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베르 씨의 신분 상승
장 자끄 상뻬 지음, 윤정임 옮김 / 열린책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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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여, 안녕'이라는 유명한 책의 제목이 문득 생각났다. 제목과 달리 슬픔이 여전히 곁에 머무는 반어적인 그것처럼, 신분이 상승한 랑베르씨도 피카르 식당을 떠나지만 사실은 피카르 식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현대식으로 바뀐데다 예전같은 단골손님들의 가족적 관심이 더는 없는 피카르 식당, 랑베르는 그런 피카르 식당 대신 새로운 식당을 찾게 된다. 모습도 풋내나는 청년에서 꼭 중년신사처럼 탈바꿈된 채 말이다.

그러나, 새로운 사람들이 있는 새로운 식당에서 랑베르가 함께 앉은 자기보다 젊은 청년에게 해주는 말은 피카르 식당에서의 3명이 랑베르에게 해준 말과 동일하다. 즉, 랑베르의 몸이 피카르 식당을 떠났을지언정 그가 피카르 식당에서 얻었던 것들은 여전히 그에게 머물러 있다. 피카르 식당의 4인 그룹에서 주로 얘기를 듣던 랑베르가 새로운 식당에서는 얘기를 해주는 입장이 된 것은, 세월의 흐름과 세대 교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 이렇게 청년은 중년이 되고 자신이 젊은 시절 겪었던 어른들의 모습을 답습해가고, 그렇게 그렇게..

전작 '랑베르씨'에서는 무척 따뜻하고 유쾌한 분위기가 흘러넘친 데 반해, 후속작인 이 '랑베르씨의 신분상승'에서는 무언가 심장을 콕콕 찌르는 어떤 종류의 애수가 흐른다. 볼 때는 정신사납게 휘몰아치는 폭풍같은 전개에 알아챌 수 없었지만, 마지막 책장을 덮고나서 인생살이란 이런 것인가하는 일종의 허무와 젊은 날에 대한 아련한 애수를 느꼈다. 아무튼 작가인 장 자끄 상뻬는 작품 스타일이 두 부류로 극명하게 나뉘는 것 같다. '얼굴 빨개지는 아이'나 '랑베르씨'류의 서정적이고 따뜻한 그것과 '랑베르씨의 신분상승', '작은 차이', '어설픈 경쟁', '거창한 꿈'류의 그것으로 말이다. 전자가 보다 취향에 부합하긴 하지만 상뻬 특유의 기지와 날카로움이 녹아난 후자의 부류도 썩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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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녀귀
이종호 지음 / 황금가지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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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녀귀는 토속적인 한국공포소설이다. 폐쇄적인 전통시골마을에 배척받기 쉽상인 무당과 그네의 딸이 들어오고, 이상한 힘을 가진 두 사람에게 마을사람들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녀 각각에 저지른 살인으로 모녀귀가 태어난다.

시골학교로 부임해온 여교사 은주는 비뚤어진 책상줄과 학생들의 귀신 이야기, 이어지는 연쇄학생살인사건, 뭔가 숨기고 있는 동료교사들과 마을사람들의 비밀에 하나하나 접근해간다. 그리고 점점 드러나는 30년 전 이 마을과 학교에서 벌어졌던 일들..

분신사마라든지, 시골학교와 여교사, 무당같은 고전적 공포의 소재들로 만들어낸 으스스한 이야기 <모녀귀>. 얼핏 식상해보일수도 있으나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런 생각이 섣부른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연쇄살인범의 정체를 알게 된 순간 비명이 약하게 흘러나오는 입을 손으로 꾹 눌렀었던,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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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 간 작가들 - 행복한 책꽂이 01
주명철 / 소나무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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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를 전공한 작가가 외국대학에서 박사논문을 받은 것을 한국어로 다시 써서 출간한 책이라고 한다.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되었던 18세기의 프랑스 작가들을 통해 검열과 당시 세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꽤 흥미로웠다. 박사논문 특유의 딱딱함이나 지루함이 안 느껴져서 놀랍기도 했고 말이다. 군데 군데 삽입된 삽화와 당시 유행한 소설 발췌문들이 짧은 그림책을 읽는 듯한 즐거움도 안겨주었다. 파리의 살롱을 통해서 지식인층과 귀족층이 만나고, 야설과 음독을 통해서 언론층이 형성되는 과정이 특히 재미있었다. 소설처럼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18세기 프랑스의 언론상황을 그려내는 이 책, 종이질이 무척 나빴던 것만 빼면 강력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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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베르 씨
장 자끄 상뻬 지음, 윤정임 옮김 / 열린책들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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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베르씨>라는 제목은 '랑베르' 개인을 무척 강조하고 있지만 막상 책을 펴들고 찬찬히 읽어보니 랑베르씨보단 오히려 랑베르씨와 알고지내는 주변사람들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작은 레스토랑의 점심시간에는, 늘 똑같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식사를 하고 그 중 한 4인그룹에 랑베르씨가 속해있다. 다른 3명과 달리 젊은이인 랑베르씨가 어느날부터인가 불규칙적으로 점심식사를 하러오고 그럼으로써 레스토랑 사람들의 대화가 변하는 과정이 무척 재미있었다. 늘 정치를 논하던 그룹 사람들이나 축구얘기로 법석을 떨던 랑베르그룹 사람들이나, 어느순간부터 모두 랑베르의 애인을 둘러싼 이야기로 여념이 없다. 그리고 자기들의 연애담을 늘어놓고 랑베르를 야유하거나 응원하는 덕에 레스토랑의 분위기가 확 바뀐다. 즐거운 일탈인 것이다. 나중에 랑베르가 애인과 헤어지면서 레스토랑의 사람들은 다시 정치나 축구얘기로 돌아간다. 그들이 그토록 찬미하던 여자와 연애얘기를 비하하면서 말이다. 이런 프랑스적인 위트는 익숙치 않지만 꽤나 재미있어서 무척 웃어댔다.

