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불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체사레 파베세 지음, 김운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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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탈리아 마을을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그러나 처절하게 비극적인 귀향기. 고향이 그리워 돌아왔지만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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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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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탠드업 코미디언을 다룬 책이라면 프랑스 작가 미셸 우엘벡의 '어느 섬의 가능성'과 한국 작가 김중혁의 '나는 농담이다' 가 떠오른다. 이스라엘 작가 다비드 그로스만의 2017년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 수상작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는 위의 리스트에 새로이 추가된 한 권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우엘벡의 것처럼 인간의 유한성에 절망하며 신인류의 등장을 예언하지 않고, 김중혁의 것처럼 지상과 우주 공간을 오가는 사랑과 우애의 이야기도 아니다. 세 소설의 공통점이라면, 코미디언의 이야기지만, 전혀 웃기지 않다는 것 하나다.

 오히려 그로스만의 이 소설과 가장 유사하게 떠오르는 책은 사무엘 베케트의 '이름 붙일 수 없는 자(The unnamable)'이다. 이름도 없고, 팔다리도 없고, 머리와 몸통만 남은 채로 항아리 안에 들어가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항아리-인간의 독백으로만 이루어진 베케트의 이 소설은, 사실 소설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전위적 언어 실험이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는 글-언어로 쓰여졌음에도 말-언어에 가깝고, 활자화된 기호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명확한 의미도 담고 있지 않은, 폭발된-파편으로서의-산산조각난 언어들의 난장이며, 어떠한 장르적 구분도 거부하고 글자 그대로 '이름 붙일 수 없는' 상태로 머물러 있다. 바로 이 점에서 그로스만의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이하 '말 한 마리')'와 베케트의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는 유사하다.1) 이 두 소설은 끊임없이 독자-관객에게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독자-관객에게 '도착'하기를 끊임없이 늦추고 회피하며 쉴새없이 기표만을 쏟아낼 뿐 기의를 완성하지 못한다. 스탠딩 코미디언 도발레 G는 관객에게 개그를 주겠다고 하지만 주지 않고, 그의 발화는 결코 수행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의 '발화'는 '소통'이 아니고 심지어 '언술'조차 아니며 그저 '투척'되는 언어의 실험물일 뿐이다. 결코 완성되지 않을 뿐 아니라 완성됨을 끊임없이 지연시킴으로써 완성됨을 스스로 거부하는 듯한, 언어의 파괴적 실험이자 인간성의 파괴된 형상이다.

  데리다는 언어는 언제나 지연, 의미의 연기, 애매성, 발화자와의 거리, 혼동 가능성, 기만과 믿을 수 없음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언어의 필수 요소라고 간주하였다. 언어는 언제나 '제자리'에서 벗어나 있다. 도발레 G의 '말'은 결핍되고, 지연되며, 혼란에 빠지고, 방해받으며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고 끊임없이 안과 밖을 떠돈다. 그의 말은 힘없는 종이비행기처럼 관객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진다. 이 소설은 코미디-개그라는 완결된 이야기, 화자가 말하고 청자가 수용하며 작가가 쓰고 독자가 수용하는 소통의 완결성에 대한 회의로 점철되어 있다. 의미는 끊임없이 '달라지고' 의미의 도래는 '지연된다'. 이 직접적이고 작은 바(bar)의 공동체 안에서 관객들은 이해와 통합과 함께하는 웃음의 시간을 열망하지만 그 바람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도발레 G의 실패한 코미디를 읽으며, 독자는 의사소통이란 언제나 오해와 실패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음을 상기해야 하고, 나아가 이 오해와 실패야말로 의사 소통의 핵심일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내가 말하고 너는 알아 듣는다는 것. 우리가 함께 이해하고 함께 웃고 운다는 것. 이런 '상호 이해'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환상이다. 완전한 소통, 완전한 관계, 완전한 합일이라는 환상은 이 소설 안에서 부서진다. 

