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들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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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무시하게 내 취향인 책이었다. ‘현기증, 감정들’을 그닥 재미있게 읽지 못해 제발트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었는데, 첫 페이지의 풍경 묘사에서부터 내 마음을 완전히 앗아갔다. 카메라로 찍어놓은 듯, 정밀하면서도 감정에 젖어 축축해지지 않는 제발트의 시선은 압권이었다.


디아스포라. 고국을 떠나 흩어진 사람들을 가리키는 그리스어다.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유대교의 관습과 규율을 지키며 살아가는 유대인을 지칭하던 이 말의 의미는 오늘날 확장되어, 본토를 떠나 타지에서 흩어져 살아가는 이들을 가리키는 단어로 널리 쓰인다. 제발트의 ‘이민자들’은 제목에서 쉽게 유추할 수 있듯 디아스포라 문학이다.


네 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헨리 쎌윈 박사 - 기억은 최후의 것마저 파괴하지 않는가’, ‘파울 베라이터 - 어떤 눈으로도 헤칠 수 없는 안개무리가 있다’,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 내 밀밭은 눈물의 수확이었을 뿐’, ‘막스 페르버 - 날이 어둑해지면 그들이 와서 삶을 찾는다’. 처음부터 엄청나게 마음을 사로잡았고 ‘암브로스 아델바르트’의 절정에 이르면 이게 이 책에서 최고의 소설일 거라고, 이 이상은 나올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놀랍게도 ‘막스 페르버’는 그걸 뛰어 넘었다. 헨리 쎌윈 박사는 영국으로 떠나왔고, 암브로스는 스위스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이었고 그의 친우 코즈모는 미국으로 옮겨간 부유한 유대인이었다. 막스 페르버는 영국으로 도망쳐온 유대인이다. 파울 베라이터는 프랑스로 피신했다가 돌아왔으나 결코 온전한 독일인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헨리 쎌윈 박사는 영국으로 이민온 후 이름과 성을 바꾸고 케임브리지 의과 대학을 최상위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는 혈통 세탁에 성공한 것 같았다. 그러나 제1차세계대전 직전 스위스 베른에서 보낸 한 때, 그가 ‘푹 빠졌던’ 등산안내인 요한네스 네겔리와의 만남과 이별은 그에게 깊은 슬픔을 안긴다. 이후 네겔리가 크레바스에 빠져 추락사 하자 헨리는 깊은 우울증에 빠진다. 이후에 만난 아내와 보낸 사치스러운 시절은 우울증의 다른 표현이다. 그는 ‘무엇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는지, 돈 대문인지, 결국 발각되고 만 혈통의 비밀 때문인지, 그저 사랑이 식은 것인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나는 그가 네겔리를 잃은 순간 모든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고 생각한다. 헨리 쎌윈은 베르테르처럼 총으로 머리를 쏘아 자살한다.


연인에 가까운 것으로 짐작되는 또 하나의 관계는 암브로스 아델바르트와 그의 주인 코즈모 쏠로몬의 관계다. 아슬아슬한 곡예 비행과 거침없는 도박으로 명성을 날렸던 코즈모 쏠로몬은 심한 우울증과 정신분열로 고통 받았다. ‘전쟁이 점점 확산되고 파괴의 규모가 미국인들에게도 알려질수록 코즈모는 별로 변한 것도 없는 미국생활에 다시 적응하지 못했다. (중략) 코즈모는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화재와 죽음과 들판에 뻗어 있는 시체 들이 햇살 아래에서 썩어가는 광경을 자기 머릿속에서 본다고 주장했다.’(p.120) 미국에 뿌리내리는 데 실패하고 유럽에서의 참화를 남의 일로 생각하지 못했던 코즈모는 결국 정신병원에서 죽었다. 암브로스는 쏠로몬 집안이 몰락한 후 코즈모의 뒤를 따르듯 심한 우울증에 빠졌고 역시 코즈모가 숨진 정신병원에서 죽음을 맞았다.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상실된 기억을 자기가 만들어낸 환상으로 보충하는 것’(p.129)처럼 보였던 암브로스. 그 비현실적인 기억들은 그에게 무거운 오버코트와 같은 것이었고 그에 짓눌려 암브로스는 허약하고 불안하게 점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내면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두 번의 세계대전 사이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목격한 아름다운 것들과 파괴된 것들, 코즈모의 죽음, 몰락의 뚜렷한 징후들, 그 모든 것이 결코 잊히지 않고 머리 속에 새겨졌다는 것 그 자체가 암브로스를 파괴시켰다. ‘기억이란 때로 일종의 어리석음처럼 느껴진다. 기억은 머리를 무겁고 어지럽게 한다.’(p.185) 반복해서 전기충격치료를 받았던 암브로스의 선택 역시 자살이나 다름 없다.


또 한 명의 자살자는 교사 파울 베라이터다. 일흔네번째 생일 일주일 후 그는 철로에 누워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1/4만 유대인이었던 그는 고향에서 교사가 되기를 열망했지만 제3제국 치하에서 해임되었고 그의 집안은 붕괴되었다. 놀랍게도 파울은 그 폭력과 굴욕의 와중에 1939년 독일로 돌아와 독일 병사로 입대한다. 끝까지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입증받고 싶었던 파울, 그래서 1935년과 1936년 사이에 있던 일들은 거들떠보고 싶어 하지 않았던 파울. 그는 생애 마지막 십년 동안에야 비로소 당시의 일들을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그는 매일 문서를 들추고 메모하며 생애 마지막 십년을 보냈고, 긴 시간 고통 받다가 결국 자살했다. 그의 실명은 그의 안에 어둠이 퍼져 나가는 것을 상징하며, 파울은 그것을 ‘지극히 평온한 마음으로 받아들렸고, 바야흐로 자신이 접어들게 될 새로운 세계는 이전보다는 좁겠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편안할 것이라고 말했디’.(p.77)



영국 맨체스터로 건너와 화가로 성공한 막스 페르버의 삶은 그의 어머니의 기록과 중첩되어 나타난다. 게르만의 일원으로 아름답고 화목한 가정을 꾸미고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루이자(막스의 모친)는 전쟁으로 두 번의 사랑을 모두 잃고 그녀 자신도 죽다 살아난다. 그리고 그 대가처럼 독일의 훈장을 받는다. 유대인이 아닌 게르만 남자와의 사랑을 꿈꾸었던 그녀는 결국 유대인의 관습대로 중매 결혼을 하고 막스를 낳아 기른다. 1941년 막스의 부모인 프리츠와 루이자는 강제수용소로 옮겨져 거기서 죽는다. 막스는 말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지금도 그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였다고 자신할 수는 없네. 하지만 돌이켜보면, 당시의 일들이 내 삶의 구석구석까지 결정해놓았다는 느낌이 들어. (중략) 부모님이 겪은 고통과 나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보려고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노력도 많이 했고, 이렇게 은둔생활을 하는 가운데 간혹 영혼의 안정이 유지되는 때도 없지 않았지만, 학창시절에 나를 덮쳤던 그 불행이 내 안에 박아놓은 뿌리는 너무나 깊었네. 그 불행은 거듭 땅을 꿇고 나와 사악한 꽃을 피우고 독기 품은 잎으로 내 머리 위에 천장을 만들었지. 그 천장은 지난 몇년 동안에도 내게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나를 어둠으로 덮었네.’(p.241~242) 막스는 자살이 아닌 폐기종으로 죽었지만, 그를 공업도시 맨체스터의 아뜰리에에 은둔하게 만든 것은 그 뿌리 깊은 불행, 학살당하고 내몰린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기억이었으며, 헨리 쎌윈처럼 사랑하는 누군가를 뒤에 남기고 홀로 떠나왔다는 것에 대한 회한이었다.


