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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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소설의 거장’ 앨리스 먼로의 소설 ‘거지 소녀’는 작가의 소설 중에서도 초기작이다. 캐나다 온타리오 주 웨스트핸래티에서 태어나 자란 로즈의 소녀 시절부터, 그녀가 토론토, 밴쿠버, 또 여러 캐나다의 타운들을 두루 거쳐 다시 웨스트핸래티로 돌아온 중년기까지를 그리고 있다.

총 10편의 단편소설 속 로즈의 인생은 연속적이지 않고 띄엄띄엄 하다. 한 편 한 편의 단편소설은 다른 장소에서, 다른 에피소드로 진행되고 등장인물은 거의 항상 바뀐다. ‘거지 소녀’ 연작은  ‘여인의 일생’ 이라는 제목의 10편짜리 단막극 모음으로 읽힌다.

매 맞는 소녀, 선배에게 사랑을 느끼는 여학생, 도시에서의 새로운 삶을 희구하며 결혼이라는 제도 앞에 갈등하는 젊은 여성, 불륜을 저지르는 유부녀, 아이와 함께 살고 싶어 하는 이혼녀, 치매 걸린 새어머니를 돌보는 딸. 로즈는 10편의 단막극들에서 편마다 새로운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다. 작가 앨리스 먼로는 하층 계급 출신의 지식인 여성이 성장 과정에서 다양한 장소, 사람, 상황과 마주치는 모습을, 그 때마다 어떤 반응을 보이며 인생의 다음 막으로 넘어가는지를, 냉정한 관찰과 섬세한 심리 묘사를 통해 탁월하게 형상화 한다.


첫 소설인 <장엄한 매질> 은 마지막 소설인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와 수미상관적으로 맞물려 있다. 여기에서 새어머니 플로는 로즈에게 이렇게 말한다. “넌 네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줄 알지,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이것은 웨스트핸래티에서의 학창 시절, 해티 선생님이 로즈에게 던진 말과 같다.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이것은 로즈의 되바라짐과 시건방짐, 자만심과 허영을 비난하는 웨스트핸래티의 말이다. 로즈는 과연 뭘까? 매질을 당하는 소녀, 혼자 방에서 울음과 수치심을 삼키는 소녀, 그러나 달콤한 간식들에 자존심을 허물어버리는 소녀. 로즈 안에는 영웅적인 면모는 전혀 없고 의지도 강인함도 없다. 똑똑하지만 뜻은 높지 않고, 자존심 강해 보이지만 사실은 약하고 불안 많은 속물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현모양처의 삶을 살 수도 없고, 목표를 정하고 꾸준히 나아가는 야심 넘치는 사람이 될 수도 없다. 하나의 상으로 정리될 수 없는 인물, 일이 닥칠 때마다 그 때 그 때 생각하고 대응하는 즉흥적인 인물이 로즈이고 이것은 그녀의 배우성이 천부적인 것임을 입증한다.


 <장엄한 매질>과 이후 두 소설에서 묘사되는 웨스트핸래티- 더럽고 빈곤하며 ‘대체로 비루하고 희붐하고 흥미롭고 문제투성이로 보이는 세상’인 웨스트핸래티는 소설의 시작이자 끝이다. 타이드 영감이 딸을 학대하고 아이까지 갖게 만들었다는 소문 때문에 마을의 젊은이들이 영감을 폭행해 죽게 만드는 곳이다. 조용한 일상 속에 폭력이 들끓는 이 마을에서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갈등 그 자체다.’(p.34)

