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냥한 사람
윤성희 지음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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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성희의 소설 ‘상냥한 사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그 시절 그 사람들’ 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녹화장 이야기, 후반부는 녹화장에서 뛰쳐나온 형민의 회사 생활과 주변 사람들 이야기다. 


  형민은 인기 장수 드라마 ‘형구네 고물상’에 일찌감치 철든 아이, 동생을 잘 돌보는 아이 ‘진구’로 출연했다. 드라마가 끝난 후에도 그는 ‘진구’였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진구가 연기했던 다정하고 묵묵한 소년의 모습을 그에게 기대했다. 형민의 내면은 오랫동안 진구와 형민 사이를 떠돌았지만, 치매에 걸린 이모까지 그를 진구라고 부르자 형민은 마침내 진구와 형민 사이의 갈등을 정리한다. 무슨 상관인가,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하지만 내 눈에 그건 화해가 아니라 체념 내지는 타협으로 보인다. 


  이 소설은 진구와 형민 사이의 이야기, 즉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되고 싶은 나와 그렇게 될 수 없었던 나 사이’의 이야기다.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하고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하지, 나쁜 사람이 되기를 어려서부터 희망하는 사람은 없다. 대체로 미래를 낙관하고 인생의 큰 결정 앞에서는 다 잘 풀릴 것이라고 믿으며 그럭저럭 살아간다. 그저 소소하고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 남에게 상처주지 않는 무던한-굿맨이 되어 세상 살다 가고 싶은 것.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갖는 자그마한 소망이자 너무나 거대한 희망인 이것을 ‘상냥한 사람’ 속의 인물들도 품고 살아간다. ‘진구’를 연기하며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거기까지였던 남자 형민은 더 이상 배우로서의 미래를 갖지 못하고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 평범한 결혼을 한다. 딸을 낳고 키우며 그럭저럭 살다 어느 날 아내와 이혼한다. 이혼 후에도 삶은 그런대로 또 이어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딸 하영의 비행은 형민을 무던한-굿맨으로 살아갈 수 없게 한다. 


  이 소설 속의 인간들은 상황을 선택하는 개인이 아니라 상황 속에 그냥 내던져진 존재들이다. 형민이 ‘진구’가 된 것도 그의 선택은 아니었고 어느 날 ‘진구’ 역할에서 떨어져 나간 것도 형민의 선택은 아니었다. 귀엽고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소설 곳곳에 포진해 있지만 우리 삶은 그렇게 사랑스럽기만 하지는 않다. 불행은 예고 없이 들이닥치고 죽음도, 배신도, 뼈아픈 이별과 오랜 회오도 우리가 선택해서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름을 짓는데 한달 넘게 걸렸던 외동딸 하영이 ‘별 생각 없이’ 친구를 사지로 밀어넣은 것는 아이가 된 것도 형민의 의도나 예상 밖의 일이었다.  아파트의 담배 친구인 할머니들이 새벽에 밖에서 담배를 피우게 된 것도 그녀들이 원해서 그렇게 풀린 것은 아니었다. 소설 속의 세상은 정체를 명확히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그 속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의도나 의지를 용인하지 않는 무정한 곳으로 보인다. 언제나 인간의 삶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고, 최선을 다해 뭔가를 선택하고 매 순간 성실했다고 생각하지만 지나고 보면 모두 부질없었을 뿐이다. 그걸 깨달은 후 소설 속의 인간들은 ‘나와 버리는 것’을 택한다. 집을 나오고,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와 헤어지고, 상황을 회피하고 그저 불확실한 미래에 ‘어쩌면’ 을 걸면서 고개를 숙이고 걸어간다. 그래서 이 소설엔 결국 옳은 자리, 적당한 자리에 도달하는 이들이 없다. 누구나 적당히 좋은 사람이지만 그 뒷면에는 저마다의 부끄러운 잘못들이 있으며 다들 그걸 모른 척, 짐짓 태연한 척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이들은 모두 우연에 ‘떠밀리듯’ 살아간다. 요컨대 ‘상냥한 사람’ 속의 인물들은 의지적 인물이라기 보다는 상황에 의해 만들어진 인물들이고 그래서 이들은 대개 무력해 보인다. 그들은 끝까지 부딪히기 보다는 체념하거나 우회하는 길을 책한다. 잘못이 있다는 느낌이 들어도 ‘미안하다’는 말은 어깨를 부딪힌 낯선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며, 형민은 심지어 ‘지나치게 드러내고 사과하는 다른 부모’에게 역겨움을 느끼기까지 한다. 인물들은 스트레이트 하게 달려들기를 피하고, 회피 이외의 어느 것도 이들의 선택지가 아니다. 그래서 이 소설의 이야기는 언제나 곁가지로 빠진다. 쉴새없이 다른 인물, 다른 시간, 다른 공간대의 이야기로 미끄러지는 이야기는 ‘회피’ 방어 기제의 표현물로 보인다. 결국 여기엔 수없는 우연과 부딪힘만 있을 뿐, 어느 것도 다물어지지 않은 채 인생은 그렇게 흘러간다. 이 얼마나 참혹한 무력함의 현장인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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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장할 우리 가족 - 정상 가족 판타지를 벗어나 '나'와 '너'의 가족을 위하여
홍주현 지음 / 문예출판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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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프롤로그에서부터 ‘나는 조금 까다롭다고 할 수 있는 나름의 기준을 정하고 이것저것 따졌다. 외모, 직업, 학벌, 집안, 성격. 이렇게 다섯 가지 항목이었다.’ 라는 문장으로 나를 당혹시켰다. ‘누가 보면 저런 속물이라고 거부감이 들 태도지만 솔직히 그 때 내 속마음에는 그런 기준이 중요했다’ 라며, 마치 내 생각을 읽은 듯 문장이 이어지는데 앞으로 이 책을 더 읽어야 하나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작가분은 결국 자기의 ‘조금 까다로운’ 정도가 아닌 기준을 만족시키는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그 남자는 결혼 2년도 지나지 않아 말기 암 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이어지는 나의 당혹은 ‘투병 생활도 힘들었고 죽음이 엄습하는 것도 무서웠으며 미래를 잃는다는 불안도 괴로웠지만 나 자신이 루저가 된 기분이 들었다’ 라는 문장 때문이었다. 첫째, 투병 생활은 환자 본인이 제일 힘들지 않은가? 하지만 뭐… 간병인도 환자 본인만큼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지. 넘어가자. 둘째, 죽음이 두려운 것 역시 환자 본인이 제일 크지 않은가? 음… 어떻게든 그럴 수 있겠다고 이해하고 넘어가자. 셋째, 미래를 잃는다는 불안? 음… 음… 아픈 사람은 남편이고 최악의 경우에도 아내인 작가는 나이도 젊고 건강하고 직업도 있는데 왜 불안할까…? 결정적으로 넷째, 왜? 왜? 왜? 나 자신이 루저가 된 기분이지? 작가는 말했다. 가족의 불행을 함께 겪어야 하는 상황이 나를 디그레이드 (가치 하락)시키는 것 같았다.’ 아, 더 읽기가 힘들었다. 책 속 인물에게 감정이입 안하려고 노력하지만, 육체적 고통과 죽음의 공포 앞에 떨고 있는 말기 암 환자 남편분이 ‘가족 가치 하락의 원흉’으로 꼽히는 거 같아 너무나 짠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나 아플 때 내 남편도 이렇게 생각할까? 나 때문에 자기가 루저가 된 것 같고, 나 때문에 우리 가족의 가치가 떨어지는 거 같다고? 그럼 정말 슬플 거 같다.