  공동의 경험과 이해를 공유하고 있다면 (요컨대 홀로코스트 체험을 공유하고 있는 유대인들처럼), 그들 안에서는 이상적 관계와 이상적 의사 소통에 기반한 이상적 공동체가 자동적으로 성립될까? 순수하고 완전한 이야기에 대한 회의는 유대 민족의 선택받음에 대한, 우월성과 위대함에 대한, 신에게서 받은 약속에 대한 회의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무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도발레 G의 말은 분명히 '말'이지만 그로스만은 그 말을 잡아채 '글' 로 만들어놓는다. 그리하여 독자는 관객에게서 분리되어, 무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도발레 G의 증언, 그의 '말', 유대인의 약속에 대한 '말'에 대해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작가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의 (일부러, 의도적으로) 실패된 말-코미디를 '글'로 적어 내놓음으로써, 눈앞에 현존하는 것 같았던 소통이 결국은 어긋나고 있을 뿐임을 입증하고, 유대인 공동체와 그들의 선택받음에 대한 부정(不定)성을 에둘러 전달한다. '파이드로스'에서 '말'이 더 생생하고 육체적인 현존이라고 했던 플라톤의 제언은 깨어진다. 끝없이 흔들리는 말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말들의 나열 속에, 개인의 기억이 갖는 정확성과 그 진술의 확고부동성은 의심되며, 디아스포라와 홀로코스트의 역사로 절대화되었던 유대인들의 순수성과 오리지널리티도 도미노처럼 무너진다. 

  종이비행기와 같은 말들-수신되지 못하는 메시지. 수신되기를 처음부터 거부하고 마구 접어 날리는 듯한 메시지들. 디아스포라가 환대로 완결되지 못하고, 홀로코스트가 평화로 완결되지 못하며, 죽음은 애도로써 완결되지 못하고 개그로 뒤덮이거나 토악질로 뱉어지거나 (장례식에서) 뛰쳐나가는 것으로 회피된다. 아퀴가 지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이 불완전함을 목도한 관객은 테이블을 떠난다. 남은 것은 오직  두 명의 불구들 뿐이다. 직장과 아내를 모두 잃은 관계불구자 '나'와 신체적 불구를 가진 '피츠'. 이들은  도발레 G의 잃어버린 아버지-어머니의 역할을 대리하고, 그들의 수직적 위계를 넘어서서 수평적 연대를 수행하기 위해 이 바에 남아 있다. 어머니의 돌연한 죽음으로 도발레의 부모는, 그의 내면에서 부서진 채 떠도는 망령들-'햄릿'의 선왕처럼 밤마다 찾아와 젊은 왕자를 괴롭혔던 망령들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고 따라서 평화를 얻지도 못했다. 그러나 도발레는 물구나무 서기로 어머니를 지켰고 슬픔에서 자기를 구원하려 했던 사내였다. 그는 광대짓으로 스스로를 구원했다. 이 날의 공연-중언부언하기, 어리석음을 연기하기, 앞뒤 맞지 않는 헛소리들을 늘어놓는 작업들로 그는 마침내 부모-망령을 대신할 자를 얻는다. 잃었던 친구를 찾고, 어린 시절의 소녀와 키스하며, 부서진 언어의 조각들로, 거대한 실패로 스스로를 구원한다.  

