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장할 우리 가족 - 정상 가족 판타지를 벗어나 '나'와 '너'의 가족을 위하여
홍주현 지음 / 문예출판사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프롤로그에서부터 ‘나는 조금 까다롭다고 할 수 있는 나름의 기준을 정하고 이것저것 따졌다. 외모, 직업, 학벌, 집안, 성격. 이렇게 다섯 가지 항목이었다.’ 라는 문장으로 나를 당혹시켰다. ‘누가 보면 저런 속물이라고 거부감이 들 태도지만 솔직히 그 때 내 속마음에는 그런 기준이 중요했다’ 라며, 마치 내 생각을 읽은 듯 문장이 이어지는데 앞으로 이 책을 더 읽어야 하나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작가분은 결국 자기의 ‘조금 까다로운’ 정도가 아닌 기준을 만족시키는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그 남자는 결혼 2년도 지나지 않아 말기 암 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이어지는 나의 당혹은 ‘투병 생활도 힘들었고 죽음이 엄습하는 것도 무서웠으며 미래를 잃는다는 불안도 괴로웠지만 나 자신이 루저가 된 기분이 들었다’ 라는 문장 때문이었다. 첫째, 투병 생활은 환자 본인이 제일 힘들지 않은가? 하지만 뭐… 간병인도 환자 본인만큼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지. 넘어가자. 둘째, 죽음이 두려운 것 역시 환자 본인이 제일 크지 않은가? 음… 어떻게든 그럴 수 있겠다고 이해하고 넘어가자. 셋째, 미래를 잃는다는 불안? 음… 음… 아픈 사람은 남편이고 최악의 경우에도 아내인 작가는 나이도 젊고 건강하고 직업도 있는데 왜 불안할까…? 결정적으로 넷째, 왜? 왜? 왜? 나 자신이 루저가 된 기분이지? 작가는 말했다. 가족의 불행을 함께 겪어야 하는 상황이 나를 디그레이드 (가치 하락)시키는 것 같았다.’ 아, 더 읽기가 힘들었다. 책 속 인물에게 감정이입 안하려고 노력하지만, 육체적 고통과 죽음의 공포 앞에 떨고 있는 말기 암 환자 남편분이 ‘가족 가치 하락의 원흉’으로 꼽히는 거 같아 너무나 짠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나 아플 때 내 남편도 이렇게 생각할까? 나 때문에 자기가 루저가 된 것 같고, 나 때문에 우리 가족의 가치가 떨어지는 거 같다고? 그럼 정말 슬플 거 같다.


읽기 힘든 프롤로그를 지나면, 이어지는 글에서 작가분은 ‘한국인의 의식 속 기본 단위는 가족이며, 그래서 나는 속물적 기준으로 배우자를 골라 그와 나를 동급으로 취급받고 싶었다. 개인을 가족 집단과 동일시하는 한국의 현실 때문이었다.’ 라고 한다. 이 일로 인해 작가 홍주현은 삶의 태도가 크게 변했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의 ‘덩어리적’ 집단주의 문화에 대한 비판이 이어진다.



미국의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집단의 존엄과 존재 이유를 집단적 동일성에 둘 때 그 집단 구성원은 갈등을 견디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공동체 질서를 이루는 토대가 공동체의 동일성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집단 구성원 주류 혹은 다수와 ‘다름’은 그것을 배제하거나 억압하는 방법으로 그 다름이 유발한 갈등을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불편한 상황에 처할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다름이나 갈등을 아예 금기시 한다. (p.63~64)


한국인의 ‘우리’는 연대의 공동체가 아니다. 연대하려면 ‘너’와 ‘나’가 있어야 하는데, 구성원이 ‘우리’ 안에서 분리되지 않은 채 서로 동일시하다 보니 그저 한 덩어리 상태에 가깝다. 존중은커녕 다르다는 건 있을수 없는 일이다. ‘너’와 ‘나’ 사이 경계가 없는 ‘우리’ 속에서 다름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개념일 뿐만 아니라, ‘비정상’이 되기 쉽다. (p.78)


진짜 내 욕구는 남편의 투병 생활을 책임지지 않으려는 회피였다. 혹여 투병이 부정적 결과로 이어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무척 두려웠다. 위기 상황에 처하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마련이고, 부정적인 생각이 들면 두려운 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남편의 불행을 염려하거나. 혼자될지 모르는 내 처지를 걱정한 데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 그때 벌어질 일, 즉 온갖 원망과 비난의 화살 등 결과에 대한 책임을 내가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에 벌벌 떨었다. (중략)

이 고난은 ‘나’에게 생긴 일이란 느낌이 들었다. 이 가족은 내 뜻에 따라, 내 의지로 꾸리지 않았는가. 주인임을 증명하는 최고의 방법은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나는 남편의 투병을 (시댁 식구에 포함된 나로서의) ‘우리’ 일이 아니라 내가 해결해야 할 ‘개인’의 일로 인식했다. (p.107~108)