읽기 힘든 프롤로그를 지나면, 이어지는 글에서 작가분은 ‘한국인의 의식 속 기본 단위는 가족이며, 그래서 나는 속물적 기준으로 배우자를 골라 그와 나를 동급으로 취급받고 싶었다. 개인을 가족 집단과 동일시하는 한국의 현실 때문이었다.’ 라고 한다. 이 일로 인해 작가 홍주현은 삶의 태도가 크게 변했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의 ‘덩어리적’ 집단주의 문화에 대한 비판이 이어진다.



미국의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집단의 존엄과 존재 이유를 집단적 동일성에 둘 때 그 집단 구성원은 갈등을 견디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공동체 질서를 이루는 토대가 공동체의 동일성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집단 구성원 주류 혹은 다수와 ‘다름’은 그것을 배제하거나 억압하는 방법으로 그 다름이 유발한 갈등을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불편한 상황에 처할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다름이나 갈등을 아예 금기시 한다. (p.63~64)


한국인의 ‘우리’는 연대의 공동체가 아니다. 연대하려면 ‘너’와 ‘나’가 있어야 하는데, 구성원이 ‘우리’ 안에서 분리되지 않은 채 서로 동일시하다 보니 그저 한 덩어리 상태에 가깝다. 존중은커녕 다르다는 건 있을수 없는 일이다. ‘너’와 ‘나’ 사이 경계가 없는 ‘우리’ 속에서 다름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개념일 뿐만 아니라, ‘비정상’이 되기 쉽다. (p.78)


진짜 내 욕구는 남편의 투병 생활을 책임지지 않으려는 회피였다. 혹여 투병이 부정적 결과로 이어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무척 두려웠다. 위기 상황에 처하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마련이고, 부정적인 생각이 들면 두려운 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남편의 불행을 염려하거나. 혼자될지 모르는 내 처지를 걱정한 데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 그때 벌어질 일, 즉 온갖 원망과 비난의 화살 등 결과에 대한 책임을 내가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에 벌벌 떨었다. (중략)

이 고난은 ‘나’에게 생긴 일이란 느낌이 들었다. 이 가족은 내 뜻에 따라, 내 의지로 꾸리지 않았는가. 주인임을 증명하는 최고의 방법은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나는 남편의 투병을 (시댁 식구에 포함된 나로서의) ‘우리’ 일이 아니라 내가 해결해야 할 ‘개인’의 일로 인식했다. (p.107~108)


배려하고 양보해야 할 첫번째 대상은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먼저 배려하고, 자기 에고는 자기 내면의 진짜 욕구에게 양보하는 일이야말로 강요하듯 강조해야 할 일이 아닐까? 타인에 대한 무심함은 대개 자신을 소외하는 데서 비롯하지, 자신을 잘 챙기고 사랑하는 사람은 타인에게 좀처럼 무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p.210)



김희경의 ‘이상한 정상가족’은 아동학대에서 시작하여 한국 사회의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으로 논의가 전개되는데, 홍주현의 ‘환장할 우리가족’은 가족의 간병 문제에서 시작하여 한국 사회의 집단주의를 비판하고 자기 중심성에 기반한 철저한 개인주의를 내세운다.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김희경은 국가의 복지와 적극적 개입, 공동체의 적극적 간섭을 한국식의 폐쇄적 가족주의를 분쇄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한 반면, 홍주현은 위에 말했듯 대화와 토론에 기반한 철저한 개인성의 함양, 공동체를 위한 배려와 양보 보다 자기 자신의 이익와 편안함을 추구하는 적극적 자기중심성을 핵심으로 제시한다. 즉 한국식 가족주의와 집단주의에 대해 두 사람이 제시하는 대안은 완전히, 거의 정반대로 다르다. 개인이 아닌 가족 단위로 바라보고 평가하는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인의 삶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두 작가의 공통점이지만, 국가의 적극적 개입과 사회 시스템적 접근 및 해결을 요구하는 김희경과 달리 홍주현은 공동체의 역할보다 개인의 인식 전환에 방점을 찍는다. 국가의 개입보다 개인의 발전 및 이익 추구를 옹호한다는 점에서 홍주현이 아담 스미스를 인용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워 보인다. 홍주현은 인용 마무리에서 ‘모두가 자기실현을 할 의지와 책임이 있는 평등한 상태에서 각자 자기 능력과 의지에 따라 역할을 맡고 그에 따라 책임을 다하는 개인이 되고, 그 개인의 협력이 연대고 연대로 형성된 것이 공동체다’라고 주장한다. 즉 공동체는 개인의 합으로 존재하며 모든 개인은 평등하기 때문에 배려보다는 각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다 보면 저절로 뛰어난 개인들이 저마다 이기적인 동기에서 출발해 이룩한 행복을 얻게 된다는 논리인데… 음, 난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홍주현의 논리에서 최대의 약점은 ‘모두가 평등하다’는 전제를 현실 세계에 적용시킨다는 점인데 일단 ‘모두가 평등해야 하는 것’ 과 ‘모두가 평등한 것’ 은 같지 않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실은 모두 ‘동등’ 하지 않고, 나는 홍주현의 주장과 달리 더 많은 돌봄이 필요한 (예컨대 그녀의 남편 같은 중증 환자)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상당히 많이 존재하며 어떤 사회의 수준과 행복도는 그런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을 얼마나 케어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평등하지만 운동장은 기울어져 있고 그런 땅 위에서는 모두가 동등한 높이로 서 있지 못한 것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낮은 자리에 서 있는 자들에게 발받침을 제공해주지 않고,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는 전제 하에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도록 짓눌려져 있는 자에게 기득권자와 똑같은 양의 빵과 마이크만 제공하는 것이 올바른 일인가?



홍주현의 이 책은 가족, 집단, 민족 등등의 이름 하에 개인의 개별적 차이를 무화시키고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문화를 비판하는 취지는 좋았으나 그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고작 ‘개인성의 강화’ 라는 인식의 전환 요구 수준에 그치는 것은, 현실의 문제점을 해결하기에는 그 힘이 너무 약하다. ‘생각을 바꾸자’, ‘독서 토론을 하자’ 하는 얘기로는 개호가 필요한 약자들을 사회 안으로 끌어 들어오기도 어렵고, 일단 이런 얘기만으로 사람 생각이 쉽게 바뀌지도 않는다. 나는 언제나 ‘제도가 인식을 만든다’ 고 생각하지 개인들이 생각을 고쳐 먹으면 우리 사회가 저절로 좋아진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리고 약자에 대해 배려하는 것은, 나도 배려라는 말을 굉장히 싫어하는데 그것은 배려가 아니고 성숙한 시민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이기 때문에 배려라는 시혜적 단어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는 거지, 필요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가 나에게 이익이 되는 행동을 하면 우리 사회가 저절로 좋아질 것이라는 아담 스미스 식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고, 개인이든 가족이든 특정인의 불행과 고통을 ‘개인’의 수준에서 해결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개인주의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는다. 삶의 주체는 개인이지만 그 주체적 개인의 삶이 불행에 빠졌다고 할 때 그 해결은 그 사람 개인의 몫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집단의 몫이어야 한다. 우리는 누구나 한번 이상 불행에 빠진다. 그리고 그 때 누군가는 부와 건강과 정신적 여유를 바탕으로 개인의 삶을 자력 구제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더 자주 더 깊이 불행에 빠지는 이들에게는 부도 건강도 정신적 여유도 없고 심지어는 가족도 없는 경우도 많다. 이런 사람들은 외부의, 집단의 힘이 아니고는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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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들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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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무시하게 내 취향인 책이었다. ‘현기증, 감정들’을 그닥 재미있게 읽지 못해 제발트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었는데, 첫 페이지의 풍경 묘사에서부터 내 마음을 완전히 앗아갔다. 카메라로 찍어놓은 듯, 정밀하면서도 감정에 젖어 축축해지지 않는 제발트의 시선은 압권이었다.