폭력은 정의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고, 실제로 이 ‘정의의 매질’은 타이드 남매에게 새 삶을 선사하기도 한다. 웨스트핸래티에서 폭력은 용인되고 거의 장려된다. 매질은 하나의 위풍당당한 연극, 로즈의 처음 생각처럼 장엄한 의전 행위다. 어긋난 것을 올바르게 만든다는 폭력은 핸래티 공동체의 도덕이며, 로즈를 가혹하게 구타하는 로즈 아버지와 타이드 영감을 죽인  말채찍 패거리는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매질을 하는 아버지와, 매질을 주문하고서도 달콤한 간식으로 달래려고 드는 플로를 통해, 로즈는 인생의 연극성을 배운다. 매 맞는 피해자의 역할을 맡았다는 것은 로즈에게 우월감을 선사하고 굴종이 주는 보상은 달콤하다. 그리고 인생에서 어떤 행동들은 특별한 의미 없이 그저 연극적으로 행해진다는 깨달음. 코라와 함께 했던 순간들과 무덤 놀이 또한 삶을 하나의 연극처럼 만드는 장치들이다. 놀음PLAY이 중요하다. 진정한 것, 확고부동한 것, 겉과 속이 일치하는 것은 없다. 플로가 <특권>에서 로즈에게 말하듯, 대단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로즈는 과일 반쪽으로 아침 식사를 했다는 식으로 허세를 부리며 뭔가 대단한 사람을 연기해보려고 하지만, 그녀보다 더 화려한 배역을 연기한 루비 캐루서스나 조슬린 앞에 로즈의 작은 허세는 사소해진다.


그녀는 누군가의 대상이 되고픈 갈망을 느꼈다. 강타당하고 애무받고 전락하고 소진되는. (p.117)


누군가의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 특히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경계를 넘어서는 일이 되고 로즈는 이것을 선망한다.  <야생 백조>에서, 기차 옆자리에 앉은 남자는 로즈를 추행한다. 독자의 관행적인 예상을 거부하고 로즈는 불안 속에서도 그 추행을 즐긴다. 플로가 주입했던 몸가짐 바른 여성으로서의 로즈와, 성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는 달콤한 성취감을 느끼는 로즈가 뒤엉킨다. 욕망보다 더 갈급한 것은 호기심이었다. 성인이 된 로즈는  모든 것을 직접 보고 겪고 싶어 한다. 토론토에서의 삶은 ‘이름만 바꿨을 뿐 자기 모습 그대로 모험을 감행한다는 것’이다. 이 짧은 에피소드에서 로즈와 독자는 새로운 세계-대도시에서의 생활이 주게 될 변화, 활력 그리고 관능을 예감한다.


대학에서 만난 역사학도 패트릭-기사도 정신으로 무장한 이 부르주아 사나이는, 정의의 기사에 자신을 대입하고 그가 구해주어야 하는 가련한 처녀의 자리에 로즈를 끼워넣는다. 그의 감정은 가난과 역경에 대한 동경이며, 베푸는 자로서의 쾌감이다. 패트릭의 기만적인 사랑에 로즈는 저항하지 못한다. 누군가의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로즈에게 황홀한 일이었다. 타인의 눈에 맞춰 해야 할 역할을 수행해 왔던 로즈의 미성숙함과 타인의 부러움을 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로즈의 속물성으로 인해 그녀는 패트릭과 약혼한다.


 그녀는 유명하고 선망받는 사람, 날씨하고 총명한 사람이고 싶었다. -p.134


로즈는 대학에서 깨닫는다. ‘여학생들에게 가난은 상냥하고 헤픈 태도나 멍청함과 결합되지 않는 한 매력이 없다. 좋은 머리는 우아함의 징후, 즉 품격과 결합되지 않는 한 매력이 없다. 정말로 그랬을까? 그리고 그녀는 그런 걸 신경쓸 만큼 어리석었을까? 정말로 그랬다. 그리고, 어리석었다.’ -p.137



결혼 직전 마지막 순간에도 로즈는 허영의 왕관을 내려놓지 못한다.  ‘그의 모습에 마음이 찡해져서, 너무도 다정하고 서글퍼져서, 그에게 뭔가를 주고 놀라운 관대함을 베풀고 싶어’(P.175)하는 부분은 허영의 절정이다. 권력의 관계는 역전된다. ‘그토록 볼품 없는 거지 소녀였던 내가, 나에게 몸이 달아 있는 남자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다’는 전능함의 환상. 그녀는 시혜하는 사람으로 자신의 역할을 설정하고 패트릭에게로 뛰어든다.


