 오면〉(1991), 〈꿈꾸는 철마〉(1992) 등이 공연됐다고 전해진다. 특히 〈명성황후〉는 굉장한 인기와 한국 뮤지컬을 한 단계 끌어올린 뮤지컬 명작으로 꼽히고 있다.

 

 

첨예한 디지털화로 경제사회적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21세기 사회에서 뮤지컬 산업은 오히려 비복제의 문화적 특성이라는 아날로그 요소를 근간으로 안정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다. 무대 위에서 반복적으로 실연되는 공연 산업의 예술적 형태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장기 상연을 통해 규모의 경제를 구현하는 상업성을 동시에 이루는 뮤지컬은 근본적으로 예술성과 대중성의 합일을 지향하는 태생적 특성이 반영된 문화 산업 분야라 할 수 있다. 뮤지컬의 이러한 본질적 속성은 예술적 체험에 무게를 두는 다른 공연예술 생산물들과 차별되는 독자적인 특성을 만들어 냈으며, 더불어 다양한 대중성의 반영과 형식적 재구성의 전통을 일궈내는 문화 산업적 환경을 잉태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뮤지컬의 본산지 19세기 영국에서는 산업 혁명의 영향으로 많은 돈을 모은 시민들이 새로운 지도층으로 성장했고, 이들이 이전 귀족과는 다른 예술을 원했기에 대중성 있는 뮤지컬이 탄생한 것처럼 우리도 산업화 이후 중산층이 늘어난 것과 때를 같이하는 점을 비춰볼 때 맥락을 같이 한다고 풀이할 수 있을 듯하다. 사회적 풍요가 자연스럽게 대중적 예술로 관심이 높아지는 현상이 매우 비슷하다. 지금 뮤지컬은 대중 예술의 총아다.

뮤지컬은 또 내용적 구분에서 사실주의 무대라기보다는 낭만주의 연극에 가까운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낭만주의 연극에서는 이성보다 감성이, 정형보다는 정열이, 사실성보다는 환상성이 우위를 차지하는 경향이 있는데, 뮤지컬이 여타 공연예술 장르에 비해 화려하고 낙천적이며, 환상성을 띠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낭만주의적 성향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저자 이수진은 뮤지컬 공연장에 가면 화려한 무대와 배우의 멋진 연기 등 볼거리가 있고, 때로는 감미롭고 때로는 격정적이며 때로는 웅장하고 때로는 아련한 멜로디와 노랫말의 넘버도 있다고 말한다. 뮤지컬 〈원더풀 타운〉에는 ‘남자에게 차이는 백 가지 지름길’이라는 넘버가 나온다. 소위 여성지에 많이 실리던 이른바 남자 잡는 법을 비튼 제목이다. 뮤지컬을 즐기는 데도 백 가지 지름길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중 ‘뮤지컬 넘버’라는 지름길로 뮤지컬을 즐기러 간다.

저자에 따르면 모든 뮤지컬은 자신만의 ‘뮤지컬 넘버’로 관객에게 말을 건넨다. 〈라카지〉의 드랙퀸 앨빈은 세계가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자신을 당당하게 여기고 숨지 않으며 세상에 당당하게 소리친다. “이게 바로 나”라고. 〈렌트〉의 모린과 조안은 각자의 다른 애정관을 두고 자신의 사랑법이 옳다고 주장한다. 두 여성이 이 노래를 부를 때의 두 인물 사이의 아슬아슬한 긴장감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들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빌리 엘리어트〉에서 치매 걸린 빌리의 할머니는 안개 낀 듯 희미한 기억 속에서 다시 인생을 산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들과 만나지 않았을 사람과 마음 주지 않았을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살림할 돈으로 위스키와 맥주를 샀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던, 할머니와 결혼한 적도 없었던 그 할아버지에 대해 노래한다.

〈서편제〉에서 오로지 송화만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예술을 완성시키는 인물이다. 무대 위 송화는 소맷자락을 거두듯이 모든 원망을 거두며 눈을 뜨고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심봉사 눈 뜨는 대목’을 부른다. 그리고 〈원더풀 타운〉에서 루스는 좀처럼 낫지 않는 남자들의 불치병, 이제는 최소한 병명은 붙은 유구한 역사의 병을 퇴치할 노래를 부른다. 맨스플레인이라는 병을 퇴치할 노래 ‘남자에게 차이는 백 가지 지름길’을. '뮤지컬 넘버'에 대한 저자의 애착은 강하다. "뮤지컬의 매력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가운데 절대 놓칠 수 없는 한 가지는 ‘뮤지컬 넘버’다." 저자는 이 책에서 열다섯 곡의 ‘뮤지컬 넘버’ 속으로 독자들을 끌어들인다. 그리고 마치 무대에서 춤추고 노래 부르듯 독자와 끊임없이 교감한다.

 


 

그토록 미워했지만 할아버지와 춤을 추던 순간만은 할머니의 기억 속에 또렷이 각인되어 있고, 그 기억만큼이나 많은 댄서들이 할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할아버지처럼 담배를 들고 창문을 넘어 들어와 할머니와 춤을 추고 다시 하나씩 둘씩 창문을 넘어 나가버린다. 연기처럼. 할머니의 기억처럼.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할머니의 지나온 인생이,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이 연기처럼 흩어진다. 하나의 넘버로 치매에 걸린 할머니의 인생이 완벽하게 그려진다.(p.94)

 

이 뮤지컬(서편제)에서 오로지 송화만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예술을 완성시키는 인물이다. 눈이 멀어서도 소리꾼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는 유랑꾼이다. 그런 인물의 삶이 어찌 어린 소녀처럼 긴 소맷자락 안에 갇히랴. 누구보다 큰 질곡을 겪으면서도 쓰러지지 않은 강한 인물이건만 송화를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그를 망가뜨리면서도 사랑한다고 부르짖던 그 사람들의 시선 안에 갇힌다. 이 뮤지컬을 볼 때마다, 살포시 송화의 소맷자락을 올려주고 싶어진다. 그때는 송화가 눈을 번쩍 뜨리라.(pp.115~116)

 

그 ‘주말의 명화’나 ‘토요 명화’ 시간에 가끔 뮤지컬 영화들을 방영해주곤 했다. 그런 날이면 부모님과 함께 나란히 앉아 밤늦도록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영화가 뭔지도 잘 몰랐던 어린 시절이라 왜 서양 사람들은 총천연색의 화면 속에서 사랑 고백을 노래로 하는지 궁금했었다. 부모님이 어린 자식을 재우지 않고 맘 놓고 보여줄 수 있는 영화 대부분이 뮤지컬 영화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좀 더 철이 든 후에야 알게 되었다.(pp.140~141)

 

저자 : 이수진

 

어린 시절엔 진짜 믿었다. 주인공이 길에 나서서 노래를 부르면 갑자기 구름이 걷히고 모든 사람이 웃는 얼굴로 연주하고 함께 노래를 부르는 세상이 진짜 있다고 믿었다. 나도 그런 세상에 끼고 싶어 뮤지컬에 입문했다. 하지만 정작 웃을 일이 별로 없는 작품을 간혹 쓰고, 번역도 하고, 공연평도 하면서 뮤지컬 동네에 한 발 슬쩍 걸친 삶을 살고 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100년을 개괄한 《뮤지컬 이야기》를 공저로 쓴 일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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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성당, 거룩한 신비의 빛
강한수 지음 / 파람북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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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통해 사진으로만 봤던 유럽의 성당들을 실제로 처음으로 독자가 본 것은 지난 90년 대 해외여행 자유화조치 이후였다. 사실 산업화 시대에 해외 여행과 비행기를 타고 여행 간다는 것은 꿈으로 그리기만 했을 뿐 실제 다녀 온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산업화가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민주화도 차츰 성숙되어 가던 90년 대 초 공산주의 붕괴에 따른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 승리감에 젖어 있을 무렵이다.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GDP)이 2만 달러를 넘었다고 했고, 3만 달러를 바라보는 시대였다. '중진국'을 넘어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길목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들떠 흥분하기도 했다. 남북통일도 독일처럼 무력이 아닌 평화적으로 가능할 것도 같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군사 독재를 넘어 처음으로 민간 정부라는 김영삼 대통령은 과거 군부독재와의 단절을 선언하고 많은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쉽지 않을 거란 금융실명제도 철저한 보안 속에 성공적으로 달성한 시대이기도 했다. 그때 국민들을 더욱 흥분하게 했던 일이 해외여행 자유화조치였다. 외국 여행 가서 쓸 수 있는 돈(환전)도 5,000달러에서 10,000달러로 상향 조치했다. 너도 나도 해외 여행을 꿈꾸고 대다수 국민이 해외 여행을 다녀올 정도로 해외 여행은 필수 요소가 될 무렵이다.

