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다 타츠루의 <소통하는 신체>를 읽고 있는데 <하류지향>읽으면서 찝찝했던 부분들이 또 느껴져서 읽다 덮다 하고 있다. 하류지향, 즐거운 자극을 주는 책이지만 묘하게 느껴지는 우월감이 싫었다. 세대론에 참전하는 오피니언 리더들을 볼 때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는데 본인이 이해할 수 없는 부류의 사람들(mz세대, 90년대생, 이대녀, ..)을 퉁쳐서 이해해보려는 척, 구조적 접근을 하는 척하면서 이해할 수 없음의 이유를 스리슬쩍 그들에게로 떠넘기는 걸 볼 때 주로 그랬다.















 이라영은 세대 담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처럼 ‘**세대’를 가리키는 말은 사실상 계층, 인종, 지역, 젠더를 교차시켜보면 정확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럼에도 마치 보편적인 세대를 아우르는 말처럼 쓰이곤 한다. 주로 중산층 남성의 관점인데, 그 중산층 남성이 ‘보편적인 세대’의 개념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세대에 대한 연구와 분석은 필요하지만, ‘세대’는 종종 다른 조건들을 희미하게 만들기에 가장 좋은 수단이 된다. 학력, 인종, 젠더 권력은 모두 탈락되고 세대만 남는다.”
<말을 부수는 말>

<하류지향>은 10년 전 책이지만 요즘도 자주 회자되고 꾸준히 읽혀온 것 같다. 나도 아주 읽어볼 만한 책이라는 생각은 한다. 근데.. 이 책이 번역되었다는 점도 감안해야겠지만 그래도 나는 “이 세대(니트 족)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중이다”라는 게 지식인이 내놓은 당시 젊은 세대에 대한 고찰이라면 글쎄. 실망스럽기도 하고 저런 묘하게 비꼬는 표현들이 사태를 나아지게 하는 데 무슨 실익이 있지, 싶어 아연하다. 물론 책이 내내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고.. “요즘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소비주체(노동주체x 학생x)로 정체성을 확립하기 때문에 등가교환의 법칙에 의해 공교육을 서비스로 받아들이고, 그렇기에 왜 배워야 하나?는 질문으로 교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그 대답에 납득하지 못할 경우 그들에게는 교육도 가치없는 것이 되어 하강의 리스크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뭐 이런 분석을 한다.(제대로 기억 못할 수도 있음) 그럴듯하다고는 본다. 난 근데 저런 단어 “순순히”가 걸리는 거다. 분석을 내리기 전에 이미 판단을 끝낸 거 아닌가 의문이 든다. 
현재 유행하는 개인주의의 한 형태인 과도한 자기 존중, 이른바 에고 인플레이션이라고 하는 비대한 자아의 문제가 꼭 학력저하 혹은 저자 말마따나 “공부로부터의 도피”의 주된 유일한 원인일까. 저자가 2020년대의 한국을 분석한 것도 아니고 한국과 일본의 차이, 시차도 감안해야겠지만 말이다. 지금 한국에 하류지향을 적용해보려면.. 부, 지식, 정보, 자본화될 수 있는 모든 가치의 양극화가 진행되었다는 점과 학벌 계급 사회에 대한 피로도 등등을 생각해 봐야겠다. 다만 의문이 계속 남는다. 젊은 세대 쪽의 의견과 주장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 하지 않았을까? 














