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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 - 컬러판
생떽쥐베리 / 문예출판사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린 왕자는 굉장히 유명한 소설이고, 또 어릴 때부터 어른이 되어서까지 십 수번은 읽어본 책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소설이나 만화 등에서 어린 왕자를 인용하거나 패러디한 것을 본 것까지 친다면, 나는 모든 책 중에서 어린 왕자를 가장 많이 봤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이 이 책은 볼 때마다 어떤 각도로 보느냐에 따라 너무도 다르게 다가온다. 꼭 햇빛에 비춘 프리즘이 여러 색깔로 빛나는 것처럼 말이다.
어릴 적에는 그저 어린 왕자가 자기 행성을 떠나 여러 행성을 거치며 결국 지구까지 오는 여행기나 모험기쯤으로 읽었었다. 그 때는 어린 왕자가 살고 있던 장미와 화산이 있는 조그만 행성이라든가, 가로등을 1분마다 껐다 킬만큼 작은 행성, 다스릴 것이 하나 뿐인 임금님의 행성 등 다양한 여행지의 모습에 맘을 뺏겼더랬다. 그리고 비행사와 어린왕자의 그림그리기에도. 어린왕자가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자 비행사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구렁이를 그려준다. 얼핏 모자같이 보이는 그 그림을 어린 왕자는 단숨에 꿰뚫어본다. 또 어린 왕자는 양을 그려달라고 했다가 상자 속에 든 양을 그려주자 만족한다. 순수한 어린 눈에는 겉면의 꾸밈과 허식을 넘어서서 본질을 꿰뚫어보는 힘이 있다.
사춘기가 되고 나서는 어린 왕자와 여우의 이야기가 맘에 와닿았었다. 아마 여러 작품들에서 어린 왕자와 여우의 대화 부분만 발췌해 다루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유독 그 부분을 강조하니 뭔가 중요하고 대단해보였으니까. 하지만 그것만은 아닌 것이, 여우와의 대화는 사춘기적 감성을 자극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길들여진다'는 것, 그렇게 되기 전에는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것, 일단 친구가 되면 어린 왕자의 머리색을 닮은 밀밭만 봐도 두근거리고 기뻐질 거라는 여우의 말. 친구와 우정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되던 당시에 그런 여우의 말은 어린 왕자 뿐 아니라 내게도 일종의 깨침을 주었다. 당연한 사실이고 어렴풋이 알고 있는데도 말로 형상화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진리. 여우는 참 현명하다.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왕자와 장미의 이야기가 끌렸더랬다. 여기에는 꽃과 어린왕자라는 감상적인 가요의 영향도 있는 것 같은데, '있어야 할 곳'을 알면서 떠나버린 왕자를 순순히 보내주고 기다리는 장미와 여우에게서 '돌봐준 것에는 책임이 있다'는 말을 듣고 돌아가는 왕자의 사랑이야기가 무척 좋았다. 사실, 그동안 나는 장미에 대해서 너무 무심했었던 것이다. 비행사와 여우라는 지구에서 만난 친구들에 묻혀, 원래부터 어린 왕자를 사랑한 장미라는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심지어는 여우와 비행사와 함께 어린 왕자가 지구에서 살기를 바랬었다. 그러나 사랑을 준 존재에게는 책임을 져야하는 것임을, 여우가 한 서글픈 말의 의미를 성장한 이젠 안다.
어린왕자를 따라 이 곳 저 곳 여행하며, 온갖 존재들을 만나고 결국엔 있어야 할 곳을 깨달아 돌아가는 여행길은 즐거웠다. 쌩 떽쥐베리는 정말 사막 한복판에서 어린왕자를 만났었던 것은 아닐런지, 혹여 그의 소설 <야간비행>은 어린 왕자가 사는 별을 보다 가까이서 보기 위한 그의 시도를 그린 것은 아니었을까. 어이없는 비약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