  이상적 공동체의 자동적 성립과 완전성에 대한 회의가 이 소설의 토대라면, 그에 대한 대안은 결국 전직 법관인 '나'와 난쟁이 소녀 '피츠'의 불구성일 것이다. 회복 불가능의 불구성을 안고 있는 이 두 인물이 생물학적 부모를 뛰어넘어 도발레 G의 새로운 연대자가 된다면, 이들이 서로의 불구됨을 인정하며 오해로서의 소통으로 불완전성의 공동체를 이룬다면, 이상적 공동체의 완전무결함에 대한 환상을 걷고 이스라엘와 팔레스타인이 '불가능한 연대'를 이루는 일도 가능할지 모른다. 명백하게 개별적인 민족, 따로이 존재하며 저마다의 역사를 갖고 있는 확고부동한 공동체의 절대성을 지키려 할 때, 이 과업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서로가 서로를 타자화 하며 '나의 원수를 죽여달라'는 복수의 망령만이 이 땅 위를 떠돌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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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 한 마리'에서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를 연상하게 되는 것은, 소설 속의 코미디언 도발레 G가 공연을 펼치는 무대 위의 '뒤쪽 벽 앞에 놓인 크도 둥그스름한 구리 단지...전에 여기서 상연한 무슨 연극에 쓰던 소품일 것' 같은 단지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의 항아리-인간 독백은 연극으로도 상연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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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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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맨부커상 수상작은 꼼꼼히 챙겨본다. 요새 맨부커상은 세계사와 세계지리를 독자에게 일깨워 (가르쳐 아님) 주는 것을 주목적 중 하나로 두고 있는 것 같다. 1860년대 뉴질랜드를 배경으로 한, 2013년 수상작 '루미너리스'가 그랬고, 1970년대 자메이카를 배경으로 한, 2015년 수상작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 가 그러했다. 1940년대 오스트레일리아와 타이를 배경으로 하는, 2014년 수상작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또한 맨부커상의 요즘 의도에 충실한 선정작이다. 아주 많은 공부가 되었어요. 여러분, 오세아니아 대륙이 정확히 어딘지 알고 계셨나요? 오세아니아가 오스트랄라시아, 미크로네시아, 폴리네시아, 멜라네시아 를 통칭하는 이름인 거 아셨나요? 인도네시아는 지형학적으로 봤을 때 동남아시아가 아니라 오세아니아에 속한다는 거 알고 계셨나요? 제가 이래서 맨부커상 좋아합니다. 작품의 수준과 상관없이 일단 독자를 공부시키는 거, 더 지적으로 만들어주는 거, 독자에게 더 넓은 세계, 더 깊은 시간을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좋아합니다. 작품의 내적 수준과 관계없이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외과의사이자 전쟁영웅 도리고 에번스의 태평양전쟁 참전기(라기 보다는 포로수용기)를 중심으로 그 전후의 삶, 그의 주변인들의 삶을 밀도 높게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이 소설의 주제를 한줄 요약하면 '정신승리 따윈 개나 줘버려' 인데, 더 숭고한 것, 더 고귀한 것, 더 정신적인 것, 더 아름다운 것만을 생각하면서 현실을 시궁창, 아니 시궁창도 아니고 그냥 헬지옥으로 만들어버리는 인물 군상들을 다채롭게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병사들이 식량과 약품이 없어 죽어가고 있는데도 '영국인의 품격'을 지켜 콰이강이 보이는 아름다운 위치에 묘지를 팔 것을 지시하는 렉스로스 대령 (그는 이질에 걸려 죽은 후 정글에 파묻혔다), 사람을 구타해 죽이면서 바쇼의 하이쿠- 고통 속에 벚꽃이 핀다는 고결한 하이쿠를 읊는 나카무라 소령 (그는 전범 재판을 피해 잘 살아남았다), 포로들의 목을 베면서 일본의 무사도 정신을 생각하는 고타 대령 (그 역시 전범 재판을 피해 오래 오래 살았다), 그리고 테니슨의 시를 외우며 인간 실존의 바닥을 어떻게든 지나가보려고 악쓰는 도리고 에번스 또한 그런 인물이다. 소설을 읽고 나면 이 책의 제언인 파울 첼란의 '어머니, 그들은 시를 써요' 가 결코 아름다운 시적 세계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는 것, 매우 역설적인 제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들과 가장 반대편에 서 있는 빛나는 인물은, 역시 다키 가디너-조직꾼, 도둑놈, 진정한 전우, 하나뿐인 오리알을 짝패와 나눠먹을 수 있는 검은 왕자인데, 다키 역시 '그냥 누워서 똥 지릴 줄 모르는 놈', '고귀한 품격'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는 놈이었기 때문에 죽었다. 품위 같은 건 개나 줘버려야 된다니까. 다키 가디너는 누워서 똥을 지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변소로 기어가 똥을 누려 하다가 똥구덩이에 빠져 죽었다. 

