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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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스탄틴 카바피의 시 ‘Waiting for the Barbarians’ 에서 제목을 가져온, 존 쿳시의 책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1980년, 작가의 세번째 책으로 출간되었고, 작가는 이 책으로  남아프리카 최고의 문학상인 CNA상을 받았다. 우리 나라에는 1982년 두레출판사를 통해 소개가 되었으며 이후로도 여러 출판사에서 판본이 나왔다. 2019년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으로 재출간된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아프리카 문학을 국내에 알리는데 앞장서온 번역가 왕은철 교수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판본이다. 2003년 같은 번역자의 들녘출판사 본에 비해, 딱딱한 문어체가 익숙한 구어체로 바뀌었으며, 행갈이가 적어져 읽기에 더 속도감이 붙고 이해하기 쉬워졌다. 첫 출판된 지 40년 가까운 책이지만 어렵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꾸준히 시대에 맞춰 새로운 번역본을 내놓으려는 역자와 출판사의 노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어느 겨울의 초입, 공간적 배경은 제국의 변방에 있는 주민 3천 명 가량의 도시다. 도시  바깥쪽으로는 토착민 어부들과 그 가족들이 살고 있으며, 멀리에는 천막을 메고 떠돌이 생활을 하는 유목민들이 살아가고 있다. 정착민 어부들과 기마 유목민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제국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똑같은 ‘야만인’일 뿐이다.

이러한 배경 설정은 어느 독자에게는 중국 서부의 소수민족 이야기로 읽히기도 하고, 어느 독자에게는 아라비아 사막의 황량한 배경을 떠올리게도 하고, 어느 독자에게는 아프리카의 식민지 어드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사막과 눈이 공존하는 이 허구의 세계에 대해, 작가 쿳시는 특정 지역명과 국가명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제국’과 ‘야만’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독자의 상상력이 적용될 폭을 넓히고 누구에게든, 어디에서든 ‘제국’ 혹은 ‘야만’이 되는 일은 일어날 수 있다는 보편성을 획득한다. 시제의 현재형 또한 이 일이 먼 과거의 일이 아닌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생생함을 더한다.

화자인 ‘나’는 은퇴를 기다리며 한가롭게 소일하고 있는, 제국을 위해 일하는 시골 치안판사다. (존 쿳시, ‘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2019, p.18. 이하 괄호 안에 페이지 수만 인용) 야만인이 도시와 제국민들을 공격할 거라는 소문이 흉흉하게 돌지만, 치안판사는 한 세대에 한번 씩 일어나곤 하는 야만인 히스테리라고 생각한다.



공간은 공간이고, 인생은 인생이다. 어디를 가나 똑같다. 다른 사람들의 노고로 편하게 먹고사는 나에게는 여가시간을 때우기 위한 문명화된 악습도 없다. 그래서 나는 우울함에 맘껏 젖어 텅 빈 사막에서 특별한 역사적 비애를 찾으려 하는 것이다. 헛되고 한가하고 잘못된 짓이다! (p.32)



내가 늙어버린 것 같고, 피곤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고만 싶다. 나는 요즘 틈만 있으면 잠을 잔다. 그리고 일어날 때는 마지못해 일어난다. 잠은 더이상 고단함을 풀어주는 목욕이거나 원기회복이 아니라 망각이며, 밤마다 소멸 상태와 맞닥뜨리는 일이다. (p.38)



소설 초반의 치안판사는 목표도 지향도 없이, 한가로움이 지나쳐 공허하게 보이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제국 정부에서 졸 대령이 파견을 나오고 ‘진실을 알아내는 특출한 방법’의 소유자인 졸 대령이 야만인들을 고문해 원하는 답을 짜내면서 치안판사의 삶은 달라진다.

우울감, 헛되다는 허무감, 피로감과 무력감 속에 늙어가던 치안판사는 ‘내 창문 밑에서 하루는 칭얼거리다가 다음날에는 더이상 칭얼거리지 않게 된 갓난아이 ’(p.39), 맞아 죽은 노인과  칼에 찔린 어린아이라는 현실에 마주서게 된다. 처음에 치안판사는 이들을 외면하려 한다. 창문을 닫고 책을 읽으려 하고, 창녀가 즐거움을 주는 여관을 찾아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노력들은, 시력을 거의 잃고 발을 다친 ‘여자’와 관계를 맺고 뺨과 손이 철사 고리에 꿰인 원주민들을 보게 되면서 부서진다. 그들은 치안판사에게 더이상 예전과 같은 방관자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한다. ‘이걸 안 이상, 되돌아갈 길은 없는 듯 보인다.’(p.39)