제발트의 ‘이민자들’은 화자가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인생에서 만났던 타자들-고향을 잃고 마음의 안식처를 잃고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당하고 내몰렸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점이 ‘이민자들’을 다른 디아스포라 문학과 구별짓는다. 자신의 이야기를 내세우지 않고 역사의 격랑에 휘말렸던 타인들의 이야기를 관찰하고, 채록하고, 답사하고, 사진을 붙여 설명하는 기록문학적 성격. 그리고 놀랍도록 섬세하고 치밀한 풍경 묘사들. 제발트는 이런 서술 방식으로 대상과의 적절한 거리감을 만들고, 다큐멘터리적인 시선을 획득하며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담담한 태도를 유지한다. ‘이민자들’은 분명 비극적인 이야기고, 어둡고 우울한 흑백의 정조를 띄고 있음에도 결코 잔인해지거나 슬픔에 매몰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제발트가 세세하게 그려내는 자연의 풍광들은 마냥 아름답기만 하다. 쇠락해가는 유럽 소도시-왕년에는 흥청거렸으나 이제는 누구도 찾지 않는 몰락의 장소들이 변함없는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자연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면서, 안락함과 부유함이 있었던 유럽의 전성기가 소멸했음을 더 강하게 보여준다. 중간 중간 삽입된 사진들은 기록으로서의 문학, 개인의 삶과 역사의 증언을 동시에 해내는 ‘단편적인 기억의 영상들’(p.229)이다. 이것은 일종의 강박관념이라고 막스 페르버는 말한다. ‘시간은 믿을 만한 기준이 못될뿐더러 영혼의 소음일 뿐’(p.229)이기 때문에, 제발트는 시간에 저항하듯 계속 해서 인물들이 살고 죽은 장소를 찾고 그들이 남긴 글과 사진 들을 모아, 작가 스스로 말하듯 ‘값싼 허구화의 형태’ 바깥의 책으로 엮는다. 이러한 그의 작법 속에서 인물들의 삶은 픽션 속 개인의 우울과 절망에서 한 시대의 무챗빛 풍경이자 지금 눈앞의 고통으로 승화된다. 무엇보다 그 자신도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았기에, 이산자들의 고단한 삶과 뼛속 깊은 우울을 채록해 전수하는데는 제발트만한 인물도 없었을 것이다.





덧붙임) p.15의 사과 종 beauty of bath는 '목욕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영국 서머셋 주의 휴양도시 Bath 에서 유래한 사과 품종이다. 헨리 쎌윈은 이 사과 이름을 통해 영국의 야생적 자연이 갖는 아름다움을 예찬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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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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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스탄틴 카바피의 시 ‘Waiting for the Barbarians’ 에서 제목을 가져온, 존 쿳시의 책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1980년, 작가의 세번째 책으로 출간되었고, 작가는 이 책으로  남아프리카 최고의 문학상인 CNA상을 받았다. 우리 나라에는 1982년 두레출판사를 통해 소개가 되었으며 이후로도 여러 출판사에서 판본이 나왔다. 2019년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으로 재출간된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아프리카 문학을 국내에 알리는데 앞장서온 번역가 왕은철 교수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판본이다. 2003년 같은 번역자의 들녘출판사 본에 비해, 딱딱한 문어체가 익숙한 구어체로 바뀌었으며, 행갈이가 적어져 읽기에 더 속도감이 붙고 이해하기 쉬워졌다. 첫 출판된 지 40년 가까운 책이지만 어렵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꾸준히 시대에 맞춰 새로운 번역본을 내놓으려는 역자와 출판사의 노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어느 겨울의 초입, 공간적 배경은 제국의 변방에 있는 주민 3천 명 가량의 도시다. 도시  바깥쪽으로는 토착민 어부들과 그 가족들이 살고 있으며, 멀리에는 천막을 메고 떠돌이 생활을 하는 유목민들이 살아가고 있다. 정착민 어부들과 기마 유목민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제국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똑같은 ‘야만인’일 뿐이다.

이러한 배경 설정은 어느 독자에게는 중국 서부의 소수민족 이야기로 읽히기도 하고, 어느 독자에게는 아라비아 사막의 황량한 배경을 떠올리게도 하고, 어느 독자에게는 아프리카의 식민지 어드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사막과 눈이 공존하는 이 허구의 세계에 대해, 작가 쿳시는 특정 지역명과 국가명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제국’과 ‘야만’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독자의 상상력이 적용될 폭을 넓히고 누구에게든, 어디에서든 ‘제국’ 혹은 ‘야만’이 되는 일은 일어날 수 있다는 보편성을 획득한다. 시제의 현재형 또한 이 일이 먼 과거의 일이 아닌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생생함을 더한다.

화자인 ‘나’는 은퇴를 기다리며 한가롭게 소일하고 있는, 제국을 위해 일하는 시골 치안판사다. (존 쿳시, ‘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2019, p.18. 이하 괄호 안에 페이지 수만 인용) 야만인이 도시와 제국민들을 공격할 거라는 소문이 흉흉하게 돌지만, 치안판사는 한 세대에 한번 씩 일어나곤 하는 야만인 히스테리라고 생각한다.



공간은 공간이고, 인생은 인생이다. 어디를 가나 똑같다. 다른 사람들의 노고로 편하게 먹고사는 나에게는 여가시간을 때우기 위한 문명화된 악습도 없다. 그래서 나는 우울함에 맘껏 젖어 텅 빈 사막에서 특별한 역사적 비애를 찾으려 하는 것이다. 헛되고 한가하고 잘못된 짓이다! (p.32)



내가 늙어버린 것 같고, 피곤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고만 싶다. 나는 요즘 틈만 있으면 잠을 잔다. 그리고 일어날 때는 마지못해 일어난다. 잠은 더이상 고단함을 풀어주는 목욕이거나 원기회복이 아니라 망각이며, 밤마다 소멸 상태와 맞닥뜨리는 일이다. (p.38)



소설 초반의 치안판사는 목표도 지향도 없이, 한가로움이 지나쳐 공허하게 보이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제국 정부에서 졸 대령이 파견을 나오고 ‘진실을 알아내는 특출한 방법’의 소유자인 졸 대령이 야만인들을 고문해 원하는 답을 짜내면서 치안판사의 삶은 달라진다.

우울감, 헛되다는 허무감, 피로감과 무력감 속에 늙어가던 치안판사는 ‘내 창문 밑에서 하루는 칭얼거리다가 다음날에는 더이상 칭얼거리지 않게 된 갓난아이 ’(p.39), 맞아 죽은 노인과  칼에 찔린 어린아이라는 현실에 마주서게 된다. 처음에 치안판사는 이들을 외면하려 한다. 창문을 닫고 책을 읽으려 하고, 창녀가 즐거움을 주는 여관을 찾아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노력들은, 시력을 거의 잃고 발을 다친 ‘여자’와 관계를 맺고 뺨과 손이 철사 고리에 꿰인 원주민들을 보게 되면서 부서진다. 그들은 치안판사에게 더이상 예전과 같은 방관자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한다. ‘이걸 안 이상, 되돌아갈 길은 없는 듯 보인다.’(p.39)



이 추한 사람들이 지구의 표면으로부터 지워지고, 우리가 불의와 고통이 더이상 없는 제국을 운영하기 위해 새 출발을 하겠다고 맹세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중략) 그들로 하여금 사력을 다해 그들 모두가 들어가 눕기에 충분한 구덩이를 파게 한 뒤 거기에 그들 모두를 영원토록 묻어버리고, 새로운 의도와 결심으로 가득찬,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로 귀환하는 데는 비용이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내 방식이 아닐 것이다. 제국의 새사람들은 새 출발과 새로운 장과 깨끗한 페이지를 믿는 사람들이다. 나는 아직도 옛이야기를 가지고 몸부림치며, 그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 내가 왜 그런 수고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알게 되길 바란다. (p.44)  


데려온 야만인 ‘여자’는 치안판사에게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텅 빈 얼굴과 텅 빈 몸’을 한 ‘여자’의 등장으로 치안판사는 졸 대령과 완전히 갈라진다. 영양을 보아도 쏘아 죽일 수 없는 고뇌를 겪고, 여자들의 몸을 소유하는 것이 진정 자신이 원하는 욕망이었는지 회의한다. 치안판사는 제국이 저지른 범죄로 인한 죄책감과 함께 졸 대령과 자기는 다르다는 걸 스스로 증명하고 싶어한다. 치안판사가 여자를 쓰다듬고 어루만지는 것은 문자판을 파내어 수집하는 그의 욕구와 일맥상통하는 페티시였고, 이는 곧 야만의 세계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텅 빈’ 자리로 존재하던 ‘여자’의 모습이 꿈속에서부터 서서히 실재하는 존재로 떠오르면서, 치안판사는 회의와 죄의식을 느끼고, 무기력한 제국의 관리에서 생각하고 움직이는 인간으로 첫 발을 뗀다. 이는 ‘여자’를 유목민의 세계로 돌려 보내려는 순례로 이어진다.