배려하고 양보해야 할 첫번째 대상은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먼저 배려하고, 자기 에고는 자기 내면의 진짜 욕구에게 양보하는 일이야말로 강요하듯 강조해야 할 일이 아닐까? 타인에 대한 무심함은 대개 자신을 소외하는 데서 비롯하지, 자신을 잘 챙기고 사랑하는 사람은 타인에게 좀처럼 무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p.210)



김희경의 ‘이상한 정상가족’은 아동학대에서 시작하여 한국 사회의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으로 논의가 전개되는데, 홍주현의 ‘환장할 우리가족’은 가족의 간병 문제에서 시작하여 한국 사회의 집단주의를 비판하고 자기 중심성에 기반한 철저한 개인주의를 내세운다.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김희경은 국가의 복지와 적극적 개입, 공동체의 적극적 간섭을 한국식의 폐쇄적 가족주의를 분쇄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한 반면, 홍주현은 위에 말했듯 대화와 토론에 기반한 철저한 개인성의 함양, 공동체를 위한 배려와 양보 보다 자기 자신의 이익와 편안함을 추구하는 적극적 자기중심성을 핵심으로 제시한다. 즉 한국식 가족주의와 집단주의에 대해 두 사람이 제시하는 대안은 완전히, 거의 정반대로 다르다. 개인이 아닌 가족 단위로 바라보고 평가하는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인의 삶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두 작가의 공통점이지만, 국가의 적극적 개입과 사회 시스템적 접근 및 해결을 요구하는 김희경과 달리 홍주현은 공동체의 역할보다 개인의 인식 전환에 방점을 찍는다. 국가의 개입보다 개인의 발전 및 이익 추구를 옹호한다는 점에서 홍주현이 아담 스미스를 인용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워 보인다. 홍주현은 인용 마무리에서 ‘모두가 자기실현을 할 의지와 책임이 있는 평등한 상태에서 각자 자기 능력과 의지에 따라 역할을 맡고 그에 따라 책임을 다하는 개인이 되고, 그 개인의 협력이 연대고 연대로 형성된 것이 공동체다’라고 주장한다. 즉 공동체는 개인의 합으로 존재하며 모든 개인은 평등하기 때문에 배려보다는 각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다 보면 저절로 뛰어난 개인들이 저마다 이기적인 동기에서 출발해 이룩한 행복을 얻게 된다는 논리인데… 음, 난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홍주현의 논리에서 최대의 약점은 ‘모두가 평등하다’는 전제를 현실 세계에 적용시킨다는 점인데 일단 ‘모두가 평등해야 하는 것’ 과 ‘모두가 평등한 것’ 은 같지 않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실은 모두 ‘동등’ 하지 않고, 나는 홍주현의 주장과 달리 더 많은 돌봄이 필요한 (예컨대 그녀의 남편 같은 중증 환자)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상당히 많이 존재하며 어떤 사회의 수준과 행복도는 그런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을 얼마나 케어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평등하지만 운동장은 기울어져 있고 그런 땅 위에서는 모두가 동등한 높이로 서 있지 못한 것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낮은 자리에 서 있는 자들에게 발받침을 제공해주지 않고,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는 전제 하에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도록 짓눌려져 있는 자에게 기득권자와 똑같은 양의 빵과 마이크만 제공하는 것이 올바른 일인가?



홍주현의 이 책은 가족, 집단, 민족 등등의 이름 하에 개인의 개별적 차이를 무화시키고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문화를 비판하는 취지는 좋았으나 그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고작 ‘개인성의 강화’ 라는 인식의 전환 요구 수준에 그치는 것은, 현실의 문제점을 해결하기에는 그 힘이 너무 약하다. ‘생각을 바꾸자’, ‘독서 토론을 하자’ 하는 얘기로는 개호가 필요한 약자들을 사회 안으로 끌어 들어오기도 어렵고, 일단 이런 얘기만으로 사람 생각이 쉽게 바뀌지도 않는다. 나는 언제나 ‘제도가 인식을 만든다’ 고 생각하지 개인들이 생각을 고쳐 먹으면 우리 사회가 저절로 좋아진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리고 약자에 대해 배려하는 것은, 나도 배려라는 말을 굉장히 싫어하는데 그것은 배려가 아니고 성숙한 시민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이기 때문에 배려라는 시혜적 단어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는 거지, 필요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가 나에게 이익이 되는 행동을 하면 우리 사회가 저절로 좋아질 것이라는 아담 스미스 식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고, 개인이든 가족이든 특정인의 불행과 고통을 ‘개인’의 수준에서 해결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개인주의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는다. 삶의 주체는 개인이지만 그 주체적 개인의 삶이 불행에 빠졌다고 할 때 그 해결은 그 사람 개인의 몫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집단의 몫이어야 한다. 우리는 누구나 한번 이상 불행에 빠진다. 그리고 그 때 누군가는 부와 건강과 정신적 여유를 바탕으로 개인의 삶을 자력 구제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더 자주 더 깊이 불행에 빠지는 이들에게는 부도 건강도 정신적 여유도 없고 심지어는 가족도 없는 경우도 많다. 이런 사람들은 외부의, 집단의 힘이 아니고는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어렵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