이 추한 사람들이 지구의 표면으로부터 지워지고, 우리가 불의와 고통이 더이상 없는 제국을 운영하기 위해 새 출발을 하겠다고 맹세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중략) 그들로 하여금 사력을 다해 그들 모두가 들어가 눕기에 충분한 구덩이를 파게 한 뒤 거기에 그들 모두를 영원토록 묻어버리고, 새로운 의도와 결심으로 가득찬,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로 귀환하는 데는 비용이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내 방식이 아닐 것이다. 제국의 새사람들은 새 출발과 새로운 장과 깨끗한 페이지를 믿는 사람들이다. 나는 아직도 옛이야기를 가지고 몸부림치며, 그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 내가 왜 그런 수고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알게 되길 바란다. (p.44)  


데려온 야만인 ‘여자’는 치안판사에게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텅 빈 얼굴과 텅 빈 몸’을 한 ‘여자’의 등장으로 치안판사는 졸 대령과 완전히 갈라진다. 영양을 보아도 쏘아 죽일 수 없는 고뇌를 겪고, 여자들의 몸을 소유하는 것이 진정 자신이 원하는 욕망이었는지 회의한다. 치안판사는 제국이 저지른 범죄로 인한 죄책감과 함께 졸 대령과 자기는 다르다는 걸 스스로 증명하고 싶어한다. 치안판사가 여자를 쓰다듬고 어루만지는 것은 문자판을 파내어 수집하는 그의 욕구와 일맥상통하는 페티시였고, 이는 곧 야만의 세계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텅 빈’ 자리로 존재하던 ‘여자’의 모습이 꿈속에서부터 서서히 실재하는 존재로 떠오르면서, 치안판사는 회의와 죄의식을 느끼고, 무기력한 제국의 관리에서 생각하고 움직이는 인간으로 첫 발을 뗀다. 이는 ‘여자’를 유목민의 세계로 돌려 보내려는 순례로 이어진다.

도시를 벗어나서야 비로소 두 사람의 성관계는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것은 관계의 합일로 이어지지는 못한다. 그는 아직 제국민이었고 여자는 훼손된 야만인이었다.


 이윽고 유목민들과 마주치게 된 치안판사는 여자에게 함께 도시로 돌아가지 않겠냐고 하지만 여자는 거부한다. 치안판사의 바람은 일방적인 것일 뿐, 1인칭 주인공 제국-화자의 눈으로는 미지의 대상인 야만-’여자’의 속내를 알 수 없다. 그의 욕망은 공허와 황량함으로 끝나고 도시로 돌아오는 행보는 힘겹다.

 귀환 후, 먼 곳에서 온 야만인을 원한 대가로 치안판사는 적과 내통한 자가 되어 모든 지위를 잃는다. 제국과의 연대가 끊어지자 그는 일순 자유인이 된 우쭐함을 느낀다. 하지만 ‘자유’란 무엇일까? 제국에서 놓여난 자는 모두 자유로운가? 제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지 않으면, 중간자이자 방관자인 어중간한 역할을 벗으면 그는 자동으로 자유로워지는 걸까? 반복되는 폭력 속에, 치안판사는 짐승으로 대우하면 짐승이 되어버리는 인간에게 과연 자유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기에 이른다. 육체가 구속된 이는 말할 것도 없고, 육체가 제약받지 않아도 야만으로 대우받고 짐승 취급을 당한다면 그는 자유민이 아니다. 문명인과 야만인의 경계가 선명하고 누구나 하루 아침에 짐승이 되어버리는 곳에서, 누구도 그 스스로의 가치만으로 존엄해질 수 없는 곳에서 자유란 헛껍데기에 불과하다. 치안판사는 어디에도 도망칠 곳은 없다는 것을 알고 감옥으로 되돌아온다.



내가 지금 버리려고 하는 자유는 나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 걸까? 나는 지난해, 전보다 더 내 마음대로 인생을 살았다. 나는 정말로 무제한적인 자유를 즐겼던 걸까? 예를 들자면, 나에게는 그 여자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내 변덕에 맞춰 그녀를 아내, 첩, 딸, 노예, 혹은 그 모든 것을 아우른 존재, 혹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 수 있었다. 가끔씩 느껴지는 감정을 제외하면 그녀에 대한 의무가 내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유로부터 압박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그 누가, 감금을 당함으로써 생기는 자유를 환영하지 않을 것인가? (p.130~131)


그러나 나는 지금 자유라는 게 얼마나 기본적인 것인지 이해하기 시작한다. 나에게 어떤 자유가 남았는가? 먹거나 배고플 자유, 침묵을 지키거나 혼자 지껄일 자유, 혹은 문을 두드리거나 비명을 지를 자유이리라. 그들이 나를 여기에 감금했을 때 내가 불의, 경미한 불의의 대상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피와 뼈와 고기가 뭉쳐진 불행한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p.142)