도시를 벗어나서야 비로소 두 사람의 성관계는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것은 관계의 합일로 이어지지는 못한다. 그는 아직 제국민이었고 여자는 훼손된 야만인이었다.


 이윽고 유목민들과 마주치게 된 치안판사는 여자에게 함께 도시로 돌아가지 않겠냐고 하지만 여자는 거부한다. 치안판사의 바람은 일방적인 것일 뿐, 1인칭 주인공 제국-화자의 눈으로는 미지의 대상인 야만-’여자’의 속내를 알 수 없다. 그의 욕망은 공허와 황량함으로 끝나고 도시로 돌아오는 행보는 힘겹다.

 귀환 후, 먼 곳에서 온 야만인을 원한 대가로 치안판사는 적과 내통한 자가 되어 모든 지위를 잃는다. 제국과의 연대가 끊어지자 그는 일순 자유인이 된 우쭐함을 느낀다. 하지만 ‘자유’란 무엇일까? 제국에서 놓여난 자는 모두 자유로운가? 제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지 않으면, 중간자이자 방관자인 어중간한 역할을 벗으면 그는 자동으로 자유로워지는 걸까? 반복되는 폭력 속에, 치안판사는 짐승으로 대우하면 짐승이 되어버리는 인간에게 과연 자유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기에 이른다. 육체가 구속된 이는 말할 것도 없고, 육체가 제약받지 않아도 야만으로 대우받고 짐승 취급을 당한다면 그는 자유민이 아니다. 문명인과 야만인의 경계가 선명하고 누구나 하루 아침에 짐승이 되어버리는 곳에서, 누구도 그 스스로의 가치만으로 존엄해질 수 없는 곳에서 자유란 헛껍데기에 불과하다. 치안판사는 어디에도 도망칠 곳은 없다는 것을 알고 감옥으로 되돌아온다.



내가 지금 버리려고 하는 자유는 나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 걸까? 나는 지난해, 전보다 더 내 마음대로 인생을 살았다. 나는 정말로 무제한적인 자유를 즐겼던 걸까? 예를 들자면, 나에게는 그 여자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내 변덕에 맞춰 그녀를 아내, 첩, 딸, 노예, 혹은 그 모든 것을 아우른 존재, 혹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 수 있었다. 가끔씩 느껴지는 감정을 제외하면 그녀에 대한 의무가 내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유로부터 압박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그 누가, 감금을 당함으로써 생기는 자유를 환영하지 않을 것인가? (p.130~131)


그러나 나는 지금 자유라는 게 얼마나 기본적인 것인지 이해하기 시작한다. 나에게 어떤 자유가 남았는가? 먹거나 배고플 자유, 침묵을 지키거나 혼자 지껄일 자유, 혹은 문을 두드리거나 비명을 지를 자유이리라. 그들이 나를 여기에 감금했을 때 내가 불의, 경미한 불의의 대상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피와 뼈와 고기가 뭉쳐진 불행한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p.142)



 졸 대령이 나타나고 ‘여자’를 만나기 전, 토착민에 대한 치안판사의 태도는 너그럽지만 엄격하게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미개인’이었다. 도시인-제국민이 조금 베풀어주어야 하는 비렁뱅이 부족인 사람들. 치안판사는 그들에게서 ‘더러움과 냄새와 싸움소리와 기침소리’를 읽고 도시 사람들은 전염병의 온상이라며 싫어했다. ‘격노한 아버지에게 야단맞은 아이를 위로하는 어머니 역할 이상은 해줄 수 없다’고 생각하며 ‘한쪽은 거칠고 다른 쪽은 사근사근한’ 가면 중에서 후자 쪽인 제국의 한 면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했던 치안판사는 여전히 제국주의에 한 발을 걸치고 있는 지배층의 일원이었다. 그는 ‘평생 교양 있는 행동을 신봉해온 사람’(p.43)이자 명문가 출신의 신분에 합당한 매너와 태도로 야만인들을 지배해왔다. 이런 그의 태도는 문화통치를 수행했던 일제의 지배 계급들을 연상시킨다. 그는 인간에게 지나치게 잔인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는 지배자는 너그럽고 온화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귀족적 애티튜드였다.

그가  인간이 지켜야 할 가장 밑바닥의 품위에 눈을 뜨는 것은, 인간의 지위를 잃고 짐승으로 격하된 후의 일이다.  그는 옷을 빼앗기고, 제 때 할 수 있는 식사의 권리를 빼앗기고, 씻을 수 있는 권리를 빼앗기며,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빼앗긴다.  뺨과 손이 꿰어진 채 폭행을 당하는 야만인들을 보고 뛰쳐나가 ‘짐승에게도 망치는 휘둘러서는 안된다, 이들은 사람들이다’라고 외치는 순간, 그는 야만인들이 당하는 잔혹한 폭력을 함께 당하게 되고 제국 신민의 지위를 완전히 상실한다. 몽둥이를 맞은 그는 “눈이 안 보여!”라고 외치고 이 때에 치안판사는 비로소 야만인 맹인 ‘여자’와 동등해진다. 극한의 고통 속에 꾼 꿈에서, ‘여자’가 드디어 아름답고 맑은 모습으로 치안판사를 보고, 따뜻한 빵 한덩어리를 내미는 것은 이 ‘동등해짐’ 위에서다.


‘여자’의 눈가에 있던 애벌레 같은 흉터가 그의 얼굴에도 생긴다. 남자 옷을 빼앗기고 여자 옷을 입은 그는 남자가 아닌 여자, 지배자가 아닌 피지배인, 문명이 아닌 야만의 모습이 되어 간다. 제국의 관리이며 명문가의 남성라는 허울은 너무나 쉽게 벗겨지고, 어제까지의 문명인과 오늘의 야만인 사이에는 아무 차이가 없어지고 만다. 머리에 두건을 뒤집어 쓴 채 살고 싶다고 비명을 지르고, 뼈를 부러뜨리는 고통 속에 절규하는 것에는 문명과 야만 사이의 차이가 없다. 이때가 되어서 그는 ‘모든 인간은 살고 살고, 무슨 일이 있어도 또 살고 싶어 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온몸으로 깨닫는다. 그의 비명은 야만인의 비명이며, 인간의 비명이다.


야만인들이 정착지 깊숙이까지 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치안판사를 고문했던 만델 준위는 “너는 죄수 신분이 아니잖아. 네가 나가는 건 자유야.”(p.206) 라며 치안판사를 풀어준다. 자유라는 단어가 이토록 값싸고 얄팍하게 쓰이는 곳이 제국임을 깨달은 치안판사는 “당신은 사람들을 그렇게 다룬 다음 어떻게 음식을 먹을 수 있지?”라며 자유라는 단어가 쓰이기 이전에 먼저 인간 본연의 존엄성을 지키는 일이 있어야 함을 지적한다.