로즈는 결국 십 년 후 파경을 맞는다. ‘기사와 숙녀가 살고 만행과 헌신이 있는 세상에서 활약하고 싶은’,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삶을 연기하고 싶어하는 남자 패트릭은 기실 로즈의 딱 맞는 짝이었다. 하지만 결혼 후 그는 자신의 부르주아 계급성 안으로 소라게처럼 들어간다 (아버지가 사준 집을 화려하게 꾸미고 자랑하는 모습처럼). 그러나 패트릭은 온타리오에서 너무나 먼 브리티시컬럼비아 출신이었고 그의 계급은 굳건했다. 부유한 사람들은 ‘타인의 뜻에 따르고 자신을 갈고 닦으며 세상의 호의를 얻어야 했던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p.145)이며 패트릭 또한 남들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자신의 보수적 견해를 큰소리로 떠드는 자족적인 인생을 산다. 하지만 ‘거지 소녀’ 로즈는 그렇지 못하다. 패트릭의 아내가 되어서도 웨스트핸래티 출신의 가난한 소녀, 물질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빈곤한 계급의 소녀 로즈는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을 받아야 하고 욕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ㄴㅇ사랑받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그녀의 환상과 더 화려하고 자극적인 배역을 맡고자 하는 욕망은 불륜을 적극적으로 선택하게 만든다. 그녀가 유부남인 클리퍼드와 톰을 선택하는 것, 미스터리한 남자 사이먼을 선택하는 것은 그녀 안에 분출해야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즈의 딸 애나는 로즈와 다르다. <섭리>에서  애나는 로즈와 헤어져 밴쿠버로 돌아간다. 결국 ‘섭리’란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어야 하는-애나는 애나의 자리에 로즈는 로즈의 자리에- 것을 의미한다. 애나는 패트릭과 로즈의 부부 침대를 차지하고 부르주아 가정의 아이가 되어 흡족해 한다. 이 침대는, 이 자리는 로즈의 것이 아니었다. 로즈는 따뜻한 가정과 기둥 달린 침대의 삶보다 길을 헤치고 나아가는 방랑의 삶, 순간 순간 떠오르는 욕망을 자유롭게 분출하는 삶을 선택한다. 이러한 로즈는 일생에 걸쳐 누군가를 배신하고 배신당하는 드라마틱한 삶을 산다. 패트릭을 배신하고 톰에게 배신당하고 운명의 남자를 만났다는 확신에 스스로 배신당하는 삶이다.  


그녀가 달아나며 벗어나려 하는 것은 실망, 상실, 파경만이 아니며 그와 정반대되는 것, 즉 사랑의 축복과 충격, 그 눈부신 변화이기도 한 것 같았다. 그런 것들이 안전하다 해도 그녀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둘 중 어떤 경우라도 결국엔 뭔가를, 자신만의 균형추이건 진실성의 작고 메마른 알맹이이건, 빼앗기게 된다. -p.308


로즈와 달리 플로는 나이 들면서 어린아이 같아진다. 소녀 시절의 로즈처럼 단것을 갈망하고, 치매 환자가 되어 스펠링 놀이를 하고 간호사를 깨무는 노인이 된다. 인생의 길을 방랑하며 수많은 캐릭터로 변신했던 로즈, 너무나 혼신을 기울여 모든 역할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이젠 무엇이 연기이고 무엇이 진짜인지 알 수 없게 된 로즈의 삶과 플로의 삶은 다르다. 플로는 변함없이 플로였고, 플로답게 노년에 이른다.