  다키 가디너는 소설의 말미에 도리고 에번스의 숨은 조카인 것으로 밝혀진다. 도리고의 형인 톰과 맥과이어 부인의 불륜은, 도리고와 그의 고모부의 후처 에이미와의 불륜으로 겹쳐지고, 톰-맥과이어 부인 사이의 자식인 다키는 도리고-에이미 커플의 자식으로 상이 겹쳐진다. 즉 다키는 이 소설에서 도리고의 아들 역할이다. 잭 레인보우를 수술로 살리기 위해 다키의 구타 현장에 너무 늦게 달려갔던 도리고는 결국 다키의 죽음을 무력하게 지켜보며 '세상이 진동'- 즉 인간성이 붕괴하는 것을 느껴야 했다. 이로 인해 도리고는 소설 내내 괴로워하지만, 소설의 마지막에 거대한 산불 속에서 사랑하지 않았던 아내와 아이들을 구해내며 자신의 '외과의사 손'을 희생하는 것으로 다키의 죽음에 값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죽음을 몇 사람의 목숨 구하기로 갚으면, 그게 수학 공식처럼 그렇게 인생의 값을 딱딱 올려주는가? 빼기 1에 더하기 4면 인생은 더하기 3의 것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 도리고 에번스가 77세까지 살면서 느꼈던 허무는 더하기 300으로도 채워질 수 없었다.

  역시 재미있는 인물은 포로수용소의 부사관 고아나-조선인 최상민이다. 그는 고타와 나카무라 같은 행운을 얻지 못하고, B급 전범으로 체포되어 싱가포르의 창이감옥에서 처형되었다. 그는 50엔을 벌기 위해 포로수용소 감시원을 자원한 인물이었다. 포로수용소 조선인 감시원들의 이야기는 우리도 인터넷에서 어렵지 않게 검색할 수 있으며, 작가는 아마도 '전범이 된 조선청년' 이라는 책까지 낸 이학래의 증언을 많이 참조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학래의 책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이 소설을 두고 이야기하자면, 최상민은 친일파이며, 범죄자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죽이도록 도왔고, 죽이게끔 방관했으며 이 모두를 끝까지 반성하지 않고 '그땐 어쩔 수 없었다'는 논리로 스스로를 변호하며 '다른 사람들은 잘만 빠져갔는데' 억울해 하다 뉘우침 없이 죽었다. '몰랐다'는 것은 변명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 타이의 아이히만이여. 육신이 행한 일을 부정하는 자기합리화, 진정한 정신승리, 비열한 자기변호의 인물. 이는 우리 주변에 가장 흔하게 존재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 소설을 읽고 최상민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그를 감싸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윤리 의식을 다시 점검해보기 바란다. 제네바 규약을 몰랐다고 해도 남을 때려죽인 일이 합리화될 수는 없다. 일본인들이 시켜서 그랬다는 말이 친일 행위의 면죄부가 될 수도 없다. 최상민이 설령 살아서 만 명의 사람을 살리는 의사 선생이 되었다고 해도, 그가 타이의 밀림에서 포로들에게 가혹행위를 했다는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빼기 100에 더하기 10000을 한다고 총계 9900이 되는 게 아닌 것이다.