디아스포라. 고국을 떠나 흩어진 사람들을 가리키는 그리스어다.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유대교의 관습과 규율을 지키며 살아가는 유대인을 지칭하던 이 말의 의미는 오늘날 확장되어, 본토를 떠나 타지에서 흩어져 살아가는 이들을 가리키는 단어로 널리 쓰인다. 제발트의 ‘이민자들’은 제목에서 쉽게 유추할 수 있듯 디아스포라 문학이다.


네 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헨리 쎌윈 박사 - 기억은 최후의 것마저 파괴하지 않는가’, ‘파울 베라이터 - 어떤 눈으로도 헤칠 수 없는 안개무리가 있다’,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 내 밀밭은 눈물의 수확이었을 뿐’, ‘막스 페르버 - 날이 어둑해지면 그들이 와서 삶을 찾는다’. 처음부터 엄청나게 마음을 사로잡았고 ‘암브로스 아델바르트’의 절정에 이르면 이게 이 책에서 최고의 소설일 거라고, 이 이상은 나올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놀랍게도 ‘막스 페르버’는 그걸 뛰어 넘었다. 헨리 쎌윈 박사는 영국으로 떠나왔고, 암브로스는 스위스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이었고 그의 친우 코즈모는 미국으로 옮겨간 부유한 유대인이었다. 막스 페르버는 영국으로 도망쳐온 유대인이다. 파울 베라이터는 프랑스로 피신했다가 돌아왔으나 결코 온전한 독일인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헨리 쎌윈 박사는 영국으로 이민온 후 이름과 성을 바꾸고 케임브리지 의과 대학을 최상위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는 혈통 세탁에 성공한 것 같았다. 그러나 제1차세계대전 직전 스위스 베른에서 보낸 한 때, 그가 ‘푹 빠졌던’ 등산안내인 요한네스 네겔리와의 만남과 이별은 그에게 깊은 슬픔을 안긴다. 이후 네겔리가 크레바스에 빠져 추락사 하자 헨리는 깊은 우울증에 빠진다. 이후에 만난 아내와 보낸 사치스러운 시절은 우울증의 다른 표현이다. 그는 ‘무엇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는지, 돈 대문인지, 결국 발각되고 만 혈통의 비밀 때문인지, 그저 사랑이 식은 것인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나는 그가 네겔리를 잃은 순간 모든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고 생각한다. 헨리 쎌윈은 베르테르처럼 총으로 머리를 쏘아 자살한다.


연인에 가까운 것으로 짐작되는 또 하나의 관계는 암브로스 아델바르트와 그의 주인 코즈모 쏠로몬의 관계다. 아슬아슬한 곡예 비행과 거침없는 도박으로 명성을 날렸던 코즈모 쏠로몬은 심한 우울증과 정신분열로 고통 받았다. ‘전쟁이 점점 확산되고 파괴의 규모가 미국인들에게도 알려질수록 코즈모는 별로 변한 것도 없는 미국생활에 다시 적응하지 못했다. (중략) 코즈모는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화재와 죽음과 들판에 뻗어 있는 시체 들이 햇살 아래에서 썩어가는 광경을 자기 머릿속에서 본다고 주장했다.’(p.120) 미국에 뿌리내리는 데 실패하고 유럽에서의 참화를 남의 일로 생각하지 못했던 코즈모는 결국 정신병원에서 죽었다. 암브로스는 쏠로몬 집안이 몰락한 후 코즈모의 뒤를 따르듯 심한 우울증에 빠졌고 역시 코즈모가 숨진 정신병원에서 죽음을 맞았다.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상실된 기억을 자기가 만들어낸 환상으로 보충하는 것’(p.129)처럼 보였던 암브로스. 그 비현실적인 기억들은 그에게 무거운 오버코트와 같은 것이었고 그에 짓눌려 암브로스는 허약하고 불안하게 점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내면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두 번의 세계대전 사이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목격한 아름다운 것들과 파괴된 것들, 코즈모의 죽음, 몰락의 뚜렷한 징후들, 그 모든 것이 결코 잊히지 않고 머리 속에 새겨졌다는 것 그 자체가 암브로스를 파괴시켰다. ‘기억이란 때로 일종의 어리석음처럼 느껴진다. 기억은 머리를 무겁고 어지럽게 한다.’(p.185) 반복해서 전기충격치료를 받았던 암브로스의 선택 역시 자살이나 다름 없다.


또 한 명의 자살자는 교사 파울 베라이터다. 일흔네번째 생일 일주일 후 그는 철로에 누워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1/4만 유대인이었던 그는 고향에서 교사가 되기를 열망했지만 제3제국 치하에서 해임되었고 그의 집안은 붕괴되었다. 놀랍게도 파울은 그 폭력과 굴욕의 와중에 1939년 독일로 돌아와 독일 병사로 입대한다. 끝까지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입증받고 싶었던 파울, 그래서 1935년과 1936년 사이에 있던 일들은 거들떠보고 싶어 하지 않았던 파울. 그는 생애 마지막 십년 동안에야 비로소 당시의 일들을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그는 매일 문서를 들추고 메모하며 생애 마지막 십년을 보냈고, 긴 시간 고통 받다가 결국 자살했다. 그의 실명은 그의 안에 어둠이 퍼져 나가는 것을 상징하며, 파울은 그것을 ‘지극히 평온한 마음으로 받아들렸고, 바야흐로 자신이 접어들게 될 새로운 세계는 이전보다는 좁겠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편안할 것이라고 말했디’.(p.77)