나를 고문하는 자들과 처음 대면했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멍청하게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나? 숨길 것도 없다. 그들이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을 대하고 있다는 걸 알도록 만들자! 무서우면 무섭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자! 저자들은 완강한 침묵을 먹고 사는 인간들이다. 침묵을 지키면, 저자들은 개개인에 대해 자신들이 인내심을 갖고 열어야 하는 자물통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될 것이다. (p.212)


인간을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는 세상, 하나의 자물통으로, 물건으로, 수단이자 도구로 인간을 생각하는 세상에는 존엄이 없고, 그런 세상에서는 누구에게도 자유가 없다. 제국의 신민에게도, 야만인에게도, 평범한 아낙네와 어부들, 아이들, 군인들, 누구에게든 말이다. 눈 앞의 기만적인 자유는 언제든 박탈될 수 있다. 누구든 하루 아침에 조롱받는 천민으로, 더러운 야만인으로, 도구적인 존재로 추락할 수 있다. 이런 세상에서 자유라는 단어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자유롭고 존엄한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허울이 얼마나 얇고 가벼운 것인가를 깨달은 치안판사는 거리낌 없이 구걸을 하고 훔쳐 먹으며 삶을 이어간다. 그리고 예전에는 그토록 쉽게 잠에 빠져들었던 그가 이제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자신의 어리석었던 욕망을 반추하며 부끄러워한다. 그는 ‘편안한 시절에 제국이 스스로에게 얘기하는 거짓말’(p.223)이었을 뿐이었다.


‘그녀에게 끌린 건 그녀의 몸에 난 상처 때문이었다’. 치안판사는 이렇게 스스로를 돌아본다. 결국 그에게도 ‘여자’는 신비롭고 낯선 야만의 흔적이었을 뿐이었다.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훼손되기 전의 모습은 떠올릴 수 없는, 망가진 모습인 대로 기괴하고 진기하고 아름다운 수집품. 폐허에서 파낸 문자판 같은 존재. 애완동물처럼 여자를 소유했던 치안판사는 ‘여자’의 존재로 인해 각성했다. 제국의 수비대는 철수하고 변경의 정착지가 소멸될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더이상 맥없이 잠에 빠지지 않는다. 짧은 욕정이 그를 다시 덮쳐오고 잠들게끔 하지만 그는 ‘고요하고 변덕스러운 슬픔을 느끼’(p.252)면서도 곧 그것을 잊는다. 그는 잠들지 않는다. 깨어 있고 움직이고 대비한다. 겨울을 견딜 준비를 하며 새로 올 봄을 기다린다.  삶의 뚜렷한 목적이 없이 허무와 무기력 속에 살아가던 한 늙은이는 ‘오래전에 길을 잃었지만 어디로 통하는지 모르는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는 사람’(p.256)으로 다시 태어난다. 아직은 팔이 없는 눈사람이지만, 눈과 귀와 코와 입은 분명히 있는, 모자도 쓰고 있는, 새로 만들어진 눈사람처럼, 그는 겨울을 버티고 서서 새로운 봄을 기다리는 적극적인 존재가 된다.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문명과 야만의 경계를 나누고 지배하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폭력성을 지적하는 소설이다. 미지를 야만의 타자로 규정하고, 그 타자의 존재를 통해 ‘우리’를 정의하고려고 하는 인간의 편협함과 어리석음을 고발하는 소설이다. 또한 제국주의 시대 이후에도 독자들에게 보편적인 성찰을 불러 올 수 있는 노년의 성장담이기도 하다. 소설은 평화롭고 안온한 삶 속에서 무기력한 중간자로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고뇌하는 개인, 그리고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거듭날 것을 이야기한다. 인간을 등급화, 서열화 하고 더 존중받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어 대접하는 사회 속에서는 누구도 자유롭지 않고 누구도 존귀해질 수 없다. 우리는 누구나 제도에 포획된 ‘야만인’이 되어, ‘나는 자유로운 제국의 신민’이라는 착각을 진실이라고 믿고 살아가지만, 우리가 자유롭다는 환상은 치안판사의 삶에서 알 수 있듯 너무나 얄팍한 기만책일 뿐이다.    

굳이 먼 나라를 떠올릴 것도 없이, 대한민국의 100년 역사만 보아도 ‘야만인을 기다리며’와 같은 일들은 자주 있었다.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대학살, 제주 4.3. 사건과 광주 민주화 항쟁, 여러 건의 용공 조작 사건들처럼 지배 계급이 피지배층을 길들이고 억압하기 위한 도구로 헛소문과 조작 뉴스를 퍼뜨리고 그것을 근거삼아 민간인을 학살하고 입막음한 일은 수없이 반복되었다. 함부로 매장된 백골 무더기가 되어버린 사건들.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오랫동안 금기였다. 그러나 기록은, 기억은 남았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치안판사는 우리도 기록을 남겨 후대에 물려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고뇌하는 개인과 행동하는 지식인은 무엇을 기억하고,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책을 다 읽고 난 독자에게 이것은 강렬하게 솟구치는 질문이 될 것이다. 문학은 언제나 기록의 도구이며 행동의 수단이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특수한 지역과 특수한 시대의 역사를 보편적인 것으로 치환하는 작업이며,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문명과 야만의 틈바구니에서 인간의 존엄과 자유라는 보편적 가치에 대해 회의했던 사람의 기록으로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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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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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읽긴 읽되 바보 천치 같이 읽은 것’1)이 아닐까 두렵다. 그러나 이 책이 어떤 ‘진정성’의 반석 위에 세워진 책이 아니라는 것만은 말할 수 있다. 음운과 음소 단위에서부터 짜여진 섬세한 언어 유희와, 책의 전후를 수십 번도 넘게 오가게 만드는 기묘한 형식 실험을 통해 나보코프는, 진정성의 가치를 완벽히 뒤집어엎는 가상성의 예술을 극한치까지 선보인다. 믿을 수 없는 화자의 반복되는 진술은 나중에는 소설 전체를 통째로 의심하게 만들고, 이 ‘픽션’ 속에 누구와 무엇이 ‘픽션 속의 현실’이고 누구와 무엇은 ‘픽션 속의 픽션’인가를 혼란스럽게 고민하다가, 결국엔 그 어떤 것도 ‘현실’이 아니고 모든 것이 ‘픽션’일 수 있다는 무서운 깨달음에 도달한다. 종국에는 현실과 허구의 구분은 무의미해지고, 모든 것은 어른거리는 그림자일 뿐이라는 결론에 이르면서, ‘픽션’과 대비되는 ‘현실’의 자명성에까지 회의하며 책을 덮게 된다.  


나보코프가 1962년 출간한 책 ‘창백한 불꽃’은 시인 존 셰이드의 옆 성에 사는 찰스 킨보트의 머리말로 시작한다. 얼핏 보면 그저 셰이드의 열광적인 팬이자 그와 깊은 친교를 나눈 이웃으로 보이는 킨보트는, 머리말에서 밝히기를 위대한 시인 존 셰이드의 마지막 시가 담긴 카드 묶음을 셰이드의 부인에게서 건네 받았다고 한다.고  그는 이 시 카드에 자신의 길고 긴 주석을 달아 출판할 계획을 세운다. 책 ‘창백한 불꽃’은 그 ‘출판 계획 원고’를 독자가 일종의 ‘편집자’가 되어 들여다보는 텍스트다. 소설의 제목인 ‘창백한 불꽃’은 존 셰이드의 유작시의 제목이기도 한데, 이것은 셰익스피어의 ‘아테네의 타이몬’ 4막 3장에 나오는 구절에서 가져온 것이다. 킨보트가 주석에서 설명하는 바, 태양에게서 은빛(창백한 불꽃)을 훔쳐가 겨우 빛을 발하는 그림자 같은 존재인 달을 노래하는 구절이다.


