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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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읽긴 읽되 바보 천치 같이 읽은 것’1)이 아닐까 두렵다. 그러나 이 책이 어떤 ‘진정성’의 반석 위에 세워진 책이 아니라는 것만은 말할 수 있다. 음운과 음소 단위에서부터 짜여진 섬세한 언어 유희와, 책의 전후를 수십 번도 넘게 오가게 만드는 기묘한 형식 실험을 통해 나보코프는, 진정성의 가치를 완벽히 뒤집어엎는 가상성의 예술을 극한치까지 선보인다. 믿을 수 없는 화자의 반복되는 진술은 나중에는 소설 전체를 통째로 의심하게 만들고, 이 ‘픽션’ 속에 누구와 무엇이 ‘픽션 속의 현실’이고 누구와 무엇은 ‘픽션 속의 픽션’인가를 혼란스럽게 고민하다가, 결국엔 그 어떤 것도 ‘현실’이 아니고 모든 것이 ‘픽션’일 수 있다는 무서운 깨달음에 도달한다. 종국에는 현실과 허구의 구분은 무의미해지고, 모든 것은 어른거리는 그림자일 뿐이라는 결론에 이르면서, ‘픽션’과 대비되는 ‘현실’의 자명성에까지 회의하며 책을 덮게 된다.  


나보코프가 1962년 출간한 책 ‘창백한 불꽃’은 시인 존 셰이드의 옆 성에 사는 찰스 킨보트의 머리말로 시작한다. 얼핏 보면 그저 셰이드의 열광적인 팬이자 그와 깊은 친교를 나눈 이웃으로 보이는 킨보트는, 머리말에서 밝히기를 위대한 시인 존 셰이드의 마지막 시가 담긴 카드 묶음을 셰이드의 부인에게서 건네 받았다고 한다.고  그는 이 시 카드에 자신의 길고 긴 주석을 달아 출판할 계획을 세운다. 책 ‘창백한 불꽃’은 그 ‘출판 계획 원고’를 독자가 일종의 ‘편집자’가 되어 들여다보는 텍스트다. 소설의 제목인 ‘창백한 불꽃’은 존 셰이드의 유작시의 제목이기도 한데, 이것은 셰익스피어의 ‘아테네의 타이몬’ 4막 3장에 나오는 구절에서 가져온 것이다. 킨보트가 주석에서 설명하는 바, 태양에게서 은빛(창백한 불꽃)을 훔쳐가 겨우 빛을 발하는 그림자 같은 존재인 달을 노래하는 구절이다.


999행의 영웅시격 2행 연구로 이루어진 시 ‘창백한 불꽃’과 이어지는 킨보트의 주석. 독자의 눈과 손은 바쁘게 책의 앞뒤를 오가야 하고 이를 미리 짐작한 킨보트는 ‘간단하게  아예 두 권을 사서 편한 테이블 위에 나란히 펴놓고 보는 것이 현명하리라’(p.35) 충고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긴 주석은, 독자가 금방 알 수 있듯 셰이드 시의 충실한 해석이 아니다. 킨보트는 존 셰이드의 단어와 그에 대한 주석의 형태를 빌어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놓는다. 북구의 나라 젬블라에서 혁명이 일어난 후 간신히 탈출한 친애왕 카를 크사베리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그를 쫓는 암살자 그라두스까지 나오면서 주석은 시의 종속적 자리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활개친다.2)


킨보트가 주석에서 말하기를, 그는 셰이드에게 지속적으로 ‘영감’을 주어 왔으며, 젬블라 왕국의 이야기를 계속 셰이드에게 전해 그가 젬블라와 그 마지막 왕 카를 크사베리의 이야기를 시로 집필하도록 유도했다 한다. 그러나 킨보트의 이 진술은 온통 의심될 수밖에 없는 것이, 간간히 주석을 비집고 나오는 (생명을 가진 것처럼! 킨보트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오려는 몸부림처럼!) 존 셰이드와 그의 아내 시빌 셰이드의 언행들을 보면 이 부부는 킨보트를 친교의 대상이거나 영감의 원천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심지어는 귀찮아 하고 질려 한다. 킨보트는 ‘그가 젬블라 왕의 모험을 정확히 어느 부분까지 집필했는지 신경질적으로 집요하게 통제 불능으로 궁금해하’(p.210)지만, 셰이드는 그런 그를 피한다.


“내가 왜 당신에게 시의 주제를 줬는지, 아니 그보다 당신에게 그 주제를 준 사람이 누구인지 다 밝힐 것을 약속드립니다.”