영국 맨체스터로 건너와 화가로 성공한 막스 페르버의 삶은 그의 어머니의 기록과 중첩되어 나타난다. 게르만의 일원으로 아름답고 화목한 가정을 꾸미고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루이자(막스의 모친)는 전쟁으로 두 번의 사랑을 모두 잃고 그녀 자신도 죽다 살아난다. 그리고 그 대가처럼 독일의 훈장을 받는다. 유대인이 아닌 게르만 남자와의 사랑을 꿈꾸었던 그녀는 결국 유대인의 관습대로 중매 결혼을 하고 막스를 낳아 기른다. 1941년 막스의 부모인 프리츠와 루이자는 강제수용소로 옮겨져 거기서 죽는다. 막스는 말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지금도 그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였다고 자신할 수는 없네. 하지만 돌이켜보면, 당시의 일들이 내 삶의 구석구석까지 결정해놓았다는 느낌이 들어. (중략) 부모님이 겪은 고통과 나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보려고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노력도 많이 했고, 이렇게 은둔생활을 하는 가운데 간혹 영혼의 안정이 유지되는 때도 없지 않았지만, 학창시절에 나를 덮쳤던 그 불행이 내 안에 박아놓은 뿌리는 너무나 깊었네. 그 불행은 거듭 땅을 꿇고 나와 사악한 꽃을 피우고 독기 품은 잎으로 내 머리 위에 천장을 만들었지. 그 천장은 지난 몇년 동안에도 내게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나를 어둠으로 덮었네.’(p.241~242) 막스는 자살이 아닌 폐기종으로 죽었지만, 그를 공업도시 맨체스터의 아뜰리에에 은둔하게 만든 것은 그 뿌리 깊은 불행, 학살당하고 내몰린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기억이었으며, 헨리 쎌윈처럼 사랑하는 누군가를 뒤에 남기고 홀로 떠나왔다는 것에 대한 회한이었다.


제발트의 ‘이민자들’은 화자가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인생에서 만났던 타자들-고향을 잃고 마음의 안식처를 잃고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당하고 내몰렸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점이 ‘이민자들’을 다른 디아스포라 문학과 구별짓는다. 자신의 이야기를 내세우지 않고 역사의 격랑에 휘말렸던 타인들의 이야기를 관찰하고, 채록하고, 답사하고, 사진을 붙여 설명하는 기록문학적 성격. 그리고 놀랍도록 섬세하고 치밀한 풍경 묘사들. 제발트는 이런 서술 방식으로 대상과의 적절한 거리감을 만들고, 다큐멘터리적인 시선을 획득하며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담담한 태도를 유지한다. ‘이민자들’은 분명 비극적인 이야기고, 어둡고 우울한 흑백의 정조를 띄고 있음에도 결코 잔인해지거나 슬픔에 매몰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제발트가 세세하게 그려내는 자연의 풍광들은 마냥 아름답기만 하다. 쇠락해가는 유럽 소도시-왕년에는 흥청거렸으나 이제는 누구도 찾지 않는 몰락의 장소들이 변함없는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자연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면서, 안락함과 부유함이 있었던 유럽의 전성기가 소멸했음을 더 강하게 보여준다. 중간 중간 삽입된 사진들은 기록으로서의 문학, 개인의 삶과 역사의 증언을 동시에 해내는 ‘단편적인 기억의 영상들’(p.229)이다. 이것은 일종의 강박관념이라고 막스 페르버는 말한다. ‘시간은 믿을 만한 기준이 못될뿐더러 영혼의 소음일 뿐’(p.229)이기 때문에, 제발트는 시간에 저항하듯 계속 해서 인물들이 살고 죽은 장소를 찾고 그들이 남긴 글과 사진 들을 모아, 작가 스스로 말하듯 ‘값싼 허구화의 형태’ 바깥의 책으로 엮는다. 이러한 그의 작법 속에서 인물들의 삶은 픽션 속 개인의 우울과 절망에서 한 시대의 무챗빛 풍경이자 지금 눈앞의 고통으로 승화된다. 무엇보다 그 자신도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았기에, 이산자들의 고단한 삶과 뼛속 깊은 우울을 채록해 전수하는데는 제발트만한 인물도 없었을 것이다.





덧붙임) p.15의 사과 종 beauty of bath는 '목욕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영국 서머셋 주의 휴양도시 Bath 에서 유래한 사과 품종이다. 헨리 쎌윈은 이 사과 이름을 통해 영국의 야생적 자연이 갖는 아름다움을 예찬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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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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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스탄틴 카바피의 시 ‘Waiting for the Barbarians’ 에서 제목을 가져온, 존 쿳시의 책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1980년, 작가의 세번째 책으로 출간되었고, 작가는 이 책으로  남아프리카 최고의 문학상인 CNA상을 받았다. 우리 나라에는 1982년 두레출판사를 통해 소개가 되었으며 이후로도 여러 출판사에서 판본이 나왔다. 2019년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으로 재출간된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아프리카 문학을 국내에 알리는데 앞장서온 번역가 왕은철 교수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판본이다. 2003년 같은 번역자의 들녘출판사 본에 비해, 딱딱한 문어체가 익숙한 구어체로 바뀌었으며, 행갈이가 적어져 읽기에 더 속도감이 붙고 이해하기 쉬워졌다. 첫 출판된 지 40년 가까운 책이지만 어렵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꾸준히 시대에 맞춰 새로운 번역본을 내놓으려는 역자와 출판사의 노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어느 겨울의 초입, 공간적 배경은 제국의 변방에 있는 주민 3천 명 가량의 도시다. 도시  바깥쪽으로는 토착민 어부들과 그 가족들이 살고 있으며, 멀리에는 천막을 메고 떠돌이 생활을 하는 유목민들이 살아가고 있다. 정착민 어부들과 기마 유목민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제국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똑같은 ‘야만인’일 뿐이다.

이러한 배경 설정은 어느 독자에게는 중국 서부의 소수민족 이야기로 읽히기도 하고, 어느 독자에게는 아라비아 사막의 황량한 배경을 떠올리게도 하고, 어느 독자에게는 아프리카의 식민지 어드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사막과 눈이 공존하는 이 허구의 세계에 대해, 작가 쿳시는 특정 지역명과 국가명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제국’과 ‘야만’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독자의 상상력이 적용될 폭을 넓히고 누구에게든, 어디에서든 ‘제국’ 혹은 ‘야만’이 되는 일은 일어날 수 있다는 보편성을 획득한다. 시제의 현재형 또한 이 일이 먼 과거의 일이 아닌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생생함을 더한다.

화자인 ‘나’는 은퇴를 기다리며 한가롭게 소일하고 있는, 제국을 위해 일하는 시골 치안판사다. (존 쿳시, ‘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2019, p.18. 이하 괄호 안에 페이지 수만 인용) 야만인이 도시와 제국민들을 공격할 거라는 소문이 흉흉하게 돌지만, 치안판사는 한 세대에 한번 씩 일어나곤 하는 야만인 히스테리라고 생각한다.



공간은 공간이고, 인생은 인생이다. 어디를 가나 똑같다. 다른 사람들의 노고로 편하게 먹고사는 나에게는 여가시간을 때우기 위한 문명화된 악습도 없다. 그래서 나는 우울함에 맘껏 젖어 텅 빈 사막에서 특별한 역사적 비애를 찾으려 하는 것이다. 헛되고 한가하고 잘못된 짓이다! (p.32)



내가 늙어버린 것 같고, 피곤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고만 싶다. 나는 요즘 틈만 있으면 잠을 잔다. 그리고 일어날 때는 마지못해 일어난다. 잠은 더이상 고단함을 풀어주는 목욕이거나 원기회복이 아니라 망각이며, 밤마다 소멸 상태와 맞닥뜨리는 일이다. (p.38)



소설 초반의 치안판사는 목표도 지향도 없이, 한가로움이 지나쳐 공허하게 보이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제국 정부에서 졸 대령이 파견을 나오고 ‘진실을 알아내는 특출한 방법’의 소유자인 졸 대령이 야만인들을 고문해 원하는 답을 짜내면서 치안판사의 삶은 달라진다.