999행의 영웅시격 2행 연구로 이루어진 시 ‘창백한 불꽃’과 이어지는 킨보트의 주석. 독자의 눈과 손은 바쁘게 책의 앞뒤를 오가야 하고 이를 미리 짐작한 킨보트는 ‘간단하게  아예 두 권을 사서 편한 테이블 위에 나란히 펴놓고 보는 것이 현명하리라’(p.35) 충고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긴 주석은, 독자가 금방 알 수 있듯 셰이드 시의 충실한 해석이 아니다. 킨보트는 존 셰이드의 단어와 그에 대한 주석의 형태를 빌어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놓는다. 북구의 나라 젬블라에서 혁명이 일어난 후 간신히 탈출한 친애왕 카를 크사베리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그를 쫓는 암살자 그라두스까지 나오면서 주석은 시의 종속적 자리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활개친다.2)


킨보트가 주석에서 말하기를, 그는 셰이드에게 지속적으로 ‘영감’을 주어 왔으며, 젬블라 왕국의 이야기를 계속 셰이드에게 전해 그가 젬블라와 그 마지막 왕 카를 크사베리의 이야기를 시로 집필하도록 유도했다 한다. 그러나 킨보트의 이 진술은 온통 의심될 수밖에 없는 것이, 간간히 주석을 비집고 나오는 (생명을 가진 것처럼! 킨보트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오려는 몸부림처럼!) 존 셰이드와 그의 아내 시빌 셰이드의 언행들을 보면 이 부부는 킨보트를 친교의 대상이거나 영감의 원천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심지어는 귀찮아 하고 질려 한다. 킨보트는 ‘그가 젬블라 왕의 모험을 정확히 어느 부분까지 집필했는지 신경질적으로 집요하게 통제 불능으로 궁금해하’(p.210)지만, 셰이드는 그런 그를 피한다.


“내가 왜 당신에게 시의 주제를 줬는지, 아니 그보다 당신에게 그 주제를 준 사람이 누구인지 다 밝힐 것을 약속드립니다.”

“무슨 주제?” (p.355~356)


운명의 장난처럼 생일까지 겹치는 셰이드와 킨보트. 시인은 시를 쓰고 주석자는 그것에 주석을 단다. 처음엔 위대한 시와, 그 시의 빛을 훔쳐와 자신의 이야기를 밝히는 주석들이 마치 ‘아테네의 데이몬’에 나오는 태양과 달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면 킨보트의 주석이야말로 ‘태양’이고 셰이드의 시는 그것을 비춰 드러내기 위한 ‘달빛’ 같은 존재였다는 역전이 일어난다.


킨보트는 자신의 성 안에서, 창문 너머로 오래도록 존 셰이드를 관찰하지만 창문 너머로 보이는 셰이드는 발끝 뿐이다. 킨보트의 시선은 셰이드에 대한 흠모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대신 해줄 자를 응시하는, 달에게 빛을 쏘는 태양의 거만한 시선이며, 셰이드를 통해 자신의 빛을 되비쳐 보려는 나르시시즘의 시선이다. 옹달샘에 비친 자기의 상을 바라보며 황홀경에 도취된 나르시스가 킨보트-폐왕 카를 크사베리이며 존 셰이드는 킨보트의 환상 속에 존재하는 ‘나와 같은 나’ 다.  그렇기 때문에 킨보트는, 자신이 만들어낸 ‘가상성’의 세계 안에서 열심히 젬블라의 모험담을 시로 담아 줄 셰이드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결국 친애왕 카를을 시해하려는 그림자단의 암살자 그라두스의 손에 의해 엉뚱한 셰이드가 죽음을 맞고, 킨보트는 셰이드의 유고를 손에 넣고 경황 중인 시빌 셰이드에게 합의문에 서명하게 한 후 달아난다. 그러나 킨보트가 살펴본 시인의 유작은 그가 기대했던 젬블라 폐왕의 모험담이 아니었다. 그러나 무슨 상관이랴? ‘나의 친애하는 시인은 어쩌면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나, 좋든 나쁘든 최후의 말을 하는 이는 바로 주석자’(p.36)다. 킨보트는 셰이드의 시어들을 성냥 삼아, 킨보트-카를의 이야기에 불을 지핀다. 셰이드의 ‘기표’는 중요하지 않고 오직 킨보트가 부여하는 ‘기의’만이 강요된 참뜻, 주석자가 선포하는 진실이 된다. 셰이드의 시어들은, 그 카드들은 옛날 ‘어느 찬란한 아침 셰이드가 소각장의 창백한 불꽃 속으로 초고 더미를 몽땅 던져 태우는’ 것처럼, ‘화형식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검은 나비들’(p.20)의 운명이다.


그런데 킨보트의 주석을 계속 읽다보면 심지어 이 ‘검은 나비’- 유작시조차도 셰이드의 것이 맞을까 하는 의심이 들면서, 독자는 이 책의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발을 들이게 된다. 시 ‘창백한 불꽃’은 과연 셰이드의 것일까? 세상에서 오직 시빌 셰이드 한 명만이 보았을 뿐인 이 카드들이? 우리가 이 카드에 적힌 ‘창백한 불꽃’ 이라는 시를 존 셰이드의 유작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킨보트의 머리말 때문이다. 우리는 킨보트의 시선과 언어를 통하지 않고 존 셰이드라는 존재를 접한 적도 그의 시를 읽은 적도 없다. 어쩌면 이 ‘시’는 처음부터 킨보트의 긴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한 속임수, 주석이라는 형태를 불러오기 위한 밑작업, 킨보트로 정체를 속인 카를 왕처럼 ‘셰이드의 유작시’로 정체를 속인 ‘킨보트의 자작시’는 아닐까? 이게 정말로 셰이드의 유작시가 아니라면, 그럼 정말로 존 셰이드라는 인물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셰이드는 ‘그림자, 스페인어로는 거의 ‘인간’에 가까운…’(p.216)이름이다. 인간이 아니면서 거의 인간에 가까운 ‘인물’. 셰이드는 누구의 그림자인가. 나보코프가 창조한 픽션 속의 시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픽션 속의 킨보트가 창조한 인형, 픽션 속의 픽션일 수도 있다. 물 속에 비친 상이 나르시스 그 자신이었듯 킨보트가 응시하는 셰이드는 바로 킨보트 자신이다. 이 생각에 도달했을 때 독자는 아찔한 당혹감을 느끼지만 이것은 픽션이 줄 수 있는 가장 극한의 즐거움 -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분간할 수 없어진 세계에서 겪는 쾌락의 현기증이다.