시류에 편승해 독자도 유럽 여러 나라를 묶어 여행을 다녀오는 일정으로 첫 해외 여행을 갔다. 꿈에 그리던 유럽이라서 들뜬 마음도 있었지만 처음 가본다는 의미에서 훨씬 힘들기도 했다. 말(영어)도 수준에 미달해서 어쩔 수 없이 패키지 여행을 하기로 했고, 그만큼 비쌌지만 처음이라 비싸다는 생각보다는 돈의 여부에 관계 없이 가기로 했다. 여행사가 미리 나눠준 사전 지식을 위한 팸플릿 등을 순식간에 복 또 본 기억도 난다. 지금 생각하니 유럽의 유명한 관광지 중심이었다. 처음 유럽에 나가는 터라 유적이나 유명 관광지가 훨씬 매력적이고 아름답게 보였음은 물론이다. 지금이라면 여행사를 통한 패키지 여행보다는 친구나, 가족, 연인 등이 먼저 떠오르겠지만 그때는 앞뒤 가릴 상황이 되지 못했다. 이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밀라노와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북부 지역을 관광하다가 일정 중에 있던 밀라노 대성당이었다. 차에서 내려 유명한 극장(스칼라 극장이라고 했던 것 같다) 근처를 5분 정도 걸였다. 그 골목길을 돌아 나온 순간 눈앞에 펼쳐진 건축물에 그야말로 입이 쩍 벌어졌다. 밀라노 대성당이라고 하는데 이게 과연 사람이 지은 건물인가 할 정도로 크고 높았다. 거기에 장식마저 화려했다. 건물을 보고 압도 당한 느낌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 성당은 건축미뿐만 아니라 내부 장식이나 꾸밈이 매우 아름답다고 했다. 그러나 불행이었던 것은 내부 관람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공사 중이라는 이유라고 가이드가 설명했다. 아닌 게 아니라 외부에도 위쪽 부분에 가림막을 쳐두고 있었다. 위쪽 외부 공사는 낙석 위험이 있어서 아예 몇m쯤 떨어져야 한다는 안내 표지판도 있었다. 지금도 있겠지만 광장의 동상 안쪽으로 출입 저지선을 쳐놓고 시민들의 접근을 막고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성당 내부에 별 관심이 없었던 때라 외관이 아름다운 더 많은 것을 보기를 원했기에 섭섭하지는 않았다. 성당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깊은 생각도 못했기에 오히려 광장 옆에 바로 붙어 있는 실내 시장에서 구경하는 것이 더 즐거웠다. 유럽의 성당은 이때의 일정으로 몇 개 더 있었고, 다른 곳은 내부에도 들어가 봤지만 상상보다는 크고 엄숙한 분위기였다. 크게 떠들면 안 된다는 말과 사진 촬영 금지라는 가이드의 주의 사항을 듣지 않아도 분위기 자체가 무겁고 약간은 가라앉은 듯한 분위기였다. 그냥 구경만 하는 식으로 돌아다녔지만, 이 때 한 가지 깊게 머릿속에 박힌 것은 성당의 건축 기간이다. 기본 200년에서 400년이 넘은 것도 많았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아파트 단지 건설에도 2~3년이면 끝낸다는 '빠른 공사'를 장점이는 사실이 돋보일 때이기에 유럽의 성당 규모는 물론 건축 기간도 비현실적이라고 느꼈다. 독자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기에 더 성당을 보러 다니지도 않았기에 유럽의 성당에 대한 짧은 지식은 거기서 멈췄다. 그러나 이 책 『고딕성당, 거룩한 신비의 빛』을 읽으면서 독자의 단견과 이해 부족을 절감했다. 지금 유럽 문명이 가장 앞선 문명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상태에서 왜 그들은 그렇게 건축에 큰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을까? 이 책은 강한수가 오랫동안 탐구하고 연구한 성당 건축 연구의 일면을 독자들이 속속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쓰였다.

가톨릭 신자가 아닌 독자도 한 번 읽음으로써 일부 암기도 가능할 정도로 이해하기 쉽다. 사실 저자는 '건축가'가 아닌 '신부'이다. 의정부 교구 소속의 사제로 〈교구주보〉에 3년 간 연재해온 글을 책으로 엮었다. 전작 『로마네스크 성당, 빛이 머무는 곳』이 1부라면, 이 책 『고딕성당, 거룩한 신비의 빛』는 2부이자 완결편이다. 저자가 이 책을 쓰기에는 그럴 만한 이력이 있다. 사제로서는 독특하다고 할 만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데, 신학대학에 들어가기 전 서울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국내외 건축현장에서 활동했던 경력이 그것이다. 이후 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을 로마 그레고리아노대학교에서 교의신학을 공부하며 건축과 신학의 내밀한 관계를, 특히 중세 동안 진행되어온 성당 건축에 스며있는 신학적 배경과 건축공학은 물론 역사, 철학, 문화, 예술적 비의를 해독하는 안목을 갖추었다.

 


 

이 책은 성당 건축 양식 중 로마네스크에서 이어지는 고딕 양식의 과도기에서 후기 고딕에 이르는 건축 양식의 흐름을 정리하고 있다.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의 지역적 문화적 특성이 성당 건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저자는 서로마 멸망 후 새로운 권력 재편 과정에서 중세 유럽의 성당들은 당대의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맥락,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에게는 당연히 아는 만큼 보일 수밖에 없으며, 알게 될수록 이제까지 그저 경건함과 웅장함의 이미지 속에 감추어졌던 깊은 의미들이 그 실체를 드러내 보여준다고 주장하고 있다. 저자는 특히 이 부분을 세심하게 다루면서도 성당의 배치와 구조와 변화의 양상 등 신학적이며 건축적인 관점에서의 이해를 친절하게 돕고 있다.

이 책을 따라가다 보면 웅장한 중세 유럽 고딕 성당들이 왜 그런 형태를 하고 있는지, 외부와 내부 구조의 원리가 무엇인지, 천장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으며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그 낱낱의 의미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조금 더 예민한 사람이라면 외관을 보고 내부를 상상할 수도 있다는 점에 저자는 주목하고 있다. 저자는 로마네스크에 이은 고딕 성당의 구석구석을 살피며 친절하고 세심한 탐구와 설명으로 중세 천년으로의 여행에 독자를 초대하는 셈이다.

로마는 제국 후기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313년)’ 발표 이후 재판소나 집회장 등으로 사용되던 공공건물을 개조했던 바실리카 양식은 9세기 후반부터 12세기까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전환되었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12세기 중엽에 등장했던 초기 고딕 성당은 로마네스크적인 요소가 잔재해 과도기적 경향을 띠며, 13세기에 이르러서야 고전적 고딕 성당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책은 고딕 성당의 긴 여행을 로마네스크 성당인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 레세(Lessay)의 삼위일체 수도원 성당에서 시작한다. 고딕 양식의 조짐이 태동하는 상징적인 장소이기 때문이다.

 

 

책에 따르면 '로마네스크'가 '로마다운'이란 뜻이었다면, ‘고딕’은 게르만족의 하나인 고트족을 가리키는 '고트인의'란 뜻을 지니고 있다. 고딕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르네상스 시대의 저명한 화가이자 미술사가 조르지오 바사리(1511~1574)다. 새롭게 등장했던 미술 양식을 가리키는 용어가 대부분 그랬던 것처럼 ‘고딕’ 또한 처음 등장할 때는 ‘조악하고 야만적인 고트족의 문화’라는 멸시의 뜻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고딕 양식은 고트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13~15세기 무렵의 예술 양식을 통칭하는 말로 굳어졌다.

고딕 양식은 건축으로 대표되며 이 시기의 건축은 고딕 성당으로 요약된다. 고딕 성당은 로마네스크 성당보다 웅장하며 수직성을 강조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육중한 벽체와 기둥은 훨씬 더 날렵해지고 창은 넓어졌다. 높게 솟은 첨탑은 하느님을 향한 종교적 열망을 한껏 드러내며,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내부로 쏟아져 들어오는 풍부한 빛은 신비롭고 경건하기만 하다. 파사드 상단에 장미꽃을 닮은 원형 창(장미창)을 배치해 이곳이 영원한 진리와 빛, 그리스도의 거처임을 밝히고 있다. 이 모든 공간적 변화는 새로운 건축 기술인 포인티드 아치(Pointed arch, 첨두아치)와 리브 그로인 볼트(Rib Groin Vault, 늑재 교차 궁륭), 플라잉 버트레스(Flying Buttress, 공중 버팀벽)란 외부 버팀목이 발명됐기에 가능했다. 이 세 가지 건축 기술이 고딕 성당의 가장 큰 특징이자 핵심을 이룬다.

