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정리하다가 책 찍어둔 부분 발견했다. 이 책 읽을 때 별 메모는 못 남겼는데 인용구 부분은 이전 시대의 유해한 남성성이 어떻게 구축되었는지 내면화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단적으로 드러난다 생각해서 찍었던가. 가물가물하다. 저명한 페미니스트 엄마와 표면적으로는 그녀를 지지하는 아버지를 둔, 여러가지 의미에서 경계에 선 젊은 남성의 이야기. 청소년기 접어들면서 문학에 본격 빠지는 시기(요즘도 유효한 말일지 모르겠다)를 영어로 샐린저 이어라고 한다던데 이 책이 하듯이 홀든 콜필드 이후 세대의 방황도 더 많이 다루어야 하지 않나 싶었다.
인용구) ‘제국의 창문’ ‘남자들만의 방식으로 배신’ 이런 이야기를 아버지가 했다는 게 절묘하다. 타자화된 스스로를 변방이 아니라 중심에서 깨달을 수 있나? 깨닫고도 저지를 수 있나? 나는 아마 평생 모를 일이겠지만.

우리는 어디든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었지만 우리의 권력이 투사한 이미지는 절대로 꿰뚫을 수 없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어디에도 가지 못한 셈이었다. 내가 본 것의 아주 많은 부분이 제국의 창문을 통해서 본 것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창은 그 창문을 흠 하나 없이 닦아두었다. 우리가 가지 말라는 거리를 돌아다닐 때도 사람들은 길을 비켜주었다. 그들은 말썽을 원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 지역 경제에서도 깍두기 취급을 받았다.
린이 그녀를 들여 보내주있고 침묵 이 내려앉았다. 그 안에 뭐가 들어 있었을까? 결혼반지? 정액? 어 째서인지 죄책감은 내가 최소한 반의식 상태에서는 알고 있었던 아빠와 엘리너 사이에 벌어진 일로 만회되었다. 나는 일종의 성적 인 잘못을 저지름으로써 남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이 집의 남자가 남자들만의 방식으로 엄마를 배신하고 있었다. 아픈 엄마를, 우리가 아프게 하던 엄마를. 프랭크와 내가 온천으로 돌아 가는 꿈도 꾸었다. 사람들이 우리를 안으로 들여보냈고 우리는 그 곳이 체비체이스에 있는 부모님의 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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