의심이 계속 될수록 이야기는 미궁에 빠지고 독자는 길을 잃는다. 독자가 빠져나갈 방법은 왕궁의 벽장 뒤 통로를 그냥 계속 걸어나갔던 카를왕의 길처럼, 그저 나보코프가 설계한 어둠 속을 걷다가 극장 한가운데로 빠져나오는 길 뿐이다. 독자가 도달할 무대는 시를 쓰는 셰이드와 그 시를 해석하는 킨보트와 그 킨보트를 죽이기 위해 달려오는 그림자단의 그라두스까지 겹쳐보이고 구별할 수 없게 되는 그림자극의 무대이다. 삶이 태양이라면 죽음은 달과 같으며, 삶이 빛이라면 죽음은 그림자와 같은 것. 그래서 셰익스피어는 맥베스의 입을 빌려 인생도 결국 흔들리는 그림자일 뿐이라고, 삶과 죽음의 고리를 이어놓은 것이 아닌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어디에서 그 장면이 펼쳐지든, (중략) 더 크고, 더 훌륭하고, 더 유능한 그라두스가.’(p.371) 결국 초인종을 울릴 것이며 그의 다른 이름은 삶의 그림자, 삶의 발끝에 길게 이어져 있는 죽음이다. 끝에는 그라두스까지도 이 반복되는 킨보트-카를-셰이드의 거울상 끝에 사자(使者)의 형태로 서 있는, 거울상의 변주로 보인다. 유리에 비친 상이 벽에 걸린 거울 속에 반사되는 것처럼, 그 안에서 하나의 인물이 계속 분열되어 비치듯이. 거울 속에선 유리에 비친 나가 반복되고 그 거울은 또 유리 속에서 반복되어 끝없이, 상이 마침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셰이드-킨보트-카를- 그라두스-셰이드-킨보트-카를-그라두스...’ 같은 것의 반복, 단 한 사람 ‘나’의 반복만 계속되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이야기가 킨보트라는 - 어쩌면 그 이름조차 가짜일 - 미치광이 혹은 가공할 예술가, 게임메이커가 꾸며낸 픽션일지도 모른다.3) 그리고 그 게임메이커는 바로 작가 나보코프 자신의 ‘그림자’다. 반복되는 ‘나’의 연쇄 끝에, 이윽고 이야기의 최종 메타자인 나보코프의 상이 거울의 저 끝에 떠오르는 순간, 독자는 전율하게 된다. 나보코프는 킨보트를 꾸며내고 킨보트는 젬블라와 카를 크사베리를 꾸며내고, 그 이야기를 들어줄 시인 셰이드까지 꾸며낸다. 마뜨로쉬까 인형처럼 겹치고 겹치는 픽션의 중첩. 이 안에서 정신 착란에 빠진 잭 그레이는 그림자단의 암살자 그라두스로 둔갑하고, 러시아 문학 교수 찰스 킨보트가 젬블라의 폐왕 카를 크사베리로 둔갑하며, 어쩌면 처음부터 없는 인물이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그냥 지나가는 이웃 노인네였을지도 모르는 존 셰이드는 미완의 영웅시를 남긴 위대한 시인으로 둔갑한다. 그 모두는 나보코프의 그림자이다. 마뜨로쉬까를 끝까지 열어 보아도 그 속은 텅 비어 있을 뿐. 타자도 없고 세계도 없으며 그저 거울에 비추어진 무수한 ‘나’의 반복만이 있을 뿐인 가짜 상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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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2019, p.194. 이하 인용은 괄호 안에 페이지 수만 표기.


2)주석을 읽다 보면 워드스미스 대학의 러시아 문학 교수 찰스 킨보트가 젬블라의 폐왕 카를 크사베리와 동일 인물인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킨보트의 진술을 전적으로 신뢰했을 때 가능한 일이며, 킨보트의 ‘믿을 수 없는 화자’ 성질을 강렬하게 의식하는 독자라면 킨보트가 카를 크사베리와 동일 인물이라는 것도, 나아가 젬블라라는 나라가 이 ‘픽션’ 속의 ‘현실’로 존재한다는 것까지도 의심하게 될 것이다.


3) 킨보트조차도 마지막엔 이렇게 여지를 남긴다.

‘오돈과 합작으로 <젬블라 탈출>이라는 신작 영화를 제작할지도 모른다. 연극 평론가들의 단순한 취향에 영합해 무언극을 지어낼지도 모르겠다. 세 명의 주역, 즉 상상 속의 왕을 죽이려는 미치광이와 자신이 왕이라고 상상하는 또 다른 미치광이 그리고 우연히 사선으로 굴러들어와 두 허상 간의 충돌로 죽는 저명한 노시인이 등장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신파극을’. (p. 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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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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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소설의 거장’ 앨리스 먼로의 소설 ‘거지 소녀’는 작가의 소설 중에서도 초기작이다. 캐나다 온타리오 주 웨스트핸래티에서 태어나 자란 로즈의 소녀 시절부터, 그녀가 토론토, 밴쿠버, 또 여러 캐나다의 타운들을 두루 거쳐 다시 웨스트핸래티로 돌아온 중년기까지를 그리고 있다.

총 10편의 단편소설 속 로즈의 인생은 연속적이지 않고 띄엄띄엄 하다. 한 편 한 편의 단편소설은 다른 장소에서, 다른 에피소드로 진행되고 등장인물은 거의 항상 바뀐다. ‘거지 소녀’ 연작은  ‘여인의 일생’ 이라는 제목의 10편짜리 단막극 모음으로 읽힌다.

매 맞는 소녀, 선배에게 사랑을 느끼는 여학생, 도시에서의 새로운 삶을 희구하며 결혼이라는 제도 앞에 갈등하는 젊은 여성, 불륜을 저지르는 유부녀, 아이와 함께 살고 싶어 하는 이혼녀, 치매 걸린 새어머니를 돌보는 딸. 로즈는 10편의 단막극들에서 편마다 새로운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다. 작가 앨리스 먼로는 하층 계급 출신의 지식인 여성이 성장 과정에서 다양한 장소, 사람, 상황과 마주치는 모습을, 그 때마다 어떤 반응을 보이며 인생의 다음 막으로 넘어가는지를, 냉정한 관찰과 섬세한 심리 묘사를 통해 탁월하게 형상화 한다.


첫 소설인 <장엄한 매질> 은 마지막 소설인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와 수미상관적으로 맞물려 있다. 여기에서 새어머니 플로는 로즈에게 이렇게 말한다. “넌 네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줄 알지,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이것은 웨스트핸래티에서의 학창 시절, 해티 선생님이 로즈에게 던진 말과 같다.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이것은 로즈의 되바라짐과 시건방짐, 자만심과 허영을 비난하는 웨스트핸래티의 말이다. 로즈는 과연 뭘까? 매질을 당하는 소녀, 혼자 방에서 울음과 수치심을 삼키는 소녀, 그러나 달콤한 간식들에 자존심을 허물어버리는 소녀. 로즈 안에는 영웅적인 면모는 전혀 없고 의지도 강인함도 없다. 똑똑하지만 뜻은 높지 않고, 자존심 강해 보이지만 사실은 약하고 불안 많은 속물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현모양처의 삶을 살 수도 없고, 목표를 정하고 꾸준히 나아가는 야심 넘치는 사람이 될 수도 없다. 하나의 상으로 정리될 수 없는 인물, 일이 닥칠 때마다 그 때 그 때 생각하고 대응하는 즉흥적인 인물이 로즈이고 이것은 그녀의 배우성이 천부적인 것임을 입증한다.


 <장엄한 매질>과 이후 두 소설에서 묘사되는 웨스트핸래티- 더럽고 빈곤하며 ‘대체로 비루하고 희붐하고 흥미롭고 문제투성이로 보이는 세상’인 웨스트핸래티는 소설의 시작이자 끝이다. 타이드 영감이 딸을 학대하고 아이까지 갖게 만들었다는 소문 때문에 마을의 젊은이들이 영감을 폭행해 죽게 만드는 곳이다. 조용한 일상 속에 폭력이 들끓는 이 마을에서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갈등 그 자체다.’(p.34)

폭력은 정의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고, 실제로 이 ‘정의의 매질’은 타이드 남매에게 새 삶을 선사하기도 한다. 웨스트핸래티에서 폭력은 용인되고 거의 장려된다. 매질은 하나의 위풍당당한 연극, 로즈의 처음 생각처럼 장엄한 의전 행위다. 어긋난 것을 올바르게 만든다는 폭력은 핸래티 공동체의 도덕이며, 로즈를 가혹하게 구타하는 로즈 아버지와 타이드 영감을 죽인  말채찍 패거리는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매질을 하는 아버지와, 매질을 주문하고서도 달콤한 간식으로 달래려고 드는 플로를 통해, 로즈는 인생의 연극성을 배운다. 매 맞는 피해자의 역할을 맡았다는 것은 로즈에게 우월감을 선사하고 굴종이 주는 보상은 달콤하다. 그리고 인생에서 어떤 행동들은 특별한 의미 없이 그저 연극적으로 행해진다는 깨달음. 코라와 함께 했던 순간들과 무덤 놀이 또한 삶을 하나의 연극처럼 만드는 장치들이다. 놀음PLAY이 중요하다. 진정한 것, 확고부동한 것, 겉과 속이 일치하는 것은 없다. 플로가 <특권>에서 로즈에게 말하듯, 대단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로즈는 과일 반쪽으로 아침 식사를 했다는 식으로 허세를 부리며 뭔가 대단한 사람을 연기해보려고 하지만, 그녀보다 더 화려한 배역을 연기한 루비 캐루서스나 조슬린 앞에 로즈의 작은 허세는 사소해진다.


