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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검 1 - 애장판
김혜린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2년 9월
평점 :
품절
중학교 2학년이었을까? 생일선물로 국내최초 격주간 순정만화잡지 <댕기>창간호를 선물로 받았다. 지금은 대작가로 유명하신 이은혜선생님의 초기히트작 '점프 트리 에이 플러스'라든가 김진님의 '바람의 나라'도 재밌었지만, 무엇보다 강렬하게 잡아끈 것은 김혜린 선생님의 '불의 검'이었다. 동양화를 보는 듯 먹물의 미학이 잘 살아난 강한 선과 섬세하고 가녀린 선들이 조화된 그림체, 조연까지 개성이 확실한 생김새와 성격들. 무엇보다 아무르족(마치 우리 '한민족'같은)사람들 대부분의 그 순박하고 정깊은 표정들이 이 만화는 정말 '우리만화'라는 생각을 어린 마음에도 찡하게 불러일으켰더랬다.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넘어가는 시대, 철제무기인 '불의 검'을 둘러싼 아무르-카르마키라는 부족국가 간의 암투라는 스케일 큰 배경. 그 속에서 아무르족의 무지랭이 촌여식 '아라'와 아무르족 가라한이자 푸른 용부의 수장인 '아사(산마로)'의 사랑이 너무도 아름답고 또한 너무나 아프게 펼쳐진다.
불의 검기술을 빼내려고 카르마키에 잠입했다가 부상을 입고 기억을 상실한 산마로와 아라의 풋풋하고 따뜻한 사람에 행복하게 웃음지은 것도 잠시, 이후 아라가 카르마키 야장귀족에게 납치되고 산마로는 기억을 되찾으며 아라를 잊어버리고 두 사람은 엇갈리는 등 무수한 고난들에 시종일관 얼마나 답답하고 울고싶던지. 우여곡절 끝에 어찌어찌 정식 부부가 된 그들이 이젠 제발 울지도 가슴 쓰라리지도 입술 악물며 참지도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이다.
아라와 산마로의 사랑이 가장 압권이지만, 그들 주위의 사람들 이야기도 저마다의 울림을 담고 <불의 검>이 '사람님네들의 이야기'임을 한껏 내게 주장해왔다. 날씬마로, 곰바우 같은 달맞이부대 전사들의 순박함과 그네들을 돕는 보급부대의 청산녀같은 여인네들. 가라한 아사를 보필하는 미루와 지루, 삭검과 같은 충성스럽고 인간적인 부하들. 계속되는 전쟁통에도 부대끼는 사람과 사람 사이 한 조각 웃음을 찾아내는 그네들의 투닥거림과 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지금 살면서 힘들고 괴로워하는 것들이 다 무엇이랴 싶어진다.
물론 불의 검에 그렇게 좋은 사람냄새만 물씬한 것은 아니다. 추악한 권력욕과 정복욕으로 똘똘뭉친 간신배, 소인배, 도살자,국수주의자, 기회주의자, 배신자 참 많기도 많다. 절로 혀가 쯧쯧 차지고 인상이 찡그려지고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세상이란 다 이런건가 사람들은 더럽다는 생각으로 한껏 고조되기도 한다. 나라보다 제 잇속 챙기는 아무르족의 정치귀족들, 제 나라만 배불리려는 중원, 복속부족주민을 개만 못하게 취급하는 카르마키, 남 일을 제맘대로 조소하고 상처입히는 군중심리.
그러나 그럼에도 결국은 사람에 대한 애정이 솟아난다. 세상은 한 번 살아볼 만한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작가 김혜린의 주의가 너무도 자연스럽고 설득력 있게 내 속으로 흘러들어오는 탓일게다. 세상과 사람에 치여 힘들 때면 나는 불의 검을 펴들고 꿋꿋함과 의연함, 따뜻함을 그네들에게서 나눠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