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아무렇게나 가방에 넣고 오후에 학교에 아이를 데리러 갔는데 교문에 들어서면서부터 뭔가 쎄했다. 시간을 잘못 맞춰왔구나. 그래도 늦어서 당황하는 것보다는 머쓱한 헛걸음이 낫다 생각하며 돌아나왔다. 남은 시간 동안 아침에 내린 봄비가 막 갠 동네를 걷기로 정한다. 봄꽃을 단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길을 걸으면서 젖은 꽃의 내음에 잠시 감탄했다. 봉긋한 꽃잎들 모양에 아침에 같은 길을 따라 옹기종기 학교에 가던 아이들 우산들이 떠오른다. 봄나무들의 가지는 하나같이 여리고 가는데 그 기운만큼은 호기롭다. 내 때가 왔다는 자신감, 적기의 미학. 피기 직전 꽃눈에 매달려 떨어질지 말지 베팅하는 물방울을 본다. 온갖 여린 것들이 싱그러운 기세로 나아가는, 봄이구나. 

길에서와는 사뭇 다르게 내게는 여러가지로 버거운 3월이었다. 아직 3월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것들이 훅훅 지나간 느낌에 얼떨떨하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이런저런 변화에 적응하려니 당연하게 몸도 좋지 않았다. 잠으로 모든 것을 회복할 것처럼 유독 많이 잤는데 그런다고 나아지지도 못했다. 해야 할 걸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도 좋지 않았다. 나한테는 특히 어려운 일인 ‘일상에서 작은 균형잡기’가 어그러졌고 아이들에게 그래야 할 만큼 다정하게 대해주지 못했다. 

육아의 어려움을 하소연하면 엄마가 행복한 게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주변에서 많이 해주었었고 자주 그 말에 기대며 위로 삼기도 했지만, 이렇게 심통부리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행복하게 사는 게 그렇게까지 중요하고 최우선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이 양육자가 되고 나면, 계속 그렇게 살기는 어려운 노릇이 되어버린다. 그런 류의 혼란 속에서 어떤 양육자가 돼야 하는지 갈피를 못잡은 시기가 있었다. 지금도 비슷하긴 하지만 그 시기가 있었다, 정도로 말할 수 있으니 이제 조금은 나아진 거라고 생각하고 싶다. 해결할 수 없다고 느껴지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도 내겐 자주, 좋은 방법이 된다. 

















자리를 잡고 책을 펼쳤다. 첫번째로 실린 시의 제목은 [발자국]인데 이 시집 아플까.

영혼을 외면했던
오늘 내 발자국이
불에 달군 쇳덩이처럼
위험해 보인다[발자국]

보다가 힘들면 집에서 마저 읽어야지. 제목에서부터 그랬듯이 시집 여기저기에 발자국이 보인다. “위험해 보이는” 발자국만 나오는 건 아니었다. 특히 좋았던 장면은 [겨울 아침]이라는 시에서 만났다. 

발목까지 빠지는 눈길을 되돌아가
허기졌을 배가 눈 위로 끌린 
새끼고양이의 길을 발로 다져준다 [겨울 아침]

발자국을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일인지 곱씹어본다.
누군가 눈에 남기고 간 흔적을 본다. 앞섰던 걸음과 그 후의 걸음을 가늠한다. 그 발자국을 음미하고 따라걸어가 보기도 한다. 무심했다면 구분하기도 어려웠을 자국을 보고 새끼고양이의 주린 배를 상상한다. 그러고 나서, 이제 발걸음을 옮기게 되는 것은 스스로 “나는 늘 혼자”라고 말했던 화자이다. 되돌아간다. 작은 발이 눈속에서 푹푹 꺼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길을 다지고 본인의 발걸음도 새로 딛는다. 길이 된다. 


아주 행복해 보이는 여자가
나를 스쳐 지나갔다
걱정 하나 없는 얼굴
꿈꾸는 눈빛으로
잠든 아기를 품에 안고

만일 내가 아기를 품에 안았다면
한숨 쉬었을 것이다
아기의 미래를
바구니처럼 끌어당겨 보며


내겐 한순간도 없었던 
꿈을 꾸는 여자가
봄날의 눈사람처럼 빛났다 [봄날의 눈사람]


“꿈꾸는 눈빛으로 잠든 아기를 품에 안고” 걷는 여자란 본래 없었던 것인데도 내게도 이렇게 선명할 일인지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봄날의 눈사람이 내는 빛에 눈이 부시는 것 같은 착각도 생생하다. 시가 이 여자를 내 앞에 데려다 두고 나니 나도 그동안 이 사람을 앞세우고 걸어왔던 것같이 느껴진다. 내 발자국도 “흐릿한 그의 발자국 안에”([발자국 위로 걷기]) 포개졌겠지. 근데 눈사람한테 발자국이 있나. 이 봄에, 실없는 호기심이라 생각하며 책을 덮는다. 아이를 데리러 가면 얼추 시간이 맞을 것이다. 발을 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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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티나무 2023-03-24 1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심통 부리세요 유수님!!!!!

