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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소영 ㅣ 출구 3
정소영 지음 / 봄알람 / 2022년 6월
평점 :
어제 서울 간 김에 책 얘기 나눠주시던 분들을 오프라인으로 처음 뵈었고.. 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다시 알라딘에 붙어있고 싶다는 생각에 기들어왔다.
11월에 좋은 책들(덮고 나서 뻐렁치는)을 꽤 만났다. 기록은 그 중 하나였던 이 책으로 시작할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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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책의 흐름과 직접적 상관은 없지만 꼰대라는 말이 품은 좌절된 기대에 관해 생각했었다. 인생이 나를 여기로 데려왔어, 혹은 내 발로 이 길로 걸어왔단다, 하는 ‘어른’의 이야기에 대한 갈증에 소영이 진솔한 대답을 해주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여러 서신들중에 특히 ‘아버지’와 ‘에미’, ‘엄마’가 수신인인 편지를 읽을 때마다 부모 마음 몰라주기로 유명한 자식..인 나..도 적당히 해야것다.. 반성도 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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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영의 젊은 시절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도시를 배경으로 하다 보니 읽다가 한번씩 책밖으로 고개를 돌리게 된다. 그 동네가, 그 산에서 그런 일도 있었구나. “노동운동의 불모지“, ”정치 무풍지대” 등의 말에서 소영의 보이지 않았을 분투가 내가 이 곳에서 느끼는 안락과 대비되어 부끄러웠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많이 공감하면서 읽었지만 동시에 내내 부끄러웠다.
딴 얘기지만 부끄럽다는 걸 자주 느낀다는 게 싫다.
입시를 목표로 한 공/사교육을 받고 자라 한국문학을 비판없이 흡수하면서.. 머리가 말랑할 때에 어떤 성별의 식민지 지식인 특수성을 성수처럼 마시고 체화한 탓에 이제서 급체와 구역질이 매일 난다. 원효대사 해골물은 하룻밤만에 깨닫기라도 했지 이십년 돼가는데 뭐냐ㅋㅋ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만으로 달라지는 게 뭐가 있지. 하등 무용하다.
여하튼 다시 <감옥으로부터의 소영>으로 돌아가서.. 책이 주는 부끄러움은 그것과는 다르긴 하다. 2014년을 겪으며 얻은 현실감각.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내가 이제 어른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 사회의 균열과 깨진 곳을 마주할 때마다 저항해야 할 기성의 구태가 아니라 그 구정물에 내가 기여한 바 부정할 수 없다는 부끄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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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신한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 고문 당하고 감옥에서 적는 곧 찢어 없앨 편지, 교도소에서의 노래자랑과 민중에 대한 고민. 서신들 하나하나가 살아있고 아프다. 책을 소장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건 마지막에 실린 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다. “… (여성혐오적 인습) 너에게서 나에게로 새로 들어오더구나. 매번 내 뼛속까지 들어와 있는 남아 선호 그리고 반민주적 태도와 전투를 해야 했다. 내가 배운 세상은 민주도 평등도 아니었거든.” 딸이 태어나고 새로운 전투를 해야했다는 엄마의 회고. 성인이 된 딸을 엄마로서뿐 아니라 인간으로서 묵묵히 응원하는 모습에 깊이 의지하게 되었다. 구닥다리같지만 롤모델, 멘토, 뭐라 이름붙이든 간에 그런 게 나라는 양육자한텐 너무나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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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정작 삶의 태도는 민주적이지 않고, 자유를 주장하면서 스스로는 자유를 모르고, 평등을 이야기하고 원하지만 대부분 차별 속에 살고 있거든. 우린 배운 것이 반민주고, 부자유고, 불평등이고 어디에서도 민주, 자유, 평등을 체득해본 적 없는 사람들이야.
그래서 더욱 우리에게는 자신을 단련시킬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지금 상황에 연애는 힘들다고 에둘러 거절하면서 편지에 이렇게 말한게 킬포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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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더 이상 추상적이고 막연한 것이 아니더구나. 내가 선택한 것을 지키고 가꿀 자유의 가치가 절실하게 와닿았어. 내가 선택하는 것이 나의 자유이고 그 길에서 다시 자유가 자랄 수 있도록 계속 선택해나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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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화가 된다고 해도 여성의 권익이 저절로 자라나는 것은 아닌 것 같아.
내가 가사노동과 양육에 임금이 지불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밝혔을 때 너는 현실성이 없다고 말했어. 한국의 현실이 저임금 장시간 노동인데 너무 이상적인 생각이라고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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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영아. 슬픔이 도를 넘으면 생명도 파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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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도와 함께 춤춘 것뿐이지. 파도가 나의 전부인 줄 알았는데 나는 파도가 아니라 배였더라” 그렇게 답해주고도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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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의 화두였던 자유. 저는 지금 자유롭습니다. 자본주의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아닌 한 인간으로 자유롭습니다. 사회 안에서 길들여진 자유가 아니라, 그저 자유하는 자유입니다. 인식하는 만큼은 자유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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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소영은 ‘자유’를 주로 동사로 쓴다. ‘자유를 위해’, ‘자유로운’ 같은 표현이 아니라 “자유하는 자유”, “자유하는 인간”이다. 인간이 현재형으로 자유를 누린다는 것. 그런 본위를 위해 평생 애쓴 소영다운 표현이다. 시대의 여러 고민들에 응답해주는, 내겐 그런 책이었다.
다음엔 무리해서 서울에 가게 한 그 책. 북토크 다녀온 책에 대해 써야지. 생생했던 것들, 말하고 싶었던 것들 날아가기 전에 잡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