흔히 중세를 문화의 암흑기라 말하지만, 고딕 성당을 염두에 두면 의문을 품지 않을 수밖에 없다. 중세에 발아하고 꽃을 피운 고딕 성당이야말로 서양문명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역동적이고 위대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고딕 성당이야말로 당대의 종교, 역사, 철학, 예술 등 모든 문화의 집결체이며 상징적 공간이라고 한다면, 중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

 


 

저자는 고딕 양식과 스콜라철학은 서로를 비춰주는 거울이라고 할 수도 있을 만큼 동시성과 유사성을 갖고 있다고 역설한다. 저자에 따르면 당시 스콜라 학파는 인식의 ‘명료함’을 추구했다. 심지어 신의 존재마저도 가시적으로 드러내 설명할 수 있다고 여겼으며, 신의 현존을 빛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다. 당연히 성당은 빛을 잘 표현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으며, 이를 위해 건축의 수직성과 벽체의 경량화, 크고 넓은 창문을 확보하는 기술이 개발되어야만 했다.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고딕 양식의 건축이 태동하고 발전을 주도한 국가는 프랑스였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을 거쳐 샤르트르 대성당에 이르면서 고딕 양식의 성당 건축은 전성기를 누리게 되고, 랭스 대성당과 아미엥 대성당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프랑스의 고딕 양식이 이웃 국가들에 전파되고 지역성을 반영한 양식으로 변주되면서 유럽의 고딕 양식은 다채로운 모습으로 발전하게 된다. 영국의 솔즈베리 대성당, 이탈리아의 밀라노 대성당, 독일의 쾰른 대성당 등이 그 대표적인 성당들이다. 각국의 후기 고딕 양식은 프랑스의 수직성에 대한 강요에서 어느 정도 해방되어 고딕 이전의 고전적인 수평성과 개성적인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이처럼 로마네스크 양식의 끝자락에서 고딕 양식으로 이어지는 태동기에서 시작해 유럽의 각국으로 전파되어 나름의 고딕 양식을 갖추게 되는 완성기에 이르는 성당 건축의 과정을 면밀히 살피고 있다. 그런가 하면 그 과정의 갈피에 스며있는 역사적이며 신학적인 맥락을 짚어냄으로써 독자의 이해를 친절히 돕고 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유럽의 유서 깊고 고풍스러운 성당들이 그냥 이국적인 풍경으로만 보이지는 않을 것으로 독자는 기대한다. 기둥 하나 창문 하나에 스며있는 중세의 역사와 건축적 변화, 당시 사람들의 신에 대한 지극하고 숭고한 믿음의 이야기들이 저자의 말처럼 귀에 남아 쟁쟁하게 울릴 터이니 말이다. 독자는 앞서 언급한 대로 가톨릭 신자도, 지금의 기독교 신자도 아니다. 한마디로 종교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이 책의 내용에 감동을 받는 까닭은 성당의 건축 양식의 변화가 유럽 문화의 역사와 신앙의 역사, 그리고 당시대 사람들의 삶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 역시 우리 삶의 일부분이라는 생각의 변화도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마리아의 중개에 대한 신학자들의 논쟁은 차치하고라도, 중세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마리아의 존재는 세상살이의 상처를 치유하고 어루만져주시는 자비로운 어머니로 자리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주교좌성당이 성모 마리아(노트르담)를 주보 성인으로 정했고, 그중 가장 잘 알려진 성모 마리아 성당, 곧 노트르담 대성당이 파리의 노트르담 주교좌성당입니다.(p.67) -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중에서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북부에서 이어진 이탈리아 고딕의 생명력은 이미 지난 세기에 수도원 성당에서 시작된 대형화를 넘어서 '거대화'(Gigantismo)의 경향을 띠었습니다. 그중에서 밀라노 대성당이 대표적입니다. 밀라노 대성당은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탄생 대장군'(Cattedrale della Nativita della Beata Maria)으로 봉헌되었으며, 이전에는 '산타 마조레 대성당'과 '산타 태클라 대성당'이 이곳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1386년 종탑이 무너진 후 대주교는 새로운 성당의 건축을 명했습니다. 밀라노 대성당의 건축은 건축가뿐만 아니라 수학자와 화가 등 여러 나라의 전문가들이 모여 계획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프랑스 건축가는 고딕의 보편적 구조주의를, 톡일 건축가는 첨탑 등의 수직성을, 이탈리아 건축가는 정사각형 비례와 기하학적 물질성 등의 고전주의를 주장했고, 결국 그들의 관심은 수직성과 수평성이 모두 강조된 거대화에 집중되었습니다.(p.244~247) - 「밀라노 대성당」 중에서

 

저자 : 강한수

 

천주교 의정부교구 사제다. 사제의 길을 걷기 전에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국내외 현장에서 일했다. 이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7년 후 사제서품을 받고, 로마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교의신학을 공부했다. 의정부교구 평신도 교육기관인 신앙교육원의 초대 원장을 지냈고, 본당 사목을 하면서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성사론을 가르쳤으며,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위원이다. 안식년에 로마 사피엔자대학교 건축학과에서 고대 및 중세 건축사 연수를 했고, 현재 본당 사목을 하면서 건축신학연구소를 맡고 있다. 저서로 『로마네스크 성당, 빛이 머무는 곳』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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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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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utopia) "이상향(理想鄕), 이상적인 나라"를 뜻한다. 영국 작가이자 정치가인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Utopia)』에서 사용한 말이다. 그리스어에서 따 만든 유토피아는 'not a place', 즉 'nowhere'라는 뜻이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뜻이다. 유토피아의 반대 개념인 암흑향(暗黑鄕)은 'dystopia(디스토피아)'다. '놀라운 신세계(Brave New World'(멋진 신세계)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폭풍』에 나오는 말이다. 1932년 영국 작가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 1894~1963)가 자신의 소설 제목으로 삼았다. 이 책 『멋진 신세계』의 원제이다. 이 소설은 현대의 기술 진보가 악몽과 같은 유토피아, 즉 디스토피아를 낳는 걸 그렸다. 헉슬리가 자신이 여행했던 미국을 염두에 두고 쓴 이 소설은 좌우를 막론하고 당시 풍미하던 유토피아에 대한 기대와 환상에 정면 도전했다. 이런 까닭에 출간 당시에는 대부분 혹평 일색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훨씬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소설 발표 당시 미국은 1차 세계대전 특수로 풍요롭지만 도덕적으로 타락한 상태라고 한다. 흥청망청의 사회 분위기를 당시의 매체는 잘 남기고 있다. 오래 갈 것 같은 풍요는 1929년 경제 대공황을 맞이하면서 하루아침에 디스토피아로 변한다. 대공황기의 미국 사회를 신문 기사부터 문학작품, 영화 등 수많은 매체가 다루었지만 그야말로 실업 상태의 노동자들이 거리에 넘쳐나고 폭력 조직 '마피아'는 금주령을 이용해 밀주를 만들어 팖으로써 돈벌이를 하고 지하 세계를 장악하는 등 혼란기가 지속된다. 미국 사회는 혼란 속에서 폭력과 매춘 등이 성행하고 품격과 정의로운 길보다는 타락과 불법이 판치는 일순간에 디스토피아로 변하고 말았다. 이 예언적 소설 『멋진 신세계』는 20세기에 미래를 가장 깊이 있고 날카롭게 파헤친 작품 중의 하나라고 '세터데이 리뷰〈Saturday Review〉'는 평가했다. 현대식 에덴동산에서의 삶을 그린 이 이야기는 자유와 도덕 개념이 낡은 넝마가 되어버린 현대 문명사회를 회화적으로 묘사하여 그 속에 내포된 위험을 경고한다.

 


 

뼈아프게 비판하고 고결하게 지키려는 헉슬리의 '인간 선언'에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귀 기울여햐 한다. 유토피아를 그린 많은 작가와 사상가들은 "유토피아는 현실에서는 없는 간절히 원하는 이상향"일 뿐이라고 말한다. 과학 기술의 발전과 인간 지능은 21세기를 맞이하고서도 희망만 이야기하지 암울한 미래를 지적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현실적으로 당면한 문제를 외면한 채 말이다. 공산주의는 붕괴되었을지라도 자본주의의 승리라고 말하지 못한 이유는 일부 공산주의 국가가 잔존하고 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고 독자는 생각한다. 빈부 격차 심화 등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방안조차 제대로 내놓지 못하고 있다. 눈앞의 혜택과 쾌락에만 시선이 닿아 있는 것이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표제어 자체가 패러독스다. 쉽게 표현하자면 반어법이란 것이다. 이 소설을 한 번 읽어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이 소설은 'A. F.' 즉 헨리 포드(자동차왕)가 T형 자동차를 대량으로 생산해낸 해를 기원으로 삼은 시대의 세계국(World State)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소재로 한다. 이 세계국 사람들은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까지 다섯 계급으로 나뉘어, 필요에 따라 ‘맞춤형’으로 대량 생산된다. 이들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수면 학습과 전기 충격을 통한 세뇌로 각자의 신분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그들은 정해진 노동 시간을 끝내면 자극적이고 단순한 오락들로 시간을 보내며, 항상 소마(soma)라는 약을 통해 환각과 쾌락을 느낀다. 누구도 불만이 없고, 만인은 만인의 소유이며, 심지어 죽음까지도 무의미한 세계. 이 완벽한 유토피아에서는 모두가 다 만족스럽고 행복하다. 과연 그럴까?

그러던 어느 날, 신세계와 격리된 보호 구역에서 살고 있던 야만인 존이 이곳으로 초대된다. 존은 젊고 아름다운 사람들과 처음 보는 놀라운 과학 문명에 감탄하지만, 자유를 빼앗긴 채 아무 생각 없이 순응하며 살아가는 거짓된 행복에 점차 환멸을 느낀다. 결국 야만인 존은 고통과 불행을 달라고 부르짖고는 홀로 외딴 등대로 간다. 그곳에서 과연 그는 갈망하던 원시적인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인가.