유수 2023-03-24 21:58   좋아요 0 | URL
그니까요. 봄에 더 심술내는 제 심보란… 위안해주는 그 마음을 알아서 심통이 사람에게 향하는 건 절대 아니고 행복지상주의는 한결같이 싫네요.. 난티님께 주절주절ㅋㅋ
 
이젠 안녕 마음똑똑 (책콩 그림책) 7
마거릿 와일드 글, 프레야 블랙우드 그림, 천미나 옮김 / 책과콩나무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린이 열람실 서가에서 정말 좋아하는 그림책 작가들 조합을 만나 반갑게 책을 뽑았다. 원제는 표지의 두 인물 이름 해리 앤 호퍼인데 어떤 의미에서 번역서 제목은 적절하면서도 깊어졌다고 봐도 될 것 같다. 상실을 겪은 본인만이 할 수 있을 말. (바라건대) 애도의 시간이 지난 후에 언젠가 뱉게 되는 말. 해리와 호퍼 둘의 우정 뿐 아니라 그들의 이별 후를 존중하는 양육자에게도 시선이 간다. 그림책 마지막장을 덮고 나면 타인의 슬픔을 바라보는 것에조차 박한 곳이 여기라는 현실감에 유독 저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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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맥락과는 다른 얘기지만 그럼 반대로 어떤 의미로든 ‘오프라인에서 픽업’되는 것과 무관한 글이 가능할까? 극단적 포장과 허위를 걷어내면 온라인 위계와 오프라인 위계가 실은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는데.

페북을 글쓰는 용도로 사용하는 이점이 뭘지 늘 궁금했고 아직 궁금..

글쓰기의 정의는 이견이 없다. 글은 ‘자기‘ ‘생각‘을 ‘표현(재현)‘하는 ‘노동‘이다. 자신을 아는 일은 일생에서 가장 어려운 법이고, 생각하기는 가장 외로운 작업이다. 글쓰기는 중노동이다. 글쓰기는 두렵고, 어렵고, 책임이 따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만큼 수입으로 연결되지도 않는다. 그런 면에서 SNS에서 글쓰기는 자본의 입장에서 너무도 손쉽고 이익이 막대한 돈줄이자 중우(衆愚) 정치다. 키보드 사용자의 노동과 시간은 고스란히
‘구글‘이나 ‘삼성‘이 가져가지만, 우리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들에게 우리의 영혼을 바친다. 그 대가는 무엇인가? - P181

페이스북에 쓴 글을 책으로 묶어내는 일도 심심찮다. 내가강조하고 싶은 사실은 이러한 현상의 바람직 여부가 아니라 자아실현, 자기선전 도구로서 SNS의 절대적 유용성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몇 년 이상의 노력과 노동, 비용을 기울인저작에 대해 ‘최악‘, ‘저질‘, ‘친일‘ 등의 댓글 테러로 그 텍스트들이 평가의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에게 그런 힘이있다면 디스토피아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형태의 ‘자아실현‘
이 만연한 사회라면 공동체는 무너질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인쇄물(책)을 소환할 때다. 지금으로서는잠시 SNS을 중단하고 오프라인에서 글쓰기가 유일한 저항처럼보인다. 너 자신을 알라. 생각을 하라. 죽도록 연습하고 표현하라. 그런 점에서 영화의 백미는 글쓰기 수업 파트다. 소셜 네트워크의 본질을 꿰뚫는 감독의 통찰력과 영화를 만드는 뛰어난
‘작전 구사력‘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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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음, 예전에 어떤 친구가 있었는데, 같이 옷을 차려입곤 했었어요. 항상 그러면서 놀았죠.” 그 말을 했다는 사실에 나 자신조차 놀랐다. 나는 평소에 제니 이야기를 입 밖에 내는 일이 없었으니까.

