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시간 6
장진우 지음 / 시공사 / 2003년 9월
평점 :
절판


현재는 출간본이지만 이 글의 첫 시작은 통신연재였다. 판타지 소설사이트에서 <소녀의 시간>이라는 클래식음악을 떠올리게끔 하는 제목을 발견했고, 그 음악적인 울림이 어쩐지 마음에 들어 읽기 시작했다. 비참한 처지의 소녀가 죽고 그 영혼이 나라 안 최고의 전쟁영웅인 또 한명의 소녀에게로 들어갔을 때, 흔한 '영혼이동물'이려니 생각했다. 신분이 극적으로 반전되어 화려한 삶 속에 뛰어들고 그런 와중 이전의 자기 생활과 비교해 약간의 고뇌를 하겠거니 추측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섣부른 단정이었다.

<소녀의 시간>은 단순한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영웅물이 아니다.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처음 구조는 대중적인 영웅물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놀랄만큼 기발하고 복잡한 관계의 그물망이 형성되며 정치나 사회 및 인간감정 전반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뻗어나간다. 처음에 부각되었던 창녀 세레나의 영혼은 소설 속으로 독자를 흡입하기 위한 안내역이랄까, 진짜 아르베라제를 비롯하여 황금룡기사단의 인물들과 비에리 국왕, 카스타 하지 후작을 필두로 하는 국내정적들 이윽고는 룬반도 전체의 주요 인물들과 종래에는 멀리의 강국 메디나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는 인물들이 세레나 이상의 생생함과 개성을 가지고 움직인다.

놀라운 것은, 무수한 인물들의 살아숨쉬는 듯한 뚜렷하고 다양한 개성 뿐만이 아니다. 이제껏 전쟁이며 외교며 정치며 혁명을 다룬 판타지 소설은 많고도 많았다. 그러나 과연 이렇게나 '현실적'이면서도 독자의 사고수준을 훨씬 상회하는 '의외로운'전개를 펼쳐보이는 글이 또 있을까! 꽤나 많은 책을 읽었다고 자부하지만 소녀의 시간처럼 뒷내용을 짐작못하고 그 전개양상에 경악한 경우란 거의 없었다. 전투는 박진감 넘치면서도 기가막힌 승패를 내보인다. 외교는 각국 외교관의 머리굴리는 소리가 실제로 들리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다. 정치판은 어찌나 복잡다단하고 예측불허인지 이렇게 변수많은 것이 정치로구나 헛바람을 삼킬 지경. 게다가 왕정에 대한 혁명움직임은 또 어떠한지, 대학의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관련된 상공계층 등 여러 이익집단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손을 잡고 행동하는 과정을 보다보면 그리고 왕당파쪽에서의 첩보와 저지 움직임을 볼작시면 이건 숫제 하나의 대하 혁명물이다.

'역사'라는 것에 포함되는 온갖 것들-정치, 군사, 외교, 사회문화, 법률 등-이 적나라하게 망라되며, 정교한 거미줄처럼 연결된다. 정말 입이 딱 벌어질 정도의 스케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진짜 놀랄 것은, 이 정도로 거시적인 측면을 높게 완성시키면서도 작가는 미시적이면서도 핵심인 주체, '개개의 인간'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창녀 세레나의 자기비하와 아르베라제에게 언젠가 육체를 되돌려줘야한다는 데서 오는 끊임없는 고뇌, 수치/욕망/자존심/허영/슬픔/사랑 등 온갖 감정이 너무나 자세하고 무리없이 묘사된다. 비단 세레나 뿐 아니라 이 글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 입장에서 그럴만한 감정적 흐름과 사고의 고뇌를 작가는 표현해낸다. 남자인물이야 그렇다치고 여자들의 감성과 상황적 대응을 어찌나 잘 아는지, 이 작가 진짜 남자 맞냐고 의심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가히 인간심리의 박사급이랄까! 심리소설의 걸작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심리묘사들이 물처럼 흘러다닌다. 이 때문에 어떤 어렵고 복잡한 상황과 이론이 전개되어도 <소녀의 시간>은 시종 흥미진진함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의 사고를 뛰어넘는 작가의 정신세계는 하나의 경이이자 최고의 즐거움이다. 작가 장진우님은 음악에 종사하는 분이라고 알고 있는데, 본업이 아니면서도 이 정도 질의 소설을 써내실 수 있다니 정말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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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youngch 2008-03-03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멋진 감상 잘 읽었습니다. 퍼갈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