 

 

간단하고 단순한 줄거리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 소설에는 많은 과학적 지식이 포함되어 있다. 사실 과학이 인간 문명 발달의 결정적 힘이라고 믿고 살아온 사람들이 현대인 아닌가. 당연히 과학은 인간의 노동을 덜어주고, 풍요를 가져다 주었다. 과학자들은 현대 문명을 가져온 결정적 기여자들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전쟁에서 대량 살상 무기를 만들어 한 순간에 수십만 명을 죽이는 위력도 갖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지구 자체가 병들어 가고 있음을 밝히는 데에도 과학은 결정적 기여를 했다. 어떻게 지구를 되살리는 게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가 안 된 듯하다. 그러나 가까운 미래에 지구는 병들어 가고, 속도마저 가속도가 붙은 상태로 빠르게 최악의 상태로 가고 있는 것을 많은 과학자들이 밝혀내고 있다. 지난 세기, 어쩌면 그 전부터 지구 오염이 불러올 폐해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지만, 눈앞의 풍요와 쾌락, 안전만 추구할 뿐 기후 변화 등 환경 변화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는 듯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지구는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면 인류 번영은커녕 존속마저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암울한 미래 세계를 그린 뛰어난 현대 고전으로 평가받은 『멋진 신세계』는 제목과는 반대의 개념인 디스토피아 세계를 그리고 있다. 역설적으로 우리의 삶의 방식은 뭔가 잘못 됐다는 점을 부각한 것이다. 물론 우리의 현재가 소설 내용과 똑같은 것은 아니다. 헉슬리는 영국의 명문 집안 출신의 작가로서 광범위한 지식뿐 아니라 예리한 지성과 우아한 문체, 그리고 때로는 냉소적인 유머 감각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풍요와 쾌락을 추구한다면 마음껏 즐거운 인생을 살 수도 있는 입장이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가장 풍요롭고 거침없이 발전하고 있는 미국으로 여행을 갔다. 그러나 미국 사회에서 그가 보고 느낀 것은 '신세계'가 아닌 암울한 미래였을까? 소설 속에서는 정확한 시점을 명시하지는 않지만 약 100년 후의,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을 전망하고 그리고 있다. 이 소설은 미래를 가장 깊이 있고 날카롭게 파헤친 작품 중의 하나로 평가받는다.

 


 

소설 속의 『멋진 신세계』는 과학이 최고도로 발달한 사회다. 사회의 모든 면을 관리·지배하고, 인간의 출생과 자유까지 통제하는 미래 문명 세계다. 요즘 대세인 SF 소설의 성격이다. 인간성을 상실한 미래 세계를 신랄하게 풍자하는 한편, 신의 영역을 넘보는 인간의 오만함을 경고하고 비판한다. 이 소설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1984』와 마찬가지로 충격적인 미래 예언을 통해 인간의 자유와 도덕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미 『멋진 신세계』에서 인간이 구성해놓은 미래의 전주곡이 진행되는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풍자적이면서도 냉혹한 미래상이 앞으로 얼마나 현실로서 대두될지 사뭇 관심거리일 수밖에 없다.

헉슬리가 그리는 이 소름 끼치는 미래상은 더 이상 공상소설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성이 맞게 될 위기를 다루는, 인간을 소재로 삼은 작품이다.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는 전체주의 국가가 인간을 파멸시키는 참혹한 과정이 생생하게 드러나며 유토피아가 곧 파멸이라는 역설이 두드러진다. 또 문명의 발달과 인간의 몰락이라는 반비례 원칙을 제시한다. 지금,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설정해놓은 악몽이 빠른 속도로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현대 과학 문명의 발달과 함께 점차 개성과 인격을 상실해가는 오늘날, 지금 세태의 종착지는 과연 어디인가.

저자 헉슬리는 20페이지가 넘는 긴 〈서문〉을 통해 인류가 종말을 향해 가는 현실을 결코 인류가 바라는 방향은 아니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음을 내보인다. 물질적이고 외적인 세계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영혼과 육체 속에서 이루어지는 '혁명적인 혁명'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때마침 혁명적인 시기에 살았던 터라 마르키스 드 사드(Marquis de Sade)가 그의 독특한 광증의 양상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이 혁명의 이론을 동원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할 따름이다. 로베스피에르는 가장 피상적인 종류의 혁명인 정치 혁명을 달성했다. 발뵈프는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경제적인 혁명을 달성했다. 사드는 자신을 단순히 정치와 경제를 초월한 참된 혁명적인 혁명의 사도라고 자처했다."(p.16~17)

 


 

이 소설 속에는 가족이라는 유대가 사라진 세계가 있다. 죽음까지도 익숙해지도록 길들이기 훈련을 받는 세상에서 인간은 최소한의 존엄성과 인간적 가치, 그리고 스스로 생각할 자유마저 박탈당한다. 이곳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까지 다섯 계급으로 나뉘어, 인류를 ‘맞춤형’으로 대량 생산한다. 하나의 난자에서 수십 명의 일란성 쌍둥이들이 태어나고, 이들은 끝없이 반복되는 수면 학습과 세뇌를 통해 어떠한 의문도 갖지 않고 정해진 운명에 순응한다. 노화도 겪지 않고, 책임도 도덕도 없이 문란한 성관계를 맺고, 정신적인 외로움도 느끼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쾌락과 만족감뿐이다. 정해진 노동 시간 이외에는 단순한 자극으로만 이루어진 오락들로 꽉 짜여 있으며, 혹 나쁜 기분이 들거나 고통스러운 일을 겪으면 항상 소마(soma)라는 가상의 약을 통해 즉각적인 쾌감을 경험한다. 마약과도 같은 소마는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사고할 능력을 빼앗는다. 때문에 이 완벽한 유토피아에서는 누구나 다 행복하다. 이런 세상을 원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이다.

저자 헉슬리는 디스토피아라고 해야 어울릴 듯한 사회에서 드디어 탈출구를 제시한다. 어느 날, 신세계와 격리된 원시 지역(Reservation)에서 살고 있던 ‘야만인’ 존이 우연히 이곳에 초대받는다. 그는 처음 보는 고도의 과학 문명과 모든 것이 완벽하게 설계된 세계에 감탄하지만, 소수의 지배자들에게 통제받으며 조작된 행복에 길들여진 ‘백치’와도 같은 사람들의 모습에 점차 환멸을 느낀다. 결국 그는 문명에 절망하고 좌절한 채 다시 원시 지역으로 떠나간다.

 


 

“하지만 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사실상 당신은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셈이군요.” 무스타파 몬드가 말했다.

야만인이 도전적으로 말했다.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하겠어요.”

“늙고 추악해지고 성 불능이 되는 권리와 매독과 암에 시달리는 권리와 먹을 것이 너무 없어서 고생하는 권리와 이(?)투성이가 되는 권리와 내일은 어떻게 될지 끊임없이 걱정하면서 살아갈 권리와 장티푸스를 앓을 권리와 온갖 종류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으로 괴로워할 권리는 물론이겠고요.”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런 것들을 모두 요구합니다.” 마침내 야만인이 말했다.(p.362~363)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야만인 청년 존을 통해 두 세계, 즉 유토피아 세계와 원시 세계를 비교함으로써, 우리의 현재와 미래상을 병립시켜 보여준다. 오로지 최대의 능률과 발전만을 목표로 삼는 현대 과학 문명에 대해 신랄한 비판과 함께, 곧 도래할 섬뜩한 미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낸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에게는 무엇이 참된 이상향이며, 우리들은 그곳에 다다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그 해답을 알아내는 것은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한 숙제로 남아 있다.

역자 안정효는 "이 소설은 매끈하게 다듬어진 이상향이라는 부자연스러운 세계에 자연인을 투입시켜 인간의 미래를 이해하려는 하나의 예언적인 시도로서, 조지 오웰의 『1984』나 마찬가지로 미래의 공포라는 충격을 제시하고, 그러한 예언을 통해 인간의 자유와 도덕성을 주장하는 선언서 노릇을 한다."고 「현재를 예언하는 소설」이란 제목의 〈옮긴이의 말〉을 남겼다. 우리 사는 세상의 미래를 알고 싶다면, 현재의 지구 환경에 불안을 느끼는 독자들은 당연히 이 책을 읽을 것을 먼저 읽은 독자로서 추천한다.

 


 

저자 :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

 

광범위한 지식뿐 아니라 뛰어나고도 예리한 지성과 우아한 문체에 때로는 오만하고 냉소적인 유머 감각으로 유명한 영국 출신의 소설가이자 비평가. 1894년 7월 26일 서리 지방 고달밍에서 토머스 헉슬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이튼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했다. 지적 정보와 함께 재치와 풍자로 가득 찬 다양한 방면의 저술 활동으로 유명한 헉슬리는 20세기 관념소설의 큰 줄기를 이룬 대표적 작가다. 소설가로서 널리 알려지기는 했으나 그 외에도 수필, 전기, 희곡, 시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멋진 신세계』는 그가 1932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한 미래 과학 문명의 세계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야만인 청년을 통해 두 세계, 즉 유토피아 세계와 원시적인 세계를 제시한 작품으로 문명 비판적 풍자와 도덕적 교훈이 잘 맞물려 현대 문명사회를 희화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진보주의에 대한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1958년, 『멋진 신세계』의 예언적 주제들을 심도 있게 검토한 『다시 찾아본 멋진 신세계』를 발표했다. 활동 후반기에는 힌두 철학과 신비주의에 깊이 끌렸으며 이 경향이 작품들에 반영되었다. 미국에 정착해서 살다가 1963년 11월 22일 캘리포니아에서 사망했다.