나는 제니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주었다. 7번 애비뉴의 페이지 스리에서 처음 만난 그 일요일 밤, 뮤리얼과 나는 작은 테이블에 앉아 서로 이마를 마주 댄 채 우리의 죽은 소녀들을 위해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 표정을 보니 어쩐지 제니가 내게 공책들을 전해준 순간이 떠올랐다.<자미> 322


오드리 로드가 연인 뮤리얼과 처음 데이트하는 장면이다. 제니라는 애칭의 제네비브는 로드가 영원히 이별하게 된 어린 시절 친구이다. 제니의 황망한 죽음을 담은 장은 자미에서 뚜렷한 분수령이기도 하다. 뮤리얼과의 대화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둘은 서로의 삶에 대해 조금씩 나누기 시작하고 로드는 불쑥 '예전에 어떤 친구'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도 놀라면서. 직접 묻고 덮은 상실을 불현듯 꺼내는 행동, 이것은 신호일까?


비혼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지금처럼 자주 사용되기 전에 독신, 독신주의자라는 말이 있었다. 내 몸 하나 운신하는 것 이상은 할 수 없겠다/하지 않겠다는 판단을 어릴 때 내렸고 지금보다 젊을 때 나를 설명해야 할 일이 있으면 그 단어를 썼다. 내가 포획한 단어가 아니었단 점에서 돌아보면 아쉬움이 남지만 그땐 현재 상황과 가치관을 대강 전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땐 자주 뜻도 모르는 단어를 썼다. 어떤 외국인 친구들은 독신을 종교적 맥락에서 이해해온 듯했고, "결혼하지 않겠다"와 "순결주의" 사이에 내가 다 설명할 수 없는, 성가신 큰 구덩이가 있음을 느지막이 감지하고는 아, 그거랑 다른 건데, 설명하기 귀찮다. 자유연애 어쩌구저쩌구 술먹으면서 자연스럽게 뒤의 대화는 자주 생략하곤 했다.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었지만 마음으로는 이미 알고 있던 것들, 가치관의 큼직한 빈칸들을 이제는 대략 채웠다. 제도에 동의하든 아니든, 현재 나는 기혼자고 여기서 아이들을 기른다. 내가 나에 대해 몰랐던 것들. 세상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 당시와 내적 외적으로 정반대 지점에 서있는 현재의 나는, 이불킥을 하긴 해도 그때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 부끄럽지는 않다.


"그렇게 되었고, 선택 그 이후의 삶을 산다."


로드가 불쑥 맥락 없이 죽은 친구의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꺼냈듯이, 이제 내게서도 저 말이 생뚱맞도록 비어져 나온다. 차이점이라면 로드는 연인에게 얘기했고 나는 내 귀에 들리게 말한다는 것. 꺼내고 나니 당연한 말이라 외려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선택', '이후', '산다'는 것 모두 쉽고 당연한 명제가 아니라는 걸 긴 시간을 잡아먹으면서 깨달았는데도 말이다.

















“일상적 상호 작용 속에서 자기의 욕망과 느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쓰잘데없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 자기에게 맞는 진술의 방식을 찾아내는 것,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 속에 있는 역사성을 감지하게 되는 것, 나는 이것이 바로 탈식민화의 과정이라고 말해 왔다. 조그만 말 한마디, 친구를 가지려는 노력이 모두 역사적 과정이며 우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역사란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경험의 복합체이며,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체험들에 대한 짙고 옅은 기억들로 이루어져 있다. … 역사는 우리의 기억을 조작하고 왜곡하는 어떤 힘에 대한 기록이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들이 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선택적으로 기억하고 ‘왜곡’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문제의 핵심은 직접적 권력을 가지지 않은 다수인 우리가 역사를 적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기억을 역사로 엮어 내는 데 있다.”242


조혜정의 <글읽기와 삶읽기2>를 읽으며 스스로의 식민상태를 되짚겠다고 마음 먹는다. 다짐 같은 거 이제 졸업할 때도 되었건만... 유치해 보여도 나는 여기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친목이 어려워 하고픈 친교도 버벅댔던 것, 내 것 같지 않은데도 썼던 말들, 사소하고 시시해보였던 어떤 것도 무시하지 않기로 하자. 


"여성 운동을 하면서 보게 된 ’식민지성‘은 여성 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침묵을 강요당하는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는 많은 남녀 학생들을 만나고 있었고, 그 수는 최근에 더욱 늘어나고 있다. 여성 해방을 지향하는 여성이나 식민지적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식민지 주민이나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결책은 근본적으로 같은 것 아닌가? 잃어버린 일상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자기 진술의 양식을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205


저자는 "자기 진술의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가야 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마지막 장, 문화적 자생력기르기를 통해 다룬다. 어떻게 시작할지 데리다와 저울질하다가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빌려오기로 결정한다. 여성이 글 쓰기 위해 필요한 경제적, 정신적 조건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이 장의 마지막에서 다루는 것은  탈식민화를 가능하게 하는 글쓰기와 자기관리다.