우울감, 헛되다는 허무감, 피로감과 무력감 속에 늙어가던 치안판사는 ‘내 창문 밑에서 하루는 칭얼거리다가 다음날에는 더이상 칭얼거리지 않게 된 갓난아이 ’(p.39), 맞아 죽은 노인과  칼에 찔린 어린아이라는 현실에 마주서게 된다. 처음에 치안판사는 이들을 외면하려 한다. 창문을 닫고 책을 읽으려 하고, 창녀가 즐거움을 주는 여관을 찾아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노력들은, 시력을 거의 잃고 발을 다친 ‘여자’와 관계를 맺고 뺨과 손이 철사 고리에 꿰인 원주민들을 보게 되면서 부서진다. 그들은 치안판사에게 더이상 예전과 같은 방관자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한다. ‘이걸 안 이상, 되돌아갈 길은 없는 듯 보인다.’(p.39)



이 추한 사람들이 지구의 표면으로부터 지워지고, 우리가 불의와 고통이 더이상 없는 제국을 운영하기 위해 새 출발을 하겠다고 맹세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중략) 그들로 하여금 사력을 다해 그들 모두가 들어가 눕기에 충분한 구덩이를 파게 한 뒤 거기에 그들 모두를 영원토록 묻어버리고, 새로운 의도와 결심으로 가득찬,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로 귀환하는 데는 비용이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내 방식이 아닐 것이다. 제국의 새사람들은 새 출발과 새로운 장과 깨끗한 페이지를 믿는 사람들이다. 나는 아직도 옛이야기를 가지고 몸부림치며, 그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 내가 왜 그런 수고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알게 되길 바란다. (p.44)  


데려온 야만인 ‘여자’는 치안판사에게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텅 빈 얼굴과 텅 빈 몸’을 한 ‘여자’의 등장으로 치안판사는 졸 대령과 완전히 갈라진다. 영양을 보아도 쏘아 죽일 수 없는 고뇌를 겪고, 여자들의 몸을 소유하는 것이 진정 자신이 원하는 욕망이었는지 회의한다. 치안판사는 제국이 저지른 범죄로 인한 죄책감과 함께 졸 대령과 자기는 다르다는 걸 스스로 증명하고 싶어한다. 치안판사가 여자를 쓰다듬고 어루만지는 것은 문자판을 파내어 수집하는 그의 욕구와 일맥상통하는 페티시였고, 이는 곧 야만의 세계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텅 빈’ 자리로 존재하던 ‘여자’의 모습이 꿈속에서부터 서서히 실재하는 존재로 떠오르면서, 치안판사는 회의와 죄의식을 느끼고, 무기력한 제국의 관리에서 생각하고 움직이는 인간으로 첫 발을 뗀다. 이는 ‘여자’를 유목민의 세계로 돌려 보내려는 순례로 이어진다.

도시를 벗어나서야 비로소 두 사람의 성관계는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것은 관계의 합일로 이어지지는 못한다. 그는 아직 제국민이었고 여자는 훼손된 야만인이었다.


 이윽고 유목민들과 마주치게 된 치안판사는 여자에게 함께 도시로 돌아가지 않겠냐고 하지만 여자는 거부한다. 치안판사의 바람은 일방적인 것일 뿐, 1인칭 주인공 제국-화자의 눈으로는 미지의 대상인 야만-’여자’의 속내를 알 수 없다. 그의 욕망은 공허와 황량함으로 끝나고 도시로 돌아오는 행보는 힘겹다.

 귀환 후, 먼 곳에서 온 야만인을 원한 대가로 치안판사는 적과 내통한 자가 되어 모든 지위를 잃는다. 제국과의 연대가 끊어지자 그는 일순 자유인이 된 우쭐함을 느낀다. 하지만 ‘자유’란 무엇일까? 제국에서 놓여난 자는 모두 자유로운가? 제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지 않으면, 중간자이자 방관자인 어중간한 역할을 벗으면 그는 자동으로 자유로워지는 걸까? 반복되는 폭력 속에, 치안판사는 짐승으로 대우하면 짐승이 되어버리는 인간에게 과연 자유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기에 이른다. 육체가 구속된 이는 말할 것도 없고, 육체가 제약받지 않아도 야만으로 대우받고 짐승 취급을 당한다면 그는 자유민이 아니다. 문명인과 야만인의 경계가 선명하고 누구나 하루 아침에 짐승이 되어버리는 곳에서, 누구도 그 스스로의 가치만으로 존엄해질 수 없는 곳에서 자유란 헛껍데기에 불과하다. 치안판사는 어디에도 도망칠 곳은 없다는 것을 알고 감옥으로 되돌아온다.



내가 지금 버리려고 하는 자유는 나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 걸까? 나는 지난해, 전보다 더 내 마음대로 인생을 살았다. 나는 정말로 무제한적인 자유를 즐겼던 걸까? 예를 들자면, 나에게는 그 여자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내 변덕에 맞춰 그녀를 아내, 첩, 딸, 노예, 혹은 그 모든 것을 아우른 존재, 혹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 수 있었다. 가끔씩 느껴지는 감정을 제외하면 그녀에 대한 의무가 내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유로부터 압박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그 누가, 감금을 당함으로써 생기는 자유를 환영하지 않을 것인가? (p.130~131)


그러나 나는 지금 자유라는 게 얼마나 기본적인 것인지 이해하기 시작한다. 나에게 어떤 자유가 남았는가? 먹거나 배고플 자유, 침묵을 지키거나 혼자 지껄일 자유, 혹은 문을 두드리거나 비명을 지를 자유이리라. 그들이 나를 여기에 감금했을 때 내가 불의, 경미한 불의의 대상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피와 뼈와 고기가 뭉쳐진 불행한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p.142)



 졸 대령이 나타나고 ‘여자’를 만나기 전, 토착민에 대한 치안판사의 태도는 너그럽지만 엄격하게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미개인’이었다. 도시인-제국민이 조금 베풀어주어야 하는 비렁뱅이 부족인 사람들. 치안판사는 그들에게서 ‘더러움과 냄새와 싸움소리와 기침소리’를 읽고 도시 사람들은 전염병의 온상이라며 싫어했다. ‘격노한 아버지에게 야단맞은 아이를 위로하는 어머니 역할 이상은 해줄 수 없다’고 생각하며 ‘한쪽은 거칠고 다른 쪽은 사근사근한’ 가면 중에서 후자 쪽인 제국의 한 면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했던 치안판사는 여전히 제국주의에 한 발을 걸치고 있는 지배층의 일원이었다. 그는 ‘평생 교양 있는 행동을 신봉해온 사람’(p.43)이자 명문가 출신의 신분에 합당한 매너와 태도로 야만인들을 지배해왔다. 이런 그의 태도는 문화통치를 수행했던 일제의 지배 계급들을 연상시킨다. 그는 인간에게 지나치게 잔인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는 지배자는 너그럽고 온화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귀족적 애티튜드였다.