1916년 시집 『불타는 수레바퀴』를 출간한 이래 몇 권의 시집을 더 냈으나, 1921년 『크롬 옐로우』가 인정을 받은 후부터 일생동안 소설 창작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그의 대표작이라고 여겨지는 『연애대위법』(1928)은 다양한 1920년대 지식인들을 풍자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이 소설로 그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 밖에도 과학문명에 지배되어 가는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이 돋보이는 『멋진 신세계』(1932), 열여덟 살 때 완전히 실명했다가 차차 시력을 회복한 경험을 바탕으로 평화운동을 추구하는 작가 자신을 그린 『가자에서 눈이 멀어』(1936)를 발표했다. 이는 헉슬리의 ‘후기파’ 성향을 지닌 첫 소설로서, 그의 작품 세계에서 분기점 노릇을 한다. 또한 폭력의 부정을 역설한 『목적과 수단』(1937), 제3차 세계대전을 가상해서 쓴 『원숭이와 본질』(1948) 등의 저서가 있다.

또 1945년 《영원의 철학》을 통해 그때까지 서구 지성사에 전해오던 ‘영원의 철학’이라는 개념을 핵심적으로 통합하여 종교와 영성에 대한 이해를 혁명적으로 바꿔놓았다. 주요작품으로는 『어릿광대의 춤(Antic Hay)』, 『하찮은 이야기(Those Barren Leaves)』, 『연애대위법(Point Counter Point)』,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가자에서 눈이 멀어(Eyeless in Gaza)』, 『목적과 수단(Ends and Means)』, 『원숭이와 본질(Ape and Essence)』, 『루당의 악마(The Devils of Loudun)』, 『천재와 여신(The Genius and the Goddess)』, 『아일랜드(Island)』 등이 있다.

 

역자 : 안정효(AHN, JUNG-HYO,安正孝)

 

서강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코리아헤럴드』와 『코리아타임스』 기자를 거쳐 한국브리태니커 편집부장을 지냈다. 1975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시작으로 130여 권을 번역했고, 1982년 존 업다이크의 『토끼는 부자다』로 제1회 한국번역문학상을 받았다. 1977년 수필 『한 마리의 소시민』을 발표했고, 1985년 장편소설 『하얀 전쟁』으로 등단해,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 『가을바다 사람들』, 『은마는 오지 않는다』 등을 선보였다. 영문판 『하얀 전쟁』과 『은마는 오지 않는다』가 각각 1989년과 1990년 『뉴욕 타임스』 추천 도서로 선정됐고, 그 외에 덴마크, 일본, 독일에서도 번역 출간됐다. 1992년 『악부전』으로 김유정 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가 겸 번역가 안정효는 2023년 향년 82세로 별세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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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꼬리의 전설
배상민 지음 / 북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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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아홉 꼬리의 전설』은 추리·미스터리 소설로 탁월한 역량을 보여준 배상민 작가의 네 번째 장편소설이다. 표제어에서 드러나듯이 옛날 흑백 TV 시절 브라운관 앞으로 수많은 시청자들을 끌어모았던 〈전설의 고향〉이 생각나게 한다. 극장의 영화팬들을 '안방극장'인 TV가 빼앗아갔다고 소문이 날 정도로 당시 TV에서의 드라마는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산업화를 막 시작하던 시절이라 주머니가 얄팍한 월급쟁이들의 여가 활동으로는 영화가 가장 대표적이었다. TV의 등장으로 영화는 일시적으로 타격을 입었을 것이라는 기록이나 각종 보도를 통해 이미 확인된 사실이다. 〈전설의 고향〉은 말 그대로 구전돼 오던 각 지역의 '전설' 중에서 TV의 드라마로 제작해 보여준 프로그램이었다. 우리의 정서와 잘 맞아서인지 굉장한 인기 프로그램으로 장수를 누렸다고 들은 바 있다. 그때는 주제와 소재를 중심으로 방영할 내용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부풀려지거나 전해져오는 동안 재미를 더하기 위해 과장도, 왜곡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독자나 시청자들은 더 흥미를 느낄 수 있기에 TV 제작 프로그램 소재로 채택되고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었을 터다.

사실 소문이나 전설은 사회 비판적 성격이 강하지 않으면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되지 않는다. 더욱이 수천 년 동안 폐쇄적 사회에서 피지배자들이 겪는 각종 설움이나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많은 이야기들이 민간에서 나돌기 마련이다. 사회의 온갖 소문은 전설이 되고, 내용은 오롯이 피지배 계급의 애환이 담겨 있다. '전설'은 이런 태생적 이유로 민중들의 불만 해소로도 좋은 줄거리를 갖고 있는 이야기가 많다. 저자 배상민이 오늘날 수사극이나 미스터리 소설의 소재로 '전설'을 주목한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저자가 특히 관심을 갖고 있는 장르에 잘 맞아서 선정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독자는 생각한다.

 


 

이 책은 당시 소문으로, 전설로 내려오던 이야기를 탐정수사극으로 바꿔 소설로 썼다. 배상민 작가가 소문과 전설은 사실 확인이 잘 안 되지만 당시의 사회 상을 빗대보면 많은 은유가 숨어 있다. 교훈적이라는 단어에 일괄 흡수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탐관오리의 횡포, 지배 계급의 무자비한 행위로 입은 피햬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점에서 사회 풍자나 사회 비판의 성격이 강할 것이다. 추리·미스터리 작가의 눈으로서는 무척 매력적인 소재가 아닐 수 없다. 특히 드라마 제작사 기획 PD로 일하다가 제1회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저자에게 전설로 내려오던 이야기 중 몇 가지를 엮어 한 편의 완전한 소설로 엮어냈다. 저자는 『조공원정대』 『콩고, 콩고』 『페이크 픽션』 『복수를 합시다』 등을 통해 유머러스하면서도 현실을 비트는 통렬함으로, 현실과 서사의 틈 사이를 날카롭게 파고들며 우리에게 현실의 문제를 환기시켜 준 작가로 알려져 있다.

이 책에는 ‘소문의 시대’였던 고려 말을 배경으로, 혼란의 시기에 더욱 무성하게 가지를 뻗는 흉흉한 ‘소문’과 기이한 ‘이야기’를 쫓는 두 탐정 이야기로 써냈다. 문학적 분류로 이런 명칭이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미스터리 수사극'을 선보인다. 아홉 꼬리를 가진 ‘구미호’, 고을 감무의 목숨을 노리는 ‘처녀 귀신’, 쇠를 먹어치우는 ‘불가살이’ 등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소재들이다. 뿐만 아니라 다리가 세 개 달린 영물 ‘삼족구’ 등 형체가 없는 ‘소문’이 스스로 살을 붙이고 뼈대를 갖춰 하나의 온전한 ‘이야기’가 되어가는 과정을 저자는 추적하고 있다. 이야기가 어떻게 탄생하고 소멸하는지 그 근원 속으로 파고들어 사건 해결의 탐정 역할로 두 사람의 독창적인 인물을 내세운다. 저자는 '에필로그'인 〈작가의 말〉에서 좀더 구체적인 소개를 곁들인다. "한량에다 겁도 많지만 잔머리가 잘 돌아가는 선비가 떠오른다. 하지만 그 혼자서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다. 전장에서 반평생을 보낸 우직한 무사가 그의 곁에 있어주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선비에게 정덕문이라는 이름을, 무사에게 금행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p.321~322)

 


 

저자는 집필 이유를 "기이하고, 잔혹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밝힌다. 참혹하게 죽은 시신이 보인다. 시신은 여자고, 나이는 열일곱 살쯤. 눈은 뜨고 있었고, 배가 갈려서 창자가 튀어나와 있다." 저자의 말은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잔혹한 사건의 피해자로부터 시선을 고정시키고 시대와 사회상, 등장인물의 성격, 사건의 개요, 사건 해결 과정 등을 마치 저자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요즘 신문 기자가 사건을 추적해 들어가듯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그래서 선택된 시대 배경은 고려말이다. 피해자인 시신의 옷차림으로 보아 고려시대 사람이다. 고려말은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목숨값이 참으로 가벼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눈을 뜨고도 믿지 못할 기이한 일이 많이 벌어질 법하다.

책의 뒷 부분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사실 책의 시작 부분에 해당되기도 한다. 책의 첫 문장은 불길하다는 까마귀 떼의 울음소리다.

"까악 까악."

아침부터 온 산이 울리도록 까마귀 떼가 어지러이 울어댔다. 밤사이 변고가 일어났다는 것을 직감했다.

"시신은 참혹했다. 배는 갈라져 있었고, 위장, 창자, 자궁같이 배 속에 있어야 할 장기들이 시체 주변에 널려 있었다. 손과 발이 묶인 처녀는 눈을 뜨고 죽어 있었다. 어쩌면 살아 있는 채로 저리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지금껏 봐왔던 시신보다 더 끔찍하여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p. 8) 저자는 사건 현장을 서두에 두었다. 요즘 미스터리 소설의 시작 부분이 그렇듯 참혹한 사건 현장을, 그것도 '엽기적인' 현장을 그려내고 있다. 엽기적인 것이라는 것은 범행이 더 잔혹하다는 다른 표현이다.