“무슨 주제?” (p.355~356)


운명의 장난처럼 생일까지 겹치는 셰이드와 킨보트. 시인은 시를 쓰고 주석자는 그것에 주석을 단다. 처음엔 위대한 시와, 그 시의 빛을 훔쳐와 자신의 이야기를 밝히는 주석들이 마치 ‘아테네의 데이몬’에 나오는 태양과 달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면 킨보트의 주석이야말로 ‘태양’이고 셰이드의 시는 그것을 비춰 드러내기 위한 ‘달빛’ 같은 존재였다는 역전이 일어난다.


킨보트는 자신의 성 안에서, 창문 너머로 오래도록 존 셰이드를 관찰하지만 창문 너머로 보이는 셰이드는 발끝 뿐이다. 킨보트의 시선은 셰이드에 대한 흠모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대신 해줄 자를 응시하는, 달에게 빛을 쏘는 태양의 거만한 시선이며, 셰이드를 통해 자신의 빛을 되비쳐 보려는 나르시시즘의 시선이다. 옹달샘에 비친 자기의 상을 바라보며 황홀경에 도취된 나르시스가 킨보트-폐왕 카를 크사베리이며 존 셰이드는 킨보트의 환상 속에 존재하는 ‘나와 같은 나’ 다.  그렇기 때문에 킨보트는, 자신이 만들어낸 ‘가상성’의 세계 안에서 열심히 젬블라의 모험담을 시로 담아 줄 셰이드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결국 친애왕 카를을 시해하려는 그림자단의 암살자 그라두스의 손에 의해 엉뚱한 셰이드가 죽음을 맞고, 킨보트는 셰이드의 유고를 손에 넣고 경황 중인 시빌 셰이드에게 합의문에 서명하게 한 후 달아난다. 그러나 킨보트가 살펴본 시인의 유작은 그가 기대했던 젬블라 폐왕의 모험담이 아니었다. 그러나 무슨 상관이랴? ‘나의 친애하는 시인은 어쩌면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나, 좋든 나쁘든 최후의 말을 하는 이는 바로 주석자’(p.36)다. 킨보트는 셰이드의 시어들을 성냥 삼아, 킨보트-카를의 이야기에 불을 지핀다. 셰이드의 ‘기표’는 중요하지 않고 오직 킨보트가 부여하는 ‘기의’만이 강요된 참뜻, 주석자가 선포하는 진실이 된다. 셰이드의 시어들은, 그 카드들은 옛날 ‘어느 찬란한 아침 셰이드가 소각장의 창백한 불꽃 속으로 초고 더미를 몽땅 던져 태우는’ 것처럼, ‘화형식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검은 나비들’(p.20)의 운명이다.


그런데 킨보트의 주석을 계속 읽다보면 심지어 이 ‘검은 나비’- 유작시조차도 셰이드의 것이 맞을까 하는 의심이 들면서, 독자는 이 책의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발을 들이게 된다. 시 ‘창백한 불꽃’은 과연 셰이드의 것일까? 세상에서 오직 시빌 셰이드 한 명만이 보았을 뿐인 이 카드들이? 우리가 이 카드에 적힌 ‘창백한 불꽃’ 이라는 시를 존 셰이드의 유작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킨보트의 머리말 때문이다. 우리는 킨보트의 시선과 언어를 통하지 않고 존 셰이드라는 존재를 접한 적도 그의 시를 읽은 적도 없다. 어쩌면 이 ‘시’는 처음부터 킨보트의 긴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한 속임수, 주석이라는 형태를 불러오기 위한 밑작업, 킨보트로 정체를 속인 카를 왕처럼 ‘셰이드의 유작시’로 정체를 속인 ‘킨보트의 자작시’는 아닐까? 이게 정말로 셰이드의 유작시가 아니라면, 그럼 정말로 존 셰이드라는 인물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셰이드는 ‘그림자, 스페인어로는 거의 ‘인간’에 가까운…’(p.216)이름이다. 인간이 아니면서 거의 인간에 가까운 ‘인물’. 셰이드는 누구의 그림자인가. 나보코프가 창조한 픽션 속의 시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픽션 속의 킨보트가 창조한 인형, 픽션 속의 픽션일 수도 있다. 물 속에 비친 상이 나르시스 그 자신이었듯 킨보트가 응시하는 셰이드는 바로 킨보트 자신이다. 이 생각에 도달했을 때 독자는 아찔한 당혹감을 느끼지만 이것은 픽션이 줄 수 있는 가장 극한의 즐거움 -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분간할 수 없어진 세계에서 겪는 쾌락의 현기증이다.