"자기 관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기가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일상적인 삶을 어떻게 꾸려갈 것인지의 문제가 남는다. 특히 결혼 문제가 그러하다. 여자건 남자건 모두에게 지금과 같은 형태의 가족은 글을 쓰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상적인 지지 집단이 될 수 없다. 가정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집단이다. 결혼은 자기가 결정하는 것이며, 결정적으로 자기 관리를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이제는 어떤 생활 공동체, 또는 어떤 지지 집단을 만들어 갈 것인지에 대해 좀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253



‘자기관리’라는, 시대의 정언명령처럼 느껴지는 이 단어가 그동안 오염/오독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비딱선만 탈 뿐 방향성에 대해서는 그동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조혜정이 재정의하는 “자기관리”란 어떤 생활 공동체, 어떤 지지 집단을 만들어 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품은 “자기관리”다. 그리고 이 능력에 대한 숙고는 어떤 지지 집단을 원하는가, 내 경우엔 내가 만드는 가정의 모습에 대한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억압의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해방의 언어만 배우면 된다고 간단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지배 언어의 눌림 속에 만들어진 그 ‘말 같지 않은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이 ‘해방의 언어’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큰 착각인가? 그런 착각은 ‘해방의 언어’를 외부에서 끌어 오는 ‘식민지 엘리트’들이나 할 일이다. 이제는 오히려 지배 담론에서 비껴나 있는 그 ‘횡설수설’하는 말을 바탕으로 새 말을 만들어 가야 한다. 억압 상황에서 ‘말 같지 않게 사용되어 온 ’말‘을 살려 내지 않고서, ’억압‘을 줄여 가고 없애 갈 것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 무지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확인했다. … 혼자서 그동안 ’말이 아니라고 생각해 온 말‘의 형태로 자신이 해왔던 말을, 또는 생각을, 주변성을 공유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가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 P254

지식인은 공동체에 대한 애정을 가진 시선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과 실천을 통합시켜 가는 삶의 스타일을 실현해 간다. 따라서 지식인은 그 업적이나 직업으로 구별될 성질이 아니라 그 ㅅ자신의 일상적 삶을 통해서 구별된다. ... 글을 스기를 원한다면 일상이 작품이 되게 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해내기 위해 ‘자주 관리‘가 필수적임을 기억하자.

나는 장기적으로 이기적인 사람, 자기 분열이 덜한 사람들과 살고 싶다. ... 지금 우리게에 필요한 것은 대단한 발명가나 혁명가가 아니다. 인류 보편의 문제를 해결해 낼 이론가도 아니다. 제대로 이기적이고 자기 관리 능력을 가진 생활인들이다."


- P255

우리는 ‘다수결’로 결정을 내리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그리고 그것을 민주주의라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실은 민주주의가 아니고 민주주의의 포기에서 오는 것이다. 그것은 자체 내에서 합의를 이루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미리 포기했기 때문에 성급하게 치르어 내는, 공동체의 부재에서 비롯하는 행동이며 관습이다. 다수결의 법칙은 실은 공동체를 만들어 갈 사고력, 대화의 근거를 마모시키는 악순환의 고리였다. 민주주의란 충분한 의사 소통을 기초로 한다. 토론은 결론을 내기 위한 것이기 이전에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고 말을 만들어 가기 위한 것이다. 토론이 억제된 사회에는 두 종류의 소리가 있을 뿐이다. 외부에서 온 권위적 목소리와 ‘웅성거림’이 그것이다 - P239

그런데 ‘나’를 쓴다는 것은 쉽지 않다. 앞장에서 말했듯이 ‘나’라는 것이 어떤 ‘본래적’ 모습을 갖고 있다는 전제를 가지면 ‘나’를 쓰기가 힘들어진다. ‘나’라는 것이 도달해야 할 목표가 있거나 반드시 ‘구색’을 갖추어야 한다거나, 남보다 뛰어나야 한다고 생각할 때도 자기 진술을 하기는 어렵다. 그것에 도닳기 전에는 ‘나’라는 것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거나 말할 자격이 없는 것이라는 식의 생각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 우리가 자신을 찾아가는 작업으로서의 글쓰기를 하고자 한다면 ‘자아’란 이미 형성된 것이 아니라 형성되고 있는 어떤 것임을 알아야 하고, 특히 자신의 주변성에서부터 새로운 정치적 공간을 만들어 갈 수 있는 발언을 해야 한다고 했다. - P241