고려 말이라는 시대적 배경에 대해 저자는 혼란한 때 소문은 더 빨리 퍼진다는 점을 간파한 것이다. "고려 말은 소문의 시대였다. 밖으로는 왜구의 침입이 끊이지 않았고, 안으로는 이임임, 임견미 같은 권신들이 득세하여 활개를 치는 통해 조정이 어지러웠다. 나라 꼴이 이러하니 무수한 소문이 떠돌 수밖에 없었는데, 원귀와 괴물에 관한 것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자는 괴물에 대한 소문을 낳았다."

 

 

‘말(소문)’은 한자리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세상을 축으로 하여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 다니며 그 형태를 수시로 바꾼다. 특히 세상이 혼란할수록 ‘소문’과 ‘이야기’는 사람들의 ‘공포’를 자양분 삼아 활기를 띠기 마련이다. 이 책은 나라 안팎이 소란스러웠던 고려 말을 배경으로, 고을에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과 그 뒤에 아홉 꼬리처럼 감추어진 소문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책에는 모두 13개의 각기 다른 사건이다. 소문을 추적해 가는 두 주인공이 사건이 일어난 각지를 돌아다니며 '수사'를 펼친다. 가문이 기울어진 후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세상에 떠도는 기이한 이야기를 찾아다니는 주인공 ‘나(정덕문)’는 고을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난 살인 사건에 관심을 갖는다. 소설은 정덕문이 화자(話者)로 스토리를 이끌어 간다. 사건 현장에는 수상한 점이 많다. 잔인하게 살해된 시신이 발견되는 날이면 어김없이 실질적으로 고을을 다스리는 호장가에서 부리는 순라꾼들이 “여우가 나타났다”라고 외치고 다니는 것과 이 사건을 파헤치기만 하면 고을 감무*들이 처녀 귀신에 의해 혼이 빼앗긴 채 목숨을 잃는다는 점은 쉽게 믿을 수 없는 비과학적 이야기지만 오늘날 관점으로 그렇다. 당시에는 소문의 시대답게 살을 붙이고 뼈대를 바꿔도 진실로, 사실로 더욱 확대되어 갔다. 이것에 의문을 품은 ‘나’는 고을에 새로 부임한 감무인 ‘금행’과 함께 고을을 공포로 몰아넣은 흉흉한 소문 뒤에 감춰진 진짜 실체를 찾아 나선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정덕문)는 인물 자체가 기이하다. 소문을 소문으로만 듣지 않고 이야기의 진원지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닌다. 당시 한량이라면 귀족 계급의 자녀로서 먹고 살 걱정은 당초 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공부를 하기 싫어서 안 한다는 점은 어쩔 수 없으나, 이상한 이야기에 매혹되었다고 스스로 혼잣말 하듯 말한다. 남들은 젊은 한때를 탕진한다고 비웃었으나, 자신은 이야기들을 좇느라 등과하여 조정 일을 할 생각조차 없었다."

* 감무 : 고려시대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던 속현 혹은 향, 소, 부곡, 장, 처에 파견되던 하급 지방관. 현령보다 낮은 지위로 임시직이었으나 후에 상설직이 됨.(저자 주)

 


 

정덕문은 사건을 추적할수록, 그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이야기 뒤에는 반드시 다른 숨은 의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참혹한 살인 사건의 진범을 감추려는 눈속임일 수도 있고, 더 많은 권력을 가지려는 탐관오리들의 검은 술수일 수도 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생존본능과도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 실체를 따라가던 ‘나’와 ‘금행’은 결국 ‘구미호’도 ‘불가살이’도 ‘삼족구’도 현실을 토양으로, 인간의 욕망을 자양분으로 자라난 것임을 알게 된다.

 

문득 도사의 말이 떠올랐다. 꼬리 아홉 달린 여우만 잡을 수 있다면 무엇이건 삼족구가 될 수 있다고 했던가. 갑자기 이런저런 생각들이 이어졌다. 내가 강태공이 되면 어떨까? 그리고 금행이 여우를 잡는 삼족구가 되면 또 어떨까? 내가 금행을 여우 앞에 데려다 놓을 수만 있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 생각이 떠오를수록 가슴이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어느새 배는 강 건너에 다다랐다. 나는 배에서 내릴까 하다가 다시 뱃머리에 주저앉았다. 어쩌면 새로운 이야기를 하나 더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 때문이었다.(p.151)

 

과연 끔찍한 연쇄 살인 사건의 진범은 누구이며, ‘나’와 ‘금행’은 구미호를 잡는다는 발 세 개 달린 영물인 삼족구가 되어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까. 이 책 『아홉 꼬리의 전설』은 짜임새 있는 미스터리한 사건 전개를 통해 은폐된 진실을 파헤쳐 긴장감을 선사함과 동시에, 인간의 욕망과 현실을 투영하며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점점 몸피를 갖춰나가는”(「작가의 말」 중에서), 스스로 생명력을 가진 이야기의 속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저자는 드라마 제작사 기획 PD와 소설가로 동시 활동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이야기 작법서'를 출간하기도 한 작가의 폭넓은 사유로 구축한 ‘이야기’라는 하나의 거대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독자들은 이 세계를 통해 몰입의 재미와 동시에 이야기가 가진 힘을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을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이 책은 모두 13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우가 찢어놓은 시신」, 「불가살이와 가왜」, 「요물과 귀신의 기운」, 「호강가의 잔치」,「처녀 귀신의 소원」, 「미끼가 된 귀신」, 「호장가의 힘」, 「동자승과 곶감」, 「위협과 위기」, 「정도전과의 담판」, 「미끼를 위한 미끼」, 「지는 해 뜨는 달」, 「다리가 셋인 개를 구하러 가는 감무」 등이다. 앞서 '감무'에 대한 주석은 저자가 직접 달아 이 책의 서평에 그대로 써넣었지만 독자로서 생경한 단어 '호장가'란 단어엔 주석이 없어 독자의 추정으로 단의의 의미를 독자들에게 전한다. 호장가는 한자어 '戶長家)'는 고려 초기 흔히 쓰였던 '지방 호족' 가문을 말한다. 이들은 왕건의 고려 건국을 도왔으며 그들의 딸들의 상당수가 왕건과의 혼인으로 고려 황후의 신분을 획득한다. 고려 말 등장하는 '권문세족'과는 다른 뜻이다.

 

백성들 사이에서 새롭게 떠도는 이야기를 들으며, 이야기라는 놈은 정말 살아서 돌아다니고 있구나 생각했다. 동시에 두 이야기가 합쳐진 데에는 무슨 연유가 있지 않을까 짐작해보았다. (중략) 쇠를 먹는다는 괴물은 농사지을 쇠붙이까지 모조리 수탈해 가는 조정일 수도 있고, 먹고살기 위해 쇠를 먹는 괴물을 만들어 그 뒤에 숨고 싶은 백성들의 염원일 수 있었다. 어쩌면 이 이야기에도 백성들의 염원이 담겨 있을지 몰랐다. 꼬리 아홉 달린 여우를 없애달라는 염원.(p.231)

 

“선비님 아니십니까?”

노인이 달려와 내 양팔을 붙들었다. 몇 년 전, 가왜들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던 노인이었다. 나는 노인을 꼭 끌어안았다. 이제야 진짜 살았다 싶었다. 내 운이 여기서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중략) 헤어지기에 앞서 나는 노인과 마을 사람들에게 두 번 세 번 인사하며 고마움을 표했다. 그리고 사라져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런 세상이라도 백성들은 제법 의리가 있다는 금행의 말이 새삼 떠올랐다.(p.301~302)

 

저자 : 배상민

 

2009년 제1회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을 통해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소설집 『조공원정대』, 장편소설 『콩고, 콩고』 『페이크 픽션』 『복수를 합시다』, 이야기 작법서 『이야기 어떻게 쓸까?:매체를 넘나드는 이야기 쓰기의 원리』 등이 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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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학살을 넘어 - 팔레스타인에서 우크라이나까지, 왜 인류는 끊임없이 싸우는가
구정은.오애리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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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인류 역사상 하루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왔다"는 어느 전쟁사가의 말이 새삼 재인식되는 요즘입니다. 뉴 밀레니엄인 21세기에 들어와서도 4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정말 지구상에서 단 하루도 전쟁이 없었던 날이 있었나 싶습니다. 요즘은 물론이지만 21세기 새 희망으로 가득 찬 2000년도부터 우리에게 들려오는 '전쟁' 뉴스는 매번 국제뉴스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작은 전쟁, 내전 등에 관해서는 이젠 뉴스거리도 안 된다는 듯 외신마저 다루지 않을 정도이니 이 책 『전쟁과 학살을 넘어』를 펼치면서 떠오른 독자만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2년 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발발 때만 하더라도 엄청난 전쟁의 시작이라며 각종 뉴스 매체들은 앞으로 세계 패권국의 양상이 재편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해설까지 내놓으며 요란스러웠다. 미국을 비롯한 유럽 등은 우크라이나의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환영하는 입장이어서 적극 지원을 약속하고,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는 핵을 사용해서라도 자신들의 침략은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아시아 아프리카나 남미 등 다른 대륙의 세계인들도 직접적인 전쟁 피해는 아니더라도 크든 작든 러-우 전쟁은 일상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우려하는 마음이었다. 식량과 에너지 공급에 대한 압박 때문이다. 그리고 한마음 한뜻으로 전쟁이 빨리 끝나기만은 빌고 또 원했다. 러-우 전쟁은 지금 벌써 2년이 다 되어가도 종전 소식은커녕 가끔씩 확전 소식과 미사일로 인한 사상자 숫자만 늘어나고 있는 장기전 형국이다.

