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아무렇게나 가방에 넣고 오후에 학교에 아이를 데리러 갔는데 교문에 들어서면서부터 뭔가 쎄했다. 시간을 잘못 맞춰왔구나. 그래도 늦어서 당황하는 것보다는 머쓱한 헛걸음이 낫다 생각하며 돌아나왔다. 남은 시간 동안 아침에 내린 봄비가 막 갠 동네를 걷기로 정한다. 봄꽃을 단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길을 걸으면서 젖은 꽃의 내음에 잠시 감탄했다. 봉긋한 꽃잎들 모양에 아침에 같은 길을 따라 옹기종기 학교에 가던 아이들 우산들이 떠오른다. 봄나무들의 가지는 하나같이 여리고 가는데 그 기운만큼은 호기롭다. 내 때가 왔다는 자신감, 적기의 미학. 피기 직전 꽃눈에 매달려 떨어질지 말지 베팅하는 물방울을 본다. 온갖 여린 것들이 싱그러운 기세로 나아가는, 봄이구나. 

길에서와는 사뭇 다르게 내게는 여러가지로 버거운 3월이었다. 아직 3월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것들이 훅훅 지나간 느낌에 얼떨떨하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이런저런 변화에 적응하려니 당연하게 몸도 좋지 않았다. 잠으로 모든 것을 회복할 것처럼 유독 많이 잤는데 그런다고 나아지지도 못했다. 해야 할 걸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도 좋지 않았다. 나한테는 특히 어려운 일인 ‘일상에서 작은 균형잡기’가 어그러졌고 아이들에게 그래야 할 만큼 다정하게 대해주지 못했다. 

육아의 어려움을 하소연하면 엄마가 행복한 게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주변에서 많이 해주었었고 자주 그 말에 기대며 위로 삼기도 했지만, 이렇게 심통부리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행복하게 사는 게 그렇게까지 중요하고 최우선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이 양육자가 되고 나면, 계속 그렇게 살기는 어려운 노릇이 되어버린다. 그런 류의 혼란 속에서 어떤 양육자가 돼야 하는지 갈피를 못잡은 시기가 있었다. 지금도 비슷하긴 하지만 그 시기가 있었다, 정도로 말할 수 있으니 이제 조금은 나아진 거라고 생각하고 싶다. 해결할 수 없다고 느껴지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도 내겐 자주, 좋은 방법이 된다. 

















자리를 잡고 책을 펼쳤다. 첫번째로 실린 시의 제목은 [발자국]인데 이 시집 아플까.

영혼을 외면했던
오늘 내 발자국이
불에 달군 쇳덩이처럼
위험해 보인다[발자국]

보다가 힘들면 집에서 마저 읽어야지. 제목에서부터 그랬듯이 시집 여기저기에 발자국이 보인다. “위험해 보이는” 발자국만 나오는 건 아니었다. 특히 좋았던 장면은 [겨울 아침]이라는 시에서 만났다. 

발목까지 빠지는 눈길을 되돌아가
허기졌을 배가 눈 위로 끌린 
새끼고양이의 길을 발로 다져준다 [겨울 아침]

발자국을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일인지 곱씹어본다.
누군가 눈에 남기고 간 흔적을 본다. 앞섰던 걸음과 그 후의 걸음을 가늠한다. 그 발자국을 음미하고 따라걸어가 보기도 한다. 무심했다면 구분하기도 어려웠을 자국을 보고 새끼고양이의 주린 배를 상상한다. 그러고 나서, 이제 발걸음을 옮기게 되는 것은 스스로 “나는 늘 혼자”라고 말했던 화자이다. 되돌아간다. 작은 발이 눈속에서 푹푹 꺼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길을 다지고 본인의 발걸음도 새로 딛는다. 길이 된다. 


아주 행복해 보이는 여자가
나를 스쳐 지나갔다
걱정 하나 없는 얼굴
꿈꾸는 눈빛으로
잠든 아기를 품에 안고

만일 내가 아기를 품에 안았다면
한숨 쉬었을 것이다
아기의 미래를
바구니처럼 끌어당겨 보며


내겐 한순간도 없었던 
꿈을 꾸는 여자가
봄날의 눈사람처럼 빛났다 [봄날의 눈사람]


“꿈꾸는 눈빛으로 잠든 아기를 품에 안고” 걷는 여자란 본래 없었던 것인데도 내게도 이렇게 선명할 일인지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봄날의 눈사람이 내는 빛에 눈이 부시는 것 같은 착각도 생생하다. 시가 이 여자를 내 앞에 데려다 두고 나니 나도 그동안 이 사람을 앞세우고 걸어왔던 것같이 느껴진다. 내 발자국도 “흐릿한 그의 발자국 안에”([발자국 위로 걷기]) 포개졌겠지. 근데 눈사람한테 발자국이 있나. 이 봄에, 실없는 호기심이라 생각하며 책을 덮는다. 아이를 데리러 가면 얼추 시간이 맞을 것이다. 발을 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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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티나무 2023-03-24 1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심통 부리세요 유수님!!!!!

유수 2023-03-24 21:58   좋아요 0 | URL
그니까요. 봄에 더 심술내는 제 심보란… 위안해주는 그 마음을 알아서 심통이 사람에게 향하는 건 절대 아니고 행복지상주의는 한결같이 싫네요.. 난티님께 주절주절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