늘 똑같은 레스토랑 메뉴, 늘 똑같은 사람들의 대화, 그러나 어떤 개인의 연애라는 사소한 일 한 가지가 그런 늘 똑같은 일상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짐으로써 벌어지는 이 유쾌한 소동에서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현대의 표어는 설 자리를 잃는다.

간결하면서도 표현력 넘치는 장 자끄 상뻬의 그림이 이야기와 어우러져 더더욱 입맛을 돋구는 이야기, <랑베르씨>. 마지막 페이지에는 내부전경만 드러나던 레스토랑의 출입구가 그려져있는데, 언젠가 파리에 가면 필히 이와 비슷한 출입구를 찾아내 들어가보리라 마음먹었다. 그럼 나도 그 곳에서 어딘가 능청스럽지만 마음 따뜻한 프랑스인들을 만날 수 있을까? 그 날을 꿈꾸며 즐겁게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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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빨개지는 아이
장 자끄 상뻬 글 그림, 김호영 옮김 / 열린책들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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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든지 크고작은 결함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외적으로 두드러지게 드러날 때 무척 곤란을 겪게 된다. 얼굴 빨개지는 아이 마르슬랭이나 그의 친구인 재채기를 연발하는 르네가 그렇다. 얼굴이 빨개진다는 것에 내심 주눅들어 있던 마르슬랭은 재채기 때문에 곤란을 겪는 르네와 친구가 된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동병상련으로 마음이 무척 잘 맞는 친구가 되고, 단 둘이 강가나 들판에 앉아 그저 하늘이나 물만 봐도 어색하지 않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만약 마르슬랭이 얼굴이 빨개지지 않거나 르네가 재채기를 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그런 시간을 공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림이 대부분인 이 책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그림은, 두 사람이 나란히 말 한마디 없이 앉아 있을 때 시간이 흘러가는 장면이었다. 마르슬랭은 얼굴이 빨개졌다가 점차 하얘지고, 르네는 엣취-했다가 조용해진다. 서로가 서로를 포용할 때 결함은 더이상 결함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하니 흐뭇했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 만난 두 친구가 서로의 여전한 모습을 보고 또다시 붙어다니며 유년기와 마찬가지로 마음을 나누는 모습은 정말로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어른이 된 마르슬랭과 르네가 그 어린 날처럼 둘만 호젓이 앉고 내가 제일 마음에 들어했던 장면이 리플레이된다. 마르슬랭은 얼굴이 빨개졌다가 다시 원래색으로 돌아오고, 르네는 재채기를 했다가 조용해지고..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이해와 감싸줌의 따스한 공기가 내게까지 전달되는 듯했다.

얼굴 빨개지는 아이를 읽고 나는 고교시절의 단짝 친구들에게 오래간만에 전화를 걸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소원해졌지만 서로의 결함과 장점을 속속들이 알고 진실로 마음을 나누었던 내 마음의 벗들에게 말이다. 서로 조금 변했고, 대화의 주제도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우리는 무척 즐거웠다. 마치 그 어린 날처럼. 세월이 흐르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게 나를 온전히 다 보여주지 못하는 일이 많다. 어린 시절만큼 툭 터놓는 솔직함과 계산없는 순수가 많이 상실된 탓일게다. 그래서 어린시절의 친구들은 유독 세월이 흐름에 따라 더욱 빛을 발하며 마음의 지주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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