 졸 대령이 나타나고 ‘여자’를 만나기 전, 토착민에 대한 치안판사의 태도는 너그럽지만 엄격하게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미개인’이었다. 도시인-제국민이 조금 베풀어주어야 하는 비렁뱅이 부족인 사람들. 치안판사는 그들에게서 ‘더러움과 냄새와 싸움소리와 기침소리’를 읽고 도시 사람들은 전염병의 온상이라며 싫어했다. ‘격노한 아버지에게 야단맞은 아이를 위로하는 어머니 역할 이상은 해줄 수 없다’고 생각하며 ‘한쪽은 거칠고 다른 쪽은 사근사근한’ 가면 중에서 후자 쪽인 제국의 한 면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했던 치안판사는 여전히 제국주의에 한 발을 걸치고 있는 지배층의 일원이었다. 그는 ‘평생 교양 있는 행동을 신봉해온 사람’(p.43)이자 명문가 출신의 신분에 합당한 매너와 태도로 야만인들을 지배해왔다. 이런 그의 태도는 문화통치를 수행했던 일제의 지배 계급들을 연상시킨다. 그는 인간에게 지나치게 잔인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는 지배자는 너그럽고 온화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귀족적 애티튜드였다.

그가  인간이 지켜야 할 가장 밑바닥의 품위에 눈을 뜨는 것은, 인간의 지위를 잃고 짐승으로 격하된 후의 일이다.  그는 옷을 빼앗기고, 제 때 할 수 있는 식사의 권리를 빼앗기고, 씻을 수 있는 권리를 빼앗기며,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빼앗긴다.  뺨과 손이 꿰어진 채 폭행을 당하는 야만인들을 보고 뛰쳐나가 ‘짐승에게도 망치는 휘둘러서는 안된다, 이들은 사람들이다’라고 외치는 순간, 그는 야만인들이 당하는 잔혹한 폭력을 함께 당하게 되고 제국 신민의 지위를 완전히 상실한다. 몽둥이를 맞은 그는 “눈이 안 보여!”라고 외치고 이 때에 치안판사는 비로소 야만인 맹인 ‘여자’와 동등해진다. 극한의 고통 속에 꾼 꿈에서, ‘여자’가 드디어 아름답고 맑은 모습으로 치안판사를 보고, 따뜻한 빵 한덩어리를 내미는 것은 이 ‘동등해짐’ 위에서다.


‘여자’의 눈가에 있던 애벌레 같은 흉터가 그의 얼굴에도 생긴다. 남자 옷을 빼앗기고 여자 옷을 입은 그는 남자가 아닌 여자, 지배자가 아닌 피지배인, 문명이 아닌 야만의 모습이 되어 간다. 제국의 관리이며 명문가의 남성라는 허울은 너무나 쉽게 벗겨지고, 어제까지의 문명인과 오늘의 야만인 사이에는 아무 차이가 없어지고 만다. 머리에 두건을 뒤집어 쓴 채 살고 싶다고 비명을 지르고, 뼈를 부러뜨리는 고통 속에 절규하는 것에는 문명과 야만 사이의 차이가 없다. 이때가 되어서 그는 ‘모든 인간은 살고 살고, 무슨 일이 있어도 또 살고 싶어 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온몸으로 깨닫는다. 그의 비명은 야만인의 비명이며, 인간의 비명이다.


야만인들이 정착지 깊숙이까지 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치안판사를 고문했던 만델 준위는 “너는 죄수 신분이 아니잖아. 네가 나가는 건 자유야.”(p.206) 라며 치안판사를 풀어준다. 자유라는 단어가 이토록 값싸고 얄팍하게 쓰이는 곳이 제국임을 깨달은 치안판사는 “당신은 사람들을 그렇게 다룬 다음 어떻게 음식을 먹을 수 있지?”라며 자유라는 단어가 쓰이기 이전에 먼저 인간 본연의 존엄성을 지키는 일이 있어야 함을 지적한다.