그가  인간이 지켜야 할 가장 밑바닥의 품위에 눈을 뜨는 것은, 인간의 지위를 잃고 짐승으로 격하된 후의 일이다.  그는 옷을 빼앗기고, 제 때 할 수 있는 식사의 권리를 빼앗기고, 씻을 수 있는 권리를 빼앗기며,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빼앗긴다.  뺨과 손이 꿰어진 채 폭행을 당하는 야만인들을 보고 뛰쳐나가 ‘짐승에게도 망치는 휘둘러서는 안된다, 이들은 사람들이다’라고 외치는 순간, 그는 야만인들이 당하는 잔혹한 폭력을 함께 당하게 되고 제국 신민의 지위를 완전히 상실한다. 몽둥이를 맞은 그는 “눈이 안 보여!”라고 외치고 이 때에 치안판사는 비로소 야만인 맹인 ‘여자’와 동등해진다. 극한의 고통 속에 꾼 꿈에서, ‘여자’가 드디어 아름답고 맑은 모습으로 치안판사를 보고, 따뜻한 빵 한덩어리를 내미는 것은 이 ‘동등해짐’ 위에서다.


‘여자’의 눈가에 있던 애벌레 같은 흉터가 그의 얼굴에도 생긴다. 남자 옷을 빼앗기고 여자 옷을 입은 그는 남자가 아닌 여자, 지배자가 아닌 피지배인, 문명이 아닌 야만의 모습이 되어 간다. 제국의 관리이며 명문가의 남성라는 허울은 너무나 쉽게 벗겨지고, 어제까지의 문명인과 오늘의 야만인 사이에는 아무 차이가 없어지고 만다. 머리에 두건을 뒤집어 쓴 채 살고 싶다고 비명을 지르고, 뼈를 부러뜨리는 고통 속에 절규하는 것에는 문명과 야만 사이의 차이가 없다. 이때가 되어서 그는 ‘모든 인간은 살고 살고, 무슨 일이 있어도 또 살고 싶어 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온몸으로 깨닫는다. 그의 비명은 야만인의 비명이며, 인간의 비명이다.


야만인들이 정착지 깊숙이까지 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치안판사를 고문했던 만델 준위는 “너는 죄수 신분이 아니잖아. 네가 나가는 건 자유야.”(p.206) 라며 치안판사를 풀어준다. 자유라는 단어가 이토록 값싸고 얄팍하게 쓰이는 곳이 제국임을 깨달은 치안판사는 “당신은 사람들을 그렇게 다룬 다음 어떻게 음식을 먹을 수 있지?”라며 자유라는 단어가 쓰이기 이전에 먼저 인간 본연의 존엄성을 지키는 일이 있어야 함을 지적한다.


나를 고문하는 자들과 처음 대면했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멍청하게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나? 숨길 것도 없다. 그들이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을 대하고 있다는 걸 알도록 만들자! 무서우면 무섭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자! 저자들은 완강한 침묵을 먹고 사는 인간들이다. 침묵을 지키면, 저자들은 개개인에 대해 자신들이 인내심을 갖고 열어야 하는 자물통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될 것이다. (p.212)


인간을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는 세상, 하나의 자물통으로, 물건으로, 수단이자 도구로 인간을 생각하는 세상에는 존엄이 없고, 그런 세상에서는 누구에게도 자유가 없다. 제국의 신민에게도, 야만인에게도, 평범한 아낙네와 어부들, 아이들, 군인들, 누구에게든 말이다. 눈 앞의 기만적인 자유는 언제든 박탈될 수 있다. 누구든 하루 아침에 조롱받는 천민으로, 더러운 야만인으로, 도구적인 존재로 추락할 수 있다. 이런 세상에서 자유라는 단어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자유롭고 존엄한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허울이 얼마나 얇고 가벼운 것인가를 깨달은 치안판사는 거리낌 없이 구걸을 하고 훔쳐 먹으며 삶을 이어간다. 그리고 예전에는 그토록 쉽게 잠에 빠져들었던 그가 이제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자신의 어리석었던 욕망을 반추하며 부끄러워한다. 그는 ‘편안한 시절에 제국이 스스로에게 얘기하는 거짓말’(p.223)이었을 뿐이었다.


‘그녀에게 끌린 건 그녀의 몸에 난 상처 때문이었다’. 치안판사는 이렇게 스스로를 돌아본다. 결국 그에게도 ‘여자’는 신비롭고 낯선 야만의 흔적이었을 뿐이었다.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훼손되기 전의 모습은 떠올릴 수 없는, 망가진 모습인 대로 기괴하고 진기하고 아름다운 수집품. 폐허에서 파낸 문자판 같은 존재. 애완동물처럼 여자를 소유했던 치안판사는 ‘여자’의 존재로 인해 각성했다. 제국의 수비대는 철수하고 변경의 정착지가 소멸될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더이상 맥없이 잠에 빠지지 않는다. 짧은 욕정이 그를 다시 덮쳐오고 잠들게끔 하지만 그는 ‘고요하고 변덕스러운 슬픔을 느끼’(p.252)면서도 곧 그것을 잊는다. 그는 잠들지 않는다. 깨어 있고 움직이고 대비한다. 겨울을 견딜 준비를 하며 새로 올 봄을 기다린다.  삶의 뚜렷한 목적이 없이 허무와 무기력 속에 살아가던 한 늙은이는 ‘오래전에 길을 잃었지만 어디로 통하는지 모르는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는 사람’(p.256)으로 다시 태어난다. 아직은 팔이 없는 눈사람이지만, 눈과 귀와 코와 입은 분명히 있는, 모자도 쓰고 있는, 새로 만들어진 눈사람처럼, 그는 겨울을 버티고 서서 새로운 봄을 기다리는 적극적인 존재가 된다.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문명과 야만의 경계를 나누고 지배하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폭력성을 지적하는 소설이다. 미지를 야만의 타자로 규정하고, 그 타자의 존재를 통해 ‘우리’를 정의하고려고 하는 인간의 편협함과 어리석음을 고발하는 소설이다. 또한 제국주의 시대 이후에도 독자들에게 보편적인 성찰을 불러 올 수 있는 노년의 성장담이기도 하다. 소설은 평화롭고 안온한 삶 속에서 무기력한 중간자로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고뇌하는 개인, 그리고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거듭날 것을 이야기한다. 인간을 등급화, 서열화 하고 더 존중받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어 대접하는 사회 속에서는 누구도 자유롭지 않고 누구도 존귀해질 수 없다. 우리는 누구나 제도에 포획된 ‘야만인’이 되어, ‘나는 자유로운 제국의 신민’이라는 착각을 진실이라고 믿고 살아가지만, 우리가 자유롭다는 환상은 치안판사의 삶에서 알 수 있듯 너무나 얄팍한 기만책일 뿐이다.    

