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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 재습격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창해 / 200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을 무척 좋아한다. 소설도 썩 나쁘지 않지만, 그의 수필을 읽고 있노라면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어찌 이리도 독특하고 재미있게 다가오는지 푹 빠져들고 만다. 연필을 보다가 세일러복을 입은 소녀를 연상하기도 하고, 브래지어에서 느닷없이 여성해방운동을 연상하기도 한다. 그런 하루키의 독특한 정신세계는, 사실 나의 망상과 유사한 면이 많다. 단, 내가 나의 망상을 글로 쓴다면 이렇게 재밌지 않을 것이란 점이 다르지만. 그러나, 예외적으로 수필보다 더 좋아하는 소설이 하나 있다. 바로 빵가게 습격과 재습격이라는 두 단편 소설이다.
빵가게 재습격은 빵가게 습격의 뒷얘기다. 빵가게 습격에서 주인공 청년은 대학교를 휴학하고 친구와 함께 한없이 빈둥거린다. 아르바이트조차 안 하기에 결국은 극심한 빈곤지경에 처한 그들은 빵가게를 털러 간다. 그러나 빵가게 주인은 아무 저항 없이 빵을 내주고, 그에 그들은 꺼림직함을 느낀다. '털어서 먹어야(부당한 방법으로)'한다는 어떤 강박관념 같은 것이 그들을 지배하는 것이다. 주인은 결국 그럼 브람스를 같이 들어주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고 그들은 브람스를 듣는 대가로 빵을 얻는다. 그러나 그 후 왠지 더는 빈둥거릴 수 없게 되고, 주인공은 다시 복학해서 건실하게 살게 된다. 그리고 후회하는 것이다. 역시 털었어야 했다고 말이다.
빵가게 주인의 후덕함으로 바른 생활로 돌아온 불량청년들의 이야기? 아니면 빵가게 주인장 때문에 아둥바둥대는 현실로 다시 복귀해야만 했던 순수한 청년들의 타락이야기? ^^;a 둘 다일수도 둘 다 아닐수도 있는 이야기. 그러나 무엇보다 주인공 청년의 몽상적 사고와 말투가 마력적이었던 소설이다. 특히 초반에 배고픔에 대한 고찰말이다.
빵가게 재습격에서도 배고픔에 대한 고찰이 재등장하는데, 특이하게도 배를 타고 강물 속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배고픔의 정도를 비유한다. 빵가게를 습격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 배고픔이니만큼 비중이 꽤나 높게 묘사된다. 빵가게 재습격에서는 결혼한 청년이 또다시 배고픔에 시달리는데 아내도 같이다. 아내에게 예전의 경험을 들려주자, 그녀는 빵가게를 습격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며 결국 두 사람은 새벽에 거리로 나간다.
불행히 문을 연 빵가게가 없어 결국 맥도날드의 햄버거를 터는데, 이해할 수 없게도 아내에겐 총이 있는데다 그녀가 이런 일에 썩 능숙해보였다는 점이다. 이 아내의 존재야말로 가장 하루키소설적인 인물 아닐까. 이해할 수 없고 뭔가 있어보이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그런 존재 말이다. 맥도날드 가게의 별로 무서워하지도 않고 단지 귀찮아할 뿐인 점원들도 재미있고, 아무튼 빵가게 재습격에서는 다양한 인물들의 성격적 면이 돋보인다.
빵가게 습격과 재습격은 무척이나 재밌고 흥미로운 소설이다. 하루키의 장편을 싫어하는 분들도 이것만은 좋아하리라 확신한다. 왠지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과도 같은 분위기를 풍기니만치, 하루키 수필의 팬이신 분들은 필히 읽어보시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