책의 마지막 수록작인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는 이 책의 원제였다. 책의 처음에서 플로가 했던 그 질문은 마지막에서 해티 선생님을 통해 반복된다. 처음엔 가볍게 느껴졌던 그 질문은 이제 둔중한 무게로 독자의 가슴을 누른다. 로즈는 과연 뭘까? 이는 모욕적인 질문일 수도 있지만, 로즈의 고정되지 않는 자아를 짚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녀는 ‘무엇’이라고 정의되지 않는 존재, 그 때 그 때 주어진 역할을 자신의 생을 통째로 바쳐 연기해낸 즉흥 배우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이는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속의 밀턴 호머와 랠프 길레스피와도 연결된다. 밀턴 호머는 경계심과 억제가 없는 인물이고, 연극적인 행진을 좋아하며, 아기에게 성자처럼 축복을 내려주는 역할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수행하는 인물이다. 로즈의 친구 랠프 길레스피는 밀턴 호머의 모사를 너무 열심히 하다가 밀턴 호머처럼 되어 버렸다. 밀턴 호머와 랠프 길레스피는 실제 인생과 연극을 섞어, 연극이 실제가 되고 실제가 연극이 되게 만든다. 연극과  생활을 합일시킨 배우는 가장 위대한 연기를 해낸 것이지만 그 대가로 고독한 삶을 살게 된다. 사회가 원하는 것은 주어진 규범의 한도 내에서만 연기를 하는 것이다. 그것을 넘어서는 연기, 지나치게 감정을 드러내는 연기는 플로의 표현대로 ‘수치’스러운 것이다. 로즈와 밀턴, 랠프는 사회가 요구하는 선을 넘어 ‘연기’를 ‘사는’ 인물이 되고 이 과도함은 경계의 대상이 되며, 선을 지키는데 실패한 배우는 고독한 삶을 살게 된다.

 따라서 로즈가 랠프를 자신의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느끼는 것은 자연스럽다. 랠프는 죽음 이후 나란히 묻히게 될 동료와도 같고, 그래서 두 사람의 재회 또한 재향군인회관에서 이루어진다. 랠프의 자족적인 모습, 당혹감 속에서도 긍지를 가진 모습은 밀턴 호머와 완벽하게 일치되어 보인다. 밀턴 호머를 너무 열심히 연기하다 그 자신이 밀턴 호머가 되어버린 랠프 길레스피. 삶을 배역과 완전히 일치시킨 이 ‘배우’를 보면서 로즈는 우애와 공감을, 복잡한 삶의 궤적들을 용서하는 마음을 느낀다. 로즈는 자기 인생이 허튼 것, 우스꽝스러운 것, 장난 같은 것이라고 느껴왔다. 섬세함도 깊이도 없는 실수덩어리라고 생각했다. 플로는 그녀에게 수치를 알라고 했고, 해티 선생님은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라는 거친 의문을 던졌지만,  로즈의 수치심과 당혹감은 동료 랠프 길레스피를 보며 가라앉는다.


책은 로즈의 끝없는 이주가 마침내 온타리오 주 웨스트핸래티로 돌아오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물론 로즈의 삶은 이후로도 이어질 것이고 로즈가 다시 어디로 길을 떠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연작소설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랠프 길레스피의 죽음을 마음에 간직하는 중년 로즈의 모습으로 끝난다.


10막짜리 긴 장막극이 아니라 10편짜리 단막극 모음과도 같았던 소설. 매 편마다 로즈의 모습은 비슷한듯 하면서도 달랐고, 출연자들도 저마다 개성이 뚜렷해서, 로즈라는 한 명의 배우가 연기하는 인생소극(笑劇) 시리즈를 본 기분이었다. 읽었다기 보다는 보았다는 느낌.  로즈는 편마다 새로운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였다. ‘나 자신’을 알고 목표에 따라 미래를 계획하며, 그것을 위해 인내하고 노력하며 살아가는 인물- 이런 사람들을 성숙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로즈는 결코 성숙한 인물이 아니었다. 로즈는 ‘나 자신이 무엇인지’ 아는,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늘 떠돌았고 늘 뒤집혔고 일이 닥치면 그 때 생각하며 그 때 그 때를 살아가는 인물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리스인 조르바와도 비슷하달까. 세상의 관점으로는 대책없고 미성숙한 사람이겠지만, 그녀는 ‘확고부동하며 정의 가능한 나’가 되기를 거부했다. 대신 매 회 다른 연기PLAY를 선보이며 하나로 정의 내릴 수 없는 인간의 모순성과 복잡성을,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누구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어리석음과 속물성을 온몸으로 열연하였다. 어느 소설에서도 쉽게 만날 수 없는 이 복잡다단한 캐릭터 앞에, 작가 앨리스 먼로에 대한 경외심이 절로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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