굳이 먼 나라를 떠올릴 것도 없이, 대한민국의 100년 역사만 보아도 ‘야만인을 기다리며’와 같은 일들은 자주 있었다.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대학살, 제주 4.3. 사건과 광주 민주화 항쟁, 여러 건의 용공 조작 사건들처럼 지배 계급이 피지배층을 길들이고 억압하기 위한 도구로 헛소문과 조작 뉴스를 퍼뜨리고 그것을 근거삼아 민간인을 학살하고 입막음한 일은 수없이 반복되었다. 함부로 매장된 백골 무더기가 되어버린 사건들.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오랫동안 금기였다. 그러나 기록은, 기억은 남았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치안판사는 우리도 기록을 남겨 후대에 물려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고뇌하는 개인과 행동하는 지식인은 무엇을 기억하고,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책을 다 읽고 난 독자에게 이것은 강렬하게 솟구치는 질문이 될 것이다. 문학은 언제나 기록의 도구이며 행동의 수단이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특수한 지역과 특수한 시대의 역사를 보편적인 것으로 치환하는 작업이며,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문명과 야만의 틈바구니에서 인간의 존엄과 자유라는 보편적 가치에 대해 회의했던 사람의 기록으로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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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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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읽긴 읽되 바보 천치 같이 읽은 것’1)이 아닐까 두렵다. 그러나 이 책이 어떤 ‘진정성’의 반석 위에 세워진 책이 아니라는 것만은 말할 수 있다. 음운과 음소 단위에서부터 짜여진 섬세한 언어 유희와, 책의 전후를 수십 번도 넘게 오가게 만드는 기묘한 형식 실험을 통해 나보코프는, 진정성의 가치를 완벽히 뒤집어엎는 가상성의 예술을 극한치까지 선보인다. 믿을 수 없는 화자의 반복되는 진술은 나중에는 소설 전체를 통째로 의심하게 만들고, 이 ‘픽션’ 속에 누구와 무엇이 ‘픽션 속의 현실’이고 누구와 무엇은 ‘픽션 속의 픽션’인가를 혼란스럽게 고민하다가, 결국엔 그 어떤 것도 ‘현실’이 아니고 모든 것이 ‘픽션’일 수 있다는 무서운 깨달음에 도달한다. 종국에는 현실과 허구의 구분은 무의미해지고, 모든 것은 어른거리는 그림자일 뿐이라는 결론에 이르면서, ‘픽션’과 대비되는 ‘현실’의 자명성에까지 회의하며 책을 덮게 된다.  


나보코프가 1962년 출간한 책 ‘창백한 불꽃’은 시인 존 셰이드의 옆 성에 사는 찰스 킨보트의 머리말로 시작한다. 얼핏 보면 그저 셰이드의 열광적인 팬이자 그와 깊은 친교를 나눈 이웃으로 보이는 킨보트는, 머리말에서 밝히기를 위대한 시인 존 셰이드의 마지막 시가 담긴 카드 묶음을 셰이드의 부인에게서 건네 받았다고 한다.고  그는 이 시 카드에 자신의 길고 긴 주석을 달아 출판할 계획을 세운다. 책 ‘창백한 불꽃’은 그 ‘출판 계획 원고’를 독자가 일종의 ‘편집자’가 되어 들여다보는 텍스트다. 소설의 제목인 ‘창백한 불꽃’은 존 셰이드의 유작시의 제목이기도 한데, 이것은 셰익스피어의 ‘아테네의 타이몬’ 4막 3장에 나오는 구절에서 가져온 것이다. 킨보트가 주석에서 설명하는 바, 태양에게서 은빛(창백한 불꽃)을 훔쳐가 겨우 빛을 발하는 그림자 같은 존재인 달을 노래하는 구절이다.


999행의 영웅시격 2행 연구로 이루어진 시 ‘창백한 불꽃’과 이어지는 킨보트의 주석. 독자의 눈과 손은 바쁘게 책의 앞뒤를 오가야 하고 이를 미리 짐작한 킨보트는 ‘간단하게  아예 두 권을 사서 편한 테이블 위에 나란히 펴놓고 보는 것이 현명하리라’(p.35) 충고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긴 주석은, 독자가 금방 알 수 있듯 셰이드 시의 충실한 해석이 아니다. 킨보트는 존 셰이드의 단어와 그에 대한 주석의 형태를 빌어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놓는다. 북구의 나라 젬블라에서 혁명이 일어난 후 간신히 탈출한 친애왕 카를 크사베리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그를 쫓는 암살자 그라두스까지 나오면서 주석은 시의 종속적 자리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활개친다.2)


킨보트가 주석에서 말하기를, 그는 셰이드에게 지속적으로 ‘영감’을 주어 왔으며, 젬블라 왕국의 이야기를 계속 셰이드에게 전해 그가 젬블라와 그 마지막 왕 카를 크사베리의 이야기를 시로 집필하도록 유도했다 한다. 그러나 킨보트의 이 진술은 온통 의심될 수밖에 없는 것이, 간간히 주석을 비집고 나오는 (생명을 가진 것처럼! 킨보트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오려는 몸부림처럼!) 존 셰이드와 그의 아내 시빌 셰이드의 언행들을 보면 이 부부는 킨보트를 친교의 대상이거나 영감의 원천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심지어는 귀찮아 하고 질려 한다. 킨보트는 ‘그가 젬블라 왕의 모험을 정확히 어느 부분까지 집필했는지 신경질적으로 집요하게 통제 불능으로 궁금해하’(p.210)지만, 셰이드는 그런 그를 피한다.


“내가 왜 당신에게 시의 주제를 줬는지, 아니 그보다 당신에게 그 주제를 준 사람이 누구인지 다 밝힐 것을 약속드립니다.”

“무슨 주제?” (p.355~356)


운명의 장난처럼 생일까지 겹치는 셰이드와 킨보트. 시인은 시를 쓰고 주석자는 그것에 주석을 단다. 처음엔 위대한 시와, 그 시의 빛을 훔쳐와 자신의 이야기를 밝히는 주석들이 마치 ‘아테네의 데이몬’에 나오는 태양과 달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면 킨보트의 주석이야말로 ‘태양’이고 셰이드의 시는 그것을 비춰 드러내기 위한 ‘달빛’ 같은 존재였다는 역전이 일어난다.


킨보트는 자신의 성 안에서, 창문 너머로 오래도록 존 셰이드를 관찰하지만 창문 너머로 보이는 셰이드는 발끝 뿐이다. 킨보트의 시선은 셰이드에 대한 흠모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대신 해줄 자를 응시하는, 달에게 빛을 쏘는 태양의 거만한 시선이며, 셰이드를 통해 자신의 빛을 되비쳐 보려는 나르시시즘의 시선이다. 옹달샘에 비친 자기의 상을 바라보며 황홀경에 도취된 나르시스가 킨보트-폐왕 카를 크사베리이며 존 셰이드는 킨보트의 환상 속에 존재하는 ‘나와 같은 나’ 다.  그렇기 때문에 킨보트는, 자신이 만들어낸 ‘가상성’의 세계 안에서 열심히 젬블라의 모험담을 시로 담아 줄 셰이드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결국 친애왕 카를을 시해하려는 그림자단의 암살자 그라두스의 손에 의해 엉뚱한 셰이드가 죽음을 맞고, 킨보트는 셰이드의 유고를 손에 넣고 경황 중인 시빌 셰이드에게 합의문에 서명하게 한 후 달아난다. 그러나 킨보트가 살펴본 시인의 유작은 그가 기대했던 젬블라 폐왕의 모험담이 아니었다. 그러나 무슨 상관이랴? ‘나의 친애하는 시인은 어쩌면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나, 좋든 나쁘든 최후의 말을 하는 이는 바로 주석자’(p.36)다. 킨보트는 셰이드의 시어들을 성냥 삼아, 킨보트-카를의 이야기에 불을 지핀다. 셰이드의 ‘기표’는 중요하지 않고 오직 킨보트가 부여하는 ‘기의’만이 강요된 참뜻, 주석자가 선포하는 진실이 된다. 셰이드의 시어들은, 그 카드들은 옛날 ‘어느 찬란한 아침 셰이드가 소각장의 창백한 불꽃 속으로 초고 더미를 몽땅 던져 태우는’ 것처럼, ‘화형식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검은 나비들’(p.20)의 운명이다.