  시간의 순서를 뒤죽박죽 섞어놓고, 앞에서 무심한 듯 툭 던져놓았던 떡밥을 뒤에 가서 거대하게 회수하는 기술이, 세련되었고 읽는 재미를 주지만(왜 이 재미를 뒤로 갈수록 포기했을까), 이 계열에서 이 수법으로 거대한 산맥을 이룬 커트 보네거트의 '제5도살장'에 비하면 수준이 낮다. 인간의 끝없는 자기합리화와 자기변명, 어리석을 정도로 거짓된 논리를 만들어 그 안에 자신을 가두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기만성에 대한 고발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긴 하지만 이 주제로 거대한 산맥을 이룬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에 비하면 역시 수준이 낮다. 커트 보네거트와 가즈오 이시구로의 냄새를 맡을 수 있지만 그만은 못하다는 점, 500여 페이지 동안 이야기의 수준이 일관되었다기 보다 들쭉날쭉하다는 점, 그리고 결정적으로 작가 아버님의 전쟁 체험 때문인지 일본인을 너무 일방적으로 미워하며 오스트레일리아 만만세 외치는 국수주의의 냄새가 나서 점수 하락하였다. 어째 백인들은 이렇게 자기들 당한 거에는 부들부들하면서 자신들이 죽인 몇백만 명의 흑인&황인들의 이야기를 하는 데에는 무심할까. 홀로코스트에 분노하며 절규하지만 자신들이 죽인 제3세계(이 단어 설정부터 이미 자기들은 1,2세계)인들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않는 것이 서구의 백인들이다. (이에 대해서는 장정일의 칼럼을 참고하시라. 장정일 '서구 문학의 홀로코스트 집착', 한국일보  http://www.hankookilbo.com/v/6916e732338f401a98870aea6b8cdccc자신들을 세상의 중심으로 설정하는 것, 이것이 바로 어쩔 수 없는 백인 남성 작가들의 한계다. 하지만 이런 저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역으로 바로 그 점에서 '다른 책도 이럴까?' 싶고, 향후 발전의 가능성이 있다 싶고, 그래서 몇 작품 더 읽어보고 싶어지는 작가다. '굴드의 물고기 책'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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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과 광기의 일기
백민석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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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에 대해서는 세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어째서 쿠바인가?' '어째서 두 화자가 앞뒤로 나뉘어져 있는가?' 종합. '쿠바와 분리된 화자는 무슨 관계인가?'

  퀘스천 원. 어째서 쿠바인가? 앤써 원. 그냥 백민석 작가가 쿠바에 오래 체류해서. 쿠바에 대해 에세이집도 내셨던데 굳이 소설로 또 쓰실 건 뭔지... 앤써 투. 쿠바는 낯선 동네이므로, '여기가 아닌 어떤 곳'을 꿈꾸며 새로운 경험을 찾아 헤매는 독자에게 신선함을 줄 수 있다. 앤써 쓰리. 쿠바는 부유한 나라가 아니고 기간 시설이나 인터넷 환경이 열악하므로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나라에서는 불가능한 '인물을 방해하는 설정'이 가능함. 물도 없고, 구글맵도 안 되고, 경찰 치안도 약하고, 외세에 시달리고, 뭐 그래야 인물에게 적정한 한계가 생기고 이야기가 재밌어짐. 요새 작가들은 꼭 그렇게 자국보다 GDP 떨어지는 나라 가서 '자유'를 즐기며 '모험' 하더라? 앤써 포. 이게 결정적인 것 같은데, 쿠바는 혁명의 나라니까. 자본주의자들을 몰아내고 혁명을 이뤄낸 나라니까, 자본주의의 적극적 안티로서 이만한 배경이 없다.

  퀘스천 투. 어째서 두 화자가 앞뒤로 나뉘어져 있는가? 앤써 원. 제목이 교양과 광기의 일기니까. 이 제목이 이렇게 분리된 두 명이 화자를 지칭한다는 거 책을 절반은 읽고야 깨달았다. 앞면은 교양있는 사회인. 뒷면은 숨어 있는 내면의 광기.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같다. 앞면의 지킬은 쿠바 사회를 사진으로 찍고 저장하고 보여주고 진술하며 기록한다. 뒷면의 하이드는 단 한 명, 다나이스에게 집중한다. 내밀한 개인, 사생활, 숨어 있는 욕망, 저지르고 싶었지만 저지르지 못한 모든 무의식의 언행들. 인간의 모순됨과 표리부동함을 보여주기 위해, 신선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재미있고 괜찮은 설정이었다. 

