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냥한 사람
윤성희 지음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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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성희의 소설 ‘상냥한 사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그 시절 그 사람들’ 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녹화장 이야기, 후반부는 녹화장에서 뛰쳐나온 형민의 회사 생활과 주변 사람들 이야기다. 


  형민은 인기 장수 드라마 ‘형구네 고물상’에 일찌감치 철든 아이, 동생을 잘 돌보는 아이 ‘진구’로 출연했다. 드라마가 끝난 후에도 그는 ‘진구’였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진구가 연기했던 다정하고 묵묵한 소년의 모습을 그에게 기대했다. 형민의 내면은 오랫동안 진구와 형민 사이를 떠돌았지만, 치매에 걸린 이모까지 그를 진구라고 부르자 형민은 마침내 진구와 형민 사이의 갈등을 정리한다. 무슨 상관인가,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하지만 내 눈에 그건 화해가 아니라 체념 내지는 타협으로 보인다. 


  이 소설은 진구와 형민 사이의 이야기, 즉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되고 싶은 나와 그렇게 될 수 없었던 나 사이’의 이야기다.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하고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하지, 나쁜 사람이 되기를 어려서부터 희망하는 사람은 없다. 대체로 미래를 낙관하고 인생의 큰 결정 앞에서는 다 잘 풀릴 것이라고 믿으며 그럭저럭 살아간다. 그저 소소하고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 남에게 상처주지 않는 무던한-굿맨이 되어 세상 살다 가고 싶은 것.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갖는 자그마한 소망이자 너무나 거대한 희망인 이것을 ‘상냥한 사람’ 속의 인물들도 품고 살아간다. ‘진구’를 연기하며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거기까지였던 남자 형민은 더 이상 배우로서의 미래를 갖지 못하고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 평범한 결혼을 한다. 딸을 낳고 키우며 그럭저럭 살다 어느 날 아내와 이혼한다. 이혼 후에도 삶은 그런대로 또 이어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딸 하영의 비행은 형민을 무던한-굿맨으로 살아갈 수 없게 한다. 


  이 소설 속의 인간들은 상황을 선택하는 개인이 아니라 상황 속에 그냥 내던져진 존재들이다. 형민이 ‘진구’가 된 것도 그의 선택은 아니었고 어느 날 ‘진구’ 역할에서 떨어져 나간 것도 형민의 선택은 아니었다. 귀엽고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소설 곳곳에 포진해 있지만 우리 삶은 그렇게 사랑스럽기만 하지는 않다. 불행은 예고 없이 들이닥치고 죽음도, 배신도, 뼈아픈 이별과 오랜 회오도 우리가 선택해서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름을 짓는데 한달 넘게 걸렸던 외동딸 하영이 ‘별 생각 없이’ 친구를 사지로 밀어넣은 것는 아이가 된 것도 형민의 의도나 예상 밖의 일이었다.  아파트의 담배 친구인 할머니들이 새벽에 밖에서 담배를 피우게 된 것도 그녀들이 원해서 그렇게 풀린 것은 아니었다. 소설 속의 세상은 정체를 명확히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그 속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의도나 의지를 용인하지 않는 무정한 곳으로 보인다. 언제나 인간의 삶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고, 최선을 다해 뭔가를 선택하고 매 순간 성실했다고 생각하지만 지나고 보면 모두 부질없었을 뿐이다. 그걸 깨달은 후 소설 속의 인간들은 ‘나와 버리는 것’을 택한다. 집을 나오고,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와 헤어지고, 상황을 회피하고 그저 불확실한 미래에 ‘어쩌면’ 을 걸면서 고개를 숙이고 걸어간다. 그래서 이 소설엔 결국 옳은 자리, 적당한 자리에 도달하는 이들이 없다. 누구나 적당히 좋은 사람이지만 그 뒷면에는 저마다의 부끄러운 잘못들이 있으며 다들 그걸 모른 척, 짐짓 태연한 척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이들은 모두 우연에 ‘떠밀리듯’ 살아간다. 요컨대 ‘상냥한 사람’ 속의 인물들은 의지적 인물이라기 보다는 상황에 의해 만들어진 인물들이고 그래서 이들은 대개 무력해 보인다. 그들은 끝까지 부딪히기 보다는 체념하거나 우회하는 길을 책한다. 잘못이 있다는 느낌이 들어도 ‘미안하다’는 말은 어깨를 부딪힌 낯선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며, 형민은 심지어 ‘지나치게 드러내고 사과하는 다른 부모’에게 역겨움을 느끼기까지 한다. 인물들은 스트레이트 하게 달려들기를 피하고, 회피 이외의 어느 것도 이들의 선택지가 아니다. 그래서 이 소설의 이야기는 언제나 곁가지로 빠진다. 쉴새없이 다른 인물, 다른 시간, 다른 공간대의 이야기로 미끄러지는 이야기는 ‘회피’ 방어 기제의 표현물로 보인다. 결국 여기엔 수없는 우연과 부딪힘만 있을 뿐, 어느 것도 다물어지지 않은 채 인생은 그렇게 흘러간다. 이 얼마나 참혹한 무력함의 현장인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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