그런데 킨보트의 주석을 계속 읽다보면 심지어 이 ‘검은 나비’- 유작시조차도 셰이드의 것이 맞을까 하는 의심이 들면서, 독자는 이 책의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발을 들이게 된다. 시 ‘창백한 불꽃’은 과연 셰이드의 것일까? 세상에서 오직 시빌 셰이드 한 명만이 보았을 뿐인 이 카드들이? 우리가 이 카드에 적힌 ‘창백한 불꽃’ 이라는 시를 존 셰이드의 유작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킨보트의 머리말 때문이다. 우리는 킨보트의 시선과 언어를 통하지 않고 존 셰이드라는 존재를 접한 적도 그의 시를 읽은 적도 없다. 어쩌면 이 ‘시’는 처음부터 킨보트의 긴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한 속임수, 주석이라는 형태를 불러오기 위한 밑작업, 킨보트로 정체를 속인 카를 왕처럼 ‘셰이드의 유작시’로 정체를 속인 ‘킨보트의 자작시’는 아닐까? 이게 정말로 셰이드의 유작시가 아니라면, 그럼 정말로 존 셰이드라는 인물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셰이드는 ‘그림자, 스페인어로는 거의 ‘인간’에 가까운…’(p.216)이름이다. 인간이 아니면서 거의 인간에 가까운 ‘인물’. 셰이드는 누구의 그림자인가. 나보코프가 창조한 픽션 속의 시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픽션 속의 킨보트가 창조한 인형, 픽션 속의 픽션일 수도 있다. 물 속에 비친 상이 나르시스 그 자신이었듯 킨보트가 응시하는 셰이드는 바로 킨보트 자신이다. 이 생각에 도달했을 때 독자는 아찔한 당혹감을 느끼지만 이것은 픽션이 줄 수 있는 가장 극한의 즐거움 -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분간할 수 없어진 세계에서 겪는 쾌락의 현기증이다.

의심이 계속 될수록 이야기는 미궁에 빠지고 독자는 길을 잃는다. 독자가 빠져나갈 방법은 왕궁의 벽장 뒤 통로를 그냥 계속 걸어나갔던 카를왕의 길처럼, 그저 나보코프가 설계한 어둠 속을 걷다가 극장 한가운데로 빠져나오는 길 뿐이다. 독자가 도달할 무대는 시를 쓰는 셰이드와 그 시를 해석하는 킨보트와 그 킨보트를 죽이기 위해 달려오는 그림자단의 그라두스까지 겹쳐보이고 구별할 수 없게 되는 그림자극의 무대이다. 삶이 태양이라면 죽음은 달과 같으며, 삶이 빛이라면 죽음은 그림자와 같은 것. 그래서 셰익스피어는 맥베스의 입을 빌려 인생도 결국 흔들리는 그림자일 뿐이라고, 삶과 죽음의 고리를 이어놓은 것이 아닌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어디에서 그 장면이 펼쳐지든, (중략) 더 크고, 더 훌륭하고, 더 유능한 그라두스가.’(p.371) 결국 초인종을 울릴 것이며 그의 다른 이름은 삶의 그림자, 삶의 발끝에 길게 이어져 있는 죽음이다. 끝에는 그라두스까지도 이 반복되는 킨보트-카를-셰이드의 거울상 끝에 사자(使者)의 형태로 서 있는, 거울상의 변주로 보인다. 유리에 비친 상이 벽에 걸린 거울 속에 반사되는 것처럼, 그 안에서 하나의 인물이 계속 분열되어 비치듯이. 거울 속에선 유리에 비친 나가 반복되고 그 거울은 또 유리 속에서 반복되어 끝없이, 상이 마침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셰이드-킨보트-카를- 그라두스-셰이드-킨보트-카를-그라두스...’ 같은 것의 반복, 단 한 사람 ‘나’의 반복만 계속되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이야기가 킨보트라는 - 어쩌면 그 이름조차 가짜일 - 미치광이 혹은 가공할 예술가, 게임메이커가 꾸며낸 픽션일지도 모른다.3) 그리고 그 게임메이커는 바로 작가 나보코프 자신의 ‘그림자’다. 반복되는 ‘나’의 연쇄 끝에, 이윽고 이야기의 최종 메타자인 나보코프의 상이 거울의 저 끝에 떠오르는 순간, 독자는 전율하게 된다. 나보코프는 킨보트를 꾸며내고 킨보트는 젬블라와 카를 크사베리를 꾸며내고, 그 이야기를 들어줄 시인 셰이드까지 꾸며낸다. 마뜨로쉬까 인형처럼 겹치고 겹치는 픽션의 중첩. 이 안에서 정신 착란에 빠진 잭 그레이는 그림자단의 암살자 그라두스로 둔갑하고, 러시아 문학 교수 찰스 킨보트가 젬블라의 폐왕 카를 크사베리로 둔갑하며, 어쩌면 처음부터 없는 인물이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그냥 지나가는 이웃 노인네였을지도 모르는 존 셰이드는 미완의 영웅시를 남긴 위대한 시인으로 둔갑한다. 그 모두는 나보코프의 그림자이다. 마뜨로쉬까를 끝까지 열어 보아도 그 속은 텅 비어 있을 뿐. 타자도 없고 세계도 없으며 그저 거울에 비추어진 무수한 ‘나’의 반복만이 있을 뿐인 가짜 상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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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2019, p.194. 이하 인용은 괄호 안에 페이지 수만 표기.


2)주석을 읽다 보면 워드스미스 대학의 러시아 문학 교수 찰스 킨보트가 젬블라의 폐왕 카를 크사베리와 동일 인물인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킨보트의 진술을 전적으로 신뢰했을 때 가능한 일이며, 킨보트의 ‘믿을 수 없는 화자’ 성질을 강렬하게 의식하는 독자라면 킨보트가 카를 크사베리와 동일 인물이라는 것도, 나아가 젬블라라는 나라가 이 ‘픽션’ 속의 ‘현실’로 존재한다는 것까지도 의심하게 될 것이다.


3) 킨보트조차도 마지막엔 이렇게 여지를 남긴다.

‘오돈과 합작으로 <젬블라 탈출>이라는 신작 영화를 제작할지도 모른다. 연극 평론가들의 단순한 취향에 영합해 무언극을 지어낼지도 모르겠다. 세 명의 주역, 즉 상상 속의 왕을 죽이려는 미치광이와 자신이 왕이라고 상상하는 또 다른 미치광이 그리고 우연히 사선으로 굴러들어와 두 허상 간의 충돌로 죽는 저명한 노시인이 등장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신파극을’. (p. 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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