  퀘스천 쓰리. 쿠바와 분리된 화자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겉과 속, 밖과 안, 외면과 내면은 대한민국이든 아이슬란드든 뉴욕, 베를린, 도쿄, 아디스아바바, 두바이 어디서든 나뉘어질 수 있다. 그런데 왜? 쿠바여야 했나? 앤써 원. 그렇게 극단적으로 자본주의와 결별한 곳을 배경으로 삼아야 결국에 자본주의로 회귀하는 주인공의 나약함과 치졸함이 더 극대화되어 드러나기 때문에.
  이 소설은 재미가 괜찮다. '여기가 아닌 어떤 곳'에 대한 동경과 '자본주의가 침략하지 않는 땅' 에 대한  예찬과 '니들은 이거 모르지?' 하는 거들먹거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자를 분리해서 따로 서술한 점도 재밌었고, 작가가 전혀 감추려 하지 않고 드러내는 남근주의-백민석 씨와 따로 만나 이야기한 것이 아니므로 화자의 남근주의라고 하자-가 매력으로 다가오기까지 한다. 남근주의자면서 아닌 척 하려는 게 우스운 거지. 대놓고 남근주의, 남근주의자, '아, 남근! 남근!'하며 계속 의식하고 내보이는 모습을 보면 그 솔직함에 도리어 비평적 시선이 머물지 않나. 대물 카메라로 쿠바 곳곳을 미친 듯이 찍어대고 혁명 영웅 체 게바라에 경도된 것 같지만, 실상은 여자 앞에 한번도 제대로 서지 못하고, 선 다음에는 또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는 못난 물건의 소유자인, 지킬 앤 하이드 씨에게 말이다. 소설을 한 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혁명의 나라 쿠바를 '방법'하러 간 '자본주의 남근주의자' 의 '발기부전' - 그리고 자본주의의 성지 라스베가스로의 패퇴. 흐물흐물한 물고기에서 단단한 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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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5
에밀 졸라 지음, 유기환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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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기, 오직 투기만이 하룻밤사이 단숨에 행복, 사치, 여유로운 삶, 완전한 삶을 허락하는 거야. 만약 이 낡은 세계가 언젠가 붕괴되어야 한다면, 나 같은 사람이 붕괴 이전에 욕망을 채울 시간과 장소를 찾아내야 할 것 아닌가? (p.61) 자선의 왕, 수많은 빈자들로부터 추앙받는 신이 되는 것, 유일하고 인기있는 존재가 되는 것, 세상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 이는 그의 야망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자부심과 기쁨을 만끽하는 날, 나는 전투를 이기는 불굴의 힘, 즉 돈, 금고 가득 든 돈, 흔히 많은 악을 만들지만 언젠가 많은 선도 만들 돈을 버는 불굴의 힘을 갖게 되리라! (p.72)

알아둬요, 투기와 작전은 우리 사업과 같은 거대 사업에서는 핵심 톱니바퀴요 심장 그 자체입니다. 그래요! 그것은 작은 도랑들을 통해 도처에서 피를 불러오고, 피를 축적하고, 강물로 불어난 피를 사방으로 보내고, 대사업의 생명 그 자체인 돈의 거대한 순환을 실현하죠. 그것 없이는 자본의 흐름도, 거기서 비롯되는 문명 전파 역사도 근본적으로 불가능해요...... 주식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식회사가 도박장이라고, 강도들이 출몰하는 위험한 장소라고 늘 사람들이 외치지요! 그렇지만 주식회사 없이는 우리가 철도도, 세계를 쇄신한 현대적 거대 기업도 가지지 못했으리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p.157)

만국 은행은 모든 것이 최후의 일격으로 산산이 파괴될 때까지 석탄을 가득 채운 채 악마의 철로 위를 전속력으로 달리는 열차를 연상시켰다. 그녀는 은행이 왜 군중을 전염적 광기의 무도 속으로 몰아넣는 이 열광적 오버페이스에 집착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매일 아침 주가가 상승해야 했고, 더 큰 성공, 이를테면 황금의 대하, 황금의 바다를 만들기 위해 강물을 빨아들이는 마법의 회계 창구, 기적의 회계 창구를 믿게 해야 했다. (p.302)