우리가 쓰는 글은 각자가 가졌던 소외의 경험, 추방당한 느낌, 왠지 모를 불편함에서 시작한다. 그 지점에서 ‘중심’이 무엇인지를 묻고, 또 주변을 바라볼 거점을 마련한다. 자신이 선 자리가 어떤 경계선, 또는 변경인지, 자신의 삶 속에서 긴장을 일으키는 부분이 어디서 오는지를 성찰해 내면서, 역사속의 자신과 만난다. 자기 땅의 이방인으로서, 일상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주변인으로서 자신이 선 자리를 주목하고 바꾸어 간다. 이때의 글쓰기는 삶을 읽어 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연속적인 작업 중 하나이다. 그것은 자기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행위이며, 미래를 만들어 가기 위한 기억하기의 행위이다. 또한 그것은 익숙해진 억압을 낯설게 느끼는 동시에 새로운 ‘멍청함’에 맞서 깨어 있기 위한 전략이다.
… 감성을 희생하고 훌륭하게 살아 남을 지성이 과연 얼마나 될까? 나는 종종 우리 사회에 학자가 적은 것은 젊었을 때 감성을 죽인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 P243

이 시대의 글쓰기는 시대가 그런 만큼 더욱 대면적 관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대화적인 것이어야 한다. 경험을 나누는 이야기여야 한다. 이 때의 이야기는 가슴을 차갑게 놓아 둔 채 읽는 글이 아니다. 삶에 대한 감을 잡아 가는 이야기이며, 일상적 용어가 살려지는 글이며, 혼자만 떠는 것이 아니라 함께 느껴 가면서 삶을 만들어 가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요약하기가 힘들다. 살아 있는 글이기 때문이다. -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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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티나무 2023-03-16 13: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읽기와 삶읽기 2> 읽으려고 꺼내뒀는데 유수님 읽으셨다고 해서 무지 반가웠어요. 역시 좋을 것 같고요.
<자미>의 문장도.. 새롭게 다시 보이는군요. 👍

유수 2023-03-16 14:51   좋아요 0 | URL
그니깐요ㅎㅎㅎㅎ어쩜 이런 우연필연이! 좋은 챕터는 진짜 좋아요.

2023-03-20 1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20 15: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진 정리하다가 책 찍어둔 부분 발견했다. 이 책 읽을 때 별 메모는 못 남겼는데 인용구 부분은 이전 시대의 유해한 남성성이 어떻게 구축되었는지 내면화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단적으로 드러난다 생각해서 찍었던가. 가물가물하다. 저명한 페미니스트 엄마와 표면적으로는 그녀를 지지하는 아버지를 둔, 여러가지 의미에서 경계에 선 젊은 남성의 이야기. 청소년기 접어들면서 문학에 본격 빠지는 시기(요즘도 유효한 말일지 모르겠다)를 영어로 샐린저 이어라고 한다던데 이 책이 하듯이 홀든 콜필드 이후 세대의 방황도 더 많이 다루어야 하지 않나 싶었다.

인용구) ‘제국의 창문’ ‘남자들만의 방식으로 배신’ 이런 이야기를 아버지가 했다는 게 절묘하다. 타자화된 스스로를 변방이 아니라 중심에서 깨달을 수 있나? 깨닫고도 저지를 수 있나? 나는 아마 평생 모를 일이겠지만.

우리는 어디든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었지만 우리의 권력이 투사한 이미지는 절대로 꿰뚫을 수 없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어디에도 가지 못한 셈이었다. 내가 본 것의 아주 많은 부분이 제국의 창문을 통해서 본 것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창은 그 창문을 흠 하나 없이 닦아두었다. 우리가 가지 말라는 거리를 돌아다닐 때도 사람들은 길을 비켜주었다. 그들은 말썽을 원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 지역 경제에서도 깍두기 취급을 받았다.

린이 그녀를 들여 보내주있고 침묵 이 내려앉았다. 그 안에 뭐가 들어 있었을까? 결혼반지? 정액? 어 째서인지 죄책감은 내가 최소한 반의식 상태에서는 알고 있었던 아빠와 엘리너 사이에 벌어진 일로 만회되었다. 나는 일종의 성적 인 잘못을 저지름으로써 남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이 집의 남자가 남자들만의 방식으로 엄마를 배신하고 있었다. 아픈 엄마를, 우리가 아프게 하던 엄마를. 프랭크와 내가 온천으로 돌아 가는 꿈도 꾸었다. 사람들이 우리를 안으로 들여보냈고 우리는 그 곳이 체비체이스에 있는 부모님의 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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