˝(...) 어떤 명령에도 따르지 말라˝는 명령에 전력을 다해 복종하고 있는 것이다. 내게는 그렇게 보인다. 만약 아이들이 정말로 단순히 산만하고 나태하다면 ‘자기도 모르게 깜빡해서 선생님 말씀을 끝까지 들고 마는 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몸을 뒤틀어서 50분간을 보내기보다는 앞을 보는 편이 신체적으로도 고통이 적기 때문에 편한 자세로 교단을 응시하는 학생이 있을 만도 하다. 하지만 그런 학생은 없다.
아무것도 안 하기‘는 원리적으로 생각하면 ‘노력‘을 요하는 것이 아니다. 살기 위해 가능한 최소한의 노력만 하겠다는 것이 ‘아무 것도 안 하기'의 본모습 아닌가. 그런데 지금 학교에서 번식하고 있는 ‘아무것 또 하지 않는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아무것도 안 하기‘의 정형 을 성실하게 지키기 위해 애쓴다. 아무것도 안 하는 인간으로 보이기 위해 최대한 나른한 표정과 소리를 내고, 교복을 규정과 다르게 입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간‘임을 과시할 수 있는 상징적인 행위들을 텔 레비전과 잡지를 보고 열심히 배우고 모방해서 더욱 더 ‘아무것도 하 지 않는 인간‘으로 보이도록 개선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이것을 ‘아무것도 하지 않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근면한 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틀림없이 아이들은 전력을 다해 그들을 끌고 가려는 어떤 압도적인 흐름에 항거하고 있는 중이다. 아이들이 온 힘으로 저항하고 있는 대상은 그들을 배움으로 유인해내려는 모종의 흐름과 성장으로 나아가게 떠미는 힘이다. 아이들은 시장이 정해놓은 금기사항과 규칙에 복종하면서, 그 흐름과 힘에 전력을 다해 저항하라는 명령을 수행하고 있다.”
불량한 태도의 학생들을 묘사하는 저자만의 방식 중 하나라 할 수도 있겠지만 교육자의 입장에서 썼다는 면이 더 놀랍다. 선생이 학생을 묘사할 때 이렇게 비꼰다고요…?

"고립된 아이가 혼자서 학교라는 시스템과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자기 가치관을 학교 시스템 에 대등한 것으로 대치시킨다. "이것을 왜 배워야 하나요?”라는 질문 을 들이댄다. 스스로 배울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지 못하면 아이는 배 움을 거부한다. 이것이 자기결정이다. 배우지 않음으로써 초래되는 리 스크를 당당하게 받아들인다. 사칙연산을 못하고, 알파벳을 모르고, 한자를 못 읽는다. 흥미 있는 영역에 대한 사소한 지식은 있을지라도 흥미가 없는 분야는 아예 모른다. 벌레가 파먹은 듯 의미의 구멍이 숭숭 뚫린 세상이 별로 불쾌하지 않다는 듯 살고 있다. 이렇게 아이들은 계층 하강의 리스크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소통하는 신체> 원조교제하는 여학생의 심리와 일본 페미니즘(우에노 시즈코와 오구라 지카코)의 매춘 용인론을 다루면서는 이렇게 말한다.

“원조교제를 하는 이 소녀가 일시적으로 고객에게 팔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신체’라는 겁니다. 자기 신체를 자신이 자유롭게 팔 수 있는 ‘소유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죠. 이 소녀가 성매매를 하는 이유는 첫 번째는 ‘돈’ 때문이겠지만, 반드시 그 이유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 소녀는 성매매를 통해 ‘나의 신체는 나의 소유물’이라는 것을 선언하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신의 신체에 대한 소유권을 선언하는 것, 그것이 오히려 더 주된 목적일 수도 있을 겁니다.”70

이 뒤에는 주인과 노예를 ‘시간제 대여’하는 것에 비유해 설명하는데 난 거기까지는 인용하고 싶지가 않다. 그 분석이 맞을 수도 있을 거다. 그치만 기본적으로 저자의 이런 태도에 동의할 수 없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의 원래 의미는 “이 구조는 개개인의 개별적 삶보다 훨씬 더 큰 것이며, 여기에 대해 개인적 해법은 있을 수 없다”라는 것이라고 했다.”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앤 스니토 재인용














<케이크를 자르지 못하는 아이들>은 그런 면에서 저자와 책의 내용이, 고루 공명하는 책이었다. 범죄를 저지르고 소년원에 들어온 아이들, 문제행동의 원인 중 하나가 ‘평생 인지 발달적 지원의 사각지대에 있어왔기 때문이라면?’ 이라는 직업적 의식에서 의료 소년원으로 옮겨 연구를 시작한 정신과 의사의 책이다.