특히 지난해 10월 세계인이 놀랄 만한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면서 뜸하던 러-우 전쟁 뉴스는 이젠 거의 보도되지 않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전쟁 소식에 집중돼 있다. 전쟁을 일어난 계기는 팔레스타인 하마스 같은데, 공식으로 전쟁 선언은 이스라엘이 했다. 미사일 공습과 불법 침략으로 이스라엘 국민 수백 명이 죽었다는 사실에 분개한 이스라엘 정부가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하며 하마스 조직을 뿌리뽑아 평화를 되찾겠다는 선언이었다. 사실 하마스 공격은 불법이었고, 사망 또는 인질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사람들이 100명이 훨씬 넘는다고 하니 어느 국가든 분노하지 않겠는가. 즉각 이스라엘은 하마스 세력을 뿌리뽑겠다고 무력 진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지금까지 가자지구에 살던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희생자가 1만 명을 넘었다고 발표된 지도 한 달이 넘었다. 전쟁은 계속되고 있지만 어쩐 일인지 생각보다 훨씬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다.

 


 

이 책 『전쟁과 학살을 넘어』의 공동 저자 구정은과 오애리는 오랫동안 언론사에서 일하며 국제 뉴스를 다뤘다. '새천년'을 향한 희망의 해를 바라보며 기대가 채 잊혀지기도 전에 전쟁과 분쟁으로 얼룩진 21세기의 단층들을 심도 있게 분석했다. 전쟁 과정과 피해, 앞으로의 전망보다는 그 나라들이 왜 전쟁을 일으키고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은 이제 지역적 분쟁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왜 전쟁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아야 되는지에 당위성을 개진하는 입장에서 쓴 책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전쟁과 우리는 21세기 지역 전쟁들과 무관한 것인지, 우리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아직 휴전 중인 국가 대한민국에서 바라보는 '전쟁불가론'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 책은 모두 6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 〈세계를 뒤흔든 우크라이나 전쟁〉, 2부 〈팔레스타인은 왜 ‘분쟁지역’이 되었나〉, 3부 〈아랍의 봄과 시리아 내전〉, 4부 〈끝나지 않는 전쟁, 아프가니스탄〉, 5부 〈세계가 반대한 이라크 전쟁〉, 6부 〈전쟁을 막을 수는 없을까〉 등이다. 1부에선 지구 전체에 그늘을 드리운 우크라이나 전쟁을 다뤘다. 민주주의를 향한 우크라이나인들의 힘겨운 여정과 거기에 계속 질곡을 강요한 러시아라는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역사적 배경을 설명했다. 2부의 주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다. 이 또한 역사를 들여다보지 않고는 맥락을 잡기 힘든 이슈다. 이스라엘 건국 때부터 현재까지의 진행 과정을 풀어 쓰면서, 이스라엘이 무법자로 인식되어온 과정과 그 도구가 된 정보기관들의 저돌적 행태를 정리했다. 3~5부에선 21세기의 주요한 전쟁인 시리아 내전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을 다뤘다. 뒤의 두 전쟁은 미국의 일방적 침공으로 일어났고, 미국이 압도적 화력을 쏟아부어 장기전을 치렀지만 결코 ‘승리’라 할 수 없는 초라한 성적표만 받아들고 발을 빼야 했던 전쟁들이다. 사건의 진행 과정을 시기 순으로 설명한 뒤 미국의 오만과 일방주의가 어떻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갔는지, 그 전쟁들이 세계에 어떤 파장을 일으켰는지를 분석했다. 마지막 장에는 전쟁 뉴스를 오래 들여다본 저자들의 고민과 바람을 담았다.

 


 

전쟁 범죄를 왜 처벌해야 하는가, 전쟁 범죄에 대한 인식과 단죄는 어떻게 진화해왔나, 한국인들에게 전쟁과 파병 그리고 난민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저자들은 주목했다. 인류애가 깨져나간 단층들을 돌아본 이 책이, 인류애를 일깨우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저자들의 집필 취지에 독자는 기대한다. 저자들은 국제부 기자들로서 전쟁 현장에 나갈 일이 거의 없다. 매일 쉴새없이 들어오는 국제 뉴스의 무게를 판단하고, 신중하고 가능한 한 우리와 관련이 되는 뉴스만을 선별해야 한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 사고 등 굵직한 뉴스를 다루지만, 21세기 들어 전쟁 뉴스는 '일상'이 되어버렸음을 깨닫는다.

지난 세기 제 1, 2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양차 대전을 합쳐 줄잡아도 1억 명 이상의 사람이 죽었다. 독자들도 다 아다시피 전쟁의 가장 큰 희생자는 노약자, 부녀자, 어린아이 등이다. 군인들이 전사하는 숫자보다 민간인 피해가 훨씬 많다. 예전에는 군대를 훈련해 양측에서 어느 한 지역을 선택해 정면대결을 통해 전쟁의 승부가 가려졌다. 물론 패배한 나라와 사람들은 멸망할 수 있다. 다행히 노예로라도 끌려가면 훗날을 기약할 수 있지만 노예보다 굴욕적인 일은 없다고 해서 차라리 죽음을 택한 사람이 많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양상이 달라졌다. 직접 전쟁터뿐만 아니라 전쟁을 돕는 민간인들이 사는 곳을 비행기를 동원한 폭격, 성능과 사정거리가 엄청나게 발전된 미사일 등 대량 살상의 양상로 무기가 현대화됐다. 심지어는 핵폭탄(방사능탄), 화학탄(독가스), 생물탄(전염균) 등이 개발되면서 단 한 방으로 수십만 명을 일시에 희생시킬 수 있다. 전쟁은 점점 인류 존속 자체에 위협이 되는 수단이라는 데 인식을 같이하지만, 하루도 멈추지 않고 전쟁을 하는 인류의 앞날은 결코 희망적이지 않다.

저자들은 지난 세기 말 벌어진 '전쟁과 학살' 현장을 직접 갔다. 저자들은 뒤늦게나마 지난해 여름 동유럽을 찾았다. 숱하게 기사를 쓰면서 지명으로만 남았던 첫 방문지였다고 〈프롤로그〉를 통해 소개한다. 1990년 구 소련의 몰락으로 소련(소비에트 연방)은 붕괴했다. 옛 소련의 위성국가 역할을 했던 대부분의 나라들은 독립을 했으나 일부 국가는 내전에 휩싸였다. 이 가운데 가장 참혹한 '학살' 현장인 보스니아를 저자들은 방문했다. 이곳은 옛 유고 연방이었던 나라들끼리 내전에 돌입했다. 같은 나라였지만 기독교계 사람들과 무슬림들이 공존했다고 한다.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전쟁은 주위 경관엔 아랑곳하지 않고 무차별 학살의 만행이 저질러졌던 곳이다.

 

 

저자들은 "세르비아의 국경선 근처에 있는 스테브레니차를 찾아갔다. 세르비아계 혹은 정교도들은 그곳에서 사흘 만에 8,000명이 넘는 보스니아계 혹은 무슬림을 학살했다. 21세기를 목전에 두고 어째서 이런 학살이 벌어졌을까. 민족이란 무엇이며 종교란 무엇이기에 이런 잔혹한 일이 펼쳐지는 것일까. 유고연방의 70년 역사는 이들에게 어떤 것을 남겼을까."(p.5) 저자들이 어떤 심정이었을까? 쉽게 짐작은 안 되지만 책을 통해 읽은 내용으로는 이 지역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제노사이드'의 참혹한 기억을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제노사이드란 인종, 민족, 종족, 이념 등의 대립을 이유로 특정집단의 구성원을 대량 학살하여 절멸시키려는 행위를 이르는 말이다. 30년 전 이곳에서의 전쟁은 한 지역에서 도저히 살 수 없는 학살 등의 만행을 저지른 악몽을 죽을 때까지 짐지우고 산다. 주변 아름다운 경관과는 다르게 음울하고 우울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이 곳에서 저자들은 그들과 아픔을 같이하는 이방인으로서의 느낌을 갖고 "앞으로 10년 간 제노사이드는 생각하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불과 한두 달 만에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시작됨으로써 얼마나 참담한 심정이었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간다. 앞서 잠깐 언급한 '민족이란 무엇이며 종교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됐을 법하다.