나를 고문하는 자들과 처음 대면했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멍청하게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나? 숨길 것도 없다. 그들이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을 대하고 있다는 걸 알도록 만들자! 무서우면 무섭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자! 저자들은 완강한 침묵을 먹고 사는 인간들이다. 침묵을 지키면, 저자들은 개개인에 대해 자신들이 인내심을 갖고 열어야 하는 자물통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될 것이다. (p.212)


인간을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는 세상, 하나의 자물통으로, 물건으로, 수단이자 도구로 인간을 생각하는 세상에는 존엄이 없고, 그런 세상에서는 누구에게도 자유가 없다. 제국의 신민에게도, 야만인에게도, 평범한 아낙네와 어부들, 아이들, 군인들, 누구에게든 말이다. 눈 앞의 기만적인 자유는 언제든 박탈될 수 있다. 누구든 하루 아침에 조롱받는 천민으로, 더러운 야만인으로, 도구적인 존재로 추락할 수 있다. 이런 세상에서 자유라는 단어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자유롭고 존엄한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허울이 얼마나 얇고 가벼운 것인가를 깨달은 치안판사는 거리낌 없이 구걸을 하고 훔쳐 먹으며 삶을 이어간다. 그리고 예전에는 그토록 쉽게 잠에 빠져들었던 그가 이제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자신의 어리석었던 욕망을 반추하며 부끄러워한다. 그는 ‘편안한 시절에 제국이 스스로에게 얘기하는 거짓말’(p.223)이었을 뿐이었다.


‘그녀에게 끌린 건 그녀의 몸에 난 상처 때문이었다’. 치안판사는 이렇게 스스로를 돌아본다. 결국 그에게도 ‘여자’는 신비롭고 낯선 야만의 흔적이었을 뿐이었다.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훼손되기 전의 모습은 떠올릴 수 없는, 망가진 모습인 대로 기괴하고 진기하고 아름다운 수집품. 폐허에서 파낸 문자판 같은 존재. 애완동물처럼 여자를 소유했던 치안판사는 ‘여자’의 존재로 인해 각성했다. 제국의 수비대는 철수하고 변경의 정착지가 소멸될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더이상 맥없이 잠에 빠지지 않는다. 짧은 욕정이 그를 다시 덮쳐오고 잠들게끔 하지만 그는 ‘고요하고 변덕스러운 슬픔을 느끼’(p.252)면서도 곧 그것을 잊는다. 그는 잠들지 않는다. 깨어 있고 움직이고 대비한다. 겨울을 견딜 준비를 하며 새로 올 봄을 기다린다.  삶의 뚜렷한 목적이 없이 허무와 무기력 속에 살아가던 한 늙은이는 ‘오래전에 길을 잃었지만 어디로 통하는지 모르는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는 사람’(p.256)으로 다시 태어난다. 아직은 팔이 없는 눈사람이지만, 눈과 귀와 코와 입은 분명히 있는, 모자도 쓰고 있는, 새로 만들어진 눈사람처럼, 그는 겨울을 버티고 서서 새로운 봄을 기다리는 적극적인 존재가 된다.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문명과 야만의 경계를 나누고 지배하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폭력성을 지적하는 소설이다. 미지를 야만의 타자로 규정하고, 그 타자의 존재를 통해 ‘우리’를 정의하고려고 하는 인간의 편협함과 어리석음을 고발하는 소설이다. 또한 제국주의 시대 이후에도 독자들에게 보편적인 성찰을 불러 올 수 있는 노년의 성장담이기도 하다. 소설은 평화롭고 안온한 삶 속에서 무기력한 중간자로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고뇌하는 개인, 그리고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거듭날 것을 이야기한다. 인간을 등급화, 서열화 하고 더 존중받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어 대접하는 사회 속에서는 누구도 자유롭지 않고 누구도 존귀해질 수 없다. 우리는 누구나 제도에 포획된 ‘야만인’이 되어, ‘나는 자유로운 제국의 신민’이라는 착각을 진실이라고 믿고 살아가지만, 우리가 자유롭다는 환상은 치안판사의 삶에서 알 수 있듯 너무나 얄팍한 기만책일 뿐이다.    

굳이 먼 나라를 떠올릴 것도 없이, 대한민국의 100년 역사만 보아도 ‘야만인을 기다리며’와 같은 일들은 자주 있었다.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대학살, 제주 4.3. 사건과 광주 민주화 항쟁, 여러 건의 용공 조작 사건들처럼 지배 계급이 피지배층을 길들이고 억압하기 위한 도구로 헛소문과 조작 뉴스를 퍼뜨리고 그것을 근거삼아 민간인을 학살하고 입막음한 일은 수없이 반복되었다. 함부로 매장된 백골 무더기가 되어버린 사건들.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오랫동안 금기였다. 그러나 기록은, 기억은 남았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치안판사는 우리도 기록을 남겨 후대에 물려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고뇌하는 개인과 행동하는 지식인은 무엇을 기억하고,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책을 다 읽고 난 독자에게 이것은 강렬하게 솟구치는 질문이 될 것이다. 문학은 언제나 기록의 도구이며 행동의 수단이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특수한 지역과 특수한 시대의 역사를 보편적인 것으로 치환하는 작업이며,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문명과 야만의 틈바구니에서 인간의 존엄과 자유라는 보편적 가치에 대해 회의했던 사람의 기록으로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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