의심이 계속 될수록 이야기는 미궁에 빠지고 독자는 길을 잃는다. 독자가 빠져나갈 방법은 왕궁의 벽장 뒤 통로를 그냥 계속 걸어나갔던 카를왕의 길처럼, 그저 나보코프가 설계한 어둠 속을 걷다가 극장 한가운데로 빠져나오는 길 뿐이다. 독자가 도달할 무대는 시를 쓰는 셰이드와 그 시를 해석하는 킨보트와 그 킨보트를 죽이기 위해 달려오는 그림자단의 그라두스까지 겹쳐보이고 구별할 수 없게 되는 그림자극의 무대이다. 삶이 태양이라면 죽음은 달과 같으며, 삶이 빛이라면 죽음은 그림자와 같은 것. 그래서 셰익스피어는 맥베스의 입을 빌려 인생도 결국 흔들리는 그림자일 뿐이라고, 삶과 죽음의 고리를 이어놓은 것이 아닌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어디에서 그 장면이 펼쳐지든, (중략) 더 크고, 더 훌륭하고, 더 유능한 그라두스가.’(p.371) 결국 초인종을 울릴 것이며 그의 다른 이름은 삶의 그림자, 삶의 발끝에 길게 이어져 있는 죽음이다. 끝에는 그라두스까지도 이 반복되는 킨보트-카를-셰이드의 거울상 끝에 사자(使者)의 형태로 서 있는, 거울상의 변주로 보인다. 유리에 비친 상이 벽에 걸린 거울 속에 반사되는 것처럼, 그 안에서 하나의 인물이 계속 분열되어 비치듯이. 거울 속에선 유리에 비친 나가 반복되고 그 거울은 또 유리 속에서 반복되어 끝없이, 상이 마침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셰이드-킨보트-카를- 그라두스-셰이드-킨보트-카를-그라두스...’ 같은 것의 반복, 단 한 사람 ‘나’의 반복만 계속되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이야기가 킨보트라는 - 어쩌면 그 이름조차 가짜일 - 미치광이 혹은 가공할 예술가, 게임메이커가 꾸며낸 픽션일지도 모른다.3) 그리고 그 게임메이커는 바로 작가 나보코프 자신의 ‘그림자’다. 반복되는 ‘나’의 연쇄 끝에, 이윽고 이야기의 최종 메타자인 나보코프의 상이 거울의 저 끝에 떠오르는 순간, 독자는 전율하게 된다. 나보코프는 킨보트를 꾸며내고 킨보트는 젬블라와 카를 크사베리를 꾸며내고, 그 이야기를 들어줄 시인 셰이드까지 꾸며낸다. 마뜨로쉬까 인형처럼 겹치고 겹치는 픽션의 중첩. 이 안에서 정신 착란에 빠진 잭 그레이는 그림자단의 암살자 그라두스로 둔갑하고, 러시아 문학 교수 찰스 킨보트가 젬블라의 폐왕 카를 크사베리로 둔갑하며, 어쩌면 처음부터 없는 인물이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그냥 지나가는 이웃 노인네였을지도 모르는 존 셰이드는 미완의 영웅시를 남긴 위대한 시인으로 둔갑한다. 그 모두는 나보코프의 그림자이다. 마뜨로쉬까를 끝까지 열어 보아도 그 속은 텅 비어 있을 뿐. 타자도 없고 세계도 없으며 그저 거울에 비추어진 무수한 ‘나’의 반복만이 있을 뿐인 가짜 상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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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2019, p.194. 이하 인용은 괄호 안에 페이지 수만 표기.


2)주석을 읽다 보면 워드스미스 대학의 러시아 문학 교수 찰스 킨보트가 젬블라의 폐왕 카를 크사베리와 동일 인물인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킨보트의 진술을 전적으로 신뢰했을 때 가능한 일이며, 킨보트의 ‘믿을 수 없는 화자’ 성질을 강렬하게 의식하는 독자라면 킨보트가 카를 크사베리와 동일 인물이라는 것도, 나아가 젬블라라는 나라가 이 ‘픽션’ 속의 ‘현실’로 존재한다는 것까지도 의심하게 될 것이다.


3) 킨보트조차도 마지막엔 이렇게 여지를 남긴다.

‘오돈과 합작으로 <젬블라 탈출>이라는 신작 영화를 제작할지도 모른다. 연극 평론가들의 단순한 취향에 영합해 무언극을 지어낼지도 모르겠다. 세 명의 주역, 즉 상상 속의 왕을 죽이려는 미치광이와 자신이 왕이라고 상상하는 또 다른 미치광이 그리고 우연히 사선으로 굴러들어와 두 허상 간의 충돌로 죽는 저명한 노시인이 등장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신파극을’. (p. 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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