그녀는 누군가의 대상이 되고픈 갈망을 느꼈다. 강타당하고 애무받고 전락하고 소진되는. (p.117)


누군가의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 특히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경계를 넘어서는 일이 되고 로즈는 이것을 선망한다.  <야생 백조>에서, 기차 옆자리에 앉은 남자는 로즈를 추행한다. 독자의 관행적인 예상을 거부하고 로즈는 불안 속에서도 그 추행을 즐긴다. 플로가 주입했던 몸가짐 바른 여성으로서의 로즈와, 성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는 달콤한 성취감을 느끼는 로즈가 뒤엉킨다. 욕망보다 더 갈급한 것은 호기심이었다. 성인이 된 로즈는  모든 것을 직접 보고 겪고 싶어 한다. 토론토에서의 삶은 ‘이름만 바꿨을 뿐 자기 모습 그대로 모험을 감행한다는 것’이다. 이 짧은 에피소드에서 로즈와 독자는 새로운 세계-대도시에서의 생활이 주게 될 변화, 활력 그리고 관능을 예감한다.


대학에서 만난 역사학도 패트릭-기사도 정신으로 무장한 이 부르주아 사나이는, 정의의 기사에 자신을 대입하고 그가 구해주어야 하는 가련한 처녀의 자리에 로즈를 끼워넣는다. 그의 감정은 가난과 역경에 대한 동경이며, 베푸는 자로서의 쾌감이다. 패트릭의 기만적인 사랑에 로즈는 저항하지 못한다. 누군가의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로즈에게 황홀한 일이었다. 타인의 눈에 맞춰 해야 할 역할을 수행해 왔던 로즈의 미성숙함과 타인의 부러움을 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로즈의 속물성으로 인해 그녀는 패트릭과 약혼한다.


 그녀는 유명하고 선망받는 사람, 날씨하고 총명한 사람이고 싶었다. -p.134


로즈는 대학에서 깨닫는다. ‘여학생들에게 가난은 상냥하고 헤픈 태도나 멍청함과 결합되지 않는 한 매력이 없다. 좋은 머리는 우아함의 징후, 즉 품격과 결합되지 않는 한 매력이 없다. 정말로 그랬을까? 그리고 그녀는 그런 걸 신경쓸 만큼 어리석었을까? 정말로 그랬다. 그리고, 어리석었다.’ -p.137



결혼 직전 마지막 순간에도 로즈는 허영의 왕관을 내려놓지 못한다.  ‘그의 모습에 마음이 찡해져서, 너무도 다정하고 서글퍼져서, 그에게 뭔가를 주고 놀라운 관대함을 베풀고 싶어’(P.175)하는 부분은 허영의 절정이다. 권력의 관계는 역전된다. ‘그토록 볼품 없는 거지 소녀였던 내가, 나에게 몸이 달아 있는 남자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다’는 전능함의 환상. 그녀는 시혜하는 사람으로 자신의 역할을 설정하고 패트릭에게로 뛰어든다.


로즈는 결국 십 년 후 파경을 맞는다. ‘기사와 숙녀가 살고 만행과 헌신이 있는 세상에서 활약하고 싶은’,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삶을 연기하고 싶어하는 남자 패트릭은 기실 로즈의 딱 맞는 짝이었다. 하지만 결혼 후 그는 자신의 부르주아 계급성 안으로 소라게처럼 들어간다 (아버지가 사준 집을 화려하게 꾸미고 자랑하는 모습처럼). 그러나 패트릭은 온타리오에서 너무나 먼 브리티시컬럼비아 출신이었고 그의 계급은 굳건했다. 부유한 사람들은 ‘타인의 뜻에 따르고 자신을 갈고 닦으며 세상의 호의를 얻어야 했던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p.145)이며 패트릭 또한 남들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자신의 보수적 견해를 큰소리로 떠드는 자족적인 인생을 산다. 하지만 ‘거지 소녀’ 로즈는 그렇지 못하다. 패트릭의 아내가 되어서도 웨스트핸래티 출신의 가난한 소녀, 물질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빈곤한 계급의 소녀 로즈는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을 받아야 하고 욕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ㄴㅇ사랑받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그녀의 환상과 더 화려하고 자극적인 배역을 맡고자 하는 욕망은 불륜을 적극적으로 선택하게 만든다. 그녀가 유부남인 클리퍼드와 톰을 선택하는 것, 미스터리한 남자 사이먼을 선택하는 것은 그녀 안에 분출해야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즈의 딸 애나는 로즈와 다르다. <섭리>에서  애나는 로즈와 헤어져 밴쿠버로 돌아간다. 결국 ‘섭리’란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어야 하는-애나는 애나의 자리에 로즈는 로즈의 자리에- 것을 의미한다. 애나는 패트릭과 로즈의 부부 침대를 차지하고 부르주아 가정의 아이가 되어 흡족해 한다. 이 침대는, 이 자리는 로즈의 것이 아니었다. 로즈는 따뜻한 가정과 기둥 달린 침대의 삶보다 길을 헤치고 나아가는 방랑의 삶, 순간 순간 떠오르는 욕망을 자유롭게 분출하는 삶을 선택한다. 이러한 로즈는 일생에 걸쳐 누군가를 배신하고 배신당하는 드라마틱한 삶을 산다. 패트릭을 배신하고 톰에게 배신당하고 운명의 남자를 만났다는 확신에 스스로 배신당하는 삶이다.  


그녀가 달아나며 벗어나려 하는 것은 실망, 상실, 파경만이 아니며 그와 정반대되는 것, 즉 사랑의 축복과 충격, 그 눈부신 변화이기도 한 것 같았다. 그런 것들이 안전하다 해도 그녀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둘 중 어떤 경우라도 결국엔 뭔가를, 자신만의 균형추이건 진실성의 작고 메마른 알맹이이건, 빼앗기게 된다. -p.308


로즈와 달리 플로는 나이 들면서 어린아이 같아진다. 소녀 시절의 로즈처럼 단것을 갈망하고, 치매 환자가 되어 스펠링 놀이를 하고 간호사를 깨무는 노인이 된다. 인생의 길을 방랑하며 수많은 캐릭터로 변신했던 로즈, 너무나 혼신을 기울여 모든 역할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이젠 무엇이 연기이고 무엇이 진짜인지 알 수 없게 된 로즈의 삶과 플로의 삶은 다르다. 플로는 변함없이 플로였고, 플로답게 노년에 이른다.


책의 마지막 수록작인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는 이 책의 원제였다. 책의 처음에서 플로가 했던 그 질문은 마지막에서 해티 선생님을 통해 반복된다. 처음엔 가볍게 느껴졌던 그 질문은 이제 둔중한 무게로 독자의 가슴을 누른다. 로즈는 과연 뭘까? 이는 모욕적인 질문일 수도 있지만, 로즈의 고정되지 않는 자아를 짚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녀는 ‘무엇’이라고 정의되지 않는 존재, 그 때 그 때 주어진 역할을 자신의 생을 통째로 바쳐 연기해낸 즉흥 배우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이는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속의 밀턴 호머와 랠프 길레스피와도 연결된다. 밀턴 호머는 경계심과 억제가 없는 인물이고, 연극적인 행진을 좋아하며, 아기에게 성자처럼 축복을 내려주는 역할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수행하는 인물이다. 로즈의 친구 랠프 길레스피는 밀턴 호머의 모사를 너무 열심히 하다가 밀턴 호머처럼 되어 버렸다. 밀턴 호머와 랠프 길레스피는 실제 인생과 연극을 섞어, 연극이 실제가 되고 실제가 연극이 되게 만든다. 연극과  생활을 합일시킨 배우는 가장 위대한 연기를 해낸 것이지만 그 대가로 고독한 삶을 살게 된다. 사회가 원하는 것은 주어진 규범의 한도 내에서만 연기를 하는 것이다. 그것을 넘어서는 연기, 지나치게 감정을 드러내는 연기는 플로의 표현대로 ‘수치’스러운 것이다. 로즈와 밀턴, 랠프는 사회가 요구하는 선을 넘어 ‘연기’를 ‘사는’ 인물이 되고 이 과도함은 경계의 대상이 되며, 선을 지키는데 실패한 배우는 고독한 삶을 살게 된다.