저자들은 각 지역 분쟁에 대한 전쟁 발발 이유, 그리고 관련된 나라들의 속사정, 그 전쟁들이 세계에 일으킨 파장 등을 분석했다고 〈프롤로그〉에서 밝힌다. 특히 마지막 부 6부에서는 전쟁 뉴스를 오래 들여다본 저자들의 고민과 바람을 담았다. 전쟁 범죄를 왜 처벌해야 하는가, 전쟁 범죄에 대한 인식과 단죄는 어떻게 진화해왔나, 한국인들에게 전쟁과 파병 그리고 난민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번 취재와 책을 쓰는 동안 자료를 통해 느낀 점을 강력한 소망을 담아 썼다고 한다. "강자의 배짱 앞에 약자들은 그저 다치고 치일 뿐 아무 힘이 없는 것 같지만, 미국이라고 무소불위인 것은 아니다. 사람에겐 진화를 통해 습득해온 공감과 연민과 정의감이 있다. 그러나 국가 혹은 민족이라는 정체성이 앞서게 되면 정의감과 연민은 사라지고 국익이라는 명분 아래 이기주의와 폭력성이 판치게 된다. 하지만 개개인과 국가들 모두의 통합체인 '인류'가 되면 보편적 인권과 평화라는 화두가 다시 고개를 들며 윤리적 판단이 '냉혹한 국제질서'의 일부이자 한계이자 규범으로서 영향력을 갖게 된다. 인류애라는 말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p.8~9)

 


 

이 책은 우선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부터 살펴본다. 우크라이나 나토 가입 문제로 불거진 전쟁이다. 이는 겉으로 드러낸 명분이지만 사실을 파고 들면 또다른 이유가 보이게 된다. 저자들에 따르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는 특별한 역사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땅은 우리가 나눠준 것이며,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만들었다"는 식의 푸틴의 주장은 분명 문제가 있다. 우크라이나를 소련에 강제합병하는 바람에 둘이 한 나라가 된 것인데 '역사적 과거'를 소련 시절로만 한정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또 과거에 러시아 땅이었다고 해서 지금도 그렇다는 발상은 어불성설이다. 우크라이나 땅에 사는 우크라이나계와 러시아계 모두의 선택으로 독립을 해서 현재 주권국가로 존재하고 있는 것을 부정하고 침략한 행위는 국제법상 엄연한 범죄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포기하지 못하는 데에는 역사적 이유뿐만 아니라 군사적·지정학적·경제적인 이유도 있다. 무엇보다도 러시아는 긴 국경을 맞대고 있는 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과 미국 주도의 군사동맹인 나토에 가입할 경우 엄청난 부담을 떠안게 된다. 러시아로서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타토는 유럽과 북미 31개의 회원국(2023년 10월 현재)이 소속된 정치 및 군사 동맹체이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격화된던 1949년에 탄생했다. 나토의 핵심은 조약 제 5조에 명시된 '회원국 한 곳에 대한 무력공격은 전체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는 집단방위 원칙이다. 지금까지 나토가 집단방위 원치긍ㄹ 발동한 것은 단 한 차례로, 2001년 미국에서 9·11 테러가 발생했을 때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고 동유럽 국가들이 속속 민주화되면서 나토는 냉전의 유물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꾸준히 회원국을 늘리면서 몸집을 키웠다. 러시아는 줄곧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자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것이라며 반대해 왔다. 푸틴은 1990년 독일 통일 때 미국이 나토가 동쪽으로 '1인치도 나아가지 않을 것'이라 약속한 것을 줄곧 위반해 왔다고 주장한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접경지대에 병력을 배치한 뒤 2021년 말 미국에 안전보장을 요구했다. 우크라이나를 나토에 가입시키지 않을 것임을 문서 형태로 확약하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미국이나 나토가 결정하고 약속할 사안이 아니다. 정작 중요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의중이다. 그러기에 러시아가 이를 이유로 침공하는 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2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을 다룬다. 이 전쟁은 2023년 10월 7일 토요일 아침(현지 시각) 발발했다. 이스라엘 남부 가자지구 접경 마을 주민들은 3대 명절 중 하나인 '초막절'(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장막 생활을 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절기)를 지내고 난 후 첫 안식일을 느긋하게 맞이하고 있었다. 오전 6시 30분 갑자기 2,500발 이상의 로켓 포탄이 하늘을 뒤덮더니 가지지구를 장악한 무장 정파 하마스의 무장대원들이 픽업트럭과 오토바이, 패러글라이딩을 타고 국경 철책을 넘어 이스라엘 쪽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야말로 기습공격이었다.

완전한 방공망 '아이언 돔'이라고 큰소리치던 이스라엘의 하늘은 뚫렸다. 한꺼번에 이처럼 대량으로 포탄이 쏟아져 들어오면 일일이 모두 대응해 요격할 수 없다는 점을 하마스는 미리 알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대로 포탄과 하마스 공격 요원들에 맞닥뜨린 이스라엘 사람들은 공황 상태로 빠져 들었다. 삽시간에 수백 명이 죽고 240명 가량이 인질로 끌려갔다. 이후 팔레스타인 측은 '제 2의 나크바'를 맞이해야 했다. 나크바는 아랍어로 '대재앙'이란 뜻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1948년 5월 15일을 '대재앙의 날'로 부르면서 이날의 아픔과 슬픔을 해마다 되새긴다고 한다. 이날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나라'가 세워진 날이다. 유대민족에게는 2'000년 가가이 세계 곳곳으로 흩어져 나라 없이 지내온 설움을 청산한 축복과 기쁨의 날이지만, 이스라엘의 건국은 팔레스타인 민족에겐 진정한 '재앙'이 되는 셈이다. 이스라엘 건국은 제 2차 세계대전의 후속 결정 사안이지만 전쟁에서 이긴 승전국의 입장에서 휘두른 무소불위의 힘에 의한 것이다. 당시 승전국 영국은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혜택을 배풀고자 했는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2,000년을 살아온 팔레스타인이 있는 곳을 나가라고 하는 등 '혜택' 자체가 비극을 안고 있었던 셈이다. 프란체스카 알바네세 유엔 팔레스타인 특별인권보고관은 전쟁 발발 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2023년은 나크바 75주년이 아니다. 나크바는 75년 동안 계속되고 있다."

이 비극의 씨앗은 로마군의 예루살렘 함락으로 유대 국가가 멸망한다. 당시 유대 저항군은 깎아지른 절벽 위에 구축된 천혜의 요새 마사다에서 3년이나 항전하다 패배 직전 전원 자결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후 유대인들은 세계 곳곳으로 흩어져 살았는데 이를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한다. 이렇게 2,000년 갈등이 이 전쟁 속에 들어 있다. 세계의 패권국의 위치에 있는 미국이 뒷배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최강국으로 부상하면서 세계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분쟁에 관여해 왔다.

 


 

미군은 2003년 3월부터 2011년 12월 말 철군할 때까지 8년 9개월간 이라크에 주둔했다. 전쟁에 직접적으로 들어간 돈과 이라크 재건에 투입한 비용, 미국 내 전역병·부상병 복지비용 등을 모두 합치면 미국은 2조 달러 이상을 들인 것으로 추산된다. 미국은 가장 많았을 때에는 이라크에 15만 명을 파병했다. 이라크에서 숨진 미군과 다국적군 사망자 수는 4,800명이 넘는다. 이라크에서 다치고 장애를 입은 전역병들은 재정적자와 함께 미국 사회가 앞으로 수십 년간 책임져야 할 짐이다. 더불어 ‘수퍼 파워(초강대국)’로서 미국의 자존심, ‘선한 강대국’이라는 이미지도 타격을 입었다. 이 모든 것이 부시의 전쟁을 승인해주고 그에게 연임까지 안겨준 ‘못난 유권자들’에게 지워진 부담이었던 셈이다. 어쨌든 미국은 전쟁을 일으킨 나라이니 그 짐을 짊어지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라크인들은 무슨 죄일까. 미국은 전쟁의 상대국인 이라크의 민간인 피해에 대해서는 집계조차 하지 않았다. 이라크 전쟁을 맡았던 미군 중부사령부의 토미 프랭크스 사령관은 “우리는 시체를 세지 않는다We don’t do body counts”라는 말로 표현했다.(p.211~212) - 「미국의 오만, 미국을 실패로 이끌다」

 

저자 : 구정은

 

『경향신문』 기자로 일했고, 이라크와 시에라리온 등 세계 여러 곳을 취재했다. 사라지는 것, 버려지는 것, 약자들과 목소리를 잃은 사람들에 관심이 많다. 2021년부터 독립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면서 국제 이슈를 비롯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우리의 일과 삶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글을 쓰고 있다. 『사라진, 버려진, 남겨진』, 『여기, 사람의 말이 있다』, 『10년 후 세계사』 등을 썼고, 『나는 라말라를 보았다』, 『팬데믹의 현재적 기원』 등 여러 책을 번역했다.

 

저자 : 오애리

 

『문화일보』와 『뉴시스』에서 오래 일했으며, 지금은 국제문제를 주로 다루는 프리랜서 언론인 및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에 얽힌 역사적인 맥락을 전하고, 인문사회학적 이해를 높이는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넷플릭스 세계사』와 『숲으로 간 여성』을 비롯해 『성냥과 버섯구름』, 『모든 치킨은 옳을까?』 등을 썼고, 놈 촘스키의 『정복은 계속된다』와 마이클 무어의 『세상에 부딪쳐라 세상이 답해줄 때까지』를 우리 말로 옮겼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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