  루공 마카르 총서 중 국내에 너무나 늦게 초역된 '돈'을 읽었다. 무시무시하게 독자를 빨아들이는 흡입력이 있는 소설이었다. 서사는 선이 굵고 단순하며 지치지 않는 속도로 질주한다. 색깔이 분명한 인물들이 만나고 다투고 사랑하고 배신하는 과정에서 터지는 스파크들이 휘황하다. 1870년대 나폴레옹 3세의 제정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파리의 증권거래소와 주식회사들, 은행들, 동방을 향한 욕망으로 가슴이 부풀어오른 사업가들과 그들을 따라 전재산을 투자하며 일확천금의 꿈을 꾸는 개미 투자자들을 그린다. 그리고 화폐 상인이자 막후의 실력자인 유대인 금융가들도. 오직 자본이 자본을 낳고, 먹지 않으면 먹히는 것이 순리인 이 거대 자본주의의 파리를 이토록 세세하고 격렬하게 묘사해내는 것은 에밀 졸라의 집념의 힘이다. 읽는 내내 자본주의를 응시하는 그의 냉철한 눈빛과 거침없는 묘사력에 절로 탄복하게 된다. 첫 장의 시작부터 '증권거래소의 종이 열한 시를 울리고 (시간)' '사카르가(인물)' '레스토랑 샹포(장소)'로 들어가 증권가의 사람들을 만나는 묘사가 어찌나 시원시원한지, 특별히 잘 하려고, 예쁘고 화려하려고 애쓰지 않으면서도 슥슥 시간과 장소와 인물들을 화폭에 그려나가는 그 손놀림이 과연 대가의 그것다웠다.

  루공 가의 차남이자 '모험가 선장', '향락가', '광인' 사카르. 그는 돈으로 행복과 명성과 권력과 향락을 사고, 파리를 사고, 유럽을 사고, 유대인을 밀어낸 가톨릭의 승리와 자유주의자들을 몰아낸 보나파르트의 승리를, 그리고 마침내는 신의 지위까지 사려고 한다. 한 명의 아이를 낳기 위해 백 번의 천박한 관계가 있어야 하며 그것은 성공에도 적용되는 공식이라고 천명하는 그는, 진정 자본주의가 낳은 '앙팡 테리블' 이다.  미친놈이고 악당 사기꾼인데도 그의 굳건한 신념과 돈으로 이룩하고자 하는 자본가로서의 원대한 꿈이 너무나 눈부셔서 감히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에밀 졸라가 만들어낸 불굴의 캐릭터. 그는 파리의 초상이며, 욕망의 현신, 자본주의의 총아이다.

  불꽃 튀는 속도로 두 번 읽었고 두 번 다 정말 재미있었다. 강력하게 일독을 권한다. 정 시간이 없다면 소설의 절정인 10장 - 12월의 정기거래 결제일에서 군데르만의 유대인 자본가들과 혈투를 벌인 사카르가 다음해 1월 정기거래 결제일에 결정적인 한방으로 승리를 거머쥐려 하다가 결국 빠르게 몰락하는 그 현란한 10장만이라도 읽기를 권한다. 1870년대 파리 증권거래소의 모습을 이렇게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은 어느 영화나 다큐멘터리에서도 하지 못했던 일이니 말이다. 개인적으로 6장에서 사카르가 형 루공에게 몰래 빼내온 국가 기밀 정보를 이용해 장외 거래로 수백만 프랑을 투자하는 장면과, 10장에서 마조와 자코비 두 대리인을 통해 벌이는 주식 매수-매도의 적벽대전이 소설의 압권이라고 생각한다. 필리어스 포그 씨가 자기 배를 뜯어 불태우며 대서양을 건넜던 이래로 이렇게 손에 땀을 쥐며 책을 읽었던 적이 없는 것 같다. 사카르의 패배는 나폴레옹의 몰락과도 일치하고 (책 속에 그가 패배한 1월 정기거래 결제일의 전투를 '워털루 전투'라고 묘사한다) 결국 '찬란한 제정의 지배와 도처에 영광이 빛나는 파리의 이 시절' 이 종말을 고하고 말 것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항상 그렇듯, 위대한 작가는 미래를 예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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