소년원에 들어온 범죄자들을 면담하면서 저자는 여러 경우에서 인지 발달적 문제를 공통적으로 발견한다. 책에는 ‘반성 이전의 문제’라는 말이 자주 언급되는데. 이를테면, 너는 착하니/나쁘니 라고 물어봤을 때에는 저는 착해요, ~~~해서 착해요.라고만 대답하던 아이들이, 너는 피해자에게 이런 짓을 했고 그건 사회적, 도의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범죄야. 그런데도 네가 착하다는 거니?라고 묻고 나서야 본인이 한 짓이 나쁘다고 이야기한다는 것. 구체적으로 풀어서 설명해주지 않으면 판단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이고 인지 발달 장애의 유형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상식이나, 양심의 문제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고, 장애를 학습부진 정도로 보는 구조 속에서 제때에 진단받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 때문에 소년범 교육과 예방책을 인지 발달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실질적인 소년 범죄 해결이 어렵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최근 거대한 구멍이 되어버린 문해력 담론도 떠오른다.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가장 기본적인 능력으로써의 문해력”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고. 진정성 있는 커뮤니케이션이 결여된 사회에서 동료 시민과의 토론과 이해, 연대가 어떻게 가능할까 싶은데… 


여하튼 이 책을 읽으면서 책 주제도 그렇지만 저자의 접근 방식이나 자세도 본받을 만하다 싶으니.. 반면교사로 계속 떠올랐다. <소통하는 신체>를 다 읽지는 않았는데 책 부제가 우치다 타츠루의 커뮤니케이션론. 글쎄 그니까 커뮤니케이션을 분석해서 이론을 쓰려면 커뮤니케이션에 ‘입장’도 해봐야하는 건 아닌지.. 구시렁대는 마음을 접을 수가 없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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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3-01-16 12: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와 좋은 글! 유수님 글에 동의해요! 사실 먼저 판단하고 분석한 척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유수 2023-01-16 13:24   좋아요 1 | URL
우와아 쟝쟝님의 댓글 ㅋㅋ 은혜롭네요♥️ 그죠. 굳이 책을 읽고 굳이 요걸 깨닫고.. 굳이 페이퍼 남기고 ㅋㅋㅋㅋ 굳이읽기입니다.

공쟝쟝 2023-01-16 15:05   좋아요 2 | URL
우리의 굳이하는 읽고 쓰기가 굳어져서, 좋은 독자의 존재를 드러내야, 쓰는 사람들도 더 긴장하고 쓸거라고 생각합니다. 읽는 사람들의 존재증명💕

단발머리 2023-01-16 15:16   좋아요 2 | URL
유수님은 내가 선점한 사람이에요. 참고 바랍니다 💕💕💕

은오 2023-01-16 15:22   좋아요 1 | URL
단발님 쟝님은 유수님 선점 놓치셨어도 제가 있어서 괜찮을겁니다

공쟝쟝 2023-01-16 15:25   좋아요 2 | URL
은오님은 제가 먼저 침발랐는데요? 퉤퉤💕

유수 2023-01-16 15:25   좋아요 2 | URL
그래요 다들 여기서 침뱉고 맘껏..

은오 2023-01-16 14:4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하류지향> 저도 12월에 읽었는데요, 저는 사실 저자의 저런 묘사가 너무 웃겨서 피식대면서 읽었어요. 근데 유수님의 글을 읽어보니 아, 그렇기도 하네 싶습니다.
원조교제 저 파트는 굉장히... 아, 무슨 말도 안되는. 어이가 없네요.

유수 2023-01-16 15:17   좋아요 2 | URL
저도 그랬어요. 읽을 땐 웃으며 넘겼고, 사담을 저도 저렇게 하거든요. 하류우 지햐앙~ 노오력~(너무 가나욬ㅋㅋㅋ) 암튼 다른 책읽으니 그 느낌이 반복되고, 난 또 그걸 읽고 있고.. 사회학을 잘 모르는데요. 다작한 인문학자라더라..에 혹해 읽게 되는 저, 그리고 저런 태도가 글로 책으로 출판되어 두루 읽히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봤습니당. 원조교제는 인용한 원문 책 맥락도 봐야할 거 같긴 한데 아는 바가 없으니 여기까지만 정리할 수 있네요 ㅋㅋ