 따라서 로즈가 랠프를 자신의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느끼는 것은 자연스럽다. 랠프는 죽음 이후 나란히 묻히게 될 동료와도 같고, 그래서 두 사람의 재회 또한 재향군인회관에서 이루어진다. 랠프의 자족적인 모습, 당혹감 속에서도 긍지를 가진 모습은 밀턴 호머와 완벽하게 일치되어 보인다. 밀턴 호머를 너무 열심히 연기하다 그 자신이 밀턴 호머가 되어버린 랠프 길레스피. 삶을 배역과 완전히 일치시킨 이 ‘배우’를 보면서 로즈는 우애와 공감을, 복잡한 삶의 궤적들을 용서하는 마음을 느낀다. 로즈는 자기 인생이 허튼 것, 우스꽝스러운 것, 장난 같은 것이라고 느껴왔다. 섬세함도 깊이도 없는 실수덩어리라고 생각했다. 플로는 그녀에게 수치를 알라고 했고, 해티 선생님은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라는 거친 의문을 던졌지만,  로즈의 수치심과 당혹감은 동료 랠프 길레스피를 보며 가라앉는다.


책은 로즈의 끝없는 이주가 마침내 온타리오 주 웨스트핸래티로 돌아오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물론 로즈의 삶은 이후로도 이어질 것이고 로즈가 다시 어디로 길을 떠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연작소설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랠프 길레스피의 죽음을 마음에 간직하는 중년 로즈의 모습으로 끝난다.


10막짜리 긴 장막극이 아니라 10편짜리 단막극 모음과도 같았던 소설. 매 편마다 로즈의 모습은 비슷한듯 하면서도 달랐고, 출연자들도 저마다 개성이 뚜렷해서, 로즈라는 한 명의 배우가 연기하는 인생소극(笑劇) 시리즈를 본 기분이었다. 읽었다기 보다는 보았다는 느낌.  로즈는 편마다 새로운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였다. ‘나 자신’을 알고 목표에 따라 미래를 계획하며, 그것을 위해 인내하고 노력하며 살아가는 인물- 이런 사람들을 성숙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로즈는 결코 성숙한 인물이 아니었다. 로즈는 ‘나 자신이 무엇인지’ 아는,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늘 떠돌았고 늘 뒤집혔고 일이 닥치면 그 때 생각하며 그 때 그 때를 살아가는 인물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리스인 조르바와도 비슷하달까. 세상의 관점으로는 대책없고 미성숙한 사람이겠지만, 그녀는 ‘확고부동하며 정의 가능한 나’가 되기를 거부했다. 대신 매 회 다른 연기PLAY를 선보이며 하나로 정의 내릴 수 없는 인간의 모순성과 복잡성을,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누구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어리석음과 속물성을 온몸으로 열연하였다. 어느 소설에서도 쉽게 만날 수 없는 이 복잡다단한 캐릭터 앞에, 작가 앨리스 먼로에 대한 경외심이 절로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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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룸
김의경 지음 / 민음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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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경의 첫 소설집 '쇼룸'을 읽었다. 8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된 소설집이다.

 

처음 수록된 소설 '물건들'은 다이소에서 쇼핑을 하다 재회한 대학동창 영완과 '나'의 동거 이야기다. 천원 이천원으로 생활용품 - 생활에 꼭 필요한 것도 있지만 조금 생각해보면 정말 필요한가 고개를 갸웃거려 볼 수도 있는 - 들을 이것저것 주워 담을 수 있는 '다이소'를 주요 소재로 한 소설이 나왔다는 자체가 일단 흥미로웠다. 가난한 커플인 영완과 '나'는 값비싸고 오래 쓸 수 있는 물건을 사는 대신 부담없이 사고 쓰고 버릴 수 있는 생활용품들을 사들이는 것으로 소비 욕구를 채우고 가난한 직장인의 삶이 주는 스트레스를 그 때 그 때 해소한다. 그러나 '그 때 그 때' 해소하는 '때우기식' 삶의 방법은 이 커플 안에도 균열을 일으킨다. 볼품없는 살림살이지만 저렴한 물건들로라도 예쁘게, 단정하게, 보기좋게 꾸미고 정돈하며 살아가고파 하는 영완.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아 키우는 삶을 조심스럽게 꿈꾸는 '나'. 그러나 현실은 이 커플에게 찬바람 쌩쌩 불어댈 뿐 이들의 낮은 임금과 부모 부양의 책임은 그 작고 소박한 꿈조차 꽃피울 수 없게 하고 이들의 답답하고 억눌린 마음은 다이소에서 별 필요도 없는 싸구려 물건들을 소비하는 것으로 대충 소모되고 만다. 응집되고 커져서 큰 불꽃으로 피워올라야 하는 이들의 욕구가 '유리캔들홀더 위의 티라이트'처럼 가볍게 불타 올랐다가 조용히 사그라들고 마는 것. 결국 이들의 오순도순했던 동거 생활도 조용히 끝장나고 만다. 남은 것은 다이소 안에서 흩어져 버린 연인의 자취 뿐이다. 

분량도 제일 길고, 소재나,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서술력도 다른 일곱 편의 소설들에 비해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우울한 이야기 같지만 다이소라는 가벼운 공간이 주는 느낌을 가져와서인지 무겁게 처지지 않았고, 고민을 하면서도 축 처지지 않는 '나'의 적당한 건조함과 냉담함이 타깃층 독자를 잘 겨냥했다 싶었다.


이후의 '세븐 어 클락' 부터 '빈집' 까지는 모두 광명에 문을 연 이케아를 둘러 싼 일종의 연작소설이다. 스웨덴에서 건너온 조립가구인 이케아는 저렴함과 간편성, 보기좋은, 결정적으로 언제든 쓰고 버릴 수 있다는 '존재적 가벼움'으로 이 시대 젊은이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받고 있다. 모든게 예쁘게 전시되어 있는 이케아의 '쇼룸' 에서 그 '예쁨', '간편함' '가벼움'을 소비하는 가난한 청춘들의 이야기들. 그러나 그 저렴한 가구를 소비하는 와중에서 내 옆에 선 사람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는 결말은 희망의 온기를 놓지 않겠다는 작가의 의지로 보였다. 


'부유한 유학파 부부의 꿈'이 담긴 바우하우스 고시텔의 이야기를 그린 '2층 여자들'은 책의 마지막 소설이다. 고시원을 다룬 소설들은 꽤 여러 편 나와 있기에 솔직히 가장 식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이소나 이케아만한 공간적 소재는 아니었다. 고시원의 분절적 삶 속에서도 끈끈한 애정과 전통사회적 상호 부조를 꿈꾸는 총무의 캐릭터도 다소 뻔했다. 특히 마지막에 총무가 돈을 가지고 도망치는 이야기나, 그런 총무를 고발하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도 작가가 이전의 이케아 연작에서 보여주었던 희망의 의지가 약해보여 아쉬웠다 - 그래도 '나'가 총무를 고발하는 허위 문자를 전송하지 않은 것으로 마무리한 건 다행이었다. 


전체적으로 무거운 사회적 주제를 '다이소'나 '이케아' 같은 공간성 안에 잘 녹여낸 점, 진지하지만 질척이거나 우울하지 않은 건조한 서술이 매력적인 책이었다. 작가의 첫 책이라 처음엔 수준에 대한 확신